소설리스트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26화 (26/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6)

“바르카가?”

“네, 전하.”

“…왜 갑자기.”

샤페릴의 상태가 많이 안정되었다. 그에 따라 약 용량을 조절하기도 해야 했고, 녹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저택에 올 일시도 상의해야 했기에 잠시 들렀을 뿐이었는데.

덕분에 듣기 싫으면서도 들어야만 했던 소식을 듣게 됐다.

“부재중이라고 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통보도 없이 바로 방문하겠다고 하는 것이니.”

“…아니. 어차피 만나야 했습니다. 다만 알현 요청에는 기다려 달라고 요구했다가 갑자기 저택을 방문한다고 하는 게….”

바르카는 황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혹시 있을 위험을 감수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며, 황궁 안에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데 나올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런 그가 황제 즉위 후 처음으로 블레임 대공 저를 방문하는 게 하필 이 타이밍이라는 게 묘했다.

“폐하께서 리베테 저택의 참극 이후 황제 직속 기사단을 이용해 은밀하게 레이디 리베테를 찾고 계셨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왕제 전하께서도 폐하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다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르카.

엔프리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그의 머릿속이 뒤얽혔다.

그가 샤페릴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르카는 제 감정을 제대로 숨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

주위는 바르카의 눈치만 보며 그에게 맞추기 급급했다. ‘피 도둑놈’이라 의심받는 엔프리제의 뒤에 태어나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은 바르카였기에, 누가 봐도 차기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바르카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이유는 하나였다. 모든 것을 가진 그였기에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황제께선 왜 레이디 리베테에게 청혼하지 않으시는 거지?

-레이디 리베테의 입장을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 레이디께서는 상냥하시니 아무래도….

-하긴. 아직까지 결혼을 고사하시고 약혼자를 기다려 주시는 걸 보면…. 하지만 황제 폐하의 청혼이라면 마음을 바꾸시지 않으실까. 가문의 영광이기도 한데.

-당연하지. 폐하의 청혼을 거절하실 리가 있나.

바르카가 무슨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말대로였다.

천하의 임페리오 제국 황제의 청혼을 거절할 자가 누가 될까. 심지어 바르카는 아직 정비조차 들이지 못했다.

원래 황태자비로 내정되어 있던 여성이 있긴 했다. 그리고 바르카가 스물이 되는 해에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그녀는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슬픔은 슬픔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었다.

당장 새로운 황태자비를 맞이해야 한다며 궁이 들썩였다. 선황께서도 바르카에게 같은 조언을 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분간은… 아무리 그래도 제 아내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가 이리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데 제대로 된 애도도 없이 새로운 여성을 들이는 건 제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제멋대로에 흉포한 황태자.

그게 바르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인 뜻밖의 배려에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의 정이 있는 분’ 정도의 평가는 받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황까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바르카는 급하게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다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언제쯤 폐하께서 레이디 리베테를 비로 맞이하실까.

그런 이야기.

바르카가 리베테 저택의 참극에 유감을 표하며 살아남은 이가 없는지, 참극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한 것 역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엔프리제 역시도.

마음에 둔 여인의 가문이 순식간에 멸문당했다. 타 버린 저택의 잔해에서 리베테 백작 부부의 시신은 발견되었으나 샤페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폐하의 속이 얼마나 타고 계실는지.

리베테 저택의 참극에서 두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샤페릴을 걱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에 관해서는 엘마레에게도 가급적 말을 아끼던 엔프리제가 바르카에게만은 도움을 청하려 했었다. 바르카라면 엔프리제와 같은 위치에서 샤페릴을 지키려 할 터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단 바르카를 만나 봐야 하겠습니다.”

샤페릴이 있는 곳은 대공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다만 마법 결계로 인해 쉬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으며, 쉬이 나오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그것’을 남겨 두고 오면 될 터.

“…….”

순간 엔프리제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스몄다. ‘그것’이라고 생각한 걸 알면 샤페릴은 또 화를 낼까.

아무리 그래도 살아 있는 건데, 것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잖아요! 라고.

게다가 그것, 아니, 그 생명체 역시 꽤 귀엽게 생겼다. 샤페릴이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외양이라는 생각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사 들인 것이기도 했으니까.

