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항해
* * *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두 사람의 일상은 예전과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식사를 하고, 각자 작업과 공부를 하다가 서로를 탐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다.
창문을 넘어온 햇빛에 눈을 뜬 성현은 제 품에서 곤히 잠든 얼굴을 꽤 오랫동안 구경하다가 거실로 나갔다. 오늘따라 지유환의 아침잠이 길어지는 것 같으니 오랜만에 식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냉장고를 훑어보던 성현은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하고 식빵을 버터에 구웠다. 오늘 만드는 건 썬드라이 토마토와 바질페스토, 프로슈토를 넣은 샌드위치였다. 지유환은 거기다 종종 부라타 치즈와 올리브유까지 넣어서 아침을 만들어주곤 했었다. 주방에서는 기분 좋은 버터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렇게 빵 위에 재료를 올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일어났어?”
고개를 돌려 눈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방에서 나온 지유환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눈에 그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현은 두 발이 묶인 것처럼 자리에 굳어서 그를 마주했다. 이마를 짚고선 지유환은 핏발선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
그 복잡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저기 서 있는 이는 올해 여름 보아왔던 지유환과는 달랐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두 가지 결론이 있다고 했었다. 기억을 잃은 시기를 통째로 잊어버리게 되거나 그 시기 또한 뇌리에 남게 되거나. 어떤 쪽이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목도하게 되니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성현은 이어진 유환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나는 다 기억이 나요, 형.”
거기까지 말한 지유환은 성큼성큼 걸어와 굳어있는 성현을 단숨에 끌어안았다. 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세게 껴안아오는 탓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잔뜩 젖어있었다.
“여름 내내 있었던 일들이 전부 다….”
이 순간을 어렴풋이 상상했었다. 다시 기억이 돌아온 지유환을 만나면 뭐라고 말하며 어떻게 맞아줄까. 여러 가지를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현은 멍하니 입을 벙긋거리다가 굳은 듯이 멈춰 섰다. 곧 그는 본능적으로 체온을 확인하듯 지유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깊게 끌어안고 한참 동안이나 심호흡했다.
“아…….”
백성현은 작게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던 그 당시로 돌아간 듯했다. 자꾸만 발을 헛딛고, 손이 떨려 문도 제대로 열 수 없었던 그때로. 비 내리는 길 위를 우산도 없이 달려 응급실로 갔었다. 가진 건 뭐라도 내놓을 수 있으니 지유환만 괜찮았으면 했다.
시끄러운 응급실에 서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초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당장 내일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나 몸이 너무 아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같았다. 어른이 된 그의 삶에 필요한 거라곤 지유환밖에 없었다. 너무 과분했던가. 함부로 행복했던 건가. 끝도 없이 스스로를 향해 질문했었다.
그때 듣지 못한 답을 찾아 백성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지유환은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가만히 덮었다. 백성현의 눈이 흐려졌다.
“너 너무했어. 나한테 잘못했어.”
그렇게 혼자 사고 당하고 그러는 거, 나한테 너무하는 거야. 지유환은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을 빠짐없이 읽어냈다. 뒤늦게 안심을 시켜주듯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에 뜨거운 열감이 목 안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유환 또한 사고의 피해자였고, 당연히 그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건 단지 죽을 만큼 무서웠던 마음의 여파로 인한 투정이었다. 백성현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다 알아달라는 것처럼 칭얼거리게 됐다. 나 정말 무서웠다고. 알아달라고. 두고 가면 안 된다고.
“제가 잘못했어요. 성현 형.”
“…….”
“많이 무서웠겠다. 그렇죠.”
다정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용서를 구해왔다. 지유환은 잘못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다정함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던 날들이 머리를 스쳤다. 어리광부리듯이 한참을 안겨 있던 성현은 몸을 뒤로 물리고 우물대며 말했다. 왜인지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 너 아무 잘못 없는데. 알면서 이런 말이나 해서,”
“형이 나한테 미안할 일은 없어요.”
“…….”
“내가 형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고…,”
이렇게 지유환이 뭐든 다 괜찮다고 할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마음을 받다 보면 그 말이나 감정이 제 안에 뜨겁게 쌓이고 쌓여 종래에는 터져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 감정을 사람들은 으레 행복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지유환이었다.
“또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아무 기억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지유환의 눈매가 작게 떨렸다. 그는 아주 긴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라고 했다. 열아홉으로 돌아간 꿈이라 당연히 악몽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때는 지우고 싶었던 시기였어요.”
“…….”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데….”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에 손끝이 저렸다.
“거기에 형이 있었어요.”
“…….”
“그때 저는 이기적이고 무례한 사람이었어요. 눈앞의 일들에서 벗어나기 급급했는데.”
가만히 경청하던 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말미는 떨리고 있었지만 이 말은 꼭 해야만 했다. 성현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너 열아홉 살 때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였어.”
“…… .”
“나는 직접 봤잖아.”
“…형한테 못되게 굴었던 것도 다 기억해요.”
“못된 애 아닌데.”
성현은 곧바로 정정했다.
“넌 그럴 수밖에 없었지.”
“…… .”
“처음엔 나도 좀 서운했는데. 나중엔 그냥, 귀여웠어. 그런 네가 또… 좋았어.”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 애를 좋아했다. 나란히 누워있을 때마다 형이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하며 파고 들어오던 지유환은 무척이나 귀여웠었다.
어느새 코끝이 맞닿았다. 성현은 과거에서 건져 올려진 그를 안심시키듯이 고개를 조그맣게 저었다. 코끝에서부터 간지러운 감각이 피어올랐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가볍게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머금고 여린 점막을 부드럽게 맞댔다. 서로를 확인하고 어루만져주는 입맞춤이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난 뒤 지유환은 처음 듣는 그 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아침을 나눠 먹으면서 듣게 된 이야기였다.
