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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9화 (9/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

오랫동안 집안 살림을 억지로 도맡아야 했던 사람에게,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마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만든 음식.’이라고.

나 같은 경우 손이 느려서 음식 냄새를 오래 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면 입맛이 뚝 떨어진다.

게다가 재료를 손질할 때의 물컹거리거나 미끈거리는 감촉이라든가 썩은 부분을 잘라 낼 때의 그 코가 매워지는 냄새라든가. 입맛이 뚝 떨어지는 요소는 요리 과정 곳곳에 숨어 있다.

게다가 뒷정리는 또 얼마나 귀찮은가. 아무리 내가 요리할 때 설거짓거리를 최소한만 내도 먹는 사람들이 접시를 이거저거 꺼내서 먹거나 수저를 몇 개나 쓰면 의미가 없다. 음식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런 뒷정리가 더 귀찮을 때가 많다.

게다가 그렇게 해 주면 뒷말은 왜 그리 많은지. 맛이 있니 없니는 물론이고 약간만 조미료가 더 들어가도 느끼하니 짜니 다니…. 딱 한 번 그렇게 투정 부릴 거면 알아서 해 먹으라고 했더니 동생은,

-이게 뭐가 어렵다고 유세야? 맨날 하면서 간 하나 못 맞추는 네 혀가 병신이라서 그렇지.

라고 말했었다. 울컥해서 싸우려다 할머니한테 등짝과 종아리를 효자손으로 얻어맞는 통에 멈춰야만 했었지.

뭐, 이유야 언제나 그렇다. 사대 독자 귀한 장손에게 대들지 말라는.

생각하니까 또 등짝이 아린 듯한….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 아니요! 다 너무 맛있어 보여요.”

그런 나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남이 해 준 음식’이요, 라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아가씨.”

“고마워요, 레이디 템버.”

하, 진짜 아침부터 진수성찬이네.

먼저 코를 간질이는 건 하얗고 말랑한 빵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한 향기. 둥근 모양의 빵을 들고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살짝 짭짤해서 오히려 더 달콤하다. 요즘 소금빵이 유행이라고 했던가. 그런 걸 왜 먹나 싶었는데 조금 이해가 간다.

빵을 내려놓고 이번엔 먹음직한 갈색으로 구워져 나온 고기 쪽에 시선을 주었다. 아침부터 닭고기라니 좀 부담스럽지 않나 싶지만, 엔프리제가 많이 먹겠지. 나는 맛만 봐야겠다.

어딜 뜯어먹을까. 다리는 집주인인 엔프리제에게 양보하는 게 맞겠지. 그럼 난 날개를 먹을까? 아니면 난 퍽퍽살을 좋아하니까 가슴살을….

그렇게 고민하는데 엔프리제가 먼저 고기 쪽에 손을 뻗었다.

요령 좋게 다리를 잘라 낸 그가 슬쩍 나를 본다. 뭐지. 어쩌라는 거지. 멀뚱멀뚱 그를 보자, 엔프리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접시를 주셔야 담지 않겠습니까.”

“…아.”

왜 자기 접시를 나더러 달래? 성격 특이하네.

탁자가 그리 넓은 건 아니지만, 엔프리제의 접시를 집으려면 꽤 먼 데까지 손을 뻗어야만 한다. 그랬다간 옷이 음식에 닿을 것 같아 작게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 접시를 들어 아래에 갖다 대 주자,

“…뭐 하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보람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

“접시 달라고 하셨잖아요.”

“…제 접시 말고, 당신 접시 말한 겁니다.”

어…, 어? 내 접시는 뭐 하러?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엔프리제가 팍 인상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팔 떨어지길 기다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다만 날 선 말에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렇지 않으면 얻어맞기 일쑤였으니까.

재빨리 내 접시를 내밀자 엔프리제가 그 위에 닭 다리를 놓았다.

“…어,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 접시에 있는 걸 제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닭 다리가 이 세계에서는 제일 맛없는 부위인가?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는 닭 가슴살을 더 선호하는 나라가 있다고 들은 것도 같다.

뭐, 됐나. 덕분에 인생 첫 닭 다리를 뜯어 보는 것을.

-미쳤어? 다리는 다 내 건 거 모르냐? 건드리면 죽는다.

