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6)
“후아.”
배부르다.
나는 오랜만에 든든하게 채운 배를 어루만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남이 해 주는 밥 먹고 정리도 하지 않고 늘어지다니.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는 나를 보던 템버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너, 너무 예의 없었나?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귀족 영애면 무의식중에 예절을….
에이, 알 게 뭐야. 그럴 거면 이런 감금 생활을 자처할 이유가 없지.
“음식은 입에 맞으셨습니까?”
“엄청 맛있었어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그녀는 쿡쿡 웃고는 쟁반에 그릇을 담아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나는 반쯤 침대 밖으로 삐져나가 있던 다리를 꼬물거리며 위로 올렸다.
아, 배부르니까 졸리다.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하루 한 번 마셔야 한다는 차도 이미 마셨고, 밥도 먹었고. 드레스 사 달라는 말도 이미 했고.
옷 사 달라는 말에 템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떤 옷을 원하시나요, 아가씨.
라고 물었다.
예상대로. 엔프리제가 이미 언질을 준 게 틀림없었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다 맞춰 주라고.
-잘은 모르겠지만, 예쁜 옷이 입어 보고 싶어서요. 이것도 예쁘긴 하지만….
-전하께서 고르신 거라 실용적이긴 하지만 그리 예쁘지는 않지요. 부족한 솜씨지만, 원하시는 드레스가 있다면 제가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 템버는 만능인가요.
아무래도 템버는 여주를 조력해 주는 포지션의 시녀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감금 생활 중인 내가 뭔가를 요구하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외부에 부탁하면 내 소재가 드러나니 뭐든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지.
고마워요, 엔프리제. 템버는 엄청난 선물이에요.
요리 잘하지, 청소 잘하지, 빨래 잘하지, 배려심도 있지. 만능 템버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분 나쁘다는 감정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요리를 템버가 한다는 건, 소설 속에 나오던 디저트도 그녀가 만든다는 뜻 아냐? 뭐 만들어 달라고 하지.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디저트가 잔뜩 있다. 매번 인터넷 글로만 보면서 침을 흘렸었는데, 그것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당장 오늘 저녁엔 뭘 해 달라고 해 보지? 케이크도 있으려나. 초코 케이크는 동생이 좋아해서 동생 생일 때마다 질리게 먹었다. 그것도 맛있긴 했지만, 사실 나는 과일이 듬뿍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동생이 과일을 싫어해서 한 번도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과일 여러 가지 넣어서 만들어 줄 수 있으려나.”
보통 이런 소설 보면 과일이 엄청 비싸단 말이지. 아무래도 운송에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엔프리제가, 명색이 대공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후, 식후에 먹을 케이크만 해도 종류가 어마어마하겠다. 어디까지 될진 모르지만, 되는 건 다 먹어 보자. 그다음에는 푸딩이나 젤리 종류로 넘어가 볼까? TV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오던 크림… 브륄레? 그런 것도 먹어 보고 싶던데.
나는, 내 기억으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음 식사 때 먹고 싶은 걸 생각하며 식후 시간을 보냈다.
* * *
임페리오 제국은 티엔테 대륙에 있는 수많은 국가 중 명실상부 최고의 강대국이라 손꼽혔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수만의 직업군인이 지키고 있는 넓은 토지는 그 특성에 맞게 운영되었으며, 교역망 역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요 교역로는 깔끔하게 길을 다져 운송이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보관 방법의 혁신까지 더해진 덕에 꽤 먼 곳에서만 재배 가능한 과일이나 채소도 제국에서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임페리오 제17대 황제인 바르카 드 블레임이 손에 넣지 못할 것은 단 하나도 없을 터.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인 바르카는.
“찾았느냐.”
“죄, 죄송…,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
파르르 떨며 고하는 황제 직속 기사단장의 대답에 꾸드득,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으스러뜨릴 듯 황좌의 팔걸이를 쥐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이 언제라도 자신을 향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기사단장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세실리오 경. 그대는 무엇인가.”
