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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7화 (7/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7)

아름답다.

새하얀 크림이 물결처럼 굽이굽이 테두리를 감싸고 있고,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크림이 빵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 위에는 뿅, 하고 귀여운 느낌으로 물방울 모양의 생크림이 올라가 있다. 물방울 속에는 새빨간 딸기, 보라색의 블루베리, 녹색의 키위, 적색의 체리, 주황색의 귤, 갈색의 초콜릿이 장식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어지러웠다.

이건, 거의 예술 작품 아닌가요. 경탄 어린 눈으로 템버를 바라보자, 그녀가 엷게 웃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아가씨?”

“당연하죠! 템버의 손은 마법을 부릴 줄 아나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크림을 바를 수가 있어요?”

이게 쉬워 보여도 절대 쉽지가 않다.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학교에서 케이크 만들기 실습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생이다 보니 케이크 시트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위에 크림만 바르면 되는 간단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던 터라 매끄럽게 바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모든 케이크 파티시에들을 존경하기로 했지.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에요. 다음에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들어 드릴게요.”

으으, 기대된다. 빵이 일반 케이크들이랑 다르던데.

“고마워요, 레이디 템버.”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아가씨께서 드시고 싶은 거나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제게 말해 주세요.”

부드럽게 미소 지은 템버는, 빈 잔에 홍차를 따라 주고 물러났다. 내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일까.

“윽.”

떫어.

홍차는 처음 마셔 보는데 커피보다도 떫구나.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소설 속의 영애들을 보면 되게 우아하게 마시던데.

눈살을 찌푸린 채 입맛을 다시다가 케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떫은맛을 없애는 덴 이게 최고겠지.

“크으, 이 자태!”

지금까지는 먹다 남은 케이크를 먹는 게 대부분이었던지라, 이렇게 온전한 케이크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뭐, 자르지 말고 한 판 다 달라는 말에는 템버도 조금 놀라긴 했었지만.

“일단 크림부터…, 아니지, 과일부터 먹을까?”

하지만 막상 받고 나니 왠지 포크를 대기 꺼려진다. 뭐라고 해야 하지. 새하얀, 티 하나 없는 종이에 내가 먹물을 묻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 완벽한 예술 작품을 흐트러뜨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에이, 모르겠다!”

푹, 하고 포크를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케이크 시트 속으로 쑥 하고 빨려 들어간 포크는, 그리 짧지 않은데도 거의 손잡이 부분까지 파묻혔다.

그 꼴이 되자 생각 외로 케이크를 뜨기가 어렵다. 뭘 먼저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부를 한꺼번에 먹자는 생각에 푹 찔렀는데.

이걸 어쩌지. 빵칼을 달라고 할걸. 그냥 포크로 떠먹고 싶어서 필요 없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으음.

이럴 땐 그거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자. 이렇게 바깥쪽으로, 꾹 밀어내듯이 하면….

“윽!”

…….

커다란 생크림 덩어리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피한다고 피했지만, 뺨에 끈적한 감촉이 남았다.

지렛대의 원리, 어떻게 된 거야. 이건 지렛대라기보다 투척기 아닌가.

게다가 포크도 크림 범벅이 됐다. 씻고 템버에게 포크를 다시 가져다 달라고 해야….

그렇게 생각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템버인가! 내 생각을 그렇게 멀리서도 읽는단 말이야? 완전 초능력인데?!

“들어오세요!”

하지만 들어온 건.

“웬일로 얌전히 식사를….”

엔프리제였다.

그는 크림 범벅이 된 날 보고 놀란 듯 멈춰 섰다. 눈이 휘둥그레지자, 날카롭던 눈매가 조금 둥글어져 귀여워 보인다. 다양한 매력이 있는 남자네.

예쁘고 사납고 귀엽고를 혼자 다 해 먹다니. 저 정도는 되어야 소설 주인공 해 먹는 거구나.

“…대체 무슨 꼴을 하고 계신 겁니까.”

아.

아. 어. 음.

“좀 드실래요?”

“…됐습니다. 대체 어떻게 케이크를 먹으면 이 꼴이 되는 겁니까. 기억이 지워진 게 아니라 상식과 교양이 지워진 것 같군요.”

날카로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엔프리제는 내 뺨을 닦아 내 주었다. 아, 달달한 냄새 난다.

그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자 엔프리제가 홱 손을 뒤로 숨겼다.

“레이디 템버가 케이크를 잘라 주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냥 달라고 했어요.”

“…대체 왜….”

“그냥…, 이거 통째로 먹어 보고 싶어서요.”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준비된 케이크. 설령 다 먹지 못하겠지만, 음식 낭비가 되겠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배가 가득 차도록 먹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서민적인 욕망은 이 남자가 이해할 리가 없으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 일단 씻고 오십시오. 엉망입니다.”

닦아 냈는데도 엉망인가?

슥슥, 반사적으로 뺨을 닦아 냈다. 그러자 엔프리제가 기겁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 닦아 내려고요.”

“크림 묻은 손으로 뺨을 닦으면 오히려….”

엔프리제가 인상을 확 찌푸린다.

그렇게 더럽나? 샤페릴의 미모면 크림 좀 뒤집어쓴 정도로는 빛이 바래지 않을 텐데. 안에 든 게 나라서 매력이 반감됐나?

