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5)
“당신은… 정말 변하지 않으시는군요.”
변하지 않았다니, 뭐가? 안에 든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아니, 어쩌면 계속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가 내가 지금 한 어떤 행동이 원래의 샤페릴과 닮아 안심한 건지도 모른다. 대체 뭐가 샤페릴과 닮아 있었던 걸까. 난 그냥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데.
“감정을 숨길 줄을 모르시죠, 당신은. 아니…. 숨길 필요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감정을 숨길 줄 모른다고?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내 감정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안 맞으려고 웃었을 뿐.
궁금해하지 않으면, 울지 않으면, 화내지 않으면, 짜증 내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맞을 일이 없다.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늘 웃었다. 웃었을 때 가장 덜 맞았으니까.
어쩌면 엔프리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와서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웃음으로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도망가지만 않으면, 엔프리제는 날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다 해 준다.
도망갈 이유가 없는 내가 무언가를 숨길 이유도 없다. 숨겨야 하는 건 오로지 하나.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는 것만 숨기면 된다.
“뭐가 그리 궁금하십니까?”
“아….”
룰 설명을 듣고 있는 도중인데, 내가 먼저 이렇게 잡아 버리면 그만이지 않냐고 말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아직 말을 뒤집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으니까.
뭐가 궁금하다고 해야 하지….
아.
“게임 돌이 신기하게 생겨서요. 왜 두 가지 색이 한 돌에 같이 있어요?”
“아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답변이었는지, 엔프리제가 엷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빨간 돌 두 개가 파란 돌을 사이에 두고 일직선으로 이어지면 중간에 있는 돌은 빨간색으로 바뀝니다.”
긴 손가락이 휙 하고 게임 돌을 뒤집는다. 게임판 위에 있을 때는 바둑알보다 커 보이는데 그의 손안에 있을 때는 유독 작아 보인다. 손이 크니까 그렇겠지.
동생이 큰 뒤로는, 동생 손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꽤 신기하게 보였다.
“저기, 대공님.”
“네. 뭔가 질문이 있으십니까?”
“질문이라기보다 부탁인데…. 손 한 번만 봐도 돼요?”
“손…이요?”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샤페릴의 손은 원래의 내 손보다도 약간 작은 느낌이다. 둘의 손을 비교하면 대체 얼마나 차이 날까.
얼핏 보기엔 두세 배쯤 차이 나 보이는데.
“안 될까요?”
“…….”
엔프리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 손을 내밀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거칠어 보이는 손이 의외였다.
검을 배우니까 그런 건가? 뭔가… 생각했던 거랑 꽤 다르다.
전에 내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을 때도 그랬고 턱을 잡았을 때도 그랬지만, 손길이 되게 부드러웠다. 그래서 손도 엄청 부드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친 일을 한 사람처럼 손바닥이 울퉁불퉁하다.
“…….”
살며시 손바닥 위에 내 손을 놓아 보았다. 정전기라도 일어난 건지 엔프리제의 손이 흠칫 떨렸다가 멈췄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살짝 크기를 비교해 봤다.
“생각보다 엄청 차이는 안 나네요.”
한 1.5배쯤 되려나. 멀리서 봤을 땐 한 2.5배는 되어 보였는데. 오히려 크기보다 두께가 내 2배는 되는 것 같다.
손가락 끝을 맞춰 보았다가 손바닥 끝에 맞춰 보았다가 하다 보니, 엔프리제가 살짝 손을 뒤로 뺐다.
“아, 죄송해요. 간지러웠어요?”
“…평소에도 이러십니까?”
“네?”
이러다니, 뭘?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제 이마를 살짝 감쌌다. 귀가 빨개진 걸 보니 뭔가 창피한 것 같은데.
“외간 남자의 손을 덥석덥석 잡고 그러시냔 말입니다. 채신머리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
“아.”
아, 어, 의외로 보수적인가 보네.
아니, 얘 뽕빨물 남주잖아…? 손 좀 잡은 것 가지고 이렇게 부끄러워한다고?
으음…. 하긴 가끔 남주들 중에서 오히려 여주가 적극적으로 바뀐 것 때문에 소극적이 되는 캐릭터들이 있긴 하지. 얘도 그런 느낌인가.
“음, 저는 기억이 없으니까 예전부터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 대공님이 본 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니요.”
“그럼 대공님이니까 이러나 보죠.”
뭐, 사실이기도 하고.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남자는, 샤페릴을 납치해서 감금까지 한 미친놈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지난 사흘 동안 봐 왔던 엔프리제는 그다지 유해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내가 엔프리제한테 유해한 느낌인데. 놀리는 거 재미있고.
그래서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경계심이 들지 않긴 한다. 어쩌면 그의 집착이 샤페릴을 향한 거라 생각되다 보니, ‘나’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걸지도 모르고.
씁…. 혹시 상황 적응 능력이 떨어지나? 빙의물 여주들 보면 빙의하자마자 감정 몰입도 잘 하고 행동도 영애처럼 척척 해내던데.
“…….”
엔프리제가 벌떡 일어났다.
자칫 기분 상했나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아쉽게도 내 눈은 그의 목을 잡아 냈다. 귓바퀴까지 볼 필요도 없이 아주 시뻘겋다.