결국 그 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졸업을 막은 사람들이 빠른 시일 내에 출국하지 않으면 재단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까지 걸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벌어질 재판이라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다. 재판은 2심까지 갔고, 그쪽엔 변호사가 여섯이나 붙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소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애의 어머니가 상속에 대해서 치열하게 준비하고 갔다는 걸 상대는 몰랐다. 세상의 냉혹함, 핏줄 따위 뭣도 아니라는 것, 결국 모든 게 돈이라는 것. 생각보다 그따위 것들은 허망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애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죽음이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과업이었다는 것 또한.
오히려 재판 결과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위자료로 받게 되었고, 대입을 준비하기로 했다고 했다. 장장 2년에 걸친 소송이 끝나고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형을 만났어요.”
“아….”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는 형이 있는 거예요.”
출발점과 도착지를 따질 것 없이 한곳으로 모이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게 마치 정해진 섭리라도 되는 것처럼. 지유환은 미미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막 꿈에서 깬 사람처럼 나른한 목소리였다. 햇빛 사이로 유영하는 음성이 따뜻하고 나긋했다.
“나도 외면하고 있었던 나를… 형이 용서해주러 온 것 같아요.”
백성현은 놀란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피어싱이 걸린 귓등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게 이번 긴 꿈의 이유였을까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다.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 * *
주말 아침에 지유환에게 안겨 영화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그가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성현은 저를 껴안은 커다란 몸에 기대어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방에서 지유환의 체향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성현은 자각 없이 제 뺨을 지유환의 팔 위로 부비기도 했다.
“진짜 좋은 냄새 난다, 너….”
그가 흘긋 고개를 돌려 말하자 지유환은 성현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백성현은 픽 웃으며 조금 더 보비작거렸다. 캠퍼스에 사는 고양이가 유환에게 애교를 부렸을 때 그가 이런 식으로 만져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지유환의 손길은 넉넉해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 점심은 형아가 해줄게.”
뭔가 맛있는 걸 직접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재료를 생각하기 여념이 없던 성현은 뒤늦게 지유환의 표정이 다소 굳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성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아가 만들 수 있는 게,”
“…….”
다시 미간을 찡긋, 하는 걸 본 백성현은 그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여름 내내 어려진 지유환을 상대하며 새로 생긴 입버릇이 하나 있었다. 원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애들을 대할 때는 으레 그런 호칭으로 스스로를 지칭하곤 했는데, 올여름 들어 완전히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뭐. 왜. 나 형 맞잖아, 왜 그러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던 터라 소심하게 항의도 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내 묵묵부답으로 있던 지유환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성큼성큼 서랍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해보고 싶다고 한 게 있었죠.”
지유환의 손에 들린 구급상자를 본 백성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열아홉의 지유환은 지칠 줄 모르고 섹스를 해대긴 했지만 자주 응석 부렸고 귀엽게 굴 때가 많았다. 모든 게 처음이라는 말에 걸맞게 뭘 해도 받아들여주는 편이라 -체위 또한 대부분 백성현이 하는 대로 따라왔었다- 그에게는 꼭 시켜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백성현은 거즈를 써서도 기분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예전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도 했고, 스물넷의 지유환에게 하기엔 엄두도 나지 않아서 접어뒀던 일이었다.
- 형아가 기분 좋게 해줄게.
- 해보자, 응?
열아홉의 지유환은 계속해서 조르는 백성현을 보면서 그렇게 하고 싶은 거면 다음에 해보라고 대답해줬었다. 몸에 넣기 직전이었는데, 지금은 이 안이 너무 뜨겁고 기분 좋아서 못 멈춘다고 말하며 안을 가르고 들어왔던 게 그 당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꼭 다음에는 해봐야지, 하고 벼르던 차에 지유환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었다. 성현 나름대로는 잔뜩 기대로 부풀어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거의 반 정도 포기한 상태였는데 저걸 알아서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보게…? 진짜?”
눈을 반짝이는 성현을 보며 지유환은 가볍게 사르르 웃었다. 긴 눈매가 예쁘게 휘는 걸 보는데 왜 당혹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요. 해봐요.”
어떻게, 하고 묻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평소와는 다르게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춰와서 백성현의 몸이 침대 헤드까지 밀려났다. 그 입맞춤만으로도 지금 지유환의 심기가 뒤틀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지점에서? 왜? 여러 가지 질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탓에 나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도 몰랐다. 헐렁한 파자마를 순식간에 다 벗겨낸 지유환은 목 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맨살이 드러난 걸 확인해버린 성현이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그는 숨을 참고 있던 사람처럼 할딱대고 있었다.
뜨겁고 말캉한 것이 목 위를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가 입술을 가져다 대는 곳곳에서 감각점이 피어나고 있었다. 울혈을 만들고 싶은 것처럼 세게 빨아올리던 지유환은 기울어져 있는 성현의 몸을 바로 세웠다.
곧바로 그는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유두를 가두고는 은근하게 꼬집었다. 백성현의 허리가 즉각적으로 튀었다. 그 반응에 미미하게 웃음을 흘린 유환은 할딱대는 입에 손가락을 물려주고 아래로 내려갔다. 유륜과 돌기까지 미끈한 혀로 쓸어 올리자 백성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읏….”
갑자기 왜 달려든 건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현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유환의 손가락을 얌전히 입에 넣고 빨았다. 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가락을 혀끝으로 누르기도 하고 간지럽게 핥아 올리기도 하는 게 섹스하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도중에 너무 힘들거나 하면 손가락을 세게 깨물면 됐다. 이건 지유환과 계속해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고리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입 안에 손을 물고 있는 것이 퍽 오랜만이라 머릿속이 뜨거워져 왔다.
“형.”
