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
으음.
눈두덩이 살짝 부어서 뜨겁다. 뭔가 졸릴 때 눈꺼풀이 무거운 감각과도 닮았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스륵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잘 것 같은데.
자면 안 되는데….
“음,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이 방에 갇혀 있는 게 유일한 내 업무다. 조금 있다가 있을 저녁 시간까지 어떻게 시간을 때우냐가 매우 중요한 상황.
게다가 점심 먹고 익숙지 않은 중노동을 해서 지쳤다. 거기에 울기까지 했고. 이럴 때야말로 낮잠을 자야 할 타이밍인 게 아닐까?
“으음….”
낮잠을 자도 된다. 아니, 오히려 자는 게 더 낫다!
라는 결론을 내기가 무섭게 청개구리처럼 잠이 깼다. 그러나 눈꺼풀은 여전히 무겁다. 뭐, 꼭 잘 필요도 없으니 이대로 누워 있도록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
근데 아무 말도 없다. 왜지?
템버라면 조금 전에 주스를 놓고 나갔기 때문에 올 일이 없다. 애초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들어오겠다며 말을 건다. 템버 외에는 올 사람이….
아, 엔프리제인가?
눈을 떠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겁다. 풀 같은 걸로 딱 붙여 버린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눈곱이랑 눈물이 섞여서…?
아니, 그만두자. 나의 샤페릴이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그냥 샤페릴이 너무 연약하다 보니 눈꺼풀을 이길 힘이 없는 것뿐이다. 그런 걸로 치자.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 잔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뭐지? 엔프리제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
툭, 하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꽤 묵직한 느낌이다.
아. 뭔가 주러 온 건가? 그럼 이제 나가겠지? 라는 희망을 품어 봤으나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소설에서 보면 보통 이럴 때, 뭔가… 그….
야시시한 전개가 되던데. 몰래 뽀뽀를 한다거나 몸을 만진다거나.
아니, 잘 생각해 보자. 엔프리제가 샤페릴한테 엄한 짓을 한 건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왔을 때뿐이었다. 얌전히 방에만 박혀 있었던 내게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할 수 없지만….
그건 들어온 사람이 엔프리제였을 때의 이야기고, 다른 사람이면 혹시 또 모르잖아!
지금이라도 눈을 뜰까? 하지만 괜히 눈을 떴다가 들어온 사람을 자극하면 어떻게 하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일부러라도 범인의 얼굴을 보지 말라던데. 그래야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고….
으으, 그치만 대공의 저택에 그리 쉽게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을까? 역시 이건 엔프리제인 거 아닐까?
어쩌지,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후.”
낮은 한숨 소리.
아직 많이 들어 본 건 아니지만 귓가에 남는 소리였다. 엔프리제가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의 안식이 찾아왔다.
얘는 왜 말없이 들어와선 사람 식겁하게 만들어? 깨우든가! 아니면 나가든가!
내가 아는 소설 속 엔프리제는, 뭐랄까. 성격 더럽고 표정 변화 없고 말로 천 냥 빚을 질 것 같은 재수 없는 놈이었다.
플러스 집착이랑 소유욕이 쩌는 미친놈.
하지만 막상 겪어 본 그는 인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조금 행동을 읽기가 어렵다. 즉 원작에서의 인상과는 꽤 많이 다르다.
…아니, 잠깐. 이거 되게 안 좋은 전개 아닌가?
빙의물의 경우 스토리 라인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여주가 목적을 위해 원작의 스토리를 바꿔서 주변의 반응까지도 바꿔 버리는 경우. 혹은 여주가 목적을 위해 원작 그대로 전개되도록 충실하게 따르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꼬여서 원작의 전개에서 벗어나는 경우.
…아니, 잠깐. 생각해 보면 빙의물은 원작에서 벗어나는 게 대부분이잖아?
설마 내가 호의적으로 구는 걸 오해해서 엔프리제의 반응이 바뀌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자기한테 남자로서 호감을 느꼈다고 생각해서 막 들이대는 건 아니겠지?
너 그렇게 막 경박하고 가벼운 놈 아니지? 그렇지?
“…하.”
어, 어라. 뭔가 이상하다.
한숨을 두 번이나 쉰다고?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제 말씀하신 책, 가져왔습니다.”
…쟤, 지금 자는 사람한테 말 거는 거야? 아니면 안 자는 걸 눈치챈 거야?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 살며시 실눈을 떴다. 그러자 차가운 표정으로 날 내려보고 있는 엔프리제가 보였다.
떠보는 걸까?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안 자는 거 알고 있었나?
설마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
“실눈 뜬 거 다 보입니다.”
“…에, 에헤헤헤. 안녕하세요, 대공님.”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겨우 눈이 떠졌다. 혹시 눈곱이면 쪽팔리니까 일단 닦자.