아니, 오늘은 얼굴도 좀 빨간 것 같은데?
“잠시, 그, 잠시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게임은 마저 가르쳐 주셔야죠, 대공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자,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반응이 재미있다.
“잠시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어디 가시는데요? 어어, 대공님!”
그는 거의 도망가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렇게 내가 배를 싸쥐고 한참을 웃은 후에도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 * *
“후….”
겨우 돌아온 엔프리제의 얼굴은 원래의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웃지 않기 위해 그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게임판에 집중했다.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빨간 돌 두 개가 직선상에 놓이면, 그 사이에 있는 파란 돌은 다 빨간색으로 바뀐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근데 대공님.”
엔프리제가 흠칫 몸을 떤다. 또 이상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지 겁이 난 거겠지. 나는 웃음을 억지로 깨물며 진짜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순서대로 하는 거면, 세 번째에 빨간 돌이 파란 돌을 이렇게 감싸면 게임이 끝나 버리는 거 아닌가요?”
“아….”
엔프리제가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잘생긴 얼굴이라 그런지 그것조차 귀여워 보인다.
딱히 숨길 필요도 없는 것 같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대공님은 너무 귀여우신 것 같아요.”
“…네?”
엔프리제가 허를 찔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렇지, 이런 말을 들어 보는 건 처음이겠지. 누가 저 눈매 사나운 남자한테 귀엽다고 하겠어.
“제가 또 스킨십 할까 봐 긴장하셨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안 해요, 이제. 대공님이 싫어하시는 건 안 할 거예요.”
헤실 웃어 보이자, 엔프리제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저게 차갑고 날카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이란.
한 번 귀엽다고 생각하니까 다 귀엽게 보이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가르쳐 주세요.”
“…빨간 돌은, 곧바로 파란 돌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파란 돌에 인접한 곳 중 돌을 뒤집지 않는 곳에 놓아야 합니다. 파란색 역시 두 번째 돌은 빨간색과 인접한 곳 중 돌을 뒤집지 않는 곳에 놓아야 합니다.”
“아하.”
그거네. 내가 아는 오셀로랑 다른 게 이거구나. 오셀로는 중앙에 네 개의 돌을 깔아 두고 시작하는데, 이건 처음 시작 지점을 빨간 돌이 정할 수 있다는 건가 보다.
재밌겠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룰은 이게 전부이긴 한데…. 이해는 다 되셨습니까?”
“에이, 해 보면 이해가 가겠죠. 전 처음 하는 거니까, 저 먼저 하게 해 주실 거죠?”
“알겠습니다.”
흠. 일단 첫수는 내가 아는 방식으로 해 볼까?
중앙에 하나 놓고….
“여기다 놓는 건 가능한 거죠?”
“네.”
“대공님 차례예요.”
잠시 고민하던 엔프리제는, 내가 놓은 곳 오른쪽에 돌을 놓았다.
나한테 익숙한 건 네모 모양으로 시작하는 거지만…. 기왕 이런 룰로 하는데 새로운 것도 시도해 볼까.
“이렇게도 돼요?”
“가능합니다.”
오른쪽 대각선 위로 돌을 놓자 엔프리제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오른쪽에 돌을 놓는다. 저기가 좋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초보라서 봐주려는 건가.
해 보면 알겠지, 뭐.
이번엔 첫 번째 놓은 빨간 돌 오른쪽에….
“이러면 여기 중간 건 뒤집는 거 맞죠?”
“맞습니다.”
휙, 하고 돌을 뒤집었다. 맨날 모바일로만 하다가 게임판 가지고 하니까 재미있다. 뭔가 현실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건 …입니다.”
오, 진짜 이런 거 있구나.
중간중간 글자 몇 개는 들리는데, 뭐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안 들린다. 저 정도로 작게 말할 거면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아니면 속 시원하게 그냥 지르든가.
“뭐라고 하셨어요?”
“별거 아닙니다.”
“으음.”
이 패턴이면, 보통 남주들이 하는 말이….
“아. 혹시 귀여운 건 저라고 말씀하고 싶으셨어요?”
흠칫, 하고 파란 돌을 놓으려던 엔프리제의 손이 멈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본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맞았나 보네.
“어떻게…. 드, 들렸습니까?!”
“아니요. 그냥 때려 맞춘 건데.”
발뺌했으면 내가 몰랐을 거라는 걸 알게 된 엔프리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와, 토마토다, 토마토. 사람 얼굴이 저렇게 빨개질 수가 있구나.
“……!”
벌떡 일어난 그가, 이번에는 양해의 말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찌나 급했는지 이번에는 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으음, 사슬 저기까지 닿으려나?”
템버를 부르기엔, 지금 한참 점심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다. 어차피 곧 있으면 밥 올 텐데 그때까지 열어 두지, 뭐. 어차피 나랑 템버랑 엔프리제만 있다며.
“으음. 그나저나.”
난 게임 연구라도 하고 있을까.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엔프리제가 반쯤 버리듯 던지고 간 돌을 주워 고민했다. 내가 엔프리제였으면 어디에 뒀을까.
으음….
그렇게 나는 템버가 점심을 가져올 때까지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