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2)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아가씨?”
쭉, 쭉 하고 뒤에 끈 같은 것이 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나도 모르게 흡 하고 배에 힘을 넣자 템버가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몸에 맞춘 거라서 그렇게 힘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니, 뭐랄까. 찢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찢어지면 다시 만들면 될 뿐이니 긴장하지 마세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더 긴장되는데요.
이렇게 나한테 딱 맞춘 옷을 입어 보는 건 처음인걸. 게다가 이렇게 좋은 천으로 만든 건 처음 입어 본다.
-돈 아까우니 두 치수 정도 크게 만드는 게 낫겠죠?
-아뇨, 요즘 애들은 다 몸에 딱 맞게….
-쓸모없는 계집애라도 키나 몸집이 점점 더 커질 텐데 그때마다 새로 교복을 맞춰서야 돈이 남아나겠어요?
그때 나는 어떻게 했더라.
-할머니 때문에 고생이 많겠구나.
불쌍하다는 듯 나를 보는 아줌마에게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던 것 같다. 그때 느낀 감정은 뭐였더라.
이제는 잊어버렸다.
“한번 움직여 보시겠어요? 너무 딱 맞아도 불편할 수 있으니 지금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 보세요.”
으음, 움직여 보라고 하셔도…. 이렇게 하면 되나?
두 팔을 번쩍 들었다가 휙휙 흔들었다. 국민 체조 하듯 몸을 흔들자 놀라서 보고 있던 템버가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채 감추지 못한 웃음에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으, 죄송해요. 이게 아닌가 봐요….”
“아니, 아니에요! 그냥 아가씨가 너무 귀여우셔서 그랬어요.”
황급히 손을 내저은 템버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만세 한 채로 굳어 버렸다. 옷매무새를 살피던 그녀가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찢어지면 어쩌나 걱정하셨던 분이 갑자기 씩씩하게 팔을 휘두르시기에, 후후.”
그…건 좀 웃기긴 하겠다. 되게 촌스러워 보였겠다. 으아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앗.”
드레스에 달려 있던 작은 비즈 장식이, 헐거워졌는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꾸꾸꾹꾹꾸꾸!”
“…어머나.”
“플리!”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새하얀 무언가가 슝 하고 날아오더니 비즈를 잡아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지금 뭐가 왔다 간 거지?!
후다닥 달려가 침대 아래를 보려 했다. 하지만 이 드레스로는 엎드리기가 힘들어서 잘 보이질 않는다. 어렴풋이 어둠 속에서 하얀 것이 꼬물거리는 것이 보이긴 하지만….
…어라?
“플리! 너 대체 안에 뭘 숨겨 놓고 있는 거야?”
“어머나. 보물 창고군요.”
쪼그려 앉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대신 템버가 침대 밑을 살폈다.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장식 구슬은 새로 달아야겠군요.”
“아니에요. 플리! 얼른 돌려 줘.”
“쉬엣! 시! 시이이잇!”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침대 아래에서 들려온다.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플리! 나중에 맛있는 거 줄게. 응?”
“쉬잇! 쉬이이잇!”
“육포! 육포 줄 테니까. 응?”
“쉬에에에엣!”
야!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침대 틀을 칠 뻔했다. 템버가 말리지 않았으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괜찮아요, 아가씨. 구슬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가끔 불량이 섞여 있는 때도 있어서 언제나 필요한 양보다 많이 주문하거든요.”
역시 부잣집!
나라면, 그 불량인 구슬을 어떻게 해야 티 안 나게 달까 고민할 텐데.
“저건 족제비의 습성일까요?”
“으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저도 족제비를 본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요.”
여기서도 그리 흔한 동물은 아니구나. 덥석 족제비를 데려왔길래 여기서는 강아지처럼 친밀한 동물인가 싶었는데.
“플리, 알았어. 그거 안 뺏을 테니까 이제는 가져가면 안 돼?”
“쉬-잇!”
…아, 그래. 그냥 내가 안 떨어뜨릴게. 조심해야겠다.
“움직임은 편하신 것 같네요.”
“네? 아, 그러게요.”
“거울 한번 보시겠어요?”
“으음….”
입기 전에 본 드레스는 확실히 예뻤다. 로코코풍 드레스라고 하던가? 입어 보니 생각보다 귀찮았지만.
안에 후프 스커트가 있고, 위에 오버 드레스를 입는 형식이라 치마가 엄청 풍성해 보인다. 후프 스커트는 생각보다… 뭐랄까.
얇은 대나무 살이 들어간 모기장을 입은 느낌이긴 한데 보기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편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데 이건 몰랐다.
팔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레이스 장식은, 드레스에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아래에 입는 슈미즈에 장식으로 붙이는 거였다.
게다가 드레스 앞은 사실 거의 그, 흠, 흠흠. 가슴의 그 거기가 보일 정도로 파 놓고 그 위에 세모난 스토마커라는 걸 얹어서 따로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앞에 달린 리본이나 프릴, 보석은 그냥 장식인 줄 알았는데. 아예 이렇게 따로 만들어서 다는 거였다니….
만약 춤추다가 이 스토마커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려고 옷을 이렇게 만들었지. 그럼 대중의 앞에서 그 노출…, 흠흠.
