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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21화 (21/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1)

“…….”

“…….”

처음이다. 엔프리제와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 어색한 적은.

그리고 그가 먼저 내게 이렇게 닿아 온 것도.

“행여… 아프거나 불편하면 말씀하십시오.”

“그, 크흠. 괜찮아요.”

솔직히 말하면 좀 뻐근하긴 하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긴 좀 뭣해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목이 바싹바싹 탔다.

“대공님은…, 이런 거 많이 해 보셨어요?”

“아니요. 처음 해 봅니다.”

“그런데 되게 능숙하시네요.”

겨우 화젯거리를 찾아 말을 걸었지만, 엔프리제는 집중하느라 그런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철판도 뚫을 것 같은 기세로 집중하고 있기에 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지막 한 번을 끝낸 엔프리제가 내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이내 흡족한 듯 살짝 웃었다.

“이제 됐습니다. 아직 마르려면 좀 걸릴 테니 많이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손톱을 들어 보았다. 모양 좋은 손톱 안에 꽉 들어찬 금색. 나 혼자 칠할 때는 꽤 많이 삐져 나가기도 하고 두께도 일정치 않았던 것 같은데….

“너무 예쁘게 잘 발렸어요!”

“너무 움직이시면 한쪽으로 몰릴 수 있으니 수평으로 손을 둔 채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다른 손을 끌어 제 손 위에 놓는다. 그리고 또 집중한 얼굴로 작은 붓을 움직였다.

흠. 늘 보던 것보다 눈초리가 사나워 보인다. 눈에 힘이 들어가서 그런가?

예쁘게 칠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서 피식 웃어 버렸다.

그나저나 매니큐어라기엔 냄새가 좀 독특하다. 다 칠한 손등 가까이 다가가서 킁킁 냄새를 맡자, 엔프리제가 말을 걸었다.

“이상한 냄새가 납니까?”

“아니요. 박하 향 같은 게 나요.”

“아교 냄새를 지우려고 페퍼민트를 넣어서 그럴 겁니다.”

아, 아교. 거기에 안료 같은 걸 섞어서 이렇게 만든 거구나. 어쩐지 그냥 물이라기엔 끈적해 보이더라.

“이걸로 그림도 그릴 수 있어요?”

“그림은… 저도 소양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배우고 싶으십니까?”

“으음, 조금은요.”

사실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학구열이 있다기보다는, 엔프리제가 없는 시간 동안에도 할 게 필요하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대공이라는 직위가 공국의 왕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귀족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것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본 부분에서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쪽이건 분명 엔프리제도 꽤 바쁠 텐데 계속 내 옆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

게다가 엔프리제 말에 따르면 여기에 있는 건 세 사람뿐. 대공의 저택에 일하는 사람이 중년의 시녀 하나뿐일 리는 없으니 아마 여긴 샤페릴을 감금해 두기 위해 준비한 장소일 터였다. 일은 대공저에서 해야 할 테고.

지금이야 내가 도망갈까 봐 여기 딱 붙어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엔프리제가 계속 나랑 놀아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다가 집안이 망하기라도 하면 이 행복한 감금 생활도 끝나는 거잖아.

그러니 엔프리제가 없는 시간을 때울 무언가가 필요하다.

“당신께서…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걸 보니까 좀 흥미가 생기네요.”

색이 되게 예쁘다. 정말 금가루로 만든 것처럼.

“이런 건 뭘로 만든 거예요?”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이 금색이요. 진짜 금처럼 반짝거려서 예뻐요.”

“진짜 금입니다.”

…응?

“어, 그쵸! 진짜 금처럼 반짝이죠!”

“진짜 금이니까요.”

…응?

“금이요?”

“네.”

“이게 진짜 금으로 만든 거예요?”

“네. 아교에 금가루를 개어 만든 겁니다.”

…아니, 잠깐. 대체 왜?!

“금이… 그,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 때 쓰는 그 금이에요?”

“그 외에 다른 금이 있습니까?”

…아, 혹시 그건가.

“금이라는 게 엄청 싸요?”

“싸진 않습니다. 나름대로 귀금속에 들어가니까요.”

씁.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자.

지금 내 손톱 위에 얹혀 있는 이 반짝이는 금색이 진짜 금이라는 거지? 그냥 내 손톱에 칠하겠다고 금을 지금 발랐다는 거지?

“잠시만요, 대공님.”

“왜 그러십니까?”

집중하고 있던 엔프리제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사색이 된 나를 보고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손톱이 너무 무거워요….”

“너무 두껍게 발라졌나 보군요. 지우고 다시 발라 드리겠습니다.”

지워…. 지우면 이거 다시 금으로 만들 수 있나?

“지운 건 어떻게 하는데요?”

“버려야죠.”

“…아니,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저 정도의 금색 매니큐어를 만들려면 대체 금이 얼마나 들어가는 걸까. 눈곱만큼 들어가는 거면 좋겠지만, 휘황찬란한 금색을 보면 아무리 봐도….

