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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4화 (14/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4)

뒹굴, 뒹굴.

어제 낮잠도 자고 밤에도 푹 자서 그런걸까. 아니면 걱정거리가 없어져서 그런 걸까.

잠이 안 온다.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언제나 눈이 뻑뻑하고 피곤해서 더 자고 싶다 싶었는데. 막상 더 자도 되는 상황이 오니까 눈이 말똥말똥하다.

이게 바로 청개구리 심보라는 건가.

“으음.”

엔프리제, 오늘은 안 오겠지? 내가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애초에 지금 깨어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잖아.

템버는 깨어 있겠지만, 일 방해하긴 좀 미안하고.

“으으으으음.”

뒹굴, 뒹굴.

이럴 때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그림 그려 본 건 고등학교가 마지막인데, 종이랑 물감 달라고 해 볼까? 아니면 여기도 혹시 보드게임 같은 거 있나?

보드게임…, 엔프리제가 보드게임을 할 줄 아려나. 체스 같은 건 할 줄 알겠지? 난 모르지만.

뭐, 배우면 되지. 엔프리제가 못 놀아 줄 때는 그림을 그리자. 어차피 누구한테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그려 봐야지.

근데 너무 못 그리면…. 아니지, 피카소 같은 그림도 있잖아. 예술이라고 우겨 보자.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템버의 목소리에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엷은 미소를 띤 중년의 시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침구는 편하셨어요?”

“네! 그 전 것보다는 좋았어요.”

“전하께서 계속 신경 쓰고 계셨어요.”

엔프리제가? 어제도 잘 잤는데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지.

불편하면 또 바로 이야기할 생각인데.

“대공님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아가씨의 말씀대로예요.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지라 생각만 많아지셨죠. 조금 더 드러내면 좋을 텐데.”

혼자?

대공이면 황제 다음으로 잘난 사람일 텐데…. 주변에 사람들이 엄청 바글거리지 않나?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하긴. 별문제 없는 성장 과정을 거쳤다면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납치 감금하진 않겠지.

혼자…. 이럴 땐 보통 뭔가 남들에겐 없는 힘이나 출생의 비밀이 있기 마련인데.

어느 쪽이려나.

“그러고 보니, 레이디 템버.”

“네.”

“대공님을 좀 뵐 수 있을까요?”

템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무슨 못 할…, 아, 하긴. 갇혀 있으면서 샤페릴이 놓아 달라며 별별 짓을 다 했었지. 그런 샤페릴이 엔프리제랑 만나게 해 달라는 게 이상하긴 하겠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가씨?”

으음, 뭐, 상관없나.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서.”

“그렇군요…. 해 보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보드게임 할 만한 거 없냐고 물어도 되려나. 기억상실이 그런 거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놀이가 될 만한 거 없을까요?

“놀이…. 전하께 한번 여쭈어보겠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게임이 있으려나. 설마 게임까지 다 새로 만들진 않았겠지…. 하다못해 오셀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고마워요, 레이디 템버.”

“…….”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템버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딘지 낯선 느낌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입가에 침 자국이라도 났나?

황급히 입술 근처를 가리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만사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

아니, 그건 그냥 습관이 되어서 그런 건데.

할머니는 뭔가를 줄 때마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년이라며 날 욕했다. 주로 동생이 먹던 음식, 동생이 놀던 장난감, 동생이 먹는다고 사 두었다가 냉장고에서 썩고 있는 간식 등이었는데 가끔은 정말로 상한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고맙다고 하다가 하지 않게 된 것도 식중독에 걸린 후였다.

-그거 하나 소화 못 시키고 병원에 입원을 해? 약해 빠져선. 이래서 우리 장손 밥이나 잘 해 먹이겠냐?

상한 걸 줘서 먹고 탈이 나도 내 잘못이구나. 그걸 알게 되니 할머니가 주는 음식이 그리 달갑지 않아졌다.

달갑긴커녕 무서웠다. 이걸 먹고 또 탈이 나면 듣게 될 욕을 생각하면.

사실 욕을 먹는 건 익숙했기 때문에 괜찮았다. 다만 나한테 1인실을 쓰게 해 줄 리는 만무하고, 보통 가장 싼 6인실을 쓰게 했었다. 그때, 자전거를 타다가 팔이 부러진 같은 반 아이가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었는데….

뭐랄까. 왜인지는 딱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창피했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자 할머니는,

-계집년이 배불리 먹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을 알아야지. 내가 네 나이 때는 쫄쫄 굶어 가면서 장손 뒷바라지했다.

라고 하곤 했었다.

처음에는 말로만 했지만, 나중에는 효자손도 같이 날아왔다. 등을 후려치며 그리 말하는 게 무서워 입버릇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붙이게 되었다.