어쨌거나 연한 하늘색 바탕에 금색으로 여러 모양의 수가 놓여 있거나 반짝이는 비즈, 보석 같은 게 달려 있어서 분명 샤페릴이 입은 걸 보는 순간 감탄이 나올 건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틀림없이 엄청나게 예쁘겠지.
그렇지만.
“나중에 완성되고 볼래요.”
“그러시겠어요?”
그럼 나중에 완성본을 봤을 때의 감동이 줄어들지도 모르잖아. 그건 좀 아쉬우니까 나중에 보도록 하자.
“그럼 일단 드레스를 벗겨 드릴 테니 잠시 팔을 들어 주시겠어요?”
“아, 네.”
드레스가 살랑이자 침대 밑에서 눈치를 보던 플리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또 비즈가 떨어지진 않는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본다.
귀여워서 주고 싶긴 하지만….
“잠깐만요, 레이디 템버.”
나는 템버에게 잠시 멈춰 달라는 손짓을 하고 플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바둥거리는 플리를 안아 침대에 올려 주며 경고했다.
“네가 아무리 귀여워도 이건 아니야, 플리. 더는 안 돼. 알았지?”
“……!”
처음엔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던 플리의 눈이 갑자기 돌변했다. 반짝반짝, 세상 예쁘게 빛나더니 이불 위를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불 감촉이 좀 좋긴 하지만! 보들보들하고 폭신한 데다 두꺼운데도 왠지 시원해서 여름인데도 꼭꼭 덮고 자긴 하지만!
“기분 좋은가 보네요, 플리.”
“으으. 플리! 그만하래도!”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기회만을 엿보다 확, 하얗고 가느다란 몸을 잡아챘다.
무언가 딱딱한 게 손끝에 걸리면서 플리의 몸은 얌전히 내 손에 들어왔다.
“어휴, 이불이 엉망이 됐잖아.”
연하늘색 이불 위로 새하얀 털이 잔뜩 묻었다. 슬쩍 템버의 눈치를 보자, 그녀는 내 손에 잡혀 있는 플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폭신해서 기분 좋았던 거죠, 플리? 다음에 플리를 위한 이불을 가져와 줄게요.”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다.
만약 내가 그녀에 대해 읽지 않았더라면 가식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템버는 샤페릴이 있는 힘껏 거부하고 화풀이를 해도 언제나 슬픈 듯 웃으며 받아들여 준 사람이었다.
분명 샤페릴의 정신이 망가지지 않게 배치된 캐릭터겠지. 작가에 의해서.
그 삶은…, 아니, 아니야. 깊게 생각하지 말자.
“플리를 놓아주셔야 드레스를 벗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가씨.”
“아, 죄송해요.”
살며시 플리를 바닥에 놓아주자, 녀석은 까만 눈동자로 나와 템버를 번갈아 보더니 쏙 하고 침대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비즈를 노리고 있는 눈동잔데, 저거.
플리를 견제하면서 두 손을 들고 있는데.
“무슨 일입니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문이 활짝 열렸다. 뭐라고 막아설 새도 없이.
“…….”
“…….”
갑자기 방에 들어온 이도, 방에서 갑자기 침입자를 맞이한 이도 딱딱하게 굳었다. 나한테 고정되었던 금색 눈동자는 이내 갈 곳을 잃고 허공 어딘가를 헤매기 시작했고, 내 눈동자는 아래를 향했다.
나와 엔프리제를 따라 덩달아 굳어 버린 템버의 손은, 이제 막 스토마커의 끈을 풀고 드레스에서 떼어 내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엔프리제한테는 내 가슴께가 다 보이고 있….
“대…공님.”
“……!”
엔프리제는 결국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레이디 템버.”
“네, 아가씨.”
“대공님한테 다 보였을까요?”
“으, 으음…. 아마도… 아니지 않을까요?”
웃는 건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 그 표정에 나는….
“…크흡.”
좌절하고야 말았다.
* * *
엔프리제가 향한 곳은 서재였다. 거기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었다.
서재 책꽂이 옆,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좁은 장소는 원래 창고로 사용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엔프리제가 이 저택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계속 비워져 있었다.
그가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이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허, 허억…, 허억….”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거기에 들어가고 나서야 엔프리제는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폐가 아파 왔다.
눈앞에 선연한, 새하얀.
“윽….”
엔프리제는, 눈에 새겨진 무언가를 지워 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제 머리를 벽에 갖다 박았다.
쿵, 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도 잔상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어쩌다가, 이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샤페릴이 플리의 보석을 누르며 그를 호출했기에 달려갔을 뿐이었다. 지금은 템버가 같이 있을 텐데도 부르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그리고 가서 본 것이.
“아니, 정말로 그럴 생각이…. 나는….”
하얗게 질려서 자신을 바라보던 샤페릴의 얼굴. 그걸 떠올리면 죄책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하얀 살결의 잔상을 비워 내지 못하는 건….
“젠장…!”
엔프리제는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려는 듯 한참이나 벽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하지만 냉기에 열기가 가라앉기는커녕.
도리어 제 열기에 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