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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1화 (11/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

망했다.

왜 다른 건 다 한국식이면서 글자만 꼬부랑 글자인 걸까. 황제 감금이라는 것 외엔 아무런 특혜도 없다니, 해도 너무하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어차피 말도 한국어가 아닌데 통하면서! 글도 그래 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이럴 거면 말도 안 통해야 맞는 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답답해서 안 되겠다. 말이라도 통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하자, 응.

“왜 그러십니까?”

“으으, 글씨를 못 읽겠어요.”

엔프리제가 조금 놀란 듯 나와 책을 번갈아 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서랍장 위에 있던 종이와 깃펜을 가져왔다.

오오, 내 눈으로 이걸 직접 보는 날이 올 줄은.

한국에서 가끔 깃펜을 파는 걸 보긴 했지만, 그건 끝부분이 만년필처럼 생겼었다. 오히려 만년필에 깃털을 붙여 놓았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건 진짜로 깃털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게 정말 펜으로 기능하는 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깃펜을 바라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대편 소파에 앉은 엔프리제가 진지한 얼굴로 잉크를 콕 찍었다. 새하얀 깃펜 끝이 까맣게 물든 게 은근히 예쁘다. 저 펜 써 보고 싶어서라도 글자를 배워야겠는데.

엔프리제는 잠시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더니 내 앞에 들이밀었다.

“이것도 못 읽으시겠습니까?”

으음. 아, 알겠다.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다.

…하.

“네.”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걸로밖엔 안 보인다. 따지자면 아랍 쪽 글자나 알파벳 필기체랑 닮은 것도 같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내게도 글자체가 유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남주 버프 대단하네.

“…….”

잠시 고민하던 엔프리제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 손의 움직임이 보기 좋다. 커다란 손에 가끔 핏줄 같은 것이 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이래서 여자들이 손 큰 거에 열광하는 걸까.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거침없이 펜을 움직였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약간 머뭇거리며 글자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글자가 끊어지는 곳이 어딘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 쓴 건지 펜을 놓은 엔프리제는 종이를 든 채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읽으실 수 있겠습니까?”

못 읽는다니까.

못 읽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까.

그럼 여기엔 대체 뭘 적어 놓은 거지.

으음, 그동안의 로판 독자 경력을 살려 예상해 보자. 한참 망설인 거 보면 샤페릴이 읽으면 감정적으로 큰 반응을 보일 만한 내용 아닐까?

고백이라거나, 고백이라거나, 고백이라거나….

아, 내 뇌는 글렀다. 고백밖에 생각이 안 난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런데 대공님.”

“네.”

“글씨가 엄청 예쁘네요. 뭔가 유려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아, 또 빨개진다. 귓바퀴가.

이 남자는 의외로 칭찬에 약한가 보다. 커다란 제국의 대공이면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 아닌가? 입에 발린 칭찬은 질리도록 들었을 텐데.

아, 아니면 그건가? 진심으로 날 칭찬한 건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는 칭찬이라 각별한 걸지도 모른다.

“글자도 읽지 못하는데 책은 왜 달라고 하신 겁니까.”

쑥스러웠는지 또 톡 쏘는 말투로 말을 한다. 그러면서 고개도 홱 돌려 버린다.

이 남자, 알면서 저러는 걸까? 고개를 돌린 탓에 빨개진 귓바퀴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거.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귀여워 죽겠다. 남주는 원래 멋있는 존재 아닌가? 심지어 미친놈 캐릭터에 집착남이잖아. 왜 이렇게 귀여운 건데?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쏘아붙이려던 엔프리제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입가를 싸쥔 게 또 뭔가가 벅차오르나 보다.

알지, 알지. 샤페릴이 좀 예뻐야지. 얼굴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막 설레고 그럴 만도 하지. 솔직히 나도 오늘, 그와 아침 식사를 끝낸 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샤페릴이 웃으면서 호의적으로 구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었네요. 전혀 못 읽겠어요.”

“…하.”

엔프리제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폭 한숨을 쉬더니 톡톡, 제 무릎을 두드렸다.

뭘 고민하는 거지? 혹시 글자 가르쳐 주려고 고민하는 걸까?

근데 솔직히 말해서 저 글자를 읽을 자신이 없다. 영어도 포기한 내가 저 지렁이 같은 글씨를 어떻게 배워. 설령 배운다고 해도 엄청 오래 걸릴 텐데…, 그동안은 계속 공부만 해야 된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멍 때리고만 있는 건 확실히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림 그리는 덴 취미가 없고 한국어로 뭔가를 쓰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고.

음….

응?

“대공님.”

“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붙여 주시면 안 될까요?”

하, 내가 생각해 낸 것치곤 너무 천재적인 발상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소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어 주는 하녀인가 시종인가. 여튼 솔직히 책을 꼭 내가 읽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글자 아는 사람이 읽어 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왜 엔프리제의 얼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으로 일그러지는 것일까.

“안 됩니다.”

“아…, 왜요?”

