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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3화 (3/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3)

소설 보면 맨날 돌려 말하고 어쩌고 하다가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러니 직구로 말하자.

그런 생각에 대놓고 내 생각을 말했다.

“…….”

금색 눈동자에 혼란이 스민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치 유리병 속 반짝이 풀 섞인 물처럼 빛난다. 아니, 그거보다 조금 더 예쁘려나?

“으음, 이해는 해요. 솔직히 어제까지 멀쩡하다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는 게 이상하긴 하죠. 근데 제가 지금 진짜 답답한 상황이거든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자 금색 눈동자가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집은커녕 이름도 기억이 안 나요. 이대로 밖에 나가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하여튼 객사하기 딱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도 마음이 좋진 않을 거잖아요.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바짓가랑이 잡고 빌어야 할 판인데, 좀 믿어 줘요.”

여주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대충 기억난다. 초반 배경 설명할 때 나왔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샤페릴은 원인 불명, 병명 불명의 희귀병에 걸린다.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약값이 들어가긴 했지만, 유력 후작가였던 리베테 가문에 있어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든 소설이 그렇듯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거짓말처럼 리베테 가문이 하던 사업이 모두 망한다. 출자한 상선은 해적에게 노략질을 당해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영지에는 병충해와 역병이 돌아 농사가 망한다. 거기에 계속 들어가는 약값까지.

순식간에 집안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리베테를 놓지 않는다. 평소 베풀어 왔던 은혜 덕분에 주변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던 그들에게 두 번째 불행이 찾아왔다.

사병단이 거의 해체에 가까운 수준으로 축소된 틈을 타 도적들이 저택을 덮쳤다.

아수라장이 된 저택. 그 와중에 발열이 시작되어 쓰러진 샤페릴. 그녀를 홀로 두고 도망가지 못한 부모님은 도적 떼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흐린 정신 속에서 부모님의 비명을 들었던 샤페릴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 엔프리제가 있었다.

“정말로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엔프리제가 쉽게 날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런 충격적인 일을 겪고도 정신을 유지했던 샤페릴이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니.

게다가 아무리 기억상실이라지만,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목과 사지를 구속한 족쇄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겠다며 이런 말을 꺼내는 내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네. 혹시 저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며 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럼 신세 지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알려 줄 리는 없지. 잘 생각해 봐, 엔프리제.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건 간에 이 기회를 놓칠 거야? 합의하에 날 감금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고도 네가 피폐 뽕빨물 남주냐?!

“…….”

엔프리제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얼굴 가득하던 비웃음이 사라지고 그늘이 진 그 얼굴도 꽤 분위기가 있다. 소설 지문에서는 맨날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라고 적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보니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

하긴. 주변 눈치 볼 필요 없는 고귀한 귀족 영애인 샤페릴과 달리 나야 남 눈치만 보고 살아왔던 K-직장인인데, 이 정도야 껌이지. 소설 초반만 읽은 내가 얘에 대해 다 알진 못한다만.

게다가 여주가 너무 잘 알아채면 또 소설이 진행이 안 되잖아. 소설 전개를 위해서라도 독자들이 다 알아채도 여주는 몰라 주는 게 정석이지.

“…일단 이거부터 드십시오.”

언제 가져온 건지 엔프리제가 찻잔을 하나 내밀었다. 식었는지 흐릿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서는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게 여주가 먹기를 거부하는 통에 엔프리제가 입술을 사용해서 억지로 먹였던 그건가. 샤페릴이 입술을 깨무는데도 입안 깊숙한 곳까지 혀를 넣어 휘젓던 그 키스신 묘사….

잊을 수가 없지.

뭐, 나야 거부할 생각은 없다. 마침 목도 말랐고 잘됐다 싶어 덥석 받아 입을 댔다. 딱 넘기기 좋을 정도로 따뜻해서 꿀꺽꿀꺽 넘기자 엔프리제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저렇게 쳐다본대? 차 마시는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저, 뭔가 묻었나요?”

질질 흘리면서 마신 것도 아닌데 쳐다볼 만한 게 있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계속 쳐다보시길래요. 좀 보기 추했나요?”

“아니요. 그래서 본 건 아닙니다만….”

흠.

날 선 말투의 비아냥거리는 남주는 어디로 간 건지, 엔프리제가 곤혹스럽다는 듯 말을 흐렸다. 하긴 저 싫다면서 도망가려고 아등바등하던 여자가 갑자기 이렇게 변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내가 너무 예뻐서 봤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시답잖은 장난을 내뱉었다.

흠칫, 하고 엔프리제의 몸이 떨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제 입가를 꽉 틀어막았다. 손등 위로 울퉁불퉁한 핏줄이 퍼렇게 서 있었다.

이거 알지, 알지. 소설 남주들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할 수 없을 때 많이 하는 행동이잖아. 혹은 얼굴 빨개진 거 가리려고 하는 거거나.