분명 보면 좋아하겠지.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그녀에게도 보여 주도록 하자.

그런 엔프리제의 모습을 보고 있던 녹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싱숭생숭해졌다.

언제나 타인에게는 까칠하게 대하며 먼저 벽을 세우고 거리를 두던 남자를 이리 변하게 할 정도로 사랑이란 대단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 사랑에 의해.

아니…, 그건 자신이 개입할 영역이 아니긴 했다. 자신이 해야 할 건 딱 하나.

주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뿐.

“그대 덕분에 미리 알게 되어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방문이 무사히 끝나면 저택으로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은 조용히 묵례하며 그의 명을 받들겠다는 뜻을 표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엔프리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하 경.”

“네?”

“그대는 그림에도 소양이 있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의외의 이야기를.

* * *

“이랴!”

말을 재촉하며 엔프리제는 이를 악물었다. 제 손목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알림 장치가 마치 채찍처럼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라고.

-도망갈 생각 없는데요.

믿고 싶었다.

사람을 믿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언제더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접어 버린 후로는 한 번도 없었다. 그 전에도 아버지에 대한, 언젠가는 나를 봐 주실 거라는 헛된 미련만 있었을 뿐 믿음이라고 할 정도의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샤페릴만큼은 믿고 싶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바르카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저택에 온 이유 역시 단순했다. 엔프리제가 보냈던 알현 요청을 당시 바빠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부르기보다는 찾아온 거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입을 열려던 엔프리제가 손목을 뒤흔드는 진동에 입을 다물었다.

-…실례합니다, 폐하. 갑자기 영지 내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하여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폐하께서 도착하시기 직전에 받은 소식이라…. 직접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옳은 듯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송구스러운 일이오나 다시 알현 요청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 형님!

제가 내뱉은 변명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황제와의 알현을 이렇게 직전에 엎어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이게 문제가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신을…!”

믿고 싶었다. 그 달콤한 말들을.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진심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짓일 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말은 내게는 그 누구의 말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빛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울리고 있는 알림 장치는 플리와 연결된 것이 아니었다. 템버에게 준 것이었다. 이게 울렸다는 말은, 결국.

“…….”

으득, 하고 이가 갈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사람은 누구나 거짓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싫어한다.

‘황족의 피를 도둑질한’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심지어 친부모에게도.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대공님은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요.

기분 나빠야 할 말이었다.

엔프리제는 이 나라의 대공이었고, 황실의 핏줄을 이은 자였으며, 엄밀히 말하면 본래 황제가 되었어야 할 이였다. 그런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나.

당신이 나를 흔들기 위해 내뱉었을 그 말에, 나는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흔들렸다. 당신이 나를 긍정적으로 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내가 당신에게 기분 나쁜 피 도둑놈이 아니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당신이 날 혐오의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글씨가 엄청 예쁘네요.

-평소에 많이 듣지 않았어요? 목소리 멋있다고.

-대공님, 엄청 잘생겼어요.

그 모든 말이 거짓이었다. 거짓이었다.

가슴이 무너진다. 마음에 쌓여 있던 따스한 무언가가 무너져 녹아내린다. 질척이는 아교처럼 모든 것을 뒤덮고 엉겨 붙게 만들어 버린다.

당신이 내게 한 그 모든 게 거짓이라는, 그것이… 당신이 날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당장 거기 멈춰!”

빠르게 지나가는 시야 속에서 샤페릴이 보였다. 낯선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녀의 모습만이.

말을 멈추고, 뛰어내려 그녀의 앞에 섰다.

샤페릴이 무사하다. 하지만 이대로 밖에 나가면 분명 또 위험해지겠지. 그걸 모르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만 드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미워서.

“설마, 그러지 않길 바랐습니다. 믿고 싶었는데….”

튀어나온 원망에 되돌아온 말은.

“왜 이제 와요!”

뜻밖의 말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내가… 내가… 흐어어어엉.”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더니, 눈가마저 빨개졌다. 그리고 이내 무슨 샘물 솟듯 눈물이 솟아났다.

커다란 눈동자에서 솟아나는 그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 속을 막고 있던 끈적이는 것이 사라졌다. 씻겨져 내려갔다. 결국, 남은 것은 샤페릴에 대한 마음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