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6)
“벌써 숙달되셨군요.”
“혼자서 열심히 전략 연구했거든요.”
앞에 ‘대공님께서 저 버리고 가셔서’를 붙일까 하다가 말았다. 너무 놀려 먹으면 반응이 또 재미없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놀리지도 않았는데 엔프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이렇게 눈치가 빠른 남자라니. 근데 왜 샤페릴의 내용물이 바뀐 건 눈치채지 못하지?
하긴. 나야 소설로 하도 봐서 익숙한 거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회빙환이란 게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겠지. 도리어 미치거나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기가 더 쉽겠다. 아니면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엔프리제가 의심병이 들었구나. 다른 남주들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의심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짓궂게 굴어서 죄송해요.”
뒤늦게 사실 그게 아니었다고 우기지 않을까 했는데. 순순히 인정하는구나.
“아.”
실수다. 여기 놓으면 안 되는데. 여기다 놓으면 두 턴 안에 모서리를 빼앗길 수 있는데…!
흘끗하고 엔프리제를 보았다. 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게임판만 보고 있었다. 한 수만 물러 달라면 물러 줄까?
으음, 뭐. 밑져야 본전이지.
“대공님.”
“네.”
“저… 방금 거 다시 하면 안 돼요?”
“안 됩니다.”
끙, 치사하게.
뭔가 방법이 없을까. 여기에 놓으면…, 아, 그럼 다른 귀퉁이를 뺏기잖아. 여기는…, 그래 봤자 시간 벌기밖에 안 되는데.
으으.
“…….”
어쩌지. 어떻게 하지. 으으으으음…!
“대공님.”
“네.”
“전 초보잖아요. 한 번만 봐주세요.”
동정심에 매달려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놓은 자리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애초에 생각에 빠진 채로 둬서 그렇다. 그 원흉은 엔프리제니까, 엔프리제는 한 수 물러 줄 의무가 있다!
…는 너무 억지긴 하지.
“열심히 전략 연구 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연구만 하는 거랑 실전은 다르잖아요. 아무리 이론에 빠삭해도 실제로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는 법인데!”
“예기치 못한 상황? 전 당신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습니다만.”
…으, 으으.
“대공님이, 어제 이야기 꺼내시는 바람에 떠올랐단 말이에요.”
“떠오르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어제 대공님이 얼굴 빨개져서….”
“……!”
나는 짓궂게 굴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게 캐물으면 대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나쁘지 않다!
결코, 게임에 이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남의 추태를 자꾸 헤집는 건 그리 좋은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추태?
“그게 왜 추태예요?”
내 질문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게임판만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를 들어 올려 나를 보았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어제 그랬잖아요. 대공님은 너무 귀여우신 것 같다고.”
“자꾸… 농락하지 마십시오.”
“농락이 아니라 진짠데요! 제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세요?”
굳이 거짓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 이렇게 잘난 주제에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걸까.
내가 이 남자만큼 잘났으면 아주 난리를 피웠을 텐데. 모델을 하든 연예인…, 아, 잠깐. 여기는 그런 게 없나? 그럼 사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어서 인플루언서의 삶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 하나만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는.
“…아니요.”
“그렇죠? 진심이라니까요.”
“하지만, 다 큰 남자더러 귀엽다고 하는 건….”
“하지만 제 눈엔 귀여워 보이는 걸 어떻게 해요? 어제 얼굴 빨개지셨던 것도 그래서 계속 생각난걸요.”
엔프리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질려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쑥스러워서 저러는 걸까.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이제 제가 한 번 물러 달라는 이유를 아시겠죠?”
“모르겠습니다.”
“대공님 때문에 잘못 놓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물러 주셔야죠!”
“…싫습니다.”
“으으….”
이것도 안 통하나.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손해를 줄일 수 있는 수를 찾아봐야겠다.
“너무 오래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 좀! 기다려 보세요!”
재촉하는 엔프리제에게 톡 쏘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다 두면….
* * *
엔프리제는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패배한 샤페릴은, 뾰로통해져서 달콤한 간식을 줄 것을 요구했다. 머리를 너무 써서 단 게 필요하다나. 템버가 핫초코에 마시멜로우를 얹어 과일과 함께 가져오자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활짝 펴졌다.
