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3)
“이런 것도 아가씨께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반짝이는 금색의 롱 귀걸이. 귀에 거는 고리에는 핑크색의 보석이 다닥다닥 붙어 봄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귀걸이는 처음 해 봐서 좀 낯설다. 다행히 샤페릴의 귀는 이미 뚫려 있어서 곧바로 걸어 볼 수 있는 건 좋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귓불이 찢어지는 게 아닌지 좀 불안한 듯한….
“거울 한번 볼까요?”
템버가 내 앞에 전신 거울을 가져왔다. 덕분에 나는 가만히 앉은 채로 액세서리를 걸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와….”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금색. 게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핑크 보석의 반짝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물론 제일 눈부신 건 샤페릴의 미모였다.
거적때기를 걸쳐 놔도 분명 예쁘겠지,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반짝반짝하게 꾸며 놨으니 더 예쁠 수밖에 없지.
이럴 때 안구 정화라는 말을 쓰는 거겠지.
후.
“잘 어울리시네요.”
그렇죠? 제가 봐도 좀 그래요.
뭘 입혀 놔도 이쁘겠지만! 이쯤되면 사실 보석이 샤페릴빨을 받는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지만!
“이걸로 할까요, 그럼?”
“알겠습니다. 이건 가벼운 자리에서 하시면 될 것 같고, 좀 더 화려한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것도 골라 볼까요?”
화려한 드레스. 어제 입은 거… 같….
…어제….
“아가씨, 더우세요? 얼굴이….”
나도 느껴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뺨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제 일이 또 떠올랐을 뿐. 밤새 이불킥했던 그 일이 또 떠올랐을 뿐.
…흑흑.
나중에 엔프리제가 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변명한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사태는 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이불 위에서 팔딱거리던 플리를 잡을 때 손에 걸렸던 그 딱딱한 감촉이 알림용 보석이었던 모양이다. 템버랑 같이 있으면서도 보석을 누른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뛰어온 거라고.
엔프리제는 거의 잔화만 남은 모닥불 같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불씨만 겨우 남은 벽난로의 불길 같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했다.
…으아아.
“이런 것도 예쁘네요.”
은인가?
반짝이는 귀걸이를 손에 올려 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석 사이로 늘어진 금속은 깨끗한 은색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약간 등나무 꽃처럼 늘어진 하얀 보석 사이사이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약간 샤페릴의 이미지와도 닮았다.
“그건 상품 안내서의 설명을 보자마자 전하께서 고르신 것이랍니다.”
“그래요?”
엔프리제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기품 있고 깨끗한 이미지. 그러면서도 어딘지 톡 튀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귀걸이 이상으로 보석이 잔뜩 박혀 그물처럼 늘어진 목걸이 정중앙에 홀로 박혀 있는, 큼직한 붉은 보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제 그 드레스에 어울릴까요?”
“글쎄요…. 일단 아가씨에겐 확실히 어울릴 것 같아요.”
그럼 이것도 사 둘까. 그리고 또 눈에 들어오는 게….
“보석 세트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그냥 다 사도록 할까요?”
“네?”
…언뜻 보기에도 보석 상자가 한 이십여 개는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다 산다고?
아무리 내 돈 아니라도 그건 좀….
“다 아가씨에게 어울릴 것 같은걸요.”
아, 그건 인정이지.
샤페릴이 하고 있으면 문방구의 싸구려 반지도 명품처럼 보일걸. 하지만 다 하지도 않을 물건을 늘어놓는 취미는 없다.
오히려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 저거 저대로 썩히면 안 되는데…! 한 번은 해야 되는데…! 하면서.
“취향에 안 맞는 건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거 두 개랑…, 하나는….”
붉은색 계열 보석만 샀으니까 푸른색 계열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 저거 에메랄드인가? 색이 엄청 깨끗하네.
약간 맑은 청록색이라 보석이 긁히지 않도록 깔아 둔 천의 색까지 비춰 낸다. 그게 또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뭐랄까. 은색은 은색인데 엔틱이라고 하던가? 좀 세월이 쌓여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보석의 투명함과 합쳐져 묘한 매력을 풍겼다.
“하나는 이걸로 할까요?”
“역시 아가씨는 안목이 높으시네요.”
템버는 생글생글 웃더니 나머지 보석 상자를 다 정리했다. 그러고는 내가 고른 보석 상자까지 일단 챙겼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 금방 돌아올게요.”
계산하러 가는 건가. 그렇다는 건 이 저택 안에 지금 외부 사람이 와 있다는 거겠지? 설마 저 많은 보석을 그냥 가져왔을 리도 없고.
뭐, 여기가 악역 가문이거나 했으면 그런 갑질을 했을 지도 모르지만 엔프리제가 그런 성격은 아니니까.
