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5)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장난치냐!
이렇게 하면 뭔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사실은 엔프리제가 심어 놓은 호위 기사가 있었다’든가, ‘사실은 엔프리제가 틈을 보고 있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튀어나왔다’든가!
무슨 소설이 이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처음에 나한테 샤페릴 기억 주지 않았을 때부터 알았다고.
초반만 읽은 소설에 빙의시킨 주제에 아무런 상황 설명도 안 해 주고! 도우미 캐릭터도 없고! 남주는 나 도망가나 안 가나만 관심 가지고!
근데 왜 지금은 안 오는데애!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아, 하늘이 파랗다.
숲을 가로지르는 남자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내 시야에 하늘이 들어왔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파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렇게 끌려가야 하는 거야? 이 천국을 두고 진짜로 이렇게 가야 한다고?
나 아직 드레스도 한 벌만 시착해 봤는데. 보석도 귀걸이 하나만 차 봤는데. 아직 퐁당 쇼콜라는 먹어 보지도 못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가야 한다고…?
“…….”
또르륵, 하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가 이토록 눈물이 헤펐던가. 그런 생각을 할 생각도 없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린다.
25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피라는 것으로, 혈육이라는 것으로 묶여서 도망치지도 못했던 끔찍한 감옥에.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거기가 지옥 같았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과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겨우 벗어나 이 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했는데.
이렇게 내 좁은 천국을 빼앗길 줄이야.
“아가씨…. 그 더러운 놈에게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진 모르지만, 그놈이 아가씨를 속인 겁니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그런 건 상관없다. 샤페릴에게라면 몰라도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니까.
오히려 내게는, 샤페릴을 구하러 왔다는 당신 쪽이 적으로 느껴진다.
그 작고 연약한 플리에게 손을 대고 천국에서 날 끌고 나왔다. 템버에게도 무슨 짓을 한 모양이고. 나는 절대 당신을 용서 안 해.
앞으로 내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당신한텐 꼭 복수할 거야.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삐리리삑. 삐삐-!”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린다. 마치 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가 바로 위에서.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샤페릴의 연약한 복근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다만, 분명 새가 우는 소리인데 이상하게 플리가 떠올랐다.
플리…,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윽!”
“……?”
갑자기 남자가 진저리를 치며 팔을 휘저었다. 무슨 일이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남자는 무언가를 쫓아내려는 듯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덕분에 몸이 흔들려서 내 몸이 슬슬 밀려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머리부터 땅에 박겠지? 아프겠지?
그래도 기회는….
“크윽!”
“삐리리 삑! 삐삐-! 삐리리삑! 삑삑!”
무언가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작은 소리가.
그에 비해 울음소리는 우렁차서 용맹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설마 새가 나를 구해 주려고 남자한테 덤비나?
에이, 설마. 아무리 샤페릴이 여주라도 그런 기연까지는….
피리 소리 같은 새의 울음소리 사이로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좀 더 묵직한. 마치….
말이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가.
“당장 거기 멈춰!”
…익숙한 목소리다.
이 나쁜 놈. 왜 이제야 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으허헝.
“젠장…! 저 더러운 놈이 왜…!”
남자가 몸을 돌리려 했지만, 남자를 괴롭히던 새는 물러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좀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이 내 시야에 익숙한 의복이 들어왔다.
언제나 입고 있는 검은 바지, 언제나 깁고 있는 하얀 셔츠. 낯선 부츠.
“설마, 그러지 않길 바랐습니다. 믿고 싶었는데….”
냉소적인 목소리. 처음 만났을 때의 엔프리제와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지금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왜 이제 와요!”
반쯤 우는 목소리로 외치자 엔프리제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뭔가 말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내가… 내가… 흐어어어엉.”
“샤페릴…?”
언제나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던 엔프리제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터져 나온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불렀는데! 왜 이제 와요. 진짜로 잡혀 가는 줄 알고 얼마나…, 헤어지는 줄 알고 얼마나…. 흐어어어어엉.”
이렇게 서럽게 울어 본 게 얼마 만이지. 소리 내어 울어 본 건 벌써 2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더 놀라운 건, 이게 연기로 나온 울음이 아니라는 거였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들린 그의 목소리에 눈물부터 터졌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울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이 놓였다. 이제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이 사람이 플리랑 템버도 괴롭혔어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자질을 했다.
넌 이제 죽었다. 우리 엔프리제가,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이 세계관 최강자일 거거든?!
“…당신은 대체….”
“빨리 구해 줘요. 배도 아파요. 아프다고 내려 달라는데도 계속 내려 주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기가 찬 건지 엔프리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 남자가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다.
“대공님, 빨리요! 빨리! 검 뽑잖아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모르겠다. 상체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해 복도 카펫만 봐야 했던 샤페릴의 몸은, 내 의지에 따라 남자의 팔을 덥썩 끌어안았다. 그러자 뜻밖의 움직임에 놀란 건지 남자가 검을 뽑지 못했다.