“…풋.”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원래도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기억이 사라지면서 분명 그녀를 얽고 있던 예법이라든가 체면 같은 것도 같이 사라진 거겠지. 엔프리제가 지켜본 것 이상으로 솔직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되었다.
다과를 먹어 치운 그녀는 책을 읽어 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은 가져온 책이 없다고 하자 기억하고 있는 시의 구절이라도 좋으니 읽어 달라고 하기에 그가 기억하고 있던 몇몇 시를 낭송했다.
처음에는 눈을 반짝거리며 듣고 있던 그녀는,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옆으로 폭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혹시나 해서 템버에게 준비하도록 말해 둔 담요를 꺼내 샤페릴의 위에 덮어 주고 조용히 나오는 참이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엔프리제는, 그녀의 이상이 발견된 지 나흘 만에 인정했다. 확실히 지금의 샤페릴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저 정도로 능숙하게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샤페릴이라는 사람은.
붉은 눈동자 가득 담겨 있던 혐오, 불신, 분노. 게다가 자신을 볼 때마다 얼굴에 피어오르던 거부까지. 그 모든 걸 저리 잘 숨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어르고 달래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했을 것이다.
몇 번이나 탈주하다 저런 사슬을 찰 바에는.
“하지만….”
엔프리제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귀족의 손치고는 지나치게 거친 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어릴 때부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활도 쥐었다. 마창술도 배웠다. 공부 머리는 그리 좋지 않았기에 어떻게든 무술로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엔프리제는 공식 석상에 나갈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아무리 단련하고 솜씨를 갈고닦아도 검술 대회조차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인정이 필요해서 실력을 갈고닦은 게 아니었으니까.
오로지 한 사람. 아버지만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면….
하지만.
-오오, 바르카. 벌써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게 되었다지.
-아직 명중률은 높지 않습니다, 아버지.
-무슨. 그런 건 나이가 들면서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지면 자연히 늘게 되어 있다. 역시 내 아들이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아버지는 자신을 보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엔프리제는 단련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미 습관이 되기도 했고, 하지 않으면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는 그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이 거칠어지면 질수록 무언가가 쌓여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혼자서 단련을 계속하면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는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버릴 수 있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뛰고 검을 휘두르는 게 가장 행복했었다.
-손 한 번만 봐도 돼요?
그랬었는데.
샤페릴이 손을 보자고 이야기했을 땐 순간 거절의 말이 나올 뻔했다. 귀족치고는 지나치게 거친 손. 이 손을 그녀는 어찌 생각할까.
혹여… 혹여라도….
반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반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그리고 샤페릴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차이는 안 나네요.
제 손 위에 닿은 부드러운 살결에 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여성과 닿은 적이 별로 없어서일까. 아니면 상대가 샤페릴이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일까.
손 위를 살며시 어루만지던 그녀가 제 손을 포갰을 때는….
엔프리제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바닥을 감추듯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그건 어찌 보면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사실은 그 손을 꽉 잡고 싶었다. 자신의 품에 끌어들여 꽉 안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지만 엔프리제가 할 수 있는 건 밉살맞은 말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엔프리제가 아는, 다른 이와 상호작용하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샤페릴을 탐하고 싶어 하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자신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럼 대공님이니까 이러나 보죠.
샤페릴.
당신은 언제나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 준다. 누군가에게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그 유치한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이.
분명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기대했던 거겠지. 간절히 바랐지만, 듣지 못했던 말들을 당신은 하나하나 풀어 내 준다.
이제는 거짓이라도 상관없다.
이 모든 것에 내 착각이라 해도 좋다.
끼워 맞추기라도 좋다.
당신이 내게 한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 정도로 나는.
“샤페릴.”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결심을 흐리려 한다. 샤페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녀가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그 곁에 있고 싶다.
그 마음을 억누른다.
이미 결심하지 않았던가.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지키겠다고.
미움받아도 좋다. 자신을 증오하게 되어도 좋다. 오해받아도 좋다. 언젠가 그녀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겠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키고 싶다.
“나는 당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다짐하며 엔프리제는 눈을 꽉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