당연히 뒤를 풀고 안으로 파고 들어올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지유환은 가볍게 성현을 들어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것도 뒤에서 안은 자세였기에 얼결에 방금처럼 다시 폭 안기게 된 거였다. 성현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응? 뭐 하려, 아, 읏…!”
커다란 손이 그대로 성기를 잡아올 줄은 몰랐던 성현이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줬다. 이미 반쯤 서 있던 성기가 손이 움직일 때마다 크기를 더해갔다. 성현은 익숙한 품에 몸을 맡긴 채로 어깨를 떨었다.
지유환은 연분홍색을 띠는 살덩이를 부드럽게 주욱 쓸어올리고 가볍게 손을 뗐다. 잠시 뒤부터는 귀두를 손바닥으로 뭉개듯 짓누르며 앞뒤로 느리게 움직였다. 쿠퍼액에 손바닥이 금방 질척하게 변했다. 그 미끌거리는 감각에 성현의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하으, 아읏, 으.”
더 센 자극이 필요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지유환은 마치 처음 자위를 가르쳐주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이미 어디를 만져주면 좋아하는지는 다 알면서 하는 짓이었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기에 성현은 몸을 움츠리기만 했다.
“아, 흐으….”
이내 지유환은 잘 참았다는 것처럼 조금 더 센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귀두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둥글리듯 움직여대는 감각에 백성현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백성현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여 손바닥 위로 성기를 치댔다. 그 모습을 본 지유환이 낮게 웃었다. 여유롭기까지 한 웃음소리에 머리가 쭈뼛 섰다.
다시금 뿌리를 쥐고 길게 훑어낸 지유환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였다.
“형도 이 큰 걸 못 써서 아쉽겠어요.”
“흐으, 아…!”
실제로 백성현의 성기는 큰 편이 맞았다. 지유환의 손이 워낙 컸기에 한 손으로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이고 원래는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백성현은 단 한 번도 아쉽다거나 생각한 적이 없었다.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젓기도 전에 지유환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형은 내 입 안 좋아하잖아.”
“하아, 읏.”
“맨날 목구멍까지 넣으면서…….”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얼굴이 다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어진 행동에는 백성현의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지유환이 그대로 살기둥에 젤을 들이부었던 것이다. 넉넉한 손이 미지근한 젤을 윤활제 삼아 질꺽이며 움직임에 따라 판판한 배에도 복근이 잡혔다.
“으응, 흐, 으, 아읏.”
그때까지만 해도 지유환이 무슨 생각인지는 정확히 몰랐었다. 하지만 기어이 손을 뻗어 구급상자를 뒤지는 걸 보면서는 어떠한 강렬한 예감을 해버리고 말았다.
“야아, 잠깐만. 너 뭐 하려는…,”
백성현은 자잘하게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지유환은 잔뜩 걱정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성스럽게 구급상자를 뒤져서 치료를 해줬었다. 그때처럼 섬세한 손길이었다.
“써봐야죠. 이거… 해보고 싶다며.”
“아니, 말고. 나 말고 너한테, 해보고 싶, 아, 흐, 아윽…!”
유환은 거즈가 축 늘어질 정도로 젤로 질척질척하게 적시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발개진 선단을 거즈로 느릿하게 감쌌다. 가슬가슬한 표면이 잔뜩 예민해진 아래를 덮어오자마자 백성현은 이것이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던 감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이 귀두를 물어오는 것보다도 촘촘하고 보드라웠다. 순식간에 모든 감각점이 선단으로 내몰렸다. 성현은 본능적인 거부감에 정신없이 도리질 쳤다.
“아, 진짜. 이거 진짜 이상해. 나 안 해. 안 할래.”
하지만 아무리 몸을 뒤로 물려도 단단한 가슴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걸 다 봤을 지유환은 그만하기는커녕 피어싱이 있는 왼쪽 귀를 작게 머금었다. 이제는 피어싱이 완전히 자리 잡은 귓바퀴에 이를 내어 잘근 씹기도 했다. 이어진 지유환의 말에 백성현은 숨을 멈췄다.
“무서워요, 형아?”
놀리기라도 하듯이 웃음기가 묻어있는 음성이었다. 백성현이 놀라서 움츠러든 사이 지유환은 거즈의 양 끝단을 붙잡았다. 그가 감도를 시험해보듯 천천히 오른쪽 단을 잡아 내렸을 때였다. 조밀하게 조직된 천이 핥듯이 귀두를 쓸어오는 감각에 히익, 하고 놀란 신음이 터졌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굳은 백성현이 아래턱을 바들바들 떨었다.
“흐, 아…!”
“더 커진 것 같은데, 여기.”
그대로 거즈 반대편을 마저 끌어 내리는 손길은 느리고 여유로웠다. 그 안에 가둬진 백성현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숨을 가쁘게 들이마셨다. 거즈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목을 조이는 신음이 흘렀다.
“히으, 흐, 읏, 아, 아읏…!”
촘촘한 망에 가둬진 선단이 박동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지유환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백성현의 허리 아래가 비틀렸다. 푹 젖어있는 까슬까슬한 질감이 점점 더 부드럽고 촉촉하게 감겨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젖은 천은 귀두의 갈라진 틈이나 기둥으로 이어지는 요철까지 간지럽게 기어 내려갔다. 귀두뿐만 아니라 발끝까지 결박해오는 것만 같았다. 지유환은 작게 웃었다.
“흐, 아앗, 으으, 아흐, 윽.”
“귀엽기는 한데.”
몇 번쯤을 더 움직인 지유환은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백성현을 보다가 거즈를 약간 들어 올렸다. 젤뿐만 아니라 쿠퍼액에 질척해져 점액이 늘어나는 게 보였다. 유환은 목 안을 울리듯 툭 내뱉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질질 흘려요.”
“흐으, 아아, 흑.”
