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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pring landscape with lovers (연인이 있는 봄의 풍경) (17/22)

4. Spring landscape with lovers (연인이 있는 봄의 풍경)

* * *

그러니까, 반 년 쯤 전부터였다.

“후유증으로 인한 청력 손실은 생각보다 빈번합니다. 그래도 낙관적인 건 재발이 되기 전에는 보청기 적응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 때처럼 앞으로도 차근차근,”

“…아니요.”

열 넷의 여름부터 가장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는 마침내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분주하게 말을 이어가던 담당의의 입모양이 멎었다.

거기에 대고 이제는 그만하겠다는 말을 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소리를 놓아버리는 순간 세상에서 격리되었음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될까봐 불안해하던 시간이 그렇게나 길었다는 뜻이었다. 지유환은 그 날 이제는 완전히 닫혀버린 귀를 억지로 잡아 벌리기 위해 더 이상은 뭔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나 오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선언 뒤의 세상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순간에 버려지지도, 격리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고장난 라디오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소중하게 매만지고 있던 백성현을 본 날부터 알 수 없는 위안과 용기 같은 걸 얻었는지도 몰랐다. 제대로 작동도 못하는 걸 왜 버리지 않느냐 물었을 때.

ㅡ선물 받은 거잖아. 너한테 소중한 거고. 그럼 나한테도 소중하니까….

그래, 그런 대답을 받았을 때부터. 고장 난 채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또 한 번의 구원이었다. 이대로 살아가도 잘못된 게 아니라는 위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한 순간에 수월해진 것은 아니었다.

“768401.”

핸드폰 스피커에서 귀에서 떨어뜨린 백성현이 하나씩 키패드를 눌렀다. 문서를 갱신하는 데 필요하다는 여섯 자리 인증번호였다. 예전이었다면 손을 놓고 있었겠지만 요즘은 사소하게 소리가 필요해질 때면 그에게 도움을 구하곤 했다.

“고마워요.”

“뭘. 난 거실에 있을게.”

“네. 금방 나갈게요.”

며칠 전 요리를 하다가 냉장고 문을 한참이나 열어두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재료를 손질하다 불현 듯 생각이 나서 냉장고 앞으로 갔는데 문은 닫혀있었다. 백성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 저녁은 뭘 해줄 거냐며 옆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분명 거실에 있다가 냉장고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에 부엌으로 들어온 것일 터였다. 그런 일들이 몇 번이나 있었을지도 몰랐다.

대강의 작업을 끝낸 지유환은 거실 소파에 엎드려 누워있는 백성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지유환이 그 자리에 앉자 백성현은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지유환은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내려 유려한 얼굴선을 어루만졌다.

아래에 누워 저를 올려다보던 백성현은 문득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유환은 그의 시선이 목 부근을 향한 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말없이 손을 뻗은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지유환의 울대뼈 주위를 쓸었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에 지유환은 입매를 움찔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목울대가 오르내렸고, 백성현의 손길이 잠시 멎었다. 백성현은 여전히 시선을 턱 아래로 고정하고 중얼거렸다.

“여기, 이름이 울대뼈… 맞지?”

“네.”

“예쁘게 생겼다. 너는 노래도 잘 할 것 같아.”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지유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래는 못 부르겠어요.”

완전히 닫혀버린 뒤로는 자신이 내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뭘 어떻게 소리를 내고 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에 노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뒷말은 생략한 지유환은 백성현을 따라 하듯 그의 목 위로 손을 가져갔다.

가만히 그 위의 윤곽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는데 손끝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지유환은 웃는 얼굴 그대로 잠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백성현은 입모양을 움직이고 있었고, 진동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느라 입모양을 읽지 못한 지유환은 멍하니 되물었다.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그도 저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부드럽고 나긋했던 음성. 지금도 분명 공기 중을 유영하고 있을 소리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콧등을 찡긋거린 백성현은 다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유환은 손끝으로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말을 할 때면 고르게 울리던 울대뼈가 백성현이 웃을 때면 미묘하게 더 낮은 곳에서만 진동했다. 아, 이 웃음소리도 그는 알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멍하니 몰두했던 소리였다. 이럴 때면 괜히 아쉬워지곤 했다. 조금 더 그 소리를 기억 깊숙한 곳에 담아 뒀어야 했는데. 몇 번이고 되새겨뒀어야 했는데. 지유환의 표정이 흐려졌다.

“다시….”

“…….”

“…다시요.”