그저 그뿐인데.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지요. 아주 좋은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게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엔프리제에게 간 거겠지.

“…….”

혼자 고요해진 방 안에서 생각했다.

잘 웃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는 건 내가 아니라, 분명 당신이지 않을까.

라고.

엄마가 레이디 템버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조금 더 많이 웃을 수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피곤에 절어 있는 사람이었다. 집에 오면 내게 말조차 걸지 못하고 씻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 쓰러지곤 했다.

그러면 나는, 끙끙대며 엄마의 겉옷을 벗겨 주거나 양말을 벗겨 주곤 했었다.

할머니는 쓰러져 잠든 엄마를 보며 혀를 찼다. 계집이 집안일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게 무어 자랑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지.

아주 가끔, 밥을 같이 먹거나 시간을 같이 보낼 때가 있었다. 반년에 한 번쯤 휴가를 낸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거나 시내에 가서 필요하다는 걸 사 주곤 했다.

늘 할머니가 이거저거 사 주던 동생은, 그래도 부족했는지 거리를 쏘다니며 신나게 엄마 카드를 긁어 댔다. 나는 대부분 엄마의 곁에 있었다. 뭔가 사 들고 가 봤자 어차피 할머니에게 빼앗기거나 욕을 들어먹을 게 뻔한 데다, 평소엔 거의 대화할 수가 없는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날 앉혀 놓고 일이나 할머니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아빠에 대한 불평은 거의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는 시간은, 내가 두 사람과 만나는 시간보다도 짧았기 때문에.

-너네 할머니는 대체 왜 그럴까. 엄마 회의 중이라는데도 계속 전화를 하질 않나, 이상한 문자를 보내질 않나….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 다시 연락할 텐데 말이야.

나는 좀 더 밝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불평할 거리라면 나도 많았다. 하지만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지친 엄마가 힘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좋았던 일만 말했다. 맛있는 걸 먹었던 이야기, 학교에서 상장을 받은 이야기 같은 것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내게,

-엄만 정말 네가 부러워. 나도 네 나이 때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고 혼자 사는 게 낫겠어.

라고 이야기하고 다시 불평을 이어 갔다.

어쩌면, 엄마도 조금만 일이 덜 바빴더라면 자주 웃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가족끼리 모일 시간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아빠가 조금만 더 엄마에게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혹은 할머니가 조금만 더 엄마를 덜 괴롭혔더라면.

…아니, 사실은.

내가 없었더라면 엄마는 자주 웃었을지도 모른다.

-합의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네가 들어선 걸 알고는 그만뒀었지. 차라리 그때 이혼해 버렸어야 했던 건데.

나는… 그런 엄마를 어떻게든 위로하려고 했지만, 어린애인 나한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저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

내가 조금 더 뭔가를 할 수 있었더라면 엄마는….

내게 템버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었었을까?

그런 생각에 한참이나 멍하니,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엔프리제가 탁자에 앉았다.

왔다! 게임이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반기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대공님.”

“…좋은 아침입니다.”

“침구 바꿔 주신 덕에 어제는 침대에서 잘 잤어요.”

“그렇습니까.”

관심 없는 듯 대답하지만, 입가가 조금 부드럽게 휜다. 참 알기 힘든 남자네.

“이건 뭐예요?”

눈에 익숙한 게임판을 집어 들었다. 딱 봐도 오셀로인데 돌 색이 하양 검정이 아니라 빨강 파랑이다. 뭐, 이 정도야 달라도 괜찮겠지.

“리버시라는 겁니다. 해 보시겠습니까?”

“네!”

게임 방법만 비슷하면, 게임 자체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모바일 오셀로 1432전 1003승의 전적이 있는 만큼!

들떠서 안절부절못하는 날 보며 엔프리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게임,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아뇨, 처음 보는걸요. 대공님이 가르쳐 주시는 거 아니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엔프리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릇 거짓말을 할 때는 눈을 피하면 안 되는 법.

싱글싱글 웃자 엔프리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빤히 바라보면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왜 자꾸 의심은 하는 걸까. 하긴, 저것도 일종의 몸에 밴 습관 같은 거겠지.

“빨간 돌부터 시작합니다. 게임판 중 원하는 곳에 돌을 놓으면 되는데, 네 개의 귀퉁이에는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거길 선점해 버리면 거의 필승이잖아.

“빨간 돌을 놓은 후 파란 돌은 처음 놓인 돌의 상하좌우, 그리고 대각선 중 한 곳에만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어라,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하면 빨간 돌이 무조건 이기는 거 아닌가? 첫 돌을 놓고, 그다음에 놓이는 파란 돌을 뒤집어 버리면 끝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엔프리제의 입가에, 문득 웃음이 스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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