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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9화 (19/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9)

“플리, 이리 와.”

톡톡, 하고 침대 틀의 옆을 치자 플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미쳤어. 귀여워. 천산가.

“수박 먹을래?”

템버가 간식으로 준 수박을 작게 잘라 건넸다. 킁킁하고 냄새를 맡더니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어라?”

가만히 보니 수박 과육은 그닥 줄어들질 않는다. 그럼 플리는 대체 뭘 먹고 있는 거지?

슬쩍, 침대 밑으로 내려가 플리의 옆에 엎드렸다. 날름날름하고 분홍색 혀가 수박 위를 훑는다. 그냥 수박 과즙만 먹고 있는 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플리가 휙 고개를 든다. 분홍색 코가 나를 향하더니 움찔거린다.

으으, 귀여워.

“맛있어? 수박 주스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

“꾸꾹꾸꾸꾸.”

…응? 비둘기?

그렇다기엔 너무 가까이에서 들린다. 대체 왜 족제비한테서 이런 소리가 나는 거지.

너 사실은 비둘…, 그럴 리가 없지.

마법 생물이라서 그런 건가.

“플리 너 비둘기 흉…, 플리?!”

플리가 날뛴다. 왜지.

이쪽으로 뛰나 싶더니 저쪽으로 뛴다. 그런가 싶으면 갑자기 뒷발로 벌떡 일어나다가 후다닥 어딘가로 뛰어 간다.

뭐지. 수박이 맛이 없었나.

“플리, 왜 그래?”

“꾸꾹꾸꾸꾹꾹!”

한참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플리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핥는다. 아, 혹시 수박 냄새가 나는 건가?

조그만 데다 말랑말랑해서 그런가. 엄청 간지럽다.

“족제비는 육식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수박도 좋아하나 보네.”

“…뭐 하십니까?”

헉?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슬쩍 고개를 들자 엔프리제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날 내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지?

“좋은 오후예요, 대공님.”

“좋은 오후입니다. 그보다 왜 바닥에 엎드려 계신 겁니까.”

“플리한테 수박을 줬더니 먹는 것 같기는 한데 줄지를 않아서…. 뭐 하나 싶어서 보고 있었어요.”

엔프리제의 눈이 플리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플리는.

“시이이잇-! 쉿쉿! 쉬잇-!”

…아이고.

왜 이렇게 엔프리제를 싫어하는 걸까. 이게 바로 동족 혐오인가? 너네 둘 진짜 많이 닮았는데 잘 지내면 안 될까?

문득 머릿속에 플리를 목에 감은 엔프리제가 떠올랐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부드럽고 상냥한 눈으로 플리를 봐 주는 거지.

크으, 귀엽겠다.

“과일은 주지 않는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으로 개조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습성 같은 건 남겨 두었다더군요.”

“아, 그래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기왕 개조할 거면 차라리 지내기 편하게 뭐든 잘 먹고 뭐든 잘 할 수 있게 바꿀 것이지.

내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것인지 엔프리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 생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편의에 따라 개조된 생물입니다. 다만 너무 많은 부분을 개조하면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용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

왜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플리가 이토록 엔프리제를 적대하는 이유.

“대공님.”

“네.”

“플리는 물건이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엔프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라면 귀엽다고 생각하며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공님이 플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왜 자꾸 ‘이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건….”

“플리가 마법으로 개조당한 아이라는 건 알겠어요. 근데 살아 있잖아요.”

위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정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잡혀서 개조당한 것도 화가 날 텐데 무슨 도구라도 되는 듯 이거 저거 부르면 당연히 기분 나쁘지 않을까. 플리가 이상하게 엔프리제만 보면 화를 내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대공님께서 자꾸 이거 저거 하시니까 플리가 화내는 거 아닐까요.”

“…….”

엔프리제의 눈이 플리를 향한다. 나름대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위협하고 있는 녀석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당신이 절 부르실 때 사용하라고 가져온 도구에 불과합니다. 살아 있건 아니건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살아 있는 생명을 도구라고 부르는 건 아니지!

“대공님은…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은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부루퉁하게 내뱉고는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엔프리제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 버렸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그 입술이 지금은 밉살스러웠다.

“이제 잘래요.”

“잔다니, 지금….”

“어차피 갇혀 있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에요? 잘래요. 나가 주세요.”

그 말만 남기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자 엔프리제는,

“…하.”

낮은 한숨 소리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하….”