“폐하를 호위하는 영광과 명예의 카발레이 기사단 단장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제국 제일의 기사단 단장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바르카가 엷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노기와 눈에 비치는 광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평온한 목소리와 대비되어 더 스산하게 느껴지는 황제의 위압감에 세실리오는 그저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제 젊은 주인이 얼마나 잔혹 무도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대가, 오갈 데 하나 없는 귀족 영애 하나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것도 특수한 약을 계속 먹어야만 하는 여자를 말이야.”
그녀가 먹는 약은, 물자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이 제국에서도 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황실의 철저한 관리 아래 극소량만 수입되는 약초를 사용한 것인 데다 그걸 가공할 수 있는 약사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없었다.
리베테 가문의 비극으로부터 벌써 반달이 지났다. 약사에게서 들은 그녀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약 없이 그 기간을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 참극 속에 있었던 그녀가.
그런데도 왜 찾아내질 못하는 걸까. 설마 그 난리 통에 뒤섞여서….
“…큭.”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은 칼날이 되어 젊은 황제의 가슴 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바르카는 살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날카로운 눈으로 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세실리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늘어뜨린 저 목을 당장이라도 베어 넘기고 싶었지만….
바르카는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며 잇새로 씹어 뱉듯 말했다.
“한 달.”
세실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화르르 끓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딱 한 달 더 주도록 하겠다. 그 안에 찾아내지 못하면.”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오는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 제일의 기사단장은 황급히 예를 갖추며 황제의 마지막 자비를 받들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만에 하나 죽었다면 시체라도 끌고 와야 할 것이다.”
“예, 폐하.”
기사단장은 공포에 떨리는 목소리로 순종을 내뱉었고, 다급히 주인의 앞에서 물러났다. 분노한 황제 앞에 더 머물렀다가 언제 그의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르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혀를 찼다.
“한심하긴.”
젊은 황제는 다시 황좌로 돌아갔다.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앉는 감촉은 최악인 의자. 하지만 여기에 앉아 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에 있었다.
…그런 줄 알았다.
제국의 황제란 만물의 주인이라고. 제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가장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샤페릴.”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처럼 흘러나온 이름 하나.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그 가슴 속에 몰래 묻어 두었던, 하지만 누구도 지울 수 없도록 강하게 새겨져 있던 이름이었다.
사교계의 꽃. 젊은 귀족들의 우상. 그녀에게는 마력과도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그 가녀린 몸에 잡아끄는,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하는.
그런 사람.
리베테의 비극에서 그녀를 구해 내는 사람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바르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빌어먹을.”
보이는 것은 텅 빈 알현실뿐.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형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의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바르카는 천박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눈에, 알현실 구석에 서서 덜덜 떨고 있는 시종이 보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세실리오와 함께 들어왔었던가?
그랬다면 왜 나가지 않았지.
바르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냐.”
시종은 흠칫 놀라 몸을 떨더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되는 양 발을 질질 끌어 바르카의 앞에 섰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하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겁을 먹은 탓에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그가 답답해 바르카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니 들어왔을 것 아니냐. 설마 아무런 용건도 없이 짐의 앞에 선 것은 아니겠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시종이 더듬더듬 제 품을 뒤지더니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 찍혀 있는 봉인을 본 바르카가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붉은 밀랍 위에 선연하게 찍혀 있는 뱀의 문장.
‘황가의 피를 도둑질한 더러운 놈’의 문장이었다.
“브, 블레임 대공이 폐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황후의 배에서 장자로 태어났으나 황제의 아이로 인정받지 못한 남자, 엔프리제 드 블레임. 그 남자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알현을 요청하는 것일까.
그 남자가 ‘적자’가 아니었던 덕분에 제2 황자였던 바르카가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는 그리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에게 신경을 써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군. 대공에게는 근시일에 날을 정해 통보하겠다 전해 두도록.”
바르카는 귀찮은 벌레를 내쫓는 듯이 손을 털었다. 황제가 발견한 순간부터 곧 죽을 놈처럼 덜덜 떨어 대던 남자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구르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는 이번에야말로 혼자라는 생각에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대앉은 바르카가 작게 중얼거렸다.
“샤페릴. 그대는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대륙의 황제가 이토록 간절히 찾고 있는 사교계의 꽃은 그 시각.
“와…!”
제 눈을 현혹하는 색채의 향연에 넋을 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