세상에. 내 인생에 금을 받아 본 기억이 없는데 손톱에 바르고 있을 줄이야.

그 흔한 돌 반지는 물론 받아 본 적 있긴 하다. 부모님이 사업을 하다 보니 온 손님 수도 꽤 되어 열댓 개 넘게 받았다고 한다. 난 실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동생이 태어났을 때 다 녹여 버려서, 라고 들었다.

내 돌잔치에서 계집애한테 뭐 이런 잔치까지 해 주냐며 투덜거렸던 할머니는, 동생의 돌잔치에서 돌변했다고 한다.

호텔의 뷔페를 빌려야 한다는 둥, 아니다 코스 요리를 주문해야 한다는 둥, 손님도 격을 따져서 받아야 한다는 둥. 할머니 등쌀에 못 이긴 엄마가 부랴부랴 호텔을 예약하고 손님들에게 돌릴 초대장을 만드는 사이, 할머니는 내 돌 반지를 가지고 나가 팔찌로 만들어 왔다고 했다.

물론 그거라도 보면 내가 받았다는 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네깟 년이 그거 봐서 뭐 하냐? 훔쳐 갈라 그러냐?

할머니가 금고에 넣어 두고 꽁꽁 숨겨 놓았기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끔 동생만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이거 다 네 거다.’를 시전한 모양이지만.

“그럼 다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으으, 네.”

얌전히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요리조리 움직이던 손을 탁자 위에 놓은 채 아예 고정시켜 버렸다. 혹시 흘러내리기라도 해서 다시 바르게 되면….

저 금이 다 날아가는 거잖아!

“그, 대공님.”

“네?”

“남은 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남은 거…?”

엔프리제의 눈이 내 시선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불투명한 유리병에 들어 있는 매니큐어를 보더니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버려야죠.”

…아니, 그, 알겠는데.

알지. 너 대공님이고 돈 많은 거 잘 알지. 샤페릴한테 뭐든 다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잘 알지. 그런데 안에 든 속 알맹이인 나는, 샤페릴 안에 있는 게 샤페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단 말이다.

아까워! 소설 보면서 남주가 여주한테 뭘 해 줄 때마다 대리 만족하곤 했는데, 실제로 내 상황이 되니까 엄청 아까워!

“이걸 다요?”

“저도 아직 익숙지 않아서 혹시 실수할까 봐 조금 많이 만든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으, 아까운데.

붓이 오가는 손톱과 매니큐어 병을 번갈아 바라보던 내 눈에, 문득 엔프리제의 손톱이 보였다. 이거 발라 준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저도 발라 드려도 돼요?”

“누구한테 말입니까?”

“당연히 대공님이죠.”

너 외에 여기에 누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하는데 순간 엔프리제의 손이 픽 엇나갔다.

“아.”

“아,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손이 지금은 지진이라도 난 듯 파르르 떨린다. 그렇게 싫나?

“남자가 손톱에 이런 걸 칠하면 좀 그런가요?”

옛날에는 전쟁터에 나갈 때나 신분 과시를 할 때 남자들도 매니큐어를 발랐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여긴 안 되는 설정인가?

“안 되진 않는데….”

“않는데?”

“…당신께서 해 주신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긴장돼서요.”

엇나간 금색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 낸 엔프리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심호흡인가? 그러더니 다시 흔들림 없는 손으로 내 손톱에 붓을 가져다 댔다.

내 손에는 잘만 바르면서 내가 해 주는 건 왜 긴장된다는 걸까.

“그럼 안 하실 거예요?”

“…일단, 이거 다 바르고 대답하면 안 되겠습니까? 자꾸 손이 떨려서….”

“알았어요.”

이해는 안 되지만, 사람이 언제나 이해되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는 예전의 날 보면 답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지금의 내가 생각 없는 멍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편하게 얹혀살려는 빈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모든 사람은, 제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게 겹칠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그걸 억지로 비틀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만들려 하는 건 지나친 오만이다.

“…….”

그렇게 한참이나 침묵 속에서 붓질을 하던 엔프리제의 손이 멈췄다. 아까처럼 다 된 손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또 살짝 웃었다.

으음, 뭐랄까.

“대공님은 웃는 게 참 예쁘시네요.”

“예, 예쁘…다니.”

아, 이것도 남자한테 할 말은 아닌가? 그래도 예쁜 걸 어떻게 하겠어.

“평소에도 그렇게 웃고 다니시면 좋을 텐데.”

“웃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엔프리제가 또 벌떡 일어난다. 이럴 줄 알았지. 이제 대충 행동 패턴이 보인다.

“그, 손톱이 마를 동안 기다리셔야 하니 마실 거라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 사과 주스가 좋아요.”

“알겠습니다.”

안도한 얼굴이 어쩐지 얄밉다. 문을 열려 손잡이를 돌리는 그의 등에 대고 심술을 좀 부렸다.

“이거 다 마르면 다음은 대공님 차롄 거 알죠?”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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