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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5화 (5/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5)

실실 웃으며 뻘생각을 하는 중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데, 익숙하지는 않은 목소리.

슬쩍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엔프리제가 서 있었다.

“아, 어, 저기….”

그냥 물을 좀 맞아서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놀라서 휘둥그레진 금빛 눈동자를 보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니컬하고 날카로워 보이던 얼굴이 당혹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걸 보니 왠지 입술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만히 서로를 보며 시선만 나누고 있는데, 이내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아, 뭐…. 이해는 한다.

애가 갑자기 기억상실이라고 하더니 지능까지 낮아졌나… 싶겠지. 잠깐 혼자 뒀다고 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홀딱 젖어 있기까지.

원래 샤페릴의 모습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황당하기만 할 것이다. 성녀라 불릴 정도로 기품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심지가 곧은 귀족 영애와 지금의 내가 전혀 매칭되질 않겠지.

“물이….”

“물이?”

꽤 심각한 얼굴로 묻는 엔프리제의 시선이 따갑다. 일을 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진짜 시선이 아픈 건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면대 옆에 달린, 설마 했던 그 물건이 보였다.

“…물을 쓰려고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서요.”

…설마 로판 세계에서 샤워기를 볼 줄이야.

아니, 상식적으로 좀 이상하잖아.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백 보 양보해서 샤워기야 있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수도꼭지가 왜 세면대와 샤워기에 연결되어 있는 건데?

서로판이면 서로판답게 욕조 따로 세면대 따로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탓에 소리까지 지르고. 으으, 생각해 보니 엄청 쪽팔린다.

“…하.”

잠시 내 말을 이해하려는 듯 멈춰 있던 엔프리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으, 그렇게 한심해 보이나? 뭔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내가 바보 같았던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크게 한숨을 쉴 필요는 없잖아.

“죄송해요.”

헤실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신 흐트러진 앞머리를 슥 쓸어 뒤로 넘겼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춥다. 물 좀 뒤집어쓴 것뿐인데 왜 이렇게 춥지? 샤페릴이 가지고 있다는 지병 때문일까. 원래의 몸이라면 한겨울 길거리에서 물을 뒤집어썼을 때도 이렇게 춥진 않았을 텐데.

등줄기를 타고 슬금슬금 피어오르던 한기가 어느 순간, 폭발하듯 몸을 뒤덮더니 이내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에.”

“……?”

“…에, 에취!”

…킁.

묘한 적막이 그와 나 사이에 감돌았다.

“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쓸데없는 짓이라니!

내가 앞으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르는 곳을 둘러보는 게 어떻게 쓸데없는 짓이야? 당연한 일이지!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일을 저지른 자는 유구무언인 법.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엔프리제는 화장실 밖으로 나가나 싶더니 서랍장 쪽으로 가서 타월 하나를 꺼내 왔다. 이것도 친숙하네. 원래 다른 서로판에서도 귀족들이 저렇게 서랍장 안에 타월 같은 걸 넣어 놓고 그러던가? 저런 세탁물을 따로 두는 방 같은 게 있는 거 아니고?

으음, 잘 모르겠다. 보통은 시녀가 뭘 해 주거나 아니면 아예 평민으로 시작하니까. 다만 묘하게 한국스럽게 느껴지는 게 많다.

작가가 고증하기 귀찮아서 대충 쓴 건가. 하긴 뽕빨물에 뭘 바라겠어.

엔프리제는 가져온 타월을 내게 내밀려다가 흠칫 놀라 멈췄다.

음, 설마 지금 나 닦아 주려다가 멈춘 건 아니겠지? 지금이 정확하게 어느 시점인진 모르지만 둘이 처음으로 19금 소설에서만 쓸 수 있는 일을 한 게 다섯 번째 탈주 후니까….

이미 했나? 안 했나? 잘 모르겠네.

이미 했으면 막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하고 그럴 거 아니야. 으으, 저런 미남이 그렇게 하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은데.

정신 차려. 쟤는 미친놈이야. 미친놈이라고. 네가 열심히 욕하던 미친놈이야.

“받으십시오.”

엔프리제가 내게 수건을 내밀었다.

받으라는 건 나더러 알아서 닦으라는 뜻이겠지? 그럼 둘이 아직 선을 안 넘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다행ㅇ….

아, 잠깐만. 아, 코. 코가 또…!

“에…취!”

아.

아까는 몰랐는데 샤페릴은 재채기 소리도 귀엽다. 애기들 재채기 소리 같기도 하고….

이 사람한테 추한 부분이 있긴 한 걸까. 역시 로판은 얼굴이 개연성이지. 이 정도는 돼야 저렇게 다 가진 남자가 미쳐서 납치 감금하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로판 여주 무섭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성큼 가까워졌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진 것처럼 어두워지더니,

“아.”