아, 순간 환청이….

알 게 뭐야. 이 세계에는 그 재수 없는 사대 독자가 없다. 게다가 주인인 엔프리제도 나더러 먹으라잖아!

나는 고개를 휙휙 내젓고는 닭 다리를 손으로 잡고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후아.”

미쳤다. 진짜 고기가 미쳤다.

내가 해 온 음식은 닭고기에 대한 모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게 말해서 모독이다.

미안해, 닭들아. 그동안 내가 너희 살을 가지고 쓰레기를 만든 거였어. 이게 이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다니.

“…….”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엔프리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 웃은 건가? 나 웃긴 표정 하고 있나?

알 게 뭐야. 지금은 이 천상의 요리가 더 중요하다.

쫄깃쫄깃한 닭 다리 특유의 식감은 남아 있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잡내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잔뜩 들어간 허브도 한몫을 하는 거겠지.

베어 물 때는 분명 쫄깃했는데 입안에서 사르르 풀어진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녹는 것처럼 입안으로 퍼져 나가더니 고소하고 향기로운 덩어리가 꿀꺽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다.

겉에 소스를 살짝 바른 게 약간 새콤 짭짤해서 풍미를 더해 준다.

하지만 확실히 고기는 고기. 담백하게 구웠지만 육즙 가득하다 보니 약간 기름진 느낌도 든다. 그럴 땐 이 샐러드를 먹어 줘야지.

가끔 로판 보면 채소가 등장하지 않는 귀족가가 꽤 있다. 중세 시대에는 채소를 고급 음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나. 채소 도둑은 벌하지 않았다는 썰까지 있을 정도에 평생 고기만 먹는 귀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게는 무리다. 고기 두 입 만에 채소가 강렬하게 당긴다.

샐러드는 색감이 예쁘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양배추, 적양파, 토마토, 치커리, 파프리카에 치즈 정도. 맛있겠다.

“흐으, 맛있엉….”

기름진 맛이 싹 씻겨 나갈 정도로 상큼하다.

새콤 달달해. 맛있어. 그 소스 뭐더라? 아, 기억이 잘 안 나네. 이거 비슷한 거 먹어 본 적 있었는데.

닭고기를 한 입 가득 물고 샐러드를 입에 밀어 넣는다. 솔직히 예의 바른 식사법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 먹으니까 두 배로 맛있다.

으으, 진짜 행복하다.

“…크흠.”

아, 엔프리제가 있었지.

그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턱을 괴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지저분하게 먹는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가? 그렇다기엔 뭔가….

웃는 것 같은데.

“천천히 드십시오. 모자라면 더 구워 오게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저는 이거만 있으면 충분해요.”

샐러드 뒤에는 고소한 빵을 베어 문다. 목이 살짝 막히면 유리잔에 찰랑찰랑 차 있는 맑은 물을 한 모금. 시원하고 달달한 물이 빵의 고소함을 더 돋워 준다.

원래 서양 쪽은 석회 때문에 물 대신 와인을 자주 마신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로판 세계라 그런지 물도 맛있네.

“후.”

배부르다. 거의 쓰지 않은 식기 대신 손이 엉망이 됐다. 일단 씻어야겠네.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제야 엔프리제가 식사를 시작했다. 나랑은 달리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식사를 하는데도, 이상하게 맛있어 보인다. 얼굴에 스민 옅은 웃음 때문일까.

“대공님.”

“네?”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어요.”

“…제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제게 감사 인사를 하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엔프리제는….

그리 싫어 보이지 않았다.

* * *

드레스를 달라고 한 건 내가 맞다.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귀찮은 과정이 많다는 것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다만 실제로 겪자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귀찮았다.

“잠시만 고개를 들어 주시겠어요, 아가씨?”

대체 여기는 왜 재는 걸까.

드레스란 대부분 목이나 가슴 부분이 시원하게 파여 있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고 쳐도 어차피 샤페릴은 목이 가늘다. 평범한 사이즈로 만들면 문제없을 텐데 왜 목둘레까지 재는 걸까.

“혹시 너무 조이거나 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벌써 일곱 번째.