템버가 용케 그 많은 상자를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간 후에야 빼꼼 하고 플리가 밖으로 나왔다. 코를 킁킁 거리는 게 낯선 냄새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지금 보석 상인이 와 있나 봐, 플리.”
살며시 손을 뻗자, 플리가 내 손의 냄새를 맡고 살짝 뺨을 비볐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가까워진 게 아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쌓여 온 무언가가 우리의 거리를 좁혀 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떨어져서 경계하기만 하던 플리가 점점 내 곁으로 다가오게 되었고, 스킨십을 허락해 주게 되었고, 어느새 이렇게 스킨십을 해 주기까지 한다. 그 과정이 몹시도 즐거웠다.
“이따가 털을 빗어 줄까? 또 어디 구석에 들어갔다 나온 거지?”
등줄기에 삐쭉 곤두서 있는 털을 살살 어루만졌다. 하지만 뭐가 묻은 건지 빳빳하게 굳은 털은 좀체 가라앉질 않았다.
청소는 매일매일 템버가 구석까지 해 줘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데. 어디서 뭘 묻혀 온 거지. 가끔 사라질 때가 있는데 방 어딘가에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리 와, 플리.”
살며시 안아 들어도 거부하지 않는다. 굳어 버리지도 않는다. 그게 좋아서 품에 안고 살짝 들어 올렸다.
족제비한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고 들었는데 그 부분도 마법으로 어떻게 한 걸까? 플리에게서는 따스한 햇빛의 냄새만 났다.
게다가 족제비 털은 고급 붓털로 이용될 정도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은 또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보들보들해서 너무 기분 좋아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
갑자기 플리가 고개를 들었다.
“플리?”
킁킁,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냄새를 맡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왜 그래?”
“…….”
플리는, 평소의 그 싯싯 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귀와 코만 쫑긋거렸다. 까만 콩 같은 눈동자가 너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이 고요에 쌓인 것 같았던 그때.
“……!”
플리가 허리를 동그랗게 말며 온몸의 털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저벅저벅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이게?
엔프리제가 플리에게 나름의 사과를 건넸던 그날 이후로, 플리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히 친근하게 다가가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뭐랄까. 적대할 때조차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었는데.
“…샤페릴 아가씨.”
낮은 목소리. 낯선 목소리였다.
싸늘하게 공기가 가라앉았다.
“…플리, 이리 와.”
플리를 들어 내 뒤로 숨겼다. 하지만 플리는 숨기는커녕 내 등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서 다시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긴장하고 있었다.
날 지키려는 걸까. 그렇다는 건 이 문 밖에 있는 자는….
아니, 설마. 여기는 엔프리제의 저택이다. 이 나라의 대공의 저택이란 말이다. 그런 곳에 그리 쉽게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접니다. 베르디입니다.”
몰라. 그게 누군데.
하지만 확실한 건, 그랬구나. 이 어려운 상황에서 샤페릴이 어떻게 혼자 도망칠 수 있었나 싶었다. 이 무거운 사슬을 끊고 도망간다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하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구나. 누군가가 풀어 준 거다.
샤페릴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지?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도망칠 수 있는 곳조차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도망칠 필요도 없나? 지금까지 샤페릴이 도망친 이유는 하나다. 그녀 스스로 여기를 나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가고 싶지 않다. 그걸 잘 설명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끼이, 하고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몸집이 탄탄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샤페릴 아가씨…. 어떻게 이런….”
“…베르디.”
잠시 고민했다.
기억이 없다는 걸 어필할 것인가. 아니면 기억하는 척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내 후자를 골랐다.
이 남자는 샤페릴을 구하기 위해 온 사람이다. 그러니 기억이 없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여기에서 끌고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설득하려면 기억이 있는 척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원래 샤페릴의 말투는 어땠더라.
“짐승 같은 놈. 감히 우리 아가씨를…. 당장 풀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베르디.”
…글렀다.
기억나는 거라곤 날 선 말투로 엔프리제를 매도하거나, 템버에게 애원했다가 욕했다가를 반복하던 말투뿐이다. 아니면 신음 소리나.
그동안의 독자 경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샤페릴처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똑 부러지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사용인에게도 존댓말을 하기 마련!
이라는 생각으로 존댓말을 시전했거늘.
“…아가씨…?”
왜 저 아저씨는 충격받은 눈으로 날 보는 걸까.
이, 이게 아닌가?
“난 도망칠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이미 늦었다. 한 번 꺼낸 존댓말을 밀어 넣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내 단호한 말에 베르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가씨!”
“그보다 베르디도 얼른 도망가요.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겁니까. 설마….”
남자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심지어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기도 하다.
끙. 뭔가…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