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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8화 (1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8)

“엔피.”

“삐-!”

으음, 이것도 아닌가.

위협은 아니지만 온몸의 털을 세우면서 싫다는 걸 표현하는 걸 보니 글렀다. 엔프리제랑 비슷한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는데.

“네가 말도 할 줄 알면 좋았을 텐데.”

“끼우끼우! 삐!”

으음, 하긴.

“개조당하는 게 좋았을 리가 없지.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까만 해바라기 씨 같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자 녀석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마 알아듣는 건가?

“있잖아, 내 말 알아들어?”

라고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스스로 물어 놓고도 좀 바보 같았다. 살짝 손을 뻗자 녀석이 킁킁하고 코를 옴질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 코가 핑크색이네. 귀엽다.

“너 진짜 귀엽게 생겼다.”

“…….”

살짝 머리 위에 손가락을 댔다.

혹시 또 굳어 버리려나. 그러면 바로 손을 떼려고 했는데 여전히 핑크색 코가 꼬물거리며 움직인다. 냄새를 맡고 있는 걸까.

“있잖아. 정말로 엔피는 싫어?”

“삐-!”

으음,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이름 짓고 있다는 건 대충 알아들은 건가.

“엔리.”

“삐-!”

“엔젤?”

아, 물렸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이마를 쓸고 있던 손가락을 깨물었다. 물리적인 해를 끼치지 못한다더니….

피가 날 정도가 아니면 물 수 있구나.

“미안해. 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여기서도 엔젤이 천사라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한테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생긴 것만 보면 천산데.

“엔이 마음에 안 드나? 그럼 플루?”

“삐-! 삐-!”

아, 이것도 아니야? 거 참 까다롭네.

“그럼 플리. 어감도 예쁘고 어때!”

아, 그런데 이것도 이름이 정반대네. 도망치다, 였던가. 제 덩치의 몇십 배는 될 법한 엔프리제에게도 덤벼드는 녀석한테 붙이긴 좀 그런가.

“…….”

응?

별 반응이 없네? 이건 괜찮나?

“플리?”

이번에도 반응이 없다. 다만 새까만 눈동자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어라, 이게 마음에 들었나.

“좋아. 널 이제 플리라고 부를게.”

플리는 잠시 더 나를 쳐다보고 있더니, 다시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거기 틈도 거의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손가락 두 마디 겨우 넘는 정도라 플리의 몸 두께보다도 좁은 것 같은데.

“플리. 거기가 좋아?”

집 같은 게 필요할 텐데. 족제비는 어디서 살더라. 생물 도감 같은데 나오려나.

나중에 엔프리제한테 물어볼까.

“근데 마법 같은 것도 있구나.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으려나? 그러면 좋을 텐데.”

혹여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플리는 반응이 없다. 하지만 삑삑 하고 울지 않으니 기분 나쁘다는 뜻은 아니겠지.

마법이라. 어렸을 때는 마법을 꿈꿨던 적도 있었다.

신데렐라였던가? TV에서 종종 하던 명작 만화였던 것 같다. 신데렐라를 도와주던 착한 요정인지 마녀인지가 지팡이를 휘두르면 빗자루와 대걸레는 멋대로 청소를 시작하고 빨래는 저 혼자 나무로 만든 물통에 들어가 몸을 씻어 내곤 했다.

방바닥을 닦으면서, 혹여 할머니에게 들릴까 TV 소리를 거의 들리지도 않게 낮춰 놓고 보던 그 장면은 의외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종종 생각났다.

주로 집안일을 하기 싫을 때.

지금의 나는 마법을 어디에 쓰고 싶은 걸까. 확실한 건 집안일은 아니다.

“으음, 내가 마법을 쓸 줄 알게 되면 글자를 읽고 싶을 것 같아.”

그럼 일단 플리의 집을 만들어 줘야지.

엔프리제와 달리 행동도 조금 난폭하긴 하지만, 이상하게 닮아서 귀엽게 느껴진다. 나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무는 것도 거의 아프지 않게 물었고.

“있잖아, 플리.”

톡, 하고 침대 틀의 옆을 쳤다.

“이상한 일이지? 너는 그냥 동물이고,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데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데….”

왜일까. 나는.

“네가 참 편하게 느껴져.”

이렇게 닿지 않을 말을 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으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시이-! 쉿!”

왠지 모르지만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아니,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왜 저렇게 사이가 나쁘지?

플리는, 이제 내게는 위협을 하진 않게 되었다. 다만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무관심에 가까운 느낌이려나. 대부분 침대 밑에 들어가서 지낸다.