벌써 열다섯 번째였다. 엔프리제의 서재를 정리하는 동안 템버가 들은 한숨의 횟수가.

그녀의 어린 주인이 저리 심란해하는 것은 오랜만에 보았다. 어차피 원인은 또 새장에 갇힌 아가씨겠지. 템버는 비뚤어진 책을 가지런하게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아가씨와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래 보여?”

템버가 옅게 웃어 보이자, 엔프리제는 다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열여섯 번째.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걸까. 오랫동안 그를 봐 온 템버에게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싸웠어.”

“싸워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통이라면.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이유가 있다고는 하나,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은 채 어린 주인은 그녀를 가둬 두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족쇄와 사슬까지 채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가씨가 어린 주인을 증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운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는 있는 것 같지만, 딱히 불편하다고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템버조차 연기가 아니면 저럴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생활에 금세 적응하기까지 했다.

그 후로 반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꽤 돈독해졌다. 어린 주인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있진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엔프리제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싸움이라니.

“전하, 대체 뭘 잘못하신 건가요?”

어차피 또 엔프리제가 무언가를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 성격 좋은 아가씨가 괜히 싸웠을 리는 없을 테니.

최근에는 비아냥거림도 좀 줄었나 싶었더니 또 도진 걸까.

“…그 족제비.”

“족제비? 아, 플리 말이군요.”

“…….”

플리의 이름이 나오자 엔프리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템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설마… 플리한테 질투하셔서 해선 안 될 말을 하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낱 동물에게 질투할까. …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통은.

하지만 템버는 알고 있었다.

엔프리제에게 샤페릴이 얼마나 특별한지. ‘황족의 피를 도둑질한 놈’이라며 경멸받던 그가 황궁 안에서 마음 둘 곳이라곤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보아 온 템버와 하로웰, 그리고 현 왕제인 엘마레뿐.

그들 외엔 선황이나 당시 황태자였던 바르카에게 잘 보이려 엔프리제를 대놓고 비웃거나 능멸했다.

하지만 샤페릴만은 달랐다. 엔프리제는 그런 그녀를….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왜 자꾸 이거라고 부르냐길래 도구라서 그랬다고 했을 뿐이야.”

“저런.”

템버가 본 샤페릴은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플리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가까워지려 애쓰던 그녀가 엔프리제의 말에 화가 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가씨가 자꾸 플리에게 관심을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고…. 오늘은 그거 때문에 바닥에 엎드려 있더군. 겨우 그게 과일 먹는 모습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주인은 처음 샤페릴과 플리를 대면시켰던 그때부터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분명 다른 게 또 있을 터.

“그리고요?”

“그리고?”

“또 뭐가 싫으신 건가요?”

“…날 깨물면서 반항하던 그것을 다른 것과 바꿔 온다니까 됐다고 하더군.”

상처 입은 자신보다 족제비를 우선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걸까. 아직도 어린애에서 벗어나질 못하신다. 아가씨의 행동은 그런 의미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 짓는 템버의 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나는 왜 대공님이라 부르는 거야. 어차피 기억이 없다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 줘도 되잖아.”

아하,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으셨구나. 심지어 플리의 이름은 샤페릴이 고심에 고심을 더해서 지은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이 어린 주인의 질투심을 끌어낸 모양이었다.

“전하,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가씨랑 싸워서 가장 상처 입는 건 전하시지 않습니까.”

“…….”

엔프리제가 제 입가를 가렸다. 마음에 동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템버는 거기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자꾸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시고 제대로 사과하세요.”

어린 주인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템버와 하로웰, 그리고 엘마레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상처도 입고 상처 입히기도 하면서 배웠어야 했었던 것들을.

이제 와서 배우려니 얼마나 어렵고 힘들까. 그나마 저 굳어 버린 마음이 흔들리는 건, 상대가 샤페릴이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준 수많은 것들이 있었기에.

“한낱 동물에게 질투하는 남자는 꼴사나워요, 전하. 하지만 그 이상으로 꼴사나운 건 잘못한 걸 알았으면서도 사과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템버는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이 어린 주인이 그녀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그녀는 생각에 빠져 책상을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한 주인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가씨 방에 잠깐 들렀다 갈까.”

전하께서 사과했을 때, 받아 주실 확률을 높이려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지시게 만들어 드려야겠지. 저번에 말씀하셨던 수플레를 만들어 드릴까. 곁들일 과일은 뭐가 좋은지 여쭤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녀는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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