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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3화 (13/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3)

“네?”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엔프리제를 높게 평가한 적이 있나? 있는 그대로 말한 적은 많지만, 딱히 과장되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는데.

“저는, ‘황가의 피를…’, 아니, 그렇군요. 지금의 당신은 그런 기억조차 다 잊었다고 하셨었죠.”

그렇게 말하는 엔프리제의 얼굴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미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건 솔직히 가슴이 아팠다. 역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만큼 감정이입 시키는 힘이 장난 아니다.

게다가 왜 그러는지 이해도 가고.

나는 모르는, 이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샤페릴에게는 별 것 아니고 엔프리제에게는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정도로 중요한 어떤 일.

언제나 연인이 되는 두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는 모른다.

이토록 완벽한 남자가 왜 샤페릴을 납치하고 감금해야만 했는지, 왜 이토록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지도. 책 리뷰에서 후반부를 본 사람들이 엔프리제를 욕하면서도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스포가 될까 봐 읽진 않았었다. 다만….

이 엔프리제가, 이런 일을 벌일 정도의 계기. 그게 내 안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일까.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을 그 일이.

“흠. 그거 아세요? 대공님, 엄청 잘생겼어요.”

“…네?”

뜬금없는 말에 엔프리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늘진 미남의 얼굴에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예쁘기로 따지면 이 한심해 보이는 얼굴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눈엔 이 표정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보다는.

“목소리도 엄청 좋아요. 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하던가요? 마치 초콜릿 같아요. 입이 좀 험하긴 하지만, 잘 챙겨 주시고 제가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고 노력해 주시잖아요.”

“갑자기 무슨….”

“그런 행동이나 몸가짐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요.”

살짝 손을 들어 올리자 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엔프리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런 대공님이 하시는 거니까, 여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눈앞에서 일부러 사슬을 흔들어 보였다.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닿기를 바라며.

동시에 처음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를 이용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내 행동에.

“언젠가 말해 주실 거잖아요. 왜 이렇게 해야만 했는지.”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엔프리제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요.”

응? 무슨 말이지?

“전 이번에도 그런 당신에게….”

뒤에 이어지는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되묻기도 전에 그는 날 등지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였지? 그건… 기분 탓인가?”

스쳐 지나가며 본 그의 입가가,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휘어져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 *

“레이디 리베테는 좀 어떠십니까.”

그녀의 방에 가져갔던 시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엔프리제가 고개를 들었다. 싱그러운 녹색의 머리카락과 연두색 눈동자의 미청년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은 듯 보입니다. 아직까지 전조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억상실이 왔을 정도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그분의 체질은 감정 기본에 따라 증상의 정도가 바뀌니까요. 혹시라도 미열 증상이 보이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약의 용법도 중요했지만, 용량은 더 중요했다. 원료가 되는 약초는 본래 ‘독초’로 통하는 것이었으니까.

뭐, 그녀의 특이 체질에는 더없이 좋은 약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사용하는 양이 더없이 중요했다. 뭐든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건 맞지만, 디뉴이라는 독초는 즙 한 방울로 생사가 갈리기도 했으니까.

“…혹시 그대가 괜찮다면 한 번 저택에 와 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이야기했었다. 약의 위험성과, 그렇기에 환자의 상태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약의 용량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지만 엔프리제는 언제나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청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대공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이는 거의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다. 제 막냇동생, 주치의, 그리고 어릴 때 곁에 있어 주었던 유모뿐. 일면식도 없던 청년이 약 제조를 맡게 된 것도 전 제3 황자이자 현 왕제인 엘마레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저택에 와 달라고 스스로 말을 꺼내다니. 쉬이 믿기가 힘들었다.

“…저도 이제 그녀를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상실이 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밝고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지만 그게 연기라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대가 진찰해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엔프리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심 많고 타인을 믿지 않는 엔프리제는 그녀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상식도 지식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이야기하지만, 가끔 무언가가 거슬릴 때가 있었다. 마치 손톱에 거스러미가 일어나 계속 걸리는 것처럼.

