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2)
“…무슨 부탁입니까.”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이라서, 일까. 엔프리제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손… 놔주시면 안 될까요? 목이랑 등이 너무 당겨요.”
물론 엔프리제도 노력하긴 했다.
최대한 키도 큰 남자가 상체를 쭉 내밀어 최대한 숙였고, 한쪽 무릎은 거의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몸을 뻗었다. 그런데도 모자랐다.
그 모자란 간격은 안타깝게도 내 몸이 부담해야만 했다.
엔프리제가 너무 노력한 탓에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느낌으로 애매하게 엉덩이가 떴다. 이러다가 분위기 깰까 봐 대신 등을 쭉 폈다. 그리고 턱을 최대한 위로 들어 올렸다. 샤페릴도 키가 큰 편이라 다행히 어찌어찌 모자란 간격을 메우긴 했는데….
이 자세를 오래 유지하니까 등이랑 목이 너무 아프다.
“아.”
엔프리제가 불에라도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아니, 뭐야? 일부러 한 게 아니라고?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요망한 행동을…! 위험한 남자일세. 전 애인이 한 열댓 명쯤 있는 거 아닐까.
으음, 아닌데. 분명 키워드에 동정남이 있었는데.
“…….”
뭔가 말하려는 듯 열렸던 입술이 그대로 닫혔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또 얄미운 소리를 하려고 했던 걸까. 뭐,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다. 당장 등과 목이 편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보통 저런 캐릭터들이 솔직해지면, 그 사람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저 남자라도 19금적인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빙의물인 만큼 언제 원작이 비틀릴지 모르니 긴장해야겠지.
후, 솔직히 활자로는 경험이 풍부하지만 실제로는…, 그, 그렇다 보니 좀….
게다가 원작에서 샤페릴이 이 남자 거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로판 남주답게 무지하게 크다고 했지. 대놓고 크기 묘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19금 로판들 생각해 보면 뭐….
인간이 받아들일 크기는 아니겠지, 절대로.
…으으.
“감사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엔프리제의 눈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가 허공을 헤엄치는 걸 보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구나?
“책 읽어 주는 거 말이에요.”
“아.”
저런, 진짜로 잊었을 줄이야. 의외로 허당인 면모가 있다.
하긴, 남자든 여주든 너무 완벽한 건 또 매력이 반감된다. 뭔가 어설프고 못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 매력 터지는 법. 근데 얜 이미 허점이 많은데, 더 있으면 그냥 개그 캐릭터 되는 거 아닌가.
“…정말로 제가 해 주길 바라십니까?”
“네.”
생각 없이 대답해 놓고 보니 질문이 좀 묘하다. 누가 19금 소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무엇’을 빼고 말하는 거 봐.
하긴 이런 건 오히려 15금 소설이 더 심하지. 일부러 독자들에게 해석의 여유를 주려고 그러는 건지 섹텐 터지는 글을 만들려고 그러는 건지 ‘무엇’을 빼고 말하는 경우가 꽤 많다. 심지어 소개글에서도 그런 짓을 해서 사람을 낚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으으…, 완전 야시시한 글인 줄 알고 두근거리면서 봤다가 배신당한 게 몇 번이더라. 생각하니 또 화나네.
“…….”
또 생각에 빠진 건지 엔프리제가 소파에 앉아 제 무릎을 손끝으로 두드린다. 저게 버릇인 걸까?
손가락이 길게 쭉 뻗은 게 피아노나 키보드 치면 잘 치겠다. 컴퓨터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 키보드 치는 건 못 보겠지만, 피아노 치는 건 볼 수 있을지도….
보통 남주들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줄 알던데. 아, 아니면 바이올린도 어울릴 것 같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정말로 대공님께서 책을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목소리가 예쁘니까 글도 더 예쁘게 들릴 것 같아요.”
“…그런 입에 발린 말은….”
“아, 그런 거 아니에요. 평소에 많이 듣지 않았어요? 목소리 멋있다고.”
아, 지금 건 좀 노리고 칭찬한 게 맞긴 한데…. 역시나 귓바퀴가 빨개졌다.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
귀엽다니까.
“제 목소리가… 좋습니까?”
“네. 동굴 목소리라고 하나요? 낮게 울리는데도 기분 좋을 정도로 부드럽잖아요. 시집 같은 거 낭송하면 엄청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오오, 점점 더 빨개진다.
피부가 남자치곤 흰 편이라 그런가 엄청 티가 난다. 집착쩌는 미친놈 타입의 남주들은 보통 표정 관리 잘하던데. 엔프리제가 좀 특별한 건가?
그래서 더 좋긴 하다. 속을 알 수 없는 것보다 저렇게 드러내 주는 게 더 알기 쉬우니까.
“되도록…. 음, 아니지. 역시 저는 대공님이 읽어 주시면 좋겠어요. 대공님이 괜찮으시다면요.”
진심이었다. 그 마음을 강하게 담아 이야기하자, 엔프리제는 조금 더 망설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안 되는 거려나.
