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4)
“그러고 보니 이 사슬은 길이가 얼마나 되는 거지?”
굳이 채워 둔 걸 보면 방 밖에 나갈 정도는 안 될 것 같은데. 이 방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
잘그락 소리를 내는 사슬을 시선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길이가 꽤 있어 보이긴 하는데…. 팔다리를 살살 흔들어 확인하려 해 봤지만, 잘 가늠이 안 된다. 일어서서 확인하려고 발을 침대 밑으로 내렸다.
바닥 전체에 깔아 놓은 카펫 덕분에 맨발이라도 딛기 나쁘지 않았다. 부드럽게 발을 감싸 주는 감촉이 기분 좋다. 좋긴 한데… 청소하기엔 안 좋을 것 같다. 고생 좀 하겠는데. 여긴 청소기도 없을 거 아냐. 이 커다란 카펫을 매번 털어 낼 수도 없는 거고. 털이 많은 만큼 먼지도 엄청 엉길 텐데.
아, 하긴. 이제 내가 할 거 아니니 상관없나?
“으음, 부드럽긴 한데 간지럽다.”
발을 살랑살랑 흔들며 부드러움을 만끽하다가 몸을 움츠렸다. 그 흔한 극세사 이불 한 번 써 본 적 없는지라 나도 모르게 열중했다. 발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내려놓곤 이번엔 일어섰다.
흠. 못 걸어 다닐 정도는 아닌데 사슬이 너무 무겁긴 하다. 분명히… 세 번째 탈출 시도를 한 뒤에 채워졌었지, 이 사슬.
원작의 샤페릴은 이후로도 세 번이나 더 탈출 소동을 벌인다. 이 가냘픈 몸으로 대체 어떻게 탈출을 했던 거지.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에 남은 건 없다. 그 뒤에 또 씬이 이어졌는데 그게 또….
흠흠.
그나저나 풀어 달라고 해 봤자 아직은 날 못 믿으니 안 풀어 주겠지? 좀 가벼운 걸로 바꿔 주기만 해도 나을 것 같은데. 그건 들어주려나?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확인을 잊고 있었다. 화장실은 어디지?
기억을 돌이켜 본다. 소변플 같은 수치 플레이는 본 적 없다. 소개글에서도 강압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만 경고했었다. 설마하니 침대에서 누고 치워 주는 건 절대 아닐 테고. 보통 서양식 로판이라도 중세 고증하기보다는 우리 정서에 맞게 수세식 화장실 설정이 많던데….
슥 둘러보다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 문을 발견했다.
오, 여기가 화장실인가? 사슬 길이랑 침대와 문 사이의 거리를 보면 틀림없어 보이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에.
“오오….”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곧바로 정면에 보이는 건 거울이었다. 원래 중세에도 이런 게 있었나? 거울이나 유리 같은 건 보통 되게 비싸다는 식으로 묘사되던데.
뭔가 그냥 보기엔 한국에 있는 고급 저택의 화장실 같은 느낌이다. 뭐, 벽이나 바닥이 타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날 놀라게 한 건 바로 정면에 비치는.
“…미쳤다, 진짜. 이런 미모가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나’. 즉 샤페릴의 자태였다. 누가 로판 여주 아니랄까 봐 아주 눈이 부시다.
한국에서 이런 백발을 만들려고 하면 머리카락 완전 다 상할 텐데. 하얀 실크 천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러우면서 윤기 넘치고 가늘고도 탄력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손가락에 휘감아 봤다. 철렁거리는 사슬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제는 좀 익숙해졌는지 견딜 만했다. 그보다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촉감이 너무 좋아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이걸로 한 세 시간은 멍 때리고 있을 수 있겠는데?
게다가 이 눈동자. 뭔가 살짝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석류알처럼 영롱하고 반짝이는데, 토끼 눈처럼 무섭지는 않다. 루비를 실물로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분명 이런 눈을 수식할 때 루비 같은 눈동자라고 하는 거겠지. 거기에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와 묘하게 웃는 것처럼 끝이 내려간 눈매가 어우러져서 토끼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한 게 너무 예쁘다. 하지만 역시 제일 현실감 없는 건 이거겠지.
“얼굴 크기 무슨 일이야.”
이게 바로 CD로 가려지는 얼굴 크기인가. 뭐, 과장 조금 보태서 그 정도라는 거지만.
머리카락도 피부도 하얘서 그런가? 이상할 정도로 작아 보인다. 게다가 이 정도의 얼굴형은 성형외과 광고에서도 거의 본 적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갸름한 계란형이었다.
“이게 진짜 내 얼굴이라고?”
더 자세히 보려고 한 걸음 내디디자 눈앞의 아리따운 여성도 가까워졌다.
그렇겠지, 거울이니까. 되게 당연한 건데 그게 새삼스럽게 기뻤다.
거울 바로 앞까지 다가갔는데도 피부에는 잡티는커녕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면 요즘 TV 화질에서도, 아니 미래에 나올 더 선명한 화질에서도 굴욕 없는 미모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슬쩍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작은 손에 비해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턱 선을 사르륵 감싼다.
…미친. 손가락이랑 손톱까지 예쁜 거 실화냐?