“…유환아?”

공백 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진동에 지유환은 덴 것처럼 손끝을 떼어냈다. 그제야 그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못 봤어요.”

백성현은 훤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그냥 속아 넘어 가주곤 했다. 지금도 그는 자기 이야기에 집중하라고 무른 핀잔을 줄 뿐이었다.

사실은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유환은 저에게만 한 꺼풀 덧씌워진 막을 다시금 실감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익숙한 정적이었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유환은 기억 속 도서관과 단칸방을 분주히 뒤졌다. 그 때의 백성현이 남겨둔 목소리를 찾아 책 사이와 초여름의 어귀를 들추고 헤집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희미하게 웃었다.

* * *

당연한 말일지는 몰라도 백성현은 작년 봄을 끝으로 더 이상 시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졸업을 하기 전에 같은 강의를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스쳐가듯 말하긴 했지만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질색인 모양이었다. 그보다 그는 어느 때보다 전공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 강의가 7차니까, 좀 있으면 중간고사라서 그래.”

“시험 기간 아닐 때도 열심히 하잖아요.”

“먹고 살리려면… 열심히 해야 돼.”

목적어는 빠져 있었지만 거기서의 생략은 사실 무의미했다. 지유환은 전공 교재를 펴서 코를 박을 기세로 필기를 옮겨 쓰는 백성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는 늘 아메리카노가 있었다. 에너지 드링크는 이 집에서는 마실 수 없는 음료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현은 간혹 새벽까지 거실 테이블에서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동이 틀 무렵이나 돼서 휘청거리며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일요일을 맞아 아침 일찍 일어난 지유환은 간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테이블 위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테이블 한켠에 전공 교재가 쌓여있고 필기를 옮긴 것으로 보이는 공책들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어지러운 테이블을 차근차근 정리하던 지유환은 공책들을 보다가 아무런 과목명이 적혀있지 않은 연습장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다른 공책들과 달리 페이지를 표시해둔 포스트잇 플래그도 없었고, 표지조차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유환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열어보았다. 백성현이 어떤 것을 공부하는 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유독 자주 열어본 쪽이 있었던 것처럼 바로 열리는 페이지가 있었다.

매끄러운 종이 위를 훑어본 지유환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백지 위에서 활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그림도 잘 그리세요?

- 아뇨, 전 영 소질이 없어서요.

언젠가 백성현이 했던 말이 머리 위를 스쳤다. 지유환은 천천히 손을 내어 샤프로 그린 듯한 그림을 쓸어보았다. 누가 봐도 잘 그렸다고 할 수는 없는 그림이었지만 누구를 그린 것인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 하나하나에 들인 정성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나같이 저를 그린 그림이었다.

“아….”

그림 위를 손으로 쓸어본 것처럼 흑연이 군데군데 번진 자국이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을 쏟아냈는지가 거기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지유환의 눈길은 낱장마다 아주 오래 머물렀다.

거실의 나무 의자에 몸을 앉힌 지유환은 창가를 넘어오는 봄빛을 바라보았다. 넘기고 넘기다 보니 오랜만에 보는 백성현의 시도 나왔다. 서두를 읽자마자 작년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딱 이 맘 때쯤이었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아래의 백성현을 본 것이.

나름 시를 쓰기 전 발상을 한 것인지 조각조각난 문장들이 시 왼편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유환은 저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꽃구경을 간 적이 없었다.>

<예쁜 벚꽃>

<벚꽃 정말 예뻤다.>

<이번이 처음이다.>

<4월 8일>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읽어 내려가던 지유환은 마지막 줄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그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다른 글자들보다 작은 크기로 꾹꾹 눌러 쓴 듯한 세 글자는 순식간에 마음에 박혀왔다.

<내 생일>

덜컥, 하고 심장이 작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구석에 숨어있는 글자를 보던 지유환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캘린더를 확인했다. 4월 8일, 당장 내일이었다.

“…….”

지유환의 흐린 시선이 달력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고 보면 백성현은 생일이 언제냐고 물을 때마다 늘 멀었다며 대답을 미루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 전 그 날 백성현은,

- 너는 생일이 언제야?

갑자기 그런 물음을 던져왔었던 것도 같았다. 지유환의 얼굴이 하얗게 번져갔다.

- 12월이요. 형은요.

- 내 생일은 한참 멀었어.

