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4)
“그 더러운 피 도둑놈이 결국 아가씨께 손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베르디. 대…, 전하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아니, 맞긴 하지만. 원작에서 미친개긴 하지만. 지금은 얌전한 강아지란 말이야!
곤란한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황은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리베테 가문이 완전히 망했다고만 생각했기에 누군가가 도우러 올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거기서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줄이야.
“아가씨!”
“저는 여기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물론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경우 남주나 여주에게는 뭔가 비밀이 있기 마련. 그리고 그걸 파헤치려 하는 것도 인지상정 아니겠어? 이렇게 말해 두면 다신 오지 않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더러운 피 도둑놈의 곁에 아가씨처럼 고귀하신 분이….”
아니, 근데 왜 자꾸 도둑놈이래.
날 납치한 납치범이라고 하는 건 사실이니까 뭐라고 못 하는데, 왜 자꾸 더러운 피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거래?
“베르디.”
“아가씨가 여기 계시다는 걸 알려 주신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왔으니, 그게 누구인지는 아시겠지요.”
아니, 모르는데.
애초에 이 사람 리베테 가문 사람 아니었어? 그럼 이름만 부른 게 문제였던 건가? 경 같은 거 붙여야 했나?
아이씨. 왜 이렇게 일이 복잡해져.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으음, 엔프리제를 부르는 게 나을까? 이러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또 나 도망가려고 했던 건 줄 알고 화낼 것 같은데.
그래도 괜히 불렀다가 일이 커지면 어떻게 해?
으으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자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여기서 모시고 나갈 겁니다.”
아, 이건 불러야겠다.
내 어깨에 올라타 잔뜩 털을 부풀리고 있는 플리에게 살며시 손을 뻗었다. 가슴에 있는 보석을 누르려고 했는데.
그 순간.
“시이-! 시이이잇!”
무언가 위험을 알아챈 걸까. 내가 잡기도 전에 플리가 튀어 나가 버렸다.
“플리!”
“이 더러운 쥐새끼가!”
그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느렸다.
소설에서는 한순간이라고도 했고, 은색의 선이라고도 했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그 움직임이 왜 내 눈에는 이토록 잘 보이는 걸까.
손을 내밀었다.
내밀려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정말로 빠르다.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플리!”
새하얀 몸이 휙 허공을 가로질렀다.
놀라서 플리를 향해 가려 했지만, 남자가 더 빨랐다. 내 손목을 쥔 남자가 뿌리쳐 볼 새도 없이 가죽 부분을 끊어 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아가씨.”
“안 간다잖아요! 이거 놔요! 플리!”
바닥에 떨어진 플리는 움직이질 않는다. 설마….
-마법 생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편의에 따라 개조된 생물입니다. 다만 너무 많은 부분을 개조하면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용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족제비라면, 저렇게 허공에서 바닥으로 처박혔는데 멀쩡하진 못할 것이다. 튼튼함이 ‘사용에 필요한 부분’에 들어갈까?
플리는, 괜찮을까?
“놓으라니까!”
“아가씨는 그놈에게 속고 계신 겁니다! 무얼 알아내셔야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먼저입니다.”
남자의 손을 잡아 빼려 바둥거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내가 무조건 호신술은 공부한다!
“템버! 엔프리제! 누가 나 좀…!”
“아가씨!”
날뛰며 소리를 지르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 발에 남아 있는 족쇄를 칼로 끊으려 하기에 재빨리 발을 피했다.
“살려 주세요! 살ㄹ…! 으읍!”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남자가 두툼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설마 구해 내려는 대상이 이렇게까지 반항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제대로 된 구속구나 재갈조차 없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으으으으읍! 으으읍!”
소리야 막히든가 말든가. 어차피 무슨 말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걸 둘 중 하나라도 들으면 분명 구해 주러 올 테니까.
엔프리제가 와 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외치는 거였지만.
“지금 이 저택에 의식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리치셔도 무의미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의식 있는 사람이 없다니? 설마 템버나 엔프리제한테 무슨 짓을 한 건가?
이…!
“으윽!”
있는 힘껏 남자의 손바닥을 깨물었다. 하지만 너무 두꺼운 탓에 제대로 깨물리지 않아 고개를 휘저으며 자리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입술 끝에 무언가 가장자리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 느껴지자마자 다시 세게 깨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
내가 멈춘 틈을 이용해 다리의 족쇄까지 끊어 버렸다. 안 돼. 이대로면 정말로 끌려가게 돼…!
“으으으! 으으!”
다리를 바둥거리며 시간을 끌려 해 봤지만, 샤페릴의 몸은 가냘픈 만큼 들어 올리기도 좋았다. 남자는 날 손쉽게 자기 어깨에 매달아 버렸다. 에이씨, 샤페릴이 기사 여주여야 했는데!
