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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8화 (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8)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흐릿하게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계는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언제나 일어나던 새벽 5시겠지.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잠이 쉽게 깨질 않는다. 잠시 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다! 그 좁고 딱딱한 침대 위가 아니다!

손을 움직이자 철그렁거리는 사슬의 소리가 들렸다.

어제 두 번이나 물을 쏟는 바람에 족쇄를 벗겨 안쪽의 물기를 닦아 주고, 족쇄를 감싼 천도 갈아 주었기에 끈적이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여전히 조금 무거웠다.

그리고 그 차가운 철의 소리가,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 닿는 냉기가 현실감을 일깨워 준다.

아아.

나는 정말로 여기에 있구나, 하고.

“하, 하하.”

집이 아니다. 이제 정말로 집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말로, 이제, 나는 거기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그러는지 잘 알아서, 눈을 질끈 감은 채 눈두덩을 꾹 눌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슬픔은, 괴로움은 그렇게 하면 견뎌 낼 수 있었다. 흘려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의 눈물은 그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주르륵, 하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아, 샤페릴은 분명 우는 것조차 예쁘겠지. 나와는 달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작은 소리가 들렸다. 찰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

공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평온하고 안온했다. 따스한 온기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차갑고 무거운 냉기가 느껴졌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치우고 눈을 뜨자 흐려진 시야 사이로 그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잘 벼려 낸 칼날 같은 미모의 남자.

엔프리제.

얼핏 보기에 그는 담담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광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일그러진 미간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혼란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하긴. 아침 댓바람부터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당혹스러울 만도 하겠지.

“좋은 아침이에요, 대공님.”

슥, 눈물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에게는 그리 좋은 아침 같지 않아 보입니다만.”

비꼬는 듯한 말투. 하지만 그 눈빛에서는 비웃음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인다.

의심일까, 걱정일까.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품을 좀 했어요. 너무 일찍 일어났더니 아직 졸리네요.”

기뻐서 울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감금당해 속박당한 상태를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기뻐서 울었다고 말하면?

기억상실이 아니라 미친 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병원이라도 그 지옥보다야 낫지만 이미 이 집에서 하루를 보낸 뒤라 그런지 그리 내키진 않았다.

“대공님은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저는….”

내가 도망치진 않았나 확인하러 온 건가? 아니면.

“혹시 저 걱정돼서 와 주신 거예요?”

그냥 농담이었다.

앞으로 여기서 계속 지낼 거니까 당연히 엔프리제와는 잘 지내는 게 좋다. 앞으로 부탁해야 할 일이 한가득 남았는데 사치가 심하다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쫓겨나면 어떻게 해?

그런 생각에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한 농담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또 도망치지는 않았는지 감시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반응하는 걸까.

말은 쏘아붙이는 것처럼 냉정하지만, 표정이 귀엽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그러면서 손 둘 곳을 찾지 못해 팔짱을 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가 너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거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볼록하고 모양 예쁜 귓바퀴. 불타오를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저 귓바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짜로 걱정돼서 온 건가 보다.

“아직 기억은 하나도 안 나요. 그래도 혼란스럽거나 하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느 쪽을 걱정한 건가 싶기는 한데…. 저렇게 귀엽게 반응하는 걸 보면 역시 내 상태를 걱정해 준 거겠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미친 대공이라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좀 인상이 달라졌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아는 건가.

“그러니까, 저는…!”

“아, 대공님. 오신 김에 같이 식사하실래요?”

“……!”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던 엔프리제가 재빨리 제 입가를 감쌌다. 이번엔 목까지 빨개졌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기왕이면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좋잖아요.”

“저는….”

“제가 누구랑 같이 먹겠어요? 대공님밖에 없잖아요. 절 위해서라도 같이 먹어 주세요. 네?”

누군가와 밥을 먹은 게 언제더라. 대학 때 친구들이랑 학식 먹은 이후로 처음인가?

아침, 저녁은 늘 동생과 할머니가 밥을 다 먹고 난 후에 남은 반찬으로 급하게 배를 채우곤 했다. 점심은 밥해 주고 회사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해서 그냥 굶기 일쑤였고.

반쯤 생각 없이 뱉은 말이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로 엔프리제랑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졌다.

이럴 때 보통 여주들이 이렇게 하던데.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살짝 위를 쳐다보며, 애원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본다.

역시나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정 원하신다면.”

“와, 정말이죠?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요.”