그 때도 백성현은 한참 멀었다는 대답을 했었다. 지유환은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듯 눈꺼풀을 감아 내렸다. 벚꽃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던 백성현의 모습이 망막에 비치는 것 같았다. 지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멀기는… 뭐가 멀어요.”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나도 멀지 않았다. 사실은 숨 막히게 가까운 거였다.

“그 날이었으면서….”

왜 진작 알아주지 못했을까. 그는 태어난 날 하나 제대로 자랑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껏 어떤 생일들을 보내왔는지 듣지 않아도 훤히 알 것만 같았다. 생일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 것밖에 없었던 스물넷의 백성현. 그때 받았던 그 질문이 자꾸만 속을 아프게 찔러왔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일이 언제냐는, 그런 에두른 질문 없이도 그는 축하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이 눈부신 초봄에 태어나준 것만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었다.

지유환은 이제야 알아챈 세 글자를 손끝으로 쓸고 또 쓸었다. 겨우 공책에다 대고밖에 말하지 못했을 서러움에, 이 안에다 숨겨둔 단 몇 글자로 하루를 넘겼을 말 못할 서운함에까지 가닿도록.

* * *

버티컬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어둠이 찾아들었다. 틈새를 벌려도 빌딩 숲을 밝히는 반딧불 같은 불빛 몇 점이 보였을 뿐 시야가 환해지지는 않았다. 백성현은 비어있는 옆자리를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왠지 지유환은 오늘따라 묘하게 저를 일찍 재우려고 하는 것 같았었다. 대충 따라주는 척하면서 자지는 않을 생각이었는데, 얼굴을 매만져주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지유환의 침실에서는 예상대로 주홍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백성현의 표정이 의아하게 흐려졌다.

“뭐하고 있는 거지?”

그대로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려던 그는 마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멈춰 섰다.

“…….”

백성현은 그 자리에 한참을 굳어 있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자꾸만 목 안이 아릿해졌다. 그는 온기가 날아가 버린 옆자리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아침에 마주한 지유환은 더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강의 끝나는 게 6시라고 하셨죠.”

“아, 응.”

앞에 내밀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은 백성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지유환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월요일부터 시간표가 촘촘한 백성현과 달리 휴학 중에 있었다. 때문에 요즘 그는 백성현을 학교로 데려다주기 위해서만 학교에 갔다.

“근데 진짜 이제 안 데려다줘도 돼. 나도 이제 운전 배울 거라서.”

단번에 지유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운전 위험하잖아요.”

“…그렇게 치면 세상에 안 위험한 거 없어.”

“그래서 늘 말했지 않나….”

은근하게 눈을 맞춰온 지유환은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집에만 있어도 된다고요.”

“…….”

“굳이 다른 사람들 많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에 백성현은 경악하고 말았다.

“집에만 있으라고? 그러다 내가 너 돈 다 쓰면 어떡해.”

나름 걱정을 담아 물은 질문이었으나 지유환은 답이 없었다. 그는 마치 그런 걸 걱정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안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성현은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막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 노트테이킹을 해줬을 때도 원한다면 아르바이트비를 얼마든지 올려주겠다고 했던 바 있었다. 원래도 터무니없이 높은 시급이었건만 그쯤은 푼돈이라는 것처럼.

“그럼 다 쓸 때까지….”

지유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머릿속에 어떤 계산이 스쳐간 건지는 몰라도 입 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가 있었다.

“둘이서만 있어 봐요.”

말이 좋아서 둘이서, 였지 실상은 밖은 나가지 말고 저랑만 있자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휴학을 한 지유환은 백성현이 강의를 듣는 동안 작업실에서 원고작업을 하곤 했는데, 얼굴을 못 보는 시간이 긴 날일수록 돌아왔을 때 치대는 시간이 길었다. 백성현이 요사이 같이 저녁을 먹자는 사람들의 제안들도 하나같이 거절하고 귀가를 재촉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치 커다란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강의가 제일 늦게 끝나는 월요일이라 또 이런 말을 꺼내오는 것 같았다.

“금방 올게. 기다리지 말고 있어.”

그렇게 말한 백성현은 먼저 지유환의 입술 위로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잠시 상체를 굳힌 지유환은 떨어져나가려는 백성현의 허리를 감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목안을 울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안 기다려요….”

지유환은 그대로 백성현의 목께에 고개를 묻고 뺨을 지분거렸다. 백성현은 꽤 익숙하게 그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애교가 늘어가는 것만 같았다.

“좋아해요….”

“…….”

“오늘도 정말 많이.”