“그렇게… 좋아요? 겨우,”
성현은 선단이 자극당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지유환의 단단한 가슴 위로 몸을 기대어 뒷머리를 계속해서 보비작거렸다. 이쯤하고 제발 봐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환은 머리 위로 가볍게 촉, 하고 입을 맞춰줬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겨우 이런 걸로,”
“유환아아,”
“내가 빨아줄 때보다 기분 좋아 보여서.”
생경할 정도로 찌릿한 쾌감이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예쁜 지유환의 뜨거운 입 안은 차원이 다르게 자극적이었다. 성현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필사적인 부정에 낮게 웃은 지유환은 성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피부 위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적으로 잡힌 근육들이 이완하거나 수축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성현은 움찔거렸다. 이렇게 안겨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완전히 지유환에게 감싸 안겨 있다는 감각이 예전엔 마냥 좋기만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망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커다란 단점이 있었다. 지유환은 성현의 하얀 허벅지를 벌려 결박하듯 다리를 감았다.
“형이 가만히를 못 있어서.”
“왜에…. 왜 그러는데,”
“잘 참아봐요.”
나지막한 속삭임에 소름이 일었다. 이번엔 양 끝단을 쥐고 문지르는 게 아니라 거즈를 겹쳐 쥐고 자위해주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흐으, 하아!”
체액과 젤이 섞여 실크처럼 미끈해진 표면이 살기둥을 가두듯 조여들었다. 거기에 지유환의 손에서 비롯한 체온까지 스며 순식간에 사정감이 치솟았다. 성현은 집요하게 선단만을 훑어대는 손길에 이를 악물었다. 질척하게 젖은 천이 구멍을 막아와서 사출할 수도 없었다. 지유환의 손목을 잡아채듯 쥔 성현은 잇새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 흐만. 제발… 제발, 유환아.”
점점 아래가 아플 정도로 자극이 심해졌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마구 날뛰는 성감으로 인해 자극 없이도 저절로 허리가 움직였다. 성현의 허리 아래는 어느새 추삽질 하듯이 은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흐으, 읏, 응….”
성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문득 이 행위가 너무나도 문란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의 것의 모양대로 잡혀있는 거즈에 대고 아래를 박아댔다. 귀두 끝에 촉촉하게 감겨오는 감각과 적당히 압력이 들어간 지유환의 손아귀가 이성을 휘발시켰다.
“제발, 보지 마, 아, 흐으….”
마치 보여서는 안 되는 장면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입모양도 보이지 않는 자세라는 걸 알면서도 성현은 눈을 꼭 감으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마침내 사정에 이르기 직전, 지유환이 살기둥을 감싸고 있던 거즈를 벗겨냈다. 해방감보다 사정하지 못한 잔열감에 성현의 눈이 흐려졌다. 무엇보다 제 안이 자꾸만 움찔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제는 아무리 앞을 쓰더라도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열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유환은 말랑거리는 볼깃살을 벌리고 회음부터 비문까지 느리게 쓸었다. 성현은 손을 뒤로 짚고 칭얼거리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어서 넣어달라는 것처럼 아래를 맞춰대는 탓에 손가락 두 개가 미끄러지듯 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빨리이, 나 빨리….”
손가락을 넣어주니 알아서 허리를 돌리며 뒤를 풀어대는 걸 보고 지유환은 은근하게 손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아, 흑!”
순간 엉덩이가 위로 크게 들썩였고, 지유환은 그대로 성현을 엎드리게 했다. 이편이 뒤를 넓혀주기가 훨씬 쉬웠다.
“이쯤 되면 알아서 벌어질 만도 한데.”
“흡, 흐, 아흐, 읏.”
“매일 끝까지 넣어줬잖아요.”
유환은 익숙하게 손가락 개수를 늘려나가며 내벽을 꾹꾹 눌렀다. 여전히 여린 살은 빠듯하게 손에 감겨왔다. 지유환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
“넣고 자기도 하고….”
엎드린 하얀 나신이 바들대며 떨렸다. 제 것을 넣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안을 풀어주는 것도 빼놓을 수가 없는 즐거움이었다. 지유환은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내벽의 도톰하게 부어오른 부분을 푹 찌르며 지분거렸다.
“아, 형은… 자고 있을 때도 여기 찔러주면,”
“으흐, 윽!”
“엄청 조여서….”
엉덩이 밑과 허벅지까지 성감을 견디지 못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어느 정도 흐물흐물해진 내벽에서 손가락을 빼낸 지유환은 제 성기를 가볍게 쓸었다. 그는 그대로 빠끔거리는 구멍 위에 귀두를 가져다 대고 위아래로 뭉툭하게 문질렀다. 가장 예민한 여린 살끼리 맞닿아 미끌거리는 감각에 성현은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자세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더 귀두를 지분대던 지유환은 이내 천천히 허리를 밀어 넣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이 천천히 성기의 모양에 따라 벌어졌다. 백성현의 안은 굵은 끄트머리를 빈틈없이 오물대며 집어삼키고는 기둥까지 탐을 내듯 탐욕스럽게 조여왔다.
“아, 아, 흐읏….”
안을 꽉 채워오는 살기둥에 열상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백성현은 침대 시트 위로 뺨을 부비며 삽입으로 인한 쾌감에 허우적거렸다. 불거진 핏줄이나 커다란 성기의 굴곡 같은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유환은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속닥이듯 말했다.
“후우, 형이 좋아하는 거… 할까요.”
반도 넣지 못했지만 이 몸을 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고취감이 밀려왔다.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린 지유환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성현의 단단한 턱이 불안한 것처럼 파들거렸다. 목울대가 긴장으로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엎드린 몸을 조금쯤 일으켜준 유환은 떨지 말라는 것처럼 목줄기며 견갑골에 입을 맞췄다. 그는 등 뒤로 손을 가져가 여전히 질척하게 젖어있는 거즈를 쥐었다. 이내 지유환은 엎드린 몸 위를 올라타며 허리를 꾸욱 밀어 넣었다. 동시에 방금처럼 백성현의 성기를 거즈로 감쌌다.