맛있는 밥. 함께 먹을 사람.

말에 조금 가시가 있긴 하지만 저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최소한 엔프리제는 나를 깎아내리거나 상처 입히진 않으니까.

그냥 좀, 솔직하지 못할 뿐이지.

“그, 흠, 조금 이르지만 식사를 준비하라고 이르도록 할까요?”

응? 지금 몇 신데…? 보통 일곱 시쯤에 먹지 않나. 엔프리제는 더 빨리 먹나?

“대공님은 원래 언제 드세요?”

“…시입니다.”

“네?”

“일곱 시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먹자는 거지? 내 생체 시계가 빙의 탓에 망가졌나? 보통 내가 밥 준비 때문에 다섯 시쯤 일어나곤 했는데.

“지금은 몇 시인데요?”

“…다섯, 시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엔프리제의 목이 빨개진다. 저러다가 목이 아주 타들어 가겠네. 왜 저렇게 부끄러워….

아.

“혹시 저랑 식사하는 게 기대돼서 빨리 드시려고 하신 거예요?”

“…윽, 그, 그게 아니라! 전 그냥… 당신이 일찍 일어나셨기에 속이 허전해서 그러신가 해서….”

아하, 맞구나?

소설 속에서는 무게 엄청 잡고 찬바람 풀풀 날리더니. 귀엽긴.

“그냥 눈이 일찍 떠진 것뿐이에요. 조금 더 자려구요.”

이건 놀리려고 한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0교시라는 게 있어서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했기에 밥을 하고 가면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할머니에게 아침밥을 전날 해 두면 안 되냐고 했다가 파리채로 엄청 맞았었지. 사대 독자에게 감히 식은 음식을 먹이려고 하냐면서.

그래서 반사적으로 눈을 뜨긴 했지만, 좀 더 자고 싶었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게 사실 로망이었거든.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서 제가… 방으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면 이따…, 아!”

그러고 보니 부탁할 게 있는 걸 또 까먹을 뻔했다.

“대공님,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나요?”

“부탁…? 무엇입니까.”

“그게… 사실 침구가 너무 부드러워서 잠이 잘 안 와요.”

“…네?”

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간 걸까. 게다가 표정 관리도 제대로 되질 않는다. 아까 내가 밥 먹자고 한 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나 보다.

괜히 말했나? 아니, 그래도 이대로면 익숙해질 때까지는 못 자는 거잖아? 먹고 자고 싸는 게 사람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데!

“이불은 너무 두껍고 베개는 너무 폭신해요…. 침대도 그렇구요. 침대야 비싼 거니 바꿀 수 없겠지만, 침구만이라도 좀… 덜 좋은 걸로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리고 책도 있으면 좋겠어요.”

“책… 말입니까?”

그가 다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본바탕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라 여전히 멋있기야 하지만, 위엄도 없고 날카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내가 한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

“네, 그게, 저 여기서 못 나가는 거잖아요?”

손목을 들어 보였다. 발목에 감긴 족쇄는 들어 보이기 좀 힘들어서 내버려 뒀다.

엔프리제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손목의 족쇄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 이 상황에 불만을 표하려는 걸로 이해한 걸까.

“아, 어제도 말했지만 풀어 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래도 시간을 때울 뭔가는 필요하잖아요.”

“…네?”

아니, 이 남자야.

설마 내가 책을 가지고 탈출을 하겠어 뭘 하겠어? 당연히 읽으려고 달라고 하는 거지.

왜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대답을 하는데, 자꾸.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저 심심하다고요!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라곤 대공님과 레이디 템버뿐이잖아요. 두 분 다 일을 하셔야 할 테니 대부분은 저 혼자 있어야 할 테고.”

물론 샤페릴의 미모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며칠은 보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평생 미모만 감상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글씨를 읽을 수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다. 말이 통하는 건 이런 장르에서는 기본적인 옵션 같은 거고, 글은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고 없는 작품이 있단 말이야.

글을 못 읽으면 감금 생활에 큰 애로 사항이 생긴다. 핸드폰도, TV도 없는데 대체 뭘로 시간을 때워야 한단 말인가.

아, 내가 한국어로 소설이라도 쓸까? 근데 그럼 이상한 글자 쓴다고 또 정신병원에….

“어떤 책이든 좋아요. 네?”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며 애원하는 나를, 어째서인지 엔프리제는 씁쓸함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그렇게 미친 사람 보듯 보지 말아 주실래요, 대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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