귓가에 닿아 달콤하게 부서지는 음성을 들으며 백성현은 조그맣게 웃었다.

이런 아침이 있고, 이런 말이 있다. 무엇보다 연인이 있는, 그것으로 충분한 생일날의 아침이었다.

* * *

여느 날과 달리 아침부터 무척 기분 좋은 생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고 있지 않았었다. 이제껏 그래왔듯 오늘도 자각 없이 받아들인 또 하나의 하루일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휴학을 연장한 성준혁이 굳이 저를 찾아 학과 건물 앞까지 온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야, 너도 진짜…. 생일이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민망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던 성준혁이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백성현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종이봉투에는 백성현도 알고 있는 옷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매일 멀었다고만 하니까 알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 알았어?”

성준혁은 뭔가를 고민하듯 우물쭈물 하다가 대충 눙치듯 말했다.

“이 형님이 다 아는 수가 있다.”

“…….”

“뭐하냐. 받아.”

백성현은 까딱거리는 손을 멍하니 보았다. 씨익, 하고 성준혁이 멋쩍은 듯 웃었다.

“4월 8일. 이제 기억했어.”

멀뚱히 서 있던 백성현은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제 생일을 축하한다는 이유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얼떨떨하게 선물을 받아든 그는 종이봉투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어? 그렇게 맘에 드냐?”

“…….”

“입어 보면 더 마음에 들걸. 내가 어제 듣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그거 나온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신상이라고 했으니까. 예쁘게 잘 입고 다녀.”

백성현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뱉었다.

“…고마워.”

“근데 네가 봄에 태어났을 줄은 몰랐네. 왠지 가을이나 겨울? 그쯤일 것 같았는데.”

성준혁의 앞으로 돌연 바람이 불어왔다. 그에 떨어져있던 꽃잎들이 작은 회오리를 타고 바닥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휘날리는 꽃잎들을 보던 성준혁이 오, 하고 낮은 감탄을 터뜨렸다.

“좋은 날에 태어났네.”

“…….”

“생일 축하한다.”

태어난 날을 축하한다는 말이 너무도 이질적으로 들려서 백성현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는 성준혁이 뒤돌아가기 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근데 있잖아.”

“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누가 만든 걸까.”

어떤 어른으로 자랐건, 그 사람이 무엇을 잘하건 무엇을 못하건. 태어난 것만으로 기쁜 일이라며 축하해주는 말인 것만 같았다. 성준혁은 그 허무맹랑한 질문에도 잠시간 고민하는 듯 하다가 대답을 내놓았다. 스스로 질문을 해놓고도 너무 감상적이었나 싶어 대충 무시하라고 얼버무리려던 백성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근데, 뭐. 대충 알겠는데.”

“어?”

“그 사람 가족 아니겠냐?”

가족만큼 그 날이 고마울 사람이 없잖아. 성준혁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

작년 12월 31일, 지유환의 생일날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그에게 몇 번이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백성현은 목 안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치받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다. 그건 가족이겠다. 너무 쉬운 질문을 한 건지도 몰랐다.

“옷 잘 입을게.”

“그래. 조만간 밥이라도 같이 먹자. 빨리 다음 강의 들으러 가.”

그렇게 선물 봉투를 들고 다음 강의를 위해 경사로를 오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성준혁의 악필이 여실히 드러나는 짧은 생일 카드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실에 앉아 교정의 벚나무를 스쳐보던 백성현은 스쳐가듯 옅게 웃었다. 어서 교양 강의를 다 듣고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집 안에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이맘때쯤에는 누구 한 명을 찾고 싶어서 도서관 안을 정신없이 헤집고 다니지 않았던가. 결국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단칸방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아직 선했다. 그렇게나 찾아내고 싶었던 그를 지금은 연인이라 부를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는 길에 케이크를 사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비록 1년 전 샀던 케이크는 반도 채 먹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지만, 오늘은 나눠먹을 사람이 있었다.

* * *

[벚꽃 만개 시기를 맞아 관련 축제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이즈음에만 볼 수 있는 벚꽃의 향연을 따라…]

손잡이를 잡고 선 백성현은 버스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방송에 귀 기울였다. 오늘 마지막 강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꽃도 피는데 구경들 가라는 것이 교수의 마지막 말이었다. 멋모르는 새내기 때 한 번쯤 일어났던 일을 4학년이 돼서도 겪을 줄은 몰랐다. 덕분에 오늘은 한 시간 쯤 