내 바둥거림을 봉쇄한 남자는 그대로 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남자의 말대로 정말 저택 내에 아무도 없는 건지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템버는 분명 보석상에게 남은 보석을 돌려주고 온다고 했다. 그런데 왜 내 소리에도 반응이 없는 걸까.
엔프리제를 부르러 간 건가? 아니면 정말로 이 남자가 두 사람을….
아니, 엔프리제는 남주잖아. 남주는 보통 세계관 최강자란 말이다. 그러니 분명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남주가 이런 엑스트라한테 죽거나 할 리가 없다.
가능성이 있다면….
달라진 행동 덕에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믿게 된 엔프리제가 잠시 저택을 비웠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쪽이 더 가능성이 크겠지.
으음, 아니야. 보석상이라는 외부인이 들어온 상황에서 엔프리제가 과연 저택을 비울까? 어지간한 일이 없다면 분명 자리를 지키겠지.
…그렇다는 건.
템버는 어떤 이유로 무력화되었고 엔프리제의 방은 내가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게 가장 현실적이겠지. 혹은 같은 이유로 템버가 엔프리제에게 가서 침입을 알렸지만, 달려오는 데 시간이 걸리거나.
“…….”
일단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자의 어깨에 매달린 채 고개를 들려고 해 봤다. 처음으로 복도에 나왔는데, 안타깝게도 바닥에 깔린 카펫 외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아, 색이 방에 있는 거랑 다르네. 방에 있는 건 검은색인데 이건 빨갛….
아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아오! 샤페릴을 보며 군살 하나 없는 몸매라고 아주 극찬을 했는데 군살뿐 아니라 근육도 없나 보다. 배에 힘을 주고 상체를 들어 올리려 하지만 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질 뿐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아니, 뭐가 보여야 상황 파악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베르디, 알았…으니까 일단 내려 주면 안 될까요?”
우웩. 토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그나마 참을 만했는데, 복근 하나 없는 배를 압박하는 남자의 어깨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게다가 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배에 탄 것 같은 흔들림까지 느껴졌다.
아, 나 멀미 있는데.
샤페릴, 당신도 멀미 있어…?
“우욱…!”
아, 있나 보다.
내가 토할 것처럼 웩웩대는 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는 복도를 이리저리 꺾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나무 문이 보였다.
그 앞에 선 남자가 잠시 주위를 살폈다.
아니, 차라리 뛰어 줄래요? 가만히 있으니까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진다. 뭔가… 관자놀이 부분이 펑 하고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아파요, 베르디. 제발 내려 주세요.”
진심을 다해 말했다.
물론 도망치기 싫다는 마음도 있지만 빨리 이 자세에서 벗어나고 싶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 보면 엄청 긴박하고 긴장되던데 왜 난 이 모양이지?
이 남자가 날 구하러 온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 긴박감보다는 압박감이 더….
우욱.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가씨. 이 별장 부지만 벗어나면 바로….”
여긴 역시 별장이었나 보다. 그렇다는 건 혹시 엔프리제가 본 저택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는 걸까?
그러면 큰일인데.
“…….”
남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럴 때 소설에서 보면 남주가 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던데. 제발 엔프리제가 이 앞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았으나.
“아.”
“…….”
있기는 개뿔. 현실은 역시 시궁창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빙의해도 알맹이가 나라서 그런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아니면 내가 감금당해 있기를 원하니까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이러는 건가?
설마 이게 원작의 억제력…?!
그럼 난 이제 얌전히 여기서 구해지는 수밖에 없는 건가? 싫은데. 리베테 가문은 쑥대밭이 됐고, 어딜 가든 나는 군식구가 되는 거잖아.
아무리 샤페릴이 사교계의 꽃이었어도 엔프리제처럼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곁에만 있어 주면 된다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럼 진짜로 누군가 샤페릴의 몸을 원하고 그런 일도 있을 거 아냐.
설마…!
아니, 가능성이 있다. 이 남자는 분명 누군가의 지시로 나한테 왔다고 했다. 그러면 그 누군가가 샤페릴을 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절대 끌려 나가면 안 된다. 나가는 순간 뭔지 모르지만 여주인공다운 시련과 고난의 길이 샤페릴의 앞에 펼쳐질 거야!
하지만… 일단은 엔프리제가 있어야 어떻게 할 텐데.
엔프리제, 너 피폐 뽕빨물 남주 주제에 여주 감시 안 하고 어디 간 거야? 원작에선 샤페릴이 도망가려고 할 때마다 귀신처럼 잘도 나타나더니…!
생각해 보니 여기 밖이잖아. 그렇다면!
“엔프리제! 나 좀 구해 줘요! 침입자야! 엔프리제…!”
나는 그에게 들리길 기도하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