샤페릴이 그를 방심시키고 도망치려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엔프리제에게 그런 말을 진심으로 했을 리 없지 않냐고 비웃으며.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엔프리제는 거짓이 아닐 거라 주장한다. 아니, 그녀를 믿고 싶어 한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녀의 본질은 여전히 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날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엔프리제는, 태어났을 때부터 선황과는 지나칠 정도로 용모가 달랐다.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의 색도 모두 어머니인 선황후에게서 물려받았다. 생김새조차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리고 성장하면 할수록 선황과는 멀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황제가 억지로 혼인을 밀어붙이기 전, 사랑하는 이가 있었던 선황후가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낳은 첫 아이. 그러나 황제를 전혀 닮지 않은.

엔프리제의 존재는 권태로운 사교계에 좋은 가십거리가 되어 주었다.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퍼지기 시작했을까. 당사자인 엔프리제가 모르는 사이, 그는 ‘황가의 피를 도둑질한 더러운 놈’으로 불리고 있었다.

심지어 아버지인 선황에게조차.

엔프리제는 황후의 장자로 틀림없는 적장자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를 똑 닮은 제2 황자 바르카와 제3 황자인 엘마레가 태어났을 때 주위의 수군거림은 더 커졌다.

왜 엔프리제만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던 걸까. 다른 두 황자는 황제의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황제와 똑 닮았는데.

황후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의식한 듯 엔프리제가 황제의 아이라 말했다. 전 연인과의 부정은 없었다고. 황제 역시 엔프리제가 자신의 아이라고 말했다. 설령 뒤에서는 황후의 부정을 의심했어도.

엔프리제는 적장자로 태어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껍데기뿐인 황자가 되었다.

-네 스스로 물러나거라.

-아버지….

-짐과 전혀 닮지 않은 얼굴로, 짐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 거라. 구역질이 나니까.

스스로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선황은 그런 엔프리제의 의사를 존중하는 척하며 대공의 자리를 내려 주었다. 호화로운 저택과 많은 시녀, 시종도 내려 주었다. 평생 낭비하며 살아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재물과 비옥한 영지도 내려 주었다.

하지만 왜일까. 엔프리제에게는 그 모든 것이 족쇄로 느껴졌다.

앞으로 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영지 안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의미로 채워 준 황금의 족쇄.

황제와 엔프리제의 연극은 귀족들의 눈을 가리지 못했다. 그들은 엔프리제가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쫓겨난 거라며 수군거렸다. 그 수군거림은 매 연회마다 따라다녔다.

대공의 신분이기에 황가에서 하는 연회에는 빠질 수 없었던 엔프리제는, 늘 구경거리가 되곤 했다. 대놓고 이런저런 추론을 수군거리며 그를 능멸하면서도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엔프리제는, 누군가와 연을 맺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스러져 가겠지. 그 누구와도 연을 맺지 못하고 홀로 죽어 가겠지. 황가의 피를 도둑질한 더러운 도둑놈에게 다가와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샤페릴만은 달랐다. 그녀는 엔프리제의 평판이나 소문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걸어 준 첫 사람이었다. 편견도 혐오도 없이 웃어 준 첫 사람이었다. 그에게 먼저 다가와 준 첫 사람이었다.

그녀는… 엔프리제가 연을 맺고 싶다고 생각한 첫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가까이 오지 마세요!

-당신이, 당신이 부모님을…!

-제 부모님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왜 당신은 절 데리고 온 거예요? 대체 왜!

그런 그녀가 내뱉는 비난의 말은… 비수보다도 아팠다. 그래서 샤페릴이 기억상실이라는 진단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염치도 없이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한 번 편견 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주길 바랐다.

그리고 정말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샤페릴은 껍데기만 남은 그에게 ‘부탁’을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엔프리제가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를 칭찬했다. 그가 비관했고 싫어하며 스스로를 깎아 내렸던 그 모든 것을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금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이 다 거짓이라면…, 이 가슴 속에 충만한 감정 역시 모두 거짓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진실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 아니, 거짓을 믿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 깊은 곳까지 잠식한 의심은 좀체 사라져 주질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이 불쾌한 의문의 답을 확실하게 찾아내고 싶습니다.”

금색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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