탁자 위의 책을 집어 든 그가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내일 이 시간에 시집을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엔프리제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분명 희어야 할 목덜미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 * *
“햇빛을 피해 핀 꽃 한 송이가 잔뜩 웅크린 것은, 행여 제 몸이 보일까 두려워함일지라. 나는 그 한 송이 꽃을 발견한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나른한 오후.
이틀 연속으로 고기 요리 메들리가 나오더니, 오늘은 생선 요리가 나왔다. 내가 직접 요리할 때는 고기보다 생선이 더 꼴 보기 싫었는데….
그도 그럴 게 마트에서 파는, 깔끔하게 손질된 생선은 몇백 원이나마 더 값이 나간다. 손질되지 않은 게 더 싸고 싱싱한 경우가 많다.
생활비가 많이 나오면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고, 동생이 게임에 들이는 돈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아껴야만 했다. 그래서 통생선을 사서 내장 같은 걸 직접 손질했지만….
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하지만 역시나 남이 해 준 음식은 다르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많이 봐 놓고도 다 구워진 생선구이의 향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내가 요리할 땐 한 20여 분 넘게 연기를 맞아 가며 해서 그런가 냄새도 맡기 싫었는데.
덕분에 내 손바닥보다도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뼈만 남기고 순삭했다. 거기에 쌀이 들어간 채소 스튜도 한 그릇을 비워 버렸다. 일부러 남겨 둔 빵으로 스튜를 닦아 마무리하고 연유가 뿌려진 딸기까지 먹었더니 배가 터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식곤증 때문에 노곤노곤해져서 반쯤 잠든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엔프리제가 왔다.
-…….
그는 방에 들어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쑥스러운 건지, 언제 시작하면 좋을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 건지.
이대로 두면 내가 잠드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 ‘시집 읽어 주시려구요?’라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솔직히 말하면 커튼이 쳐져 있는 게 더 좋아서 일부러 안 걷었는데. 천성이 아싸에 어둠의 자식이라서 그런가 빛 아래보다는 어둠 속이 더 편했다. 게다가 예전에 햇빛 아래에서….
흠.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엔프리제는 빠른 걸음으로 탁자에 다가와 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속 세계니 결국 만들어 낸 건 한국인 작가. 혹여 내가 아는 시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것까지 작가가 다 설정한 건 아니겠지, 설마.
어쨌건, 엔프리제의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가 썩 나쁘지 않아 집중해서 들으려는데 이번엔 따스한 햇살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졸린데 햇살의 온기가 몸을 덥히고,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시구를 속삭인다. 이런 상황에서 눈꺼풀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눈을 감은 채 시를 음미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의 기억이 중간중간 끊어져 있다. 아마 잤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신이 든 후에도 엔프리제는 계속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 앉아서 존 걸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집중해서 듣고 있었던 것처럼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 가득 찬 밭 안에서 나는 붉은 것을 찾아내었다. 그 불길하고 흉흉한 것을 뽑아내려 했으나 이미 내 손에도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놀라 몸을 일으키자 내 가슴께에 붉은 점이 보였다. 아아,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황금 물결 가득하던 밀밭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웃음 지었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엔프리제가 보였다.
햇빛을 받아 더 어둡게 느껴지는 흑발. 살짝 일그러진 눈썹과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금색 눈동자. 햇빛을 받아 그림자 일렁이는 콧대와 색 엷은 입술.
햇빛을 등지고 있는 그는, 말 그대로 자체발광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눈이 부셔서 살짝 눈가를 일그러뜨리자 그림자 속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순간 그가 탁, 하고 책장을 닫았다.
“내일은 어떤 책을 읽어 드릴까요.”
“내일은…, 음.”
엔프리제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이야기라. 시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진짜로 글씨를 좀 배우는 게 나으려나. 이러다가 시집만 읽게 될 것 같다. 시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도 좀 읽고 싶은데.
엔프리제에게 읽어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그, 다양한 인물의 연기를 하는 엔프리제의 모습이 잘 연상되질 않는다.
엄청 쑥스러워할 것 같은데.
“대공님.”
“네.”
“글자, 배우기 어렵죠?”
솔직히 말하면 엄두가 나질 않는다. 저게 글씨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나름대로 학원 한 번 안 가고 독학과 교육 방송만으로 인서울까지 했는데….
배우는 데 한 오 년 걸리고 그런 건 아니겠지?
“저는 다섯 살 때 읽고 쓰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건 네가 지나치게 똑똑해서 그런 거 아닐까? 주인공 버프와 작가의 편애로.
“아이들은 원래 더 습득이 빠르잖아요. 그리고 대공님은 공부도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괜히 남주들이 세계관 최강자, 세계관 최고 미남이 아니다. 다섯 살 때 저 지렁이를 완벽하게 읽고 쓸 수 있었다니 천재라고밖에 볼 수 없겠지.
…아, 차라리 내가 한글을 가르치는 게 빠르지 않을까? 근데 그러면 기억상실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잖아.
끄응.
“…당신은 왜 저를 그리 높게 평가하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엔프리제에게 자연스럽게 한글을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내 귀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