갑자기 느껴지는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엷은 소리를 흘렸다.

“…정말로 어린애 같군요.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다니.”

무게감 뒤에 느껴진 것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자, 그의 손이 타월 너머에서 내 머리를 살짝 눌렀다.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그리고 슥슥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털어 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닿는 손 크기가 엄청나다. 머리에 닿는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정도면 샤페릴의 얼굴 정도는 한 손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런데도 손이 부드럽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 내는 움직임이 너무 상냥해서 깃털이 살랑이는 것 같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상냥한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얼마 만이더라. 누군가가 이렇게 머리를 닦아 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애매할 정도로 오래전에….

“…하.”

머리 위에 뜨거운 숨결이 흩날린다.

타월 사이로 비쭉 솟은 귓바퀴에 닿은 바람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서 간지러웠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가. 엔프리제의 몸에서 나는 체취인지 향수인지 알 수 없는 향기가 콧속을 간질였다.

내 화장품은 언제나 인터넷 최저가만 골라 산 데다 향수 같은 건 뿌려 본 적도 없기에 이게 무슨 향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미지만큼은 선명했다.

“숲 냄새가 나요.”

“…….”

“정말 기분 좋은 냄새가.”

시원하고 선선하다.

뭔가 좀 더 차갑고 투명한 냄새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얼음이 떠오르는.

그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어쩐지 졸음이 몰려왔다.

아, 이대로 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기울어지려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의 무게감이 사라졌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툭, 냉정하게 뱉어 내는 목소리.

그걸 마지막으로 그는 내게서 물러서더니 휙 방을 나가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 날 혼자 두고 나가 버렸던 것처럼.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에 손을 올려 보았다. 살짝 젖은 수건은, 그의 온기가 남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보드랍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의 손이 주던 안정적인 무게감에는 댈 수 없을 정도로 내 손이 가벼운 게 아쉬웠다.

흠, 다음에 또 물을 뒤집어써 볼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 드디어 시녀의 등장인가!

로판에서의 시녀란 대부분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조연으로서 스토리의 한 축을 맡기도 하고, 악역을 맡아 여주를 괴롭히기도 하고, 원작의 여주를 괴롭히다가 빙의한 여주한테 참교육 당하고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어 대리 만족을 주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의 시녀는 별 존재감이 없다. 등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네, 들어오세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들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 너무 가벼웠나?

이럴 때 소설 속 여주들은 어떻게 하더라.

하지만 들뜰 수밖에 없잖아. 내 모든 신변을 돌봐 줄 분이신데! 음식도 이분이 하시고, 청소도 해 주시고, 빨래도 해 주시는 감사한 분이란 말이야!

이분한테 잘 보여야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지!

“실례하겠습니다.”

샤페릴은, 그녀에게 놓아 줄 것을 애원했다가 매도했다가 폭력까지 휘두르려 했었다. 그래서인지 시녀는 몹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방에 들어섰다.

중년과 노년의 어중간한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연령대의 여성은, 마른 체형인데도 신경질적으론 보이지 않았다. 온화하고 포근한 인상에 입가에 머금은 엷은 미소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뭐랄까. 활자로 봤을 땐 좀 더 나이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거의 엄마 또래의 나잇대로 보인다.

“어머나, 아직도 물기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이니 얼른 닦고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내 이상에 대해 전해 들었을 텐데도 그녀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귀족인 샤페릴이야 이런 게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K-직장인이다. 엄마뻘인 사람에게 이런 시중을 받는다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선 뒤 웃으며 손을 뻗었다.

“혼자서 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저한테 주세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가져온 옷을 침대 위에 놓았다. 그사이 나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 끝과 몸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젖으면 안 되니 여기에 두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어….”

이름이 뭐더라.

아니, 애초에 이름을 기억하면 이상한 상황이긴 하지. 내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시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게.

끄응.

내가 묘한 소리를 내자 그녀가 풋, 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템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가씨.”

“앗, 그렇군요. 고마워요! 레이디 템버.”

엄마랑 비슷한 나잇대인데 엄마랑은 전혀 다르다.

내 기억에 있는 엄마는…, 아니, 애초에 마주친 적도 얼마 없지. 너무 바빠서 집에 들어오는 게 한 달에 다섯 번 될까 말까였으니까. 그래서 내게 엄마라는 존재는 타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이상했다. 입으로 말을 내어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내 생각을 알아챈 듯 말을 해 주는 그녀가.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기분 나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하셨지요? 곧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뭔가를 알아챈 걸까. 그녀는 싱긋 웃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가슴의 울렁거림도 가라앉았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 쥐어진, 이제는 온기가 사라진 수건을 쳐다보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아.”

드레스 사 달라고 하는 거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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