“알았어요, 씻고 올게요. 근데 이건 그냥 먹을 거니까 치우시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혹여라도 더럽다고 버릴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걸을 때마다 찰그랑거리는 사슬 소리가 거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저기, 어…. 대공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전하라고 부르기엔 뭔가 좀 오글거린다. 그것보다는 대공님이 나을 것 같은데….

이게 허용되는 세계관이려나.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저 이 사슬 좀 가벼운 걸로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기 힘들어요.”

“그건….”

“풀어 달라고도 안 할게요. 그냥 너무 무거워서 그래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역시 안 되나.

흠…. 역시 이건 시일이 좀 더 지나야 하려나.

“오늘 주문하면 며칠 걸릴 겁니다.”

“아, 괜찮아요! 저야 바꿔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흐흐, 성공이다.

작은 성취감에 도취되는 것과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진짜로 샤페릴을 좋아하나 보다.

여전히 마음에는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방심하게 만들어 도망치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겠지.

그런데도 내가 얌전히 따라 주자 순순히 사슬을 바꿔 준다고 한다. 아마 조금 더 얌전히 있으면 풀어 주기도 하지 않을까. 시일이 좀 지났을 때 시도해 봐야지

“…사슬을 바꿔 주지 않으면 매 식사 시간마다 이럴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죠.”

환하게 웃는 내게 그는 싸늘한 한마디를 남겼다.

아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왜 저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건지, 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설마.

“대공님.”

“…네.”

“오해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저 사슬 때문에 불만 있어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니…!”

아.

츠촤아아, 하는 익숙한 소리. 나는 아까 화장실에서 물을 쓴 후, 레버를 돌려놓았는지를 생각했다.

…망할.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

빙의하면서 정신머리는 원래 몸에 두고 온 게 아닐까, 라고.

* * *

으음, 큰일이다. 잠이 오질 않는다.

기본적으로 내 침대는 언제나 딱딱하고 좁았다. 동생이 초등학생 때 쓰던 작은 침대를 내가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십오 년 전쯤에 샀던 그 침대는, 가끔은 맨바닥에서 자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단단하고 등이 배겼다.

그런 내게 이 환경은 너무 호화롭고 또 가혹했다.

“…으으, 이불이 너무 푹신해.”

푹신하다는 건, 두께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에 든 게 솜인지 오리털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지만 너무 따뜻하고 답답하다.

겨울 솜이불도 한 번 덮어 본 적 없는 내게는 너무 부담스럽다.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불 위로 올리자니 뭔가 팔만 너무 훅 허공에 뜨는 느낌이고, 이불 속에 넣자니 파묻히는 느낌이고!

게다가 베개도 너무 푹신하다. 높이가 꽤 있어서 걱정했는데 머리를 대자마자 푹 꺼졌다. 덕분에 귀가 베개 속에 파묻혀서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딱 한 번, 동생이 졸라서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도 부모님은 바빠서 할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만 갔었다.

나만 따로 싼 숙소를 잡기는 좀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근처에 싼 숙소가 없었던 걸까. 가장 싼 방 하나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와 동생이 묵은 방에는 비할 바가 못 됐지만, 그때도 어쩐지 부담돼서 잠을 설쳤었다.

침구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거슬린다. 오히려 쇠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더 나은 것 같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후….”

방을 둘러보다가 한 번도 앉은 적 없는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배드라고 하던가? 드러누울 수 있게 한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반대쪽은 아무것도 없는 긴 소파. 거기에 눕자 오히려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침대가 너무 폭신하니까 뭔가 바닥 없는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었다. 땅에 닿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그런 느낌.

소파 정면에는 촛대가 보였다. 아른아른 흔들리는 주홍색의 아름다운 불빛. 촛대는 은색인지 금색인지 제대로 가늠이 되질 않았다. 촛불의 색으로 물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 몸을 옆으로 돌렸다.

아직 낯선 방. 앞으로 내가 계속 지내게 될 방.

촛불을 외면하듯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방에서 봤던, 온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그냥 소설을 보다 잠들었을 뿐인데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절세의 미녀에 빙의되질 않나, 끝장나게 잘생긴 남자가 내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리질 않나.

뭔가 계속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내게는, 처음으로 맛보는 온전한 휴식이었으니까.

…문득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은 그냥 리얼한 꿈인 게 아닐까? 눈을 뜨면 다시 그 작고 딱딱한 침대 위인 게 아닐까? 어제 사 왔던 식재료들로 또 새벽부터 음식을 하고 집을 정리하고….

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매일이 시작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두려웠다.

이래서 너무 행복한 꿈은, 행복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그 격차가 크면 클수록 깨고 난 뒤에 현실이 절망스러울 테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는 그저 집이 굴러가기 위한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던 그 집. 내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걸어 주는 이 없던 그 집.

이런 행복을 맛본 후에 그 비참한 곳으로 되돌아가면 난….

신이시여, 만약 당신이 날 보낸 거라면…. 그게 어떤 변덕이었든 상관없어요. 다만 제게서 이 좁은 천국을 빼앗지는 말아 주세요.

이 안락하고 좁은, 나만의 천국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꼭 감은 눈꺼풀 속, 어둠의 끄트머리를 물들이던 주홍색이 흐려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도 이 행복에서 깨어나지 않게 해 달라 계속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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