그러다가 엔프리제가 오면 갑자기 용수철처럼 핑-, 하고 튀어나온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엔프리제가 무시하면 그 손끝을 깨물어 버리기까지 하면서.

“플리, 그만해.”

일단은 말려 봤다.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나랑 둘이 있을 때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약간 긴장하고 흥분한 지금 들어줄 리가 없다. 붕붕 흔들리는 꼬리의 까만 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엔프리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대공님.”

“네.”

“말도 안 통하는 동물이랑 뭐 하세요.”

엔프리제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드디어 플리와의 대치 상황을 그만둘 생각이 들었는지 소파에 와서 앉았다.

“시잇-! 싯!”

그러자 플리가 다가와서 의기양양하게 위협을 가했다. 엔프리제가 도망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귀여워라.

“…….”

엔프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손이 많이 아픈가?

“손 좀 보여 주세요.”

“괜찮습니다.”

“에이, 그거 보여 준다고 닳는 거 아니잖아요. 좀 보여 주세요. 네?”

내 재촉에 엔프리제가 찌푸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플리의 이빨 모양으로 찍혀 있고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족제비 이빨, 생각보다 날카로운가 보네.

“이 방에 약 같은 거 있어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엔프리제의 눈썹이 펴질 줄을 모른다.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게 어딘지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리를 데려온 건 본인이면서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플리라고 이름 지으신 겁니까?”

“네? 아, 네.”

“…….”

왜 저렇게 부루퉁해. 자기 이름 따서 지은 게 마음에 안….

…어라? 그러고 보니 내가 엔프리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던가?

“어감이 좋죠?”

“그렇습니까?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엔프리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거….

“귀여워서 마음에 들어요. 이거저거 시도해 봤는데 플리가 별로 안 좋아하더라구요.”

“…….”

귓바퀴가 살짝 붉어진다.

아, 혹시 그건가? 플리를 부르면 자기 이름 부르는 것 같아서 쑥스러워서 그러는 걸까.

“그러고 보니 대공님은 이름이 뭐예요?”

엔프리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내가 기억을 되찾을까 두려운 걸까. 그래서 또 자신을 거부하게 될까 봐.

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엔프리제 드 블레임입니다.”

순순히 말해 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 듣는 게 맞긴 하지. 그의 입에서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활자로만 봤지.

“당신의 이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저런 말을 하면서 내 표정을 살폈을 텐데. 뭔가 꼬리를 드러내진 않나,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지금의 엔프리제는 뭔가 다르다. 정말로 내가 궁금해할까 봐 물어본다는 느낌이었다.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너무 나에 대해 묻지 않는 것도 이상하겠지.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요. 제가 제 이름을 부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기 이름도 모른다는 건 좀 막막하잖아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글 웃었다. 잠시 생각하던 엔프리제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이름은… 샤페릴 드 리베테입니다.”

“샤페릴….”

…이상한 소리겠지만, 갑자기 실감이 났다. 나는 정말로 샤페릴이 된 거구나.

지금까지는 엔프리제의 이름도, 샤페릴의 이름도 직접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실감이 그리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책 속의 일을 보는 느낌이랄까, 나랑은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았달까.

그런 게 조금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며 내 이름이 ‘샤페릴’이라고 단언하는 엔프리제를 보며 실감이 났다. 내가 정말로 샤페릴이라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제… 김수희라는 사람은 정말로 사라졌구나.

“뭔가 생각나는 건 없으십니까?”

이 남자, 소설을 잘 안 읽나 보다. 아니면 이 세계의 소설에서는 기억상실에 걸리는 게 클리셰가 아니던가.

이름만 듣고 기억을 되찾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장편 연재되기는커녕 5화 만에 끝나 버리겠다.

“전혀요. 다만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엔프리제는 엷게 웃었다.

샤페릴의 이름만으로도 당신은 그렇게 행복해지는 건가. 그런 사람을 당신은 왜 납치하고 감금한 걸까.

이 남자도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아니, 나는 이 감금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으니 후회는 하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던가. 여주와 올바른 방법으로 접하지 않고 강제로 몸의 대화를 시작한 남주가, 여주가 자신에게 마음을 준 후로 후회하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역시 후회남이 되려나.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엔프리제가 이렇게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나, 하는.

엔프리제는 내가 책에서 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러니 언젠가 내게 더 마음을 열게 되면, 사실대로 말해 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대공님 이름도 예뻐요. 엔프리제. 입에 딱 붙고 어감도 예쁘고.”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엔프리제는.

“…감사합니다.”

발갛게 물드는 얼굴을 가리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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