슥슥 눈을 비빈 후 다시 위를 보자, 엔프리제는 아까 그 자세 그 표정 그대로 날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저 안 자는 거.”
“들어올 때부터 숨소리가 안 들렸으니까요.”
…아, 그래서 어릴 때도 매번 걸렸었구나.
이게 버릇이 이상하게 들어서 그렇다. 자는 척할 때 이불 덮어쓰고 숨죽인 채 할머니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
어렸을 때는 철이 없어서 집안일 하기 싫다고 꾀병을 부리거나 자는 척을 할 때가 있었다. 저렇게 숨죽인 채 할머니가 욕설을 뱉곤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었지.
처음 몇 번은 그냥 넘어가 주더니 나중에는 이불 위를 발로 차면서 깨우는 바람에 결국 자는 척을 포기했었다. 드물게 진짜로 잠들었을 땐 그냥 두긴 했다. 그것도 한 시간이 넘어가면 바로 깨웠지만.
내가 잠들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나 했는데 숨소리로 알아챈 거였구나. 하긴 나도 바깥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작게 숨을 쉬었으니까 기척 같은 데에 예민한 엔프리제는 더 그렇겠지.
“사실 눈이 좀 부어서요.”
“그래 보입니다.”
…아니, 이럴 땐 모르는 척해 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아니면 눈가가 빨개서 귀엽다고 해 주든지.
하긴 이 집착남이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그런 예의나 센스가 있었으면 애초에 샤페릴을 감금하지도 않았을 거다. 꼬셨지.
“…그렇게 하셔도 풀어 드릴 생각 없습니다. 괜한 헛고생을 하시는군요.”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 의심한다고…?!
하긴. 이것도 남주의 소양이긴 하다. 원래 남주란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여주를 몰아붙여 사건을 만드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여주가 숨 쉬는 것까지 의심하던 남주가 처음으로 여주를 온전히 믿고,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넘어갔을 때의 귀여움과 가슴 벅참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사건 전개를 위해서, 하필 그 타이밍에 여주가 남주를 배신하고 속일 때가 많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남주를 위해 배신해야만 하는 그 배덕감! 혹여 들통나지 않을까 긴장되는 마음에 계속되는 가슴의 두근거림! 속았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이미 한 번 여주에게 연 마음을 닫지 못하는 남주의 고뇌!
크으으!
“그런 표정 지으셔도 안 됩니다.”
“…응? 무슨 표정요?”
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려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걸로 표정이 느껴질 리 만무했다. 철그렁거리는 사슬의 소리만 거슬렸을 뿐.
엔프리제는 어딘지 복잡한 얼굴로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음.
“도망칠 생각이면 대공님한테 족쇄를 가볍게 해 달라든가 책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죠. 게다가 저 아직 드레스 입어 보지도 못한걸요.”
그를 안심시키려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를 꺼냈다. 하지만 우리의 엔프리제는 역시나 차가운 말투로 단언했다.
“그건 모를 일이죠. 이런저런 요구를 하며 탈출하지 않을 것처럼 절 방심시킨 후 일을 도모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걸 대놓고 나한테 말한다고…?
으음, 뭐, 나도 대놓고 이야기했으니 차라리 이게 나은가? 괜히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는 건 서투르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나한테는 이런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엔프리제의 말은 뭐,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꼬아 들으려면 뭐든 꼴 수 있는 거 아닐까. 애초에 엔프리제는 너무 꼬였다. 난 별 의도 없이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듣고. 그건 내가 어찌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니… 앞으로 꾸준히 행동으로 보여 주며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왜 그런 짓을 해요? 돈 아깝게!”
샤페릴이라면 모르지만, 평범한 소시민인 나에게 그런 돈 낭비는 스트레스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물론 20대까지만 해도 드라마를 보며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를 꿈꿔 본 적도 있긴 하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내가 그걸 사용할 거라는 가정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한 번 입어 보지도 못한 드레스와 읽어 보지도 못한 책을 날리다니….게다가 드레스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거잖아? 내 맞춤이란 말이야!
맞춤옷을 입어 보는 건 교복 이후로 처음인데!
“…….”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자, 믿는 건지 의심하는 건지 엔프리제는 대답을 잇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 믿고 안 믿고는 엔프리제가 정할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안절부절못하며 스트레스 받아 봤자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흠.”
책, 읽을 수 있으려나.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단어 외우는 거랑 발음이 너무 어려워 영포자가 된 내가 이 세계의 말이라고 쉽게 배울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이 천국에서 공부라니, 그런 귀찮은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기억 특전이 없으니까 제발 글자 특전이라도 주세요. 그래야 이 감금 생활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
나는 절망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