“흐윽, 시, 러, 그거 시러.”
성현은 벌써 익숙해진 감촉이 성기를 감싸자마자 당혹감에 바르작거렸다. 그 몸짓을 눈치채고 조그맣게 웃은 유환은 조심성 없이 손목을 마구 흔들었다. 방금 전보다도 더 예민해진 선단이 촉촉한 거즈에 갇혀 거세게 비벼졌다.
“하아, 앗…! 히으, 아, 흑!”
기어코 성현의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지유환은 아랑곳 않고 왼팔로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아 올렸다. 하반신을 뒤로 뺐다가 꿈질대며 삽입 길이를 늘려가기도 했다. 자각도 하지 못하는 새에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 응, 흐으, 으으응, 흣….”
“대답 잘 해봐요.”
지유환은 앞뒤로 정신없이 당하느라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성현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성현은 종잇장처럼 딸려와 기진맥진하게 호흡했다. 유환은 그에게 선택하라는 듯 말했다.
“이쪽이 좋은지,”
잠시 멈춰있던 손이 느리게 수음을 재개했다. 성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젖혀 지유환의 어깨에 기댔다.
“흐, 아아!”
아래가 거즈에 막혀있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면 이쪽인지.”
지유환은 성현의 허리를 감아 안고 있던 왼쪽 팔을 확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아래가 밀착되며 뜨거운 성기가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그 자세 그대로 느리게 피스톤질까지 했다. 대답을 재촉하듯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지유환은 치골과 엉덩이가 부딪혀 턱턱 소리가 날 정도로 내벽 깊숙이 파고들었다.
“흐아, 하아…! 아, 아!”
“후우, 대답해봐요.”
안을 짓찧는 자극에 경련하던 성현의 상체가 앞으로 휘청대며 기울었다.
“못 고르시겠어요.”
당장에 대답을 내놓아야 멈춰 줄 것 같았다. 성현은 다급하게 지유환의 허벅지를 쥐고 입을 열었다. 그는 눈물을 매단 채로 지유환에게 눈을 맞췄다.
“네가, 넣어주는 게, 흐으, 좋아아….”
“아까는, 여기가 대고… 하아. 열심히 박던데.”
그 말에 죽을 것 같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유환은 기둥을 엄지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올리다가 천 조각에 막혀있는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젤을 짜놓아서 투명한 점액이 거즈에서부터 뿌리까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지유환은 성현이 함부로 사정할 수 없게 손바닥으로 선단을 틀어막고 천진하게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곧바로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자극이 들이닥쳤다. 성현은 입가로 타액이 새는 것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흐윽, 이제, 안, 그럴 게에. 제발, 하, 으으…!”
성현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며 애원하고 나서야 지유환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느리게 허릿짓을 하면서 백성현을 살살 달랬다.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거에 질투하게 하지 마요.”
움찔거리는 내벽에 묻어둔 성기를 꺼떡이는 정도일 뿐이었는데도 성현은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유환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목선을 길게 핥았다. 입으로든 아래로든 이 몸 전체를 녹여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아대고 싶었지만 백성현은 아래를 조금만 휘저어줘도 정신을 못 차렸다. 느리게 원을 그리듯이 허리를 돌려주자 성현의 하얀 나신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침대 시트 위로 픽 넘어졌다.
“으응, 하아, 아, 아으응…!”
귓등까지 새빨개져 바들거리는 게 안쓰럽기까지 했다. 유환은 그의 몸을 다시 일으켜 안고는 베개를 끌어왔다. 성현은 그 와중에도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에 맞춰주듯이 유환도 가볍게 하반신을 추어올렸다. 하지만 동시에 백성현이 다시 중심을 잃은 탓에 전립선을 할퀴듯 짓누르고 들어간 살기둥이 안으로 처박혔다. 본의 아니게 백성현이 가장 느끼는 부분을 직격으로 때려준 것이었다.
“흐아, 아!”
파드득 떨린 몸이 베개 위에 엎어져 들썩였다. 절정을 맞은 성현의 내벽이 콱 조여왔다. 지유환 또한 한쪽 눈을 내리감으며 쾌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가만히 둬도 오물오물거리는 안쪽이 몇 번이나 세게 수축했다.
“하아….”
하얗고 마른 등의 떨림은 잦아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안겨준 것이었는데 정말로 베개를 껴안고 바들바들 댔다. 성현은 팔을 짚고 힘을 주었지만 몇 번이나 그대로 미끄러졌다. 유환은 양손으로 그의 골반을 쥐며 읊조리듯 내뱉었다.
“됐어요, 그냥. 엎드려 있어.”
“하, 아아, 흐으….”
“내가 알아서….”
“읏, 아, 아…!”
“잘 쑤셔줄 거니까.”
엎드린 채로 엉덩이만 든 자세가 된 성현은 베개 위로 파고들 듯이 뺨을 부벼댔다. 지유환은 이제껏 참았던 욕구를 해소하듯이 미친 듯이 처박아대기 시작했다. 바르작거리는 성현의 몸이 계속해서 앞으로 밀릴 정도로 사나운 삽입이었다. 성현은 내장이 밀려 올라가는 듯한 압박감에 진저리를 쳤다.
“아, 아…! 흐아아!”
말랑한 볼기살이 단단한 치골에 계속해서 치받혔다. 밀려오는 쾌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몸이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가려고 해서 지유환은 그를 번쩍 들어 다시 제 성기에 맞춰 안았다. 그제야 포기한 것처럼 늘어진 얇은 허리를 들어 다시 푹 밀고 들어갔다.
“후우, 어디, 가려고요.”
“읏, 아아! 흐, 으읏!”
