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7)
“대공님.”
“네.”
“저 부탁이 있어요.”
엔프리제가 게임판에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이 틈이다.
나는 재빨리 돌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대공님이랑 바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저랑… 바로요?”
“레이디 템버는, 혼자서 이 집안의 일을 다 하고 계신 거잖아요. 자꾸 부르자니 죄송해서요.”
“아아.”
으음, 표정 변화는 없는데 뭔가 느낌이 묘하다. 혹시 다른 말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언제든지 대공님과 연락하고 싶어요! 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까지 할 리가 없잖아. 연인 사이도 아닌데. 피식 웃고는 엔프리제의 손을 주시했다.
내 정신을 돌리고 기습을 할지도 모르니까.
“연락 방법….”
“뭔가 없을까요. 설렁줄을 하나 더 달아서 대공님의 방에 연결한다거나.”
“조금 생각해 보게 해 주십시오.”
톡, 톡.
기다란 손가락이 탁자 위를 두드렸다. 손톱이 나무에 닿아서 그런가 소리가 난다. 근데 그게 거슬리진 않아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손톱이 되게 깔끔하네. 여기도 네일 케어라든가 페디큐어 같은 게 있는 걸까. 있으면 한번 받아 보고 싶긴 한데….
“대공님.”
“네.”
“그 손톱, 대공님이 직접 관리하시는 거예요?”
“네?”
엔프리제가 제 손톱을 들여다본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손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관리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지런하고 윤기가 나길래요. 반들반들해서 너무 예쁜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만.”
오, 저런 것도 남주 보정인가.
“그런 걸 해 보고 싶으십니까?”
“으음.”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템버가 조심스럽게 가위와 줄을 이용해서 손톱을 손질해 준다. 그래서 언제나 단정하고 윤기가 나긴 한다.
다만 뭐랄까. 예전 생에서는 손이 거칠고 예쁘지 않아서 창피하기도 했고, 어설프게 혼자 매니큐어라도 바르면….
-이년이 실성을 했나. 냄새나게 이런 건 왜 발라? 귀한 장손 먹을 음식에 이런 화학물질 덩어리가 들어가면 어쩔 셈이야? 당장 지워.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는 내 손등을 효자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 탓에 한동안 손등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시퍼렇게 멍이 들었었으니까.
그 후에도 몰래몰래 한 번씩 발라 보긴 했었지만, 설거지하거나 빨래하면서 조금씩 벗겨지는 게 보이기에 그 후로는 하지 않았다. 혹여 그게 진짜 귀한 장손 피부에 여드름이라도 나게 하면 또 얻어맞을 건 나였으니까.
그치만 이번 생에선 기왕 이렇게 예쁜 손을 가졌는데…. 뭔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원하시면…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정말요?”
“네.”
아, 나 너무 양심 없나? 부탁이 끊이지 않는 느낌인데.
으음.
“대공님은 저한테 부탁할 거 없으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뭐.
이 남자도 샤페릴을 감금했을 땐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거 아닌가. 도망칠 때 외엔 험한 짓은 안 한 걸 보면 그런 의도로 가둔 건 아닌 것 같고.
그런 의도만 아니라면 나도 받아먹기만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너무 부탁만 하는 거 같아서요.”
“…….”
의외의 말이었던 걸까. 엔프리제가 고장 났다. 딱딱하게 굳은 채 멍하니 날 보고 있는 게 조금 재밌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일단은 감금된 몸인데 뭐 해 줄 수 있는 게 없긴 하네.
으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 지난 생에서 배웠던 건 전혀 도움이 안 될 테고 집안일은 템버가 잘 하고 있고….
글자를 모르니까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림도 못 그리고.
어라, 나 진짜 도움이 안 되네?
“생각해 보니 별 도움이 안 되네요.”
지키지도 못할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게 쑥스러워서 엷게 웃었다. 그러자 엔프리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 입가를 손으로 꽉 누르며 뭔가를 말했다.
“…다.”
문제는 입가를 누른 채로 말해서 웅얼웅얼하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뭐라는 거야.
“안 들렸어요, 대공님.”
“다, 크흠! 당, 당신이 여기에 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
아, 안 돼. 순간 생각이 하얗게 날아갔다.
이게 기습당한 사람의 기분이구나. 내가 엔프리제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겠다.
어후. 막 팔이 근질근질하다. 아니, 심장이 근질거린다고 해야 할까?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든다.
“…….”
나도 모르게 말을 잊고 엔프리제를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뭔가 하얀 천을 물들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아, 하얘졌다. 하얗게 질렸다.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 대공님의 곁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대공님 곁에 있고 싶어요! 앞으로 평생 여기서 나가기 싫어요!”
아, 나도 모르게 진심이 막 튀어나온다. 어차피 지른 거, 에라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 그동안 제가 한 말들을 반성하는 거예요!”
“…당신이 한 말이라면?”
