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2)
“별일이군요.”
흐릿한 정신을 깨우는, 낮고 낯선 목소리. 그에 반응하듯 눈앞이 맑아졌다.
아직 잠에 취해 흐린 시야에 비친 것은 잠들기 전 봤던 내 방 천장이 아니었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낮과 밤이 모호한 공간. 묘하게 창백한 인상의 방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문양의 가구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펫. 그리고 이건 분명 꿈일 게 틀림없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날카로운 칼날 같은 남자.
“이 시간까지 날뛰지 않고 얌전히 계시다니. 드디어 무의미한 발버둥임을 아신 모양이군요. 하긴. 그런 걸 달고서도 날뛰실 정도로 머리가 나쁘진 않으시겠죠.”
비아냥처럼 들리는 말투인데 목소리에서는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사지와 목을 훑는 남자의 금색 눈동자에 이끌려 시선을 움직였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부드러운 천 조각 위로 꽉 동여맨 가죽 벨트, 그리고 사족과 침대 다리를 연결한 사슬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철그렁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손목의 사슬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남자는, 놀랍게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눈초리로 날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홱 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이 낯선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으음,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요즘 웹소설에 빠져서 자기 전에 꼬박꼬박 보고 자긴 했는데, 그 때문에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이게 인터넷에서 글로만 접해 본 자각몽이라는 건가. 어떻게 해야 깨어날 수 있는 거더라.
잠시 고민하다가 고전적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윽, 무거워…!”
뺨을 꼬집으려 손을 들자 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천근만근 늘어진다. 꿈에서도 원래 무게가 느껴지는 거던가? 아니, 다른 건 다 현실성이 없으면서 왜 이건 묘하게 현실적이지?
…생각해 보니 꼭 뺨을 꼬집을 필요도 없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왼손의 손등을 꽉 꼬집으려 손을 움직였다.
“…아압…, 파…!”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가더니 퍽, 하고 내 손등을 가격했다.
무슨 일이야, 이게. 아파. 무거워.
아니, 꿈인데 왜 아파? 설마 이게 꿈이 아니라고?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데?!
눈을 떴더니 연예인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예쁜 흑발 금안의 남자가 날 비아냥거리고, 목이랑 손목에는 족쇄가 달려 있고, 대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묶여 있어서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하…고?
…응?
왠지 익숙한 상황인데. 어디서 봤더라.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눈앞으로 가져왔다.
“…하얀색?”
내가 무슨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아니고 하룻밤 새 머리가 하얗게 셌을 리는 없다. 물론 ‘이 정도로 고생하는데 백발이 되지 않은 게 용하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지만, 딱히 어제 더 특별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생한 건 없다.
그러니 이건 분명 그거겠지.
“…설마 내가 소설 빙의를 하다니.”
남자 주인공의 외모와 이 특수한 상황을 보자마자 작품 하나를 떠올렸다. 내 기억력이 뛰어나서…, 면 좋겠지만 당연히 그건 아니다.
그냥 어젯밤 읽다 잠든 소설이라서, 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나는 19금 피폐 뽕빨물 <감금된 영애에게는 비밀이 있다>의 여주인공, 샤페릴에 빙의한 모양이다. 미친 대공이 사교계의 꽃인 백작 영애를 납치 감금해서 탈출하려는 그녀에게 엄한 짓을 하던 바로 그.
“…실화야? 진짜로 내가 빙의했다고? 이거 완전….”
대박…!
완전 대박이다!
신이시여, 한 번도 믿어 본 적은 없지만 감사합니다!
남들은 그런 걸로 엄살 피운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매일. 각종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감금과 다름없는 이런 상황을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글을 보며 쌉가능을 외치던 매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감금이 대수냐고 외치던 매일…!
그랬던 내가 정말로 이 천국에 빙의한 것이다.
실제로 19금 피폐 뽕빨물의 미친 주인공에게 잡혀 감금된 이 상황이 왜 천국이냐고? 커뮤니티 글이야 가상이니 쌉가능을 외친 거지, 실제는 다르지 않냐고?
무슨 소리.
이 남주, K-로판 남주답게 여주를 굶기는 일은 절대 없다. 코스 요리까진 아니지만, 매일매일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대령하고 디저트도 준다. 가끔 여주가 뭐 먹고 싶다고 하면 아무리 비싸도, 아무리 구하기 힘들어도 무조건 구해 온다.
그뿐이겠어? K-로판에서 드문 일이긴 하지만, 중년의 여성이 시녀로 붙어서 여주 시중은 다 들어 준다. 방은 언제나 깨끗, 어지르는 사람도 없고 빨래 역시 완벽! 심지어 여주가 감금된 제 상황을 한탄하여 바닥에 그 끈적이는 주스를 패대기쳐도 알아서 다 치워 줄 정도였다.
먹여 줘, 재워 줘, 치워 줘, 돈 안 벌어도 돼!
“이보다 더 좋은 천국이 어딨어?!”