“그를 이용해 무엇을 하실 줄 알고 사람을 붙여 드린단 말입니까.”

책 읽게 하려는 건데요. 그 외에 뭘 한다는 거죠.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생각을 가득 담아 엔프리제를 보았다. 하지만 이 순수한 눈빛을 뭐 어떻게 오해한 것인지, 엔프리제가 일어나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내 턱을 쥐었다.

와, 이거 그거잖아. 남주들이 맨날 하는 거. 그 여주 턱 끌어 올려서 얼굴 가까이 대고 색기 어필하는 그거.

글로만 보던 걸 당했다는 생각에 두근두근한 가슴을 애써 가라앉혔다. 얌전히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자 그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하, 가까운 곳에서 봐도 굴욕 없는 미모 같으니. 샤페릴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주인공인 애들은 이유가 있다니까.

“밖으로 도움을 요청하시려 해도 무의미합니다. 이 저택에는 저와 당신, 그리고 템버 외엔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 그럼 템버 혼자서 청소, 빨래, 요리에 내 옷까지 만들고 있는 거야? 힘들겠다.

“어…, 도움을 요청해요? 왜요?”

음….

아, 도망치려고? 도움을 청한다고?

내 사전에 도망이라든가 탈출이라는 글자를 지워 버렸더니, 순간 떠올리질 못했네. 는 개뿔. 생각도 못 했다.

그걸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

엔프리제는 입을 다문 채 금색 눈동자로 뚫어지게 나를 바라본다. 내 눈에서 진의를 읽어 내려는 것처럼.

…그렇게 쳐다보면 나도 일단은 여자라 설레는데.

흠흠.

“지겨우실 테지만, 안 믿으시는 것 같으니 다시 말할게요. 제가 어디에 도움을 청하겠어요? 제 이름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애초에 밖에 도움을 청해 봤자 리베테 백작가는 이미 망했잖아.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얘도 알면서 왜 그런 걸 걱정하는 거지?

아, 하긴. 샤페릴은 아직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모르지. 습격당하는 것만 보고 정신을 잃었으니까. 그래도 도착할 수 없는 편지라는 건 같고, 엔프리제는 그 저택에서 샤페릴을 납치해 왔으니 이미 백작 부부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으음, 하긴 별게 다 걱정스러울 만하지. 납치 감금이라는 범죄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내 안정적인 감금 생활을 위해서 그의 불안을 덜어 줄 필요가 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말로 아무리 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고.

템버한테 부탁한다고 할까? 하지만 여기, 대공가잖아. 집안일만 해도 혼자서 하기엔 벅찰 텐데 그런 것까지 부탁하긴 좀 그런데.

으음….

음….

아! 그러면 되겠네.

“그럼 대공님이 읽어 주시면 되겠네요.”

“…뭐…, 라고요?”

당혹스러운 듯 엔프리제가 살짝 입을 벌린 채 날 보았다.

턱을 잡은 힘도 약해져서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떼어 내면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한다고 확신할 것 같아서.

“제가 사람을 써서 밖에 연락을 할까 봐 걱정되신다면서요. 그러면 대공님이 읽어 주시면 제 감시도 하고, 일석이조 아니에요?”

크, 나치곤 좋은 생각이었다.

나야 엔프리제가 읽어 주면 마냥 좋다. 저 목소리로 시집 같은 거 들으면 ASMR 느낌도 날 것 같고, 워낙 미모가 뛰어나서 보기에도 좋으니 두 배로 행복할 것 같다. 근데 글에는 좀 집중이 안 될지도….

문제는, 대공이면 이 남자 바쁘지 않나? 나한테 붙어 있을 시간이 있을까.

원작에서는 어땠더라. 샤페릴 시점에서 서술되어서, 엔프리제가 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질 않았었다. 샤페릴이 탈출을 위해서 뭔가를 꼬물꼬물하면 이 남자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방해한 것만 기억난다.

그러다가 탈출 성공하면, 저택 밖으로 나간 샤페릴을 잡아 와서 씬으로 돌입…, 흠, 흠흠.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생각은 아니지. 심지어 원래는 겉표지가 디자인 표지라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젠 두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더 리얼하게 상상하게 된다. 이러다가 얼굴이라도 빨개지면 엔프리제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그만두자.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엔프리제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눈으로 날 보았다. 스스로 탈출에 불리한 제안을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는 거겠지.

아, 이래서 남주들이 뭐만 하면 얼굴을 들이대는 거였구나.

원래도 감정을 읽기 어렵지 않은 남자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더 확연하게 보인다. 물결치는 것처럼 정처 없이 혼란으로 흔들리는 금색 눈동자가. 심지어 잔떨림까지도.

나, 취향이 좀 이상한가? 이 남자의 마음이 나로 인해 흔들리는 게 은근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 좀 기쁜 것 같기도 하다.

그야, 이렇게 예쁜데 싫을 수가 없지. 한 삼십 분쯤 더 들여다보고 있으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슬슬 한계다.

“근데 대공님,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더 해도 될까요?”

금색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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