“아, 해요.”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린 성현은 제 입에 물려진 기다란 손가락에 낮게 신음했다. 지유환의 검지 손가락이 금방 성현의 타액에 번들번들해졌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알죠, 아프면… 하아. 깨무는 거.”
“흐으, 아, 으, 아, 아…!”
야릇하게 성현의 혀를 꾹꾹 눌러대던 지유환이 헛웃음처럼 말했다.
“좋아 죽는 거 같긴 한데.”
쉴 틈 없이 들이치는 삽입에 이성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이 행위로 도달할 수 있는 쾌감의 끝을 향해 가는 듯했다. 제어장치 따위는 애초에 망가진 지 오래였다.
사나운 피스톤질을 하면 할수록 귀두 끝이 좁아지며 뭔가가 막혀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지유환은 씩 웃으며 백성현의 위로 완전히 몸을 겹쳤다. 빈틈없이 근육과 살이 맞닿아 뜨거운 체온이 번져왔다. 백성현은 그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사람처럼 제 배를 움켜쥐었다. 미친듯이 도리질 치기도 했다.
“거기, 까지, 흐으, 넣으면, 안 돼, 흐아, 아!”
꾸욱, 하고 아래를 완전히 밀어 넣자마자 가장 깊은 내벽이 빠끔 열리며 그의 것을 물어댔다. 전립선을 세게 긁고 들어간 살덩이가 불끈거렸다.
“흐읏, 하아….”
지유환의 복근이 더욱 선명해지며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는 깊은 곳을 헤집은 동시에 허리를 떨며 토정했다. 백성현 또한 동시에 절정에 다다른 것인지 여운을 즐기기 위해 몇 번쯤 추삽질을 할 때마다 내벽이 수축하며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몇 번쯤 더 박아넣던 지유환은 백성현의 몸을 안아 올렸다. 곧 그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지유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백성현 또한 절정이었다는 걸 직접 느꼈기에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사정액 없이 여전히 경련하듯 몸만 떨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안아 들기 위해 살갗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허리를 비틀며 부들거릴 뿐이었다. 지유환은 인상을 쓰며 턱을 단단히 조였다.
“드라이로 간 거예요?”
그의 눈이 흥분으로 어둡게 잠겼다. 곧바로 그의 손이 백성현의 성기를 쥐었다. 유환은 미끌해진 엄지로 귀두의 갈라진 틈을 세게 문질렀다.
“안, 대에, 안돼, 그러면, 으, 흐윽, 유환, 하아…!”
이미 거즈로 인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곳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귀두의 윤곽을 뭉개듯 집요하게 비벼댔다. 이렇게 성감이 끝에 달했을 때 이런 자극은 치명적이라는 걸 알았다. 경련하는 몸이 기어이 뒤로 휙 젖혀졌다.
“흐아아!”
성현은 허리 아래를 부르르 떨더니 다급하게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감해버린 사람의 행동이었다. 동시에 그의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터져 나왔다. 여전히 지유환의 것을 품고 있는 아래가 꽉꽉 조여들 때마다 투명한 물줄기 또한 세게 터져 나왔다.
“하으, 으, 흐엉….”
울 것처럼 흐려진 신음이었다. 시트를 죄 적셔버린 성현은 팔을 내리지도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며 옅게 몸을 떨었다. 목 밑부터 얼굴까지 새빨개진 성현을 본 지유환은 귓바퀴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움찔, 하는 몸을 붙잡아 주듯이 꽉 껴안기도 했다. 끄트머리에 맺혀있던 물기가 아직 단단하게 서있는 기둥을 따라 주르르 흘렀다. 성현은 필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다가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에 목을 움츠렸다.
“다리 벌려요. 닦아줄 테니까.”
“흐으, 흑….”
“이거 이상한 거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게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지유환은 미미한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속닥였다.
“부끄러워?”
성현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지유환의 것이 내벽을 빠져나오며 발개진 구멍에서 꾸물대며 정액이 흘렀다. 희뿌연 점액이 허벅지 사이까지 느릿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걸 보고 있자니 다시 아래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지유환은 부드러운 완력으로 백성현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는 고민하듯 멈춰있다가 성현을 제 커다란 품 안에 폭 감싸 안았다. 쏟아지는 체향 안에서 차츰 떨림이 멎어갔다.
“좀 괜찮아요?”
등 뒤를 쓸어주는 손길과 나긋하게 올라간 말끝에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더 안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성현을 보며 지유환은 목 안을 울려 웃었다.
“매일 해서 그런 건가…. 너무 예민해졌어요.”
백성현은 고개를 묻은 채 도무지 얼굴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환은 달래듯이 속삭였다.
“화났어요? 너무 괴롭혔나….”
“…….”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는데.”
그즈음 그의 시선이 푹 젖어있는 거즈에 닿았다. 왜 저런 걸 해보고 싶어 했는지 여전히 그로서는 의문이었다.
“아. 해보니까 어때요. 거즈.”
“아니, 나느은…. 너한테 하고 싶었다고…!”
그제야 성현이 고개를 퍼뜩 들고 뭔가를 쏘아붙여 와서 지유환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내 그는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질문했다.
“감당 되겠어요?”
“…….”
“어쩌려고 그런 걸 해보고 싶어 해요.”
그가 원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지금도 이렇게나 할딱대면서 어떻게 뒷감당을 할지 상상이 안 됐다. 또 혼자 기절하거나 해버리면 무척 곤란했다.
“준비되면 해봐요.”
“…….”
“저는 형이 하고 싶다고 하면 목구멍도 열어주는데.”
못할 게 있겠느냐는 듯이 유환은 눈을 예쁘게 접었다. 하지만 되려 사색이 된 건 백성현이었다. 그제야 그 말뜻을 이해한 탓이었다.