이 세계에 네일아트가 있으면 좋겠다. 이 정도로 완벽한 손톱 모양에 아무것도 발리지 않았다는 게 매우 안타깝다. 원래 내 손톱이 이랬으면 기본 케어라도 받아 봤을 텐데.
아니, 못 받았으려나. 내 돈은 내 돈이 아니었으니까.
하여간. 손마디에 있는 주름이나 손톱의 반달 모양 반점조차 완벽한 손에 한참을 감탄했다.
뺨은 뭐…,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만져 본 것 중에 최고의 감촉을 자랑했던, 조금 전의 카펫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하다. 어딜 어떻게 만져도, 결대로 만져도 반대로 만져도 손이 녹아들 듯 부드럽다. 그 감촉에 반해서 한참 동안 뺨을 문질렀다.
“…음, 이건 좀 변태 같나?”
워낙 예쁘다 보니 이러고 있어도 그냥 장난치는 걸로 보이긴 하지만…. 아직 내 몸이라는 자각보다 남의 몸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서 그런가 기분이 묘하다.
응, 여기까지만 하자. 나중에 더 봐야지.
내가 봤을 땐 이 완벽한 미모에 감탄하며 만끽하는 데만도 사흘은 훌쩍 지나갈 것 같다. 다만 사흘간 거울 앞에서 헤헤거리는 날 생각하니 뭔가 좀 묘했다. 이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원래 얼굴을 떠올리면 좀….
아, 기왕이면 예쁜 옷도 입혀 볼까? 이 완벽한 미모에 예쁜 드레스나 원피스를 코디 한다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릴 때도 못 해 본 인형 놀이를 내 몸으로 해 볼 줄이야.
어릴 때 맨날 돈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할머니는 내게 제대로 된 장난감 하나 사 준 적이 없었다. 물론 동생이 가지고 놀 로봇이나 블럭, 레고 같은 건 차고 넘치게 받았지만.
동생이 실컷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내면 돈 아깝다며 나한테 주곤 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긴 했지만, 그래도 인형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었다. 학교 끝난 뒤에 문구점 진열장 앞에 찰싹 달라붙어 몇 시간이고 인형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었다.
분명히 엄청나게 갖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겠지. 문구점 주인아저씨가 쫓아낼 정도였으니까.
-안 살 거면 가라, 아가야. 너 그러고 있으면 다른 애들이 무서워서 도망가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혹시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겁났던 걸지도 모른다. 행색이 꾀죄죄한 애가 콧물 훌쩍거리며 그러고 있었으니.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후로도 가끔 아저씨 몰래 먼 곳에서 진열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어차피 집에 가 봤자 할머니가 시키는 집안일을 해야만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이 없었지.
“…에이, 우중충한 생각은 그만하자. 이제 거기로 돌아갈 일도 없는데.”
그보다 이건 잠옷인가? 잘 어울리긴 하는데 이것까지도 너무 하얗다. 마치 다른 색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로판 소설에 나오던, 속살이 훤히 비치는 슬립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꽤 얇아 보인다. 얼굴이 워낙 예쁜 데다 청순한 분위기라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좀 심심한 느낌도 든다. 움직이긴 편하지만 어차피 일할 것도 아닌데 좀 불편하면 어때. 그보다는 예쁜 옷이 입어 보고 싶다.
옷 아래로 살짝살짝 비치는 가죽 족쇄와 잿빛의 사슬은, 그렇기에 오히려 더 이질적으로 보였다. 온통 하얀 내 모습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어서.
이리저리 몸을 돌리면서 거울에 모습을 비쳐 보다 문득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드레스만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장신구도 사 달라고 해 볼까? 하얀 머리카락이니 어떤 색의 보석이든 어울릴 것 같다. 머리 모양도 이리저리 바꿔 봐도 좋을 것 같고.
“흠.”
귀 뒤로 살짝 넘겨 보려 했더니 너무 부드러워서 사르르 빠져나간다. 물을 좀 묻히면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였다.
“아…!”
츠촤아아, 하는 어딘지 불길하고도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집은 샤워기가 세면대에 붙어 있었다. 그 탓에 레버를 제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아야만 했다. 다른 가족들은 다 괜찮은데 유독 동생만 샤워 후에도 레버를 돌려 놓질 않아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았던 나는 자주 물벼락을 맞곤 했다.
그때 들었던 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빗나가질 않지.
“으으, 차가워!”
몸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비명을 지르며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대로는 물줄기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다시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수도꼭지를 찾아 겨우 물을 잠갔을 때는 이미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망할. 옷이 몸에 엉겨 붙어 기분 나쁘다.
그러고 보니 시녀는 왜 안 나타나지? 보통 로판에서는 시녀가 꼭 초반에 등장하는 법인데. 빨리 나와야 부탁을 할 텐….
헐, 미친. 젖어도 이뻐.
원래 물에 젖었을 때 예쁜 사람이 찐이라고 하던데, 샤페릴이 딱 들어맞았다. 오히려 뭔가 색기라고 부를 법한 무언가까지 더해져서 진짜 예쁘다.
샤페릴의 미모에 과연 빈틈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크으.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가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