근데 빨개지진 않은 것 같은데…?

아, 혹시 거긴가? 슬쩍 시선을 돌려 그곳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둥글게 솟은 그곳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역시 로판 남주는 이거지. 대놓고 얼굴 같은 곳이 빨개지는 건 너무 알기 쉽다.

저렇게… 귓바퀴 같은 곳이 빨개져서 여주는 모르고 독자들만 알아채야 제맛이지.

거 귓바퀴도 예쁘게 생겼네.

“하하, 농담이에요.”

실없는 웃음을 흘리자 엔프리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귓바퀴는 더 빨개졌다. 쑥스러운가?

“…하로웰 경.”

더 상대할 필요 없다는 듯 엔프리제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사실은 쳐다보고 있으면 감정이 드러날까 봐서 그런 거겠지.

귀엽네.

하지만 표정은 숨길 수가 없다. 꿈틀거리는 눈썹이나 입가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 내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다는 얼굴.

현실의 내가 내뱉었다면 다들 싸늘하게 굳었을 실없는 한마디. 현실이었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정도의 얼굴 천재가 저렇게 반응한다는 게 은근히 재미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로판 여주들이 몰라서 남주랑 엇갈리고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모르는 척 남주 반응을 즐겼던 게 틀림없어. 아니면 작가가 소설 전개에 필요하다고 모르는 척하라고 시켰든지.

저렇게 대놓고 티 내는데 어떻게 몰라?

“네.”

하로웰이라고 불린 노의사가 대답했다. 의사는 나를 흘긋 보더니 진찰할 때 썼던 청진기 같은 걸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었다.

정리가 다 끝나자 그는 한 손을 제 가슴께에 올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레이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이 평생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으아, 레이디래. 완전 오글거린다.

글로 읽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막상 귀로 들으니 막 팔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레이디’답게 정중하고 품위 있게 대답해야겠지?

흠흠.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중이 뭐죠? 품위는 뭐죠?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없는 내가 인사를 해 봤자 이게 최선이겠지. 그렇게 소설을 많이 봤는데 왜 써먹질 못하니. 바보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걸 어떻게 해.

“…….”

의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엔프리제 쪽을 보았다.

뭐, 의사가 걱정하지 않아도 조급할 일은 없다. 당장 내일 회사 가지 않으면 짤리는 것도 아니고 밥 차리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는걸.

다만 아쉬운 건 좀 있다. 기억이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빙의물을 보면 가끔 인물의 기억을 특전처럼 주는 경우가 있던데, 나는 굉장히 불친절한 경우에 당첨됐나 보다.

뭐, 상관없나.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내 목표는 하나다. 이대로 대공에게 감금당한 채 평생 띵가띵가 놀고먹으면서 지내는 것.

…크으, 지금 좀 상상했어. 완전 행복해.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싱글거리자, 의사는 나를 가련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대공도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어음, 그럼 난 이제 뭐 하지?

* * *

톡, 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남자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이 평생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로웰의 한마디가 가시처럼 그의 마음에 박혀 빠지질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스트레스, 라.

그녀의 목과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족쇄를 떠올리며 엔프리제는 입술을 짓씹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는, 그저.

-전하의 이야기를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경비대에 신고했을 겁니다.

오랫동안 엔프리제를 보아 왔던 노의사는, 처음 보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최대한 빨리 레이디의 구속을 풀어 주시는 게 좋습니다. 저대로는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억 상실이라는 말을 듣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기억을 다 잃었는데도?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레이디는 영리하신 분입니다. 갑자기 신체를 구속당해 감금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셨으면서도 일부러 언급하지 않잖습니까. 전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러시는 걸 겁니다.

그렇겠지. 엔프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질끈 눈을 감았다.

-저러다가 더 상태가 심각해지면 어찌 될지….

싸늘한 목소리였다. 물론 엔프리제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후….”

엔프리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처음 만났던 날의 그녀가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대공 전하. 리베테 백작가의 샤페릴이라고 합니다.

사교계의 꽃.

성녀.

현신한 천사.

그녀를 일컫는 말은 참으로 많았지만, 핵심은 딱 하나였다. 그녀라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주었다.

그것이 설령 ‘황가의 피를 도둑질한 더러운 놈’이라고 해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샤페릴은 그날의 엔프리제를 기억하고 있을까?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분명 꼴사나운 모습이었을 테니.

“나는….”

하로웰의 말이 맞았다.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그녀를 해방해 주어야만 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건.

“쓰레기지.”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술렁였다.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던 샤페릴의 모습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던 순수하고 상냥한 샤페릴의 모습에.

온전히 제 손에 쥐여진 사랑하는 이의 모습에 묘한 고양감까지 느낀 자신은.

태생이 쓰레기였던 자신은, 결국 쓰레기로 자라났다.

“…하.”

엔프리제는 등받이에 기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 작은 벌레 같은 것이.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한 그가 벌떡 일어나 서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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