아냐, 그냥 없던 일로 하자, 하고 중얼거리는 백성현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지유환은 성현의 무릎 안쪽과 어깨 밑을 받쳐 안고 일어났다.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180cm가 넘는 남자를 안고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여상했다.
“씻겨줄 테니까 안겨 있기만 해요.”
“으응….”
따뜻한 물줄기 아래 몸 곳곳을 씻겨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성현은 지유환에게 노곤노곤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힘겹게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스르르 풀렸다.
* * *
다시 눈을 뜬 것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서였다. 이미 한밤중이 된 것인지 바깥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백성현은 그 얼굴을 눈길로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정신없이 끌려가던 섹스가 언제였냐는 듯이 조용한 밤이었다. 성현은 가볍게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거렸다.
“…….”
무사히 길을 찾아 처음으로 돌아갔을까.
이제 열대야는 끝났다. 생각해 보면 무더운 밤에도 단잠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 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성현은 올해의 치열했던 여름을 같이 견뎌냈던 소년을 떠올렸다. 여름의 끝자락까지 잔잔한 파도를 수놓아주었던, 지유환의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그 소년을.
피어싱을 한 귓바퀴가 뜨끔거리는 것 같았다.
- 언제 어디서 만났더라도 그 빛 하나를 따라갔을 거예요.
- 내내 항해하는 사람처럼.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었다. 에두른 말들로 어설프게 고백한 뒤에는 수줍게 웃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그는 아무 고민 없이 모든 처음을 저에게 주었다. 스스로를 허물이라 했지만 백성현에게는 모든 순간 아름다운 나비였다.
아릿하게 번져오는 마음에 지유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결에도 마주 안아준 그는 성현이 그 뒤에도 한참을 뒤척이자 나른하게 물어오기도 했다.
“잠이 안 와요?”
“유환아. 있잖아, 나 정말…,”
지유환이 천천히 침실의 조도를 높였다. 그는 백성현의 입모양을 차분하게 읽어냈다.
“…열아홉의 너를 좋아했어.”
갑작스러울지도 몰랐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전하고 싶었다. 여리고 서툴렀던 그 소년 또한 그가 사랑하는 지유환이라고. 유환의 눈이 조금쯤 크게 뜨였다. 그는 뜨거운 고백 앞에 쉬이 말을 잇기가 어려운 것처럼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성현은 이어진 그의 말에 숨을 멈추었다.
“형, 나는… 이제는 그 애를 이해할 수 있어요.”
불과 얼마 전 인터뷰에서 그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존재라고 했었다. 막연히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로 가려뒀던 소년기 속 갇혀있던 존재였다. 지유환은 이제 그 애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성현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원망뿐이었는지. 그때의 나는 왜 원동력이라고 할만한 게 악의밖에 없었는지….”
“…….”
“길을 헤매는 중이었을 뿐이라는 걸 알아요.”
심장소리가 목 안까지 들려왔다. 지유환은 소년의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형이 알려준 거예요, 하고 작게 속삭인 그는 자랑하듯 덧붙였다.
“이제 저는 열아홉에도 형이 있어요.”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자꾸만 숨이 찬 기분이 들었다. 백성현은 무사히 여기로 도달한 지유환을 한가득 눈에 담았다.
사람들은 세월에 축적되어 가며 매 순간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듯 행동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골격처럼 남아 영원히 웅크리고 있는 법이었다. 퇴적되는 기억 속에 단단하고 볕이 드는 영토가 생겨났다. 두 사람이 일궈낸 역사적인 지층이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이번 여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사라진 존재는 없다.
네가 구원했던 어린 시절의 나 또한 여기에 숨 쉬고 있듯이.
“찾아와줘서 고마워.”
“…….”
“너 정말 사랑스러웠어.”
모든 것이 오롯하게 살아 있었다.
* * *
백성현은 이번에도 낭독회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자리에 앉아있었다. 지난 초여름에도 찾았던 소극장이었다. 이곳은 보통은 실내악 공연을 하거나 연극을 하는 장소라는 걸 입구에 즐비한 팸플릿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이 공간을 지유환 혼자서 채울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간질거리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낭독회가 진행될 것이었다.
소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연령대는 천차만별이었다. 성현은 지긋한 나이의 노신사와 교복을 입은 학생 사이에 앉아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앉은 모두가 초여름에 발간된 그의 책을 손에 들거나 무릎에 올려두고 무대 위로 나타날 시인 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간 전체에 낮게 깔린 클래식 음악에 괜히 더 설레기도 했다. 성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문자를 보냈다.
- 유환아 나 자리에 앉아있어
- 잘 들을게
- 너도 잘해
문자를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아 숫자 1 표시가 사라졌다. 연달아 답장이 왔다.
- 3열 가운데에 앉아있죠?
- 떨리면 형 보고 읽을게요.
인터뷰든 사인회든 도무지 떨지를 않으면서 그런 농담을 하곤 했다. 백성현은 작게 웃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저번 낭독회가 사고로 인해 미뤄지고 나서 오히려 티켓을 구하려는 이들이 훨씬 늘어났다고 들었다. 출판사 직원은 지유환에게 책이 잘 될수록 할 일이 너무 많아진다며 장난처럼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그는 특히 낭독회 관련 문의가 너무 많이 들어오는 탓에 진땀을 흘렸다고 말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관객들은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낭독회가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백성현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클래식 음악이 페이드아웃으로 줄어들고 소극장 전체의 조도가 내려갔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올라가며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대 하수에서부터 지유환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백성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회색 테이퍼드 핏 슬랙스와 캐시미어 니트가 몸에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는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아갔다. 등 뒤에 걸린 포스터처럼 은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가운데에 마련된 자리에 앉기 전, 지유환은 가볍게 인사했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그는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높아졌다.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가까이 끌어오는 것까지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올해 여름에 했어야 할 낭독회인데 많이 늦어졌네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는데…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긋한 목소리가 소극장 안에서 고요하게 울렸다. 음역이 낮고 배음이 풍부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앉아있는 모두가 그가 말한 사고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물론 그 결과로 한 계절 꼬박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백성현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도 서점이나 갤러리에서 종종 낭독회를 하곤 했다고 알려준 적 있었다. 이연 작가가 지켜보는 와중 화랑에서 낭독회를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낭독회는 유려하게 흘러갔다.