“아가씨! 이거 놓으십…! 윽!”
엔프리제가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의 몸이 휘청였다. 나를 고정하고 있던 팔에도 힘이 빠져 주르륵 하고 몸이 미끄러져 내렸다.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
내 생각대로, 엔프리제는 내가 떨어지기 전에 덥석 나를 받아 안았다. 날 움직이지 못하게 얽매던 남자의 팔과 달리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 품에 안겨 엔프리제의 얼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모든 긴장이 다 풀려 버렸다.
“…정말로 우신 겁니까?”
“그럼 진짜로 울지 가짜로 울어요?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세수하듯 양손으로 슥 문질렀다. 아직 뜨거운 눈물과 차갑게 식은 눈물이 뒤섞여 손을 적셨다.
살짝 삐져나온 것 같은 콧물까지 훌쩍이고 손을 떼자, 엔프리제는 복잡한 감정을 품은 얼굴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도망치시려던 게… 아닙니까?”
“도망치려는 거면 제가 저 남자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겠어요? 내 발로 뛰지.”
“그건….”
엔프리제는 의외로 감정적인가 보다.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었던 건가.
하긴, 지금 상황은 좀 소위 말하는 피꺼솟 상황이긴 하지. 믿고 나갔더니 도망친 걸로 보일 테니까. 그걸 이해하기에 나는 일부러 몸을 웅크려 엔프리제에게 폭 안겼다.
“엄청 불렀어요.”
“저를…요?”
“엄청 많이 불렀어요. 엔프리제! 도와줘요! 하면서.”
“그랬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실제로 부른 횟수는 몇 번 안 될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부른 숫자까지 더하도록 하자. 그러면 거짓말 아니잖아?
“아, 저 남자 갑자기 일어나서 습격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목이 부러졌거나… 기절한 상태일 테니까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조금 무섭긴 하다. 판타지 세계에선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큼이나 하찮긴 하지만, 실제로 내 일이 되니 공포스럽긴 하지만….
“…일찍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늦지 않았으니까 용서해 줄게요.”
늦게 왔으면 좀 많이 원망할 뻔했다. 나쁜 놈, 알맹이가 샤페릴이 아니라고 날 이렇게 순순히 넘겨줘? 하면서. 그래도 늦지 않았으니 됐다.
“…정말로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한 엔프리제의 입가가 사르르 휘었다.
지금까지 보여 줬던, 그 어설프고 요상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 지난번에 보여 줬던 만족의 미소와도 다르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금색 눈동자가 햇빛 아래 글썽인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미소였다.
“…….”
지난번에는 쉽게 나왔던 그 말이 웬일인지 나오질 않았다. 막힌 말문이 심장으로 갔는지, 두근두근하며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 *
“…아니, 미쳤지! 미쳤어!”
심장이 왜 두근거리고 난리야, 거기서!?
이쁘긴 했지. 원래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그 눈동자나 미소가 너무… 분위기가 엄청나서. 남주다운 포스까지 나서! 엄청 예쁘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 목표는 아무런 방해 없이, 얌전히 엔프리제의 보호 아래에서 일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사는 거다.
그와 잘되고 싶다거나, 로판 다운 일을 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아, 그런데 솔직히 거기서 두근거리지 않으면 이상한 거 아냐?
처음 안겨 본 남자의 품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딱딱했다. 거기에 엔프리제의 몸에서 나는 그 향기가…, 숲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며 간질였다.
그게 엔프리제의 품에 안겨 있구나, 라는 실감을 더 생생하게 만들었다.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모쏠 인생 25년. SNS 팔로워 장난 아닌, 친구들이 다 환호하던 옆 고등학교 1년 선배인 오빠한테도 설레지 않았다. 대학에서 엄청난 대시를 받던 과대표 오빠랑 같은 조에서 조별 과제를 할 때도 설레지 않았….
아니, 그런 남자들이랑 엔프리제를 비교하면 좀 섭하긴 하지. 어디까지나 현실에 존재하는 그 남자들이랑 로판 남주랑 비교를 하면 안 되긴 하지. 우리 엔프리제가 좀 잘난 데다 성격도 좋고 또 상냥….
“이게 아니라니까!”
왜 또 이야기가 거기로 흐르는 건데!
25년 인생에 로맨스라곤 없었는데! 왜 갑자기 사고가 자꾸 엔프리제한테로만 흐르는 거야…!
이건, 그래. 그거다. 흔들 다리 효과.
좌절한 상황에서 엔프리제가 구하러 와 준 것 때문에 잠깐, 아주 잠깐 설레는 것뿐이지 진짜 설레는 게 아니라고! 정신 차려, 나!
그렇게 파닥거리는 내 귀에.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낮은 노크 소리와 함께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