치수를 재면서 너무 조이지 않냐, 헐렁하지 않냐, 불편하지 않냐 물어본 게 벌써 그 정도다. 그때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녀는 매번 새로운 신체 부위로 줄자를 옮길 때마다 다시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불편하긴 하다. 평생 목걸이는커녕 목도리도 해 본 적 없는지라 가늘고 긴 게 목을 휘감는 감촉이 영 어색하다.

교복 사러 갔을 때는 그냥 가슴둘레, 허리둘레, 팔 길이, 어깨에서 엉덩이께까지의 길이만 재고 끝냈었는데. 이러다가 손가락 길이까지 재겠네.

“마지막으로 손가락 길이만 잴게요.”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치수를 재 주는 템버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 거리감이 꽤 부담스럽다. 어제 엔프리제가 가까이 왔을 때는 오히려 괜찮았는데.

뭐랄까. 그는 뭔가, 현실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소설 속 인물이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반면 템버는 좀 다르다. 뭐랄까.

엄마라는 존재를 극도로 이미지화해서 구현화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깊고. 이상적인 엄마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어렵다.

“아가씨는 신체 비율이 정말 좋으시네요. 맞춤옷이 아니면 제대로 맞는 걸 찾기도 힘들겠어요.”

그런가.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하지.

여주잖아. 일반 사람들은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와 몸매를 가진 건 당연…, 한데….

근데 왜 가슴은 작을까. 좀 더 커도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작가가 작은 가슴을 좋아하나.

“다 됐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점심을 먹은 후 조금 소화됐나 싶었을 무렵부터 시작된 고행이 드디어 끝났다. 무너지듯 소파 위에 주저앉자 템버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많이 힘드셨죠?”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진짜 손가락 길이까지 잴 줄이야….”

“드레스는 선이 중요하니까요.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예쁜 선이 나온답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템버와 떨어지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템버에게서는 분유 냄새 같은 게 난다. 달달한 우유의 냄새라고 해야 하나. 그 향기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콧속에 남은 향을 씻어 버리려 찻잔을 들자, 템버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아가씨, 끓인 지 꽤 되어 이미 다 식었을 거예요. 다시 데워 드릴게요.”

“괜찮아요. 식었다고 못 마시는 것도 아닌데.”

식은 음식을 먹는 데는 별 거부감이 없다. 동생이 먹다 남긴 걸 하도 먹어서 그런가. 지 손으로는 밥 한 번 푼 적 없는 놈이, 전날 한 반찬은 손도 대지 않는 통에 늘 식은 반찬은 내 차지가 되었었다.

이런 차야 일부러 식혀 먹기도 하는데, 뭐. 아무렇지도 않다.

“아가씨. 전하께서는 아가씨께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드리라고 하셨어요. 저는 제 주인이신 전하의 명에 따라야만 해요.”

하지만 템버의 표정은 심각했다.

하긴. 이런 귀족 사회에서 주인의 명은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중요한 거긴 하지. 그러니 템버도 어쩔 수 없이….

“게다가 제가 싫어요.”

“…네?”

“다 식어서 향도 맛도 떨어진 차를 아가씨가 드시게 하는 건 제 마음이 용납 못 해요.”

어, 음.

…음.

어째서일까. 그냥 입에 발린 말일 뿐일 텐데. 예의상 그리 말해 주는 것일 뿐일 텐데.

알고 있는데.

왜 눈물이 나려는 걸까.

“차는 이미 드셨으니 다른 걸로 가져올까요? 과일 주스는 어떠세요?”

그냥 주인의 명에 따르려는 것임을 알고 있는데.

왜.

“…그냥 물이 좋아요. 차갑게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금방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템버가 나간 뒤, 아까부터 눈가에 맴돌던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초등학교 때도 거의 울지 않았었는데, 왜 어른이 된 지금 이렇게나 울보가 되어 버린 걸까. 샤페릴의 몸이 이상할 정도로 눈물샘이 약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이런 걸로 우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조금, 친절한 대접을 받은 것뿐이지 않은가. 그냥 나한테 식은 걸 주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지 않은가.

겨우 그것뿐인데.

별것 아닌데.

지겨울 정도로 동생에게, 할머니에게 해 왔던 건데. 그 대상이 내가 되었다는 이유로 나는….

나는 템버가 오기 전에 울음을 멈추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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