막연히 책만 읽어줄 거라고만 생각한 것과 달리 가벼운 안부를 묻는 것부터 책에 실린 서평에 대한 이야기, 목차나 레이아웃을 구성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소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해주었다. 내내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라 더욱 집중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제일 처음은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시편을 낭독하곤 했습니다만, 오늘은 지금 당장 읽기 좋은 시를 골랐습니다. 142페이지. 〈트라이림〉 입니다.”
입체적인 얼굴선이 조명 아래 더욱 도드라졌다. 그의 말을 따라 관객들은 책을 펴고 활자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백성현은 트라이림이 고대의 군용선이라는 사실을 각주를 보고 처음 알았다.
지유환은 그 뒤로도 두어 개의 시를 더 낭독했다. 말끝이 미묘하게 떨어지는 어투가 신기하게도 그의 시가 가진 운율과는 무척 잘 어울렸다. 세 번째 페이지를 폈을 때 백성현은 그가 읽고 있는 시들이 모두 다 바다에서 온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낭독이 이어지는 동안 그의 낮은 목소리가 이 공간 안을 가득 메웠다. 감탄하는 듯한 관객의 탄성이나 분주하게 귓속말하는 음성 또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유환의 목소리에 집중하면 사방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맞는 기분이었다. 매 순간 새롭게 벅차올랐다. 마치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마저 들어서 백성현은 의자에 등을 바짝 붙였다.
유환은 그즈음 안경을 고쳐 쓰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나른한 얼굴로 시편을 낭독하는 모습에 이상할 만큼 심장이 박동했다. 그는 모든 문장으로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마침내 그가 세 번째 시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책을 내려놓자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다. 지유환은 작게 목례하고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물을 마셨다.
“낭독을 할 때는 소음 여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해요.”
그가 가볍게 객석을 돌아보았다. 스치듯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오늘 이 소극장에서는 제 목소리 말고는 아무 소음도 없을 거라더군요.”
유환의 말대로였다. 모두가 그로 인해 활자가 소리로 거듭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라면 어떻게 읽을까 궁금했던 문장도 많았다. 직접 듣고 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새로운 나머지 처음 보는 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뒤로도 유환은 각 목차의 제목과 연결되는 시들을 연달아 읽어주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밑줄을 긋거나 뭔가를 따라 적는 사람들도 많았다. 유환이 낭독한 시와 목차 사이의 연결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도 명료하고 타당해서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글이란 소리 내서 읽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성큼 다가오는구나. 그제야 이 낭독회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같았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이라던 그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도. 저기에 서 있는 지유환은 더없이 빛나 보였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다. 막힘없이 답하던 지유환은 수월하게 마지막 질문까지 도달했다. 그는 다시 한번 질문들을 확인하듯 무대 앞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 처음에 세 편의 시를 오늘 읽기 좋은 시로 고르신 이유가 뭔가요? 모두 바다와 관련된 시들이라는 게 흥미로워서요.
- 삶과 죽음에 대해 줄곧 이야기해 온 이유가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작품 자체가 죽음보다 삶에 무게가 훨씬 많이 기울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잠깐의 정적 뒤에 지유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한마디씩을 할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마지막 두 질문은 한 번에 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지유환은 이렇게 말했다. 희미하게 웃는 그의 시선이 향할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 *
글을 쓰는 사람들 모두가 날 때부터 비슷한 사명이 있는 것처럼 삶을 뭔가에 비유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생이라는 주제는 다소 거룩하지만 꺼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산증인 같은 것이라서요.
저의 경우 항해라고 하겠습니다.
인류는 아주 옛날부터 바다를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항해술이란 특별할 게 없었어요.
그저 목적지와 평행한 수평선을 그리고 머리 위를 감싸는 별자리를 기억해서 항로로 쓰는 게 다였습니다.
당시엔 바람과 별밖에 없었습니다. 18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항해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예전의 뱃사람들은 그 두 개만을 도구 삼아 새까만 바다로 뛰어들었던 거죠.
가늠할 수 없는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다에 무엇을 두고 왔기에, 또 무엇을 찾아야 했기에 그렇게 나아갈 수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나 무모하게 나서서 끊임없이 두드리는 것, 그것이 결국 인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입니다. 새까만 밤바다 위를 표류하며 오직 바람과 별자리에 기대는… 어쩌면 낭만적이기까지 한 그 마음.
그 외로운 바닷길을 개척한 최초의 인류로 남을 거란 걸 적어도 그들은 알았을 겁니다.
생이란 이런 지점에서 촉발합니다. 반드시 한 번쯤은 어딘가에 부딪혀야만 해요.
기어이 상충하고 부조화하면서 균열을 일으키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닻을 내릴 곳을 찾아서.
풍랑 속에서 다만 나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나쁜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의 항해 또한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랍니다.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 마치 헤엄이나 물장구치듯이… 그런 것들은 본질적으로 아주 즐거운 일이 아니었던가요.
부풀리거나 깎아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으려 했습니다.
오늘 낭독회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기예보가 맞다면 오늘 첫눈이 오겠네요. 첫눈 같은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각자의 긴 여정 속 이곳은 아주 작은 삶의 지점입니다. 언젠가 항해 길이 겹쳐 우연히라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금까지 시인 지유환이었습니다.”
한 시간 반을 꽉 채운 낭독회 끝에 그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조도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침〉
꼴라쥬 (collage) (기억상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