물론 소설 내에서는 피폐 뽕빨물답게 강압적인 씬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주가 이 저택을 탈출하려 할 때만 생기는 일종의 해프닝 같은 것이었다.
여주가 지쳤거나 반포기 상태로 탈출을 시도하지 않은 날에는 다소의 비아냥을 남긴 채 얌전히 떠나곤 했다.
이 소설의 남주가 여주에게 바라는 건 딱 두 가지.
하나, 방에서 나가지 않는 것.
둘, 매일 달콤한 향이 나는 차를 마시는 것.
그 두 가지만 지키면 여주 몸에 손 하나 대지 않는다. 차에 든 게 뭔지 내가 읽은 부분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먹고 뭔가 몸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리어 찜찜하다고까지 이야기했으니 대충 예상은 간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뿐.
“모르겠어요.”
“레이디의 성함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모르겠어요’만 반복했다. 노의사는 흘끗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이 저렇게…, …바뀐 거지?”
“아무래도 기억상실 같습니다.”
의사의 담담한 선고에 나도 모르게 승리의 미소를 지을 뻔했다.
흠흠. 연기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원. 안에 든 게 샤페릴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쫓아낼지도 모르니 절대로 들키면 안 돼.
흐흐, 그래도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모르쇠만 반복한 보람이 있다. 정확하게 제가 원하던 병명입니다, 선생님. 만세!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남자의 시선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들켰나? 아니, 그럴 리가. 빙의한 주인공이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한, 들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직은 괜찮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생글생글 웃어 보이자,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시니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억상실?”
어…, 나한테 말 거는 거 아니지…?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며 말하는 통에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의사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인격 장애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가 내 손목에 시선을 준다.
남자…, 아, 그러고 보니 쟤 이름이 뭐더라? 읽는 내용의 절반이 씬이었던지라 여주가 하도 ‘저 남자’라고 불러 대서 나도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아! 엔프리제!
엔프리제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료됩니다.”
크으,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보던 그 대사를 현실에서 들을 줄이야. 새삼스럽지만 내가 소설 속에 빙의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대답조차 없이 밖으로 나갔던 남자는 한참 뒤에 이 의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내고 대응 전략까지 세워 두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스트레스라.”
“저…,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직 소설 초반밖에 읽지 못한 나는 샤페릴에 대해 거의 모른다.
물론 그녀의 배경이나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초반에 요약되어 있기에 대충 알고는 있다. 하지만 샤페릴의 습관이나 말투 같은 건 거의 모른다. 내가 읽은 거라곤.
-그만…! 아…!
-싫어, 싫어요! 당신이 미워!
-으, 흐윽….
이런 거뿐이라서….
뭐, 설령 안다고 해도 연기의 ㅇ 자도 해 본 적 없는 내가 발연기를 하다 안에 든 게 샤페릴이 아니라는 게 들통나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그래서 기억상실인 척을 했다.
빙의물의 정석 루트 중 하나이기도 하지. 물론 원작을 잘 모를 때의. 애초에 샤페릴이 처한 상황상 이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순진한 척 엔프리제를 바라보자, 그가 심란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제 탓으로 기억상실 혹은 인격 장애를 겪게 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지.
아니, 아니지. 애초에 쟤 미친놈이잖아? 어쩌면 이 상황을 달가워할지도 모른다.
흠, 뭐, 어쨌든. 쟤가 죄책감을 느끼건 기뻐하건 나랑은 별 상관 없는 일이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나한테 더 잘해 줄 테고, 달갑다면 내 기억을 되돌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 여기서 벗어날 마음이 없는 내게는 두 상황 모두 나쁘지 않다.
밖에 나가 봤자 샤페릴의 앞에 펼쳐진 건 고난과 가시밭뿐인데 뭐 하러 나가겠어?
“…당신이 생각한 것치곤 참신한 방법이로군요.”
한참 생각하던 엔프리제가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와, 미친. 존잘이네. 이래서 로맨스는 남주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미친놈인 거 뻔히 알고 있고, 지금 날 비아냥거린다는 것도 충분히 느껴지는데 웃음에 호로록 감겨 버렸다.
이런 미남에게는 내성이 없어서 더 그런가. 왜냐하면 내 주변에 있었던 남자들은….
…후, 여기까지만 말하도록 하자.
“이런 짓을 하면 제가 당신을 놓아 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크으, 소름. 완전 오글거리는 대사인데 얼굴이 돼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소설 보는 것 같은 감각이라서 그런가. 뭔가 집착남을 직관하고 있다는 느낌에 전율이 올라온다.
아니,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쟤 눈엔 내가 수작 부리는 걸로 보인다는 거 아냐?
틀린 건 아니지만 수작의 종류가 좀 다르다. 저기, 나랑 당신이랑 같은 목표하에 움직이고 있거든요…? 나 여기서 진짜 쫓겨나기 싫거든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
“도망갈 생각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