“그동안 너무 생각 없이 이야기한 것 같아요. 전 딱 한 번 들은 걸로도 이렇게 쑥스럽고 막 간질간질한데….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파르르 몸을 떨자, 간질거리며 몸을 타고 오르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엔프리제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제 입가를 가렸다.
아니, 그거 하지 마. 무섭게 왜 그래.
“저는… 싫지 않았습니다.”
“네?”
“저는, 당신이 말해 주는 그 말들이 싫지 않았습니다. 혹시 당신은… 싫으셨습니까?”
아니! 너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막 밉살맞은 말 많이 하고, 막, 어, 재수 없게 굴고! 그런 캐릭터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데?
“진심이세요?”
너무 진지하게 물었나. 엔프리제도 덩달아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으으, 그….”
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 입 놔뒀다 뭐 해? 제발 말 좀 하라고!’를 외쳤던 나였지만, 일단 하나는 알았다. 남주들이 왜 솔직하지 못한가. 그 남자들이 솔직하게 제 마음을 다 말하면 고구마가 해소될 것 같았는데….
아니다. 여주의 심장을 보호하기 위한 작가의 배려였음이 틀림없다. 어후, 심장에 나빠. 해로워.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가까워지는 거면 모를까.
“일단… 대공님은 좀 조심해 주세요.”
“기분 나쁘십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역시.”
아니, 그게 아니잖아! 누가 봐도 내 반응이 그게 아니잖아!
“대공님, 의외로 눈치 없으신 거 아세요?”
“제가… 말입니까?”
“저 지금 얼굴 빨개진 거 안 보이세요? 부끄러워서 그러잖아요! 그 잘생긴 얼굴로 그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시면 어째요?”
“잘생….”
아, 또 빨개졌다.
분명 이런 말이 싫지 않다던 엔프리제는 다시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부탁하신 건 내일 바로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 그, 싫어서 도망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어, 음. 네.
왜일까. 그제, 엔프리제가 게임하다 똑같은 느낌으로 도망쳤을 땐 마냥 귀여웠는데.
오늘은.
어쩐지 나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 * *
“끼우, 뀨! 삐삐!”
…뭐지, 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귀여운 울음소리는.
엔프리제의 손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리는 하얀 생물과, 엔프리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받아 들어도 되냐고 눈으로 물어보자 그가 다시 한 번 내게 하얀 생물을 내밀었다.
“이것은 당신을 상처 입히지 못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받으십시오.”
그렇다기엔 엔프리제의 손은 이빨 자국투성인데. 살짝 피도 났는데.
그래도 너무 귀엽다. 홀린 듯이 두 손을 내밀어 녀석을 받아 들자,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딱 멈춰 버렸다.
“이거, 족제비 맞죠…?”
어릴 때 동생이 보던 TV 만화에서 본 적 있다. 머리에 나무 이파리 달고 다니던 그거.
나뭇잎은 안 달고 있지만, 길쭉한 몸이나 윤기 도는 하얀 털이 만화 속 캐릭터와 꼭 닮았다. 아니, 이건 만화 캐릭터보다 더 귀여운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하자면 진짜 족제비는 아닙니다. 마법을 이용해 개조한 동물이니까요.”
개조한 동물…. 아, 그래서 난 다치게 하지 못할 거라고 한 거구나.
“주인으로 등록된 인물에게는 해를 입히지 못합니다…만.”
손안의 족제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기절하거나 정신을 잃은 건 아니고 딱딱하게 굳은 채 날 노려보고 있다.
음, 혹시 이건.
살짝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아 보았다. 후다닥 내게서 도망친 녀석이 침대 아래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싯-, 하는 소리를 냈다.
족제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쟤가 날 위협하고 있다는 것 하나는 잘 알겠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군요. 다른 걸로….”
“아니, 괜찮아요! 얘가 좋아요.”
어둠 속에서 날 노려보는 눈빛이 어딘가 엔프리제랑 닮았다. 어차피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진 못한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근데 문제는.
“근데 얘는 왜 데려오신 거예요?”
“아아, 저랑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겠냐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엔프리제가 느릿한 걸음으로 족제비에게 다가간다. 녀석은 몸을 웅크리고 싯싯 거리며 열심히 위협했지만, 안타깝게도 엔프리제의 상대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족제비는 의외의 행동을 취했다.
“…….”
엔프리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아무리 그래도 아프겠지, 저건.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꽉 깨문 채 대롱대롱 매달린 족제비를 잡아 내게 내밀었다.
“여기, 가슴 털에 가려진 곳에 붉은 보석이 있습니다. 이걸 누르시면….”
엔프리제가 흘긋 나를 본다.
뭐야, 누르면 어떻게 되는데.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자, 엔프리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저한테 알림이 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 자꾸 말을 하다 마는 걸까. 별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거나 그, 저…를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 이걸 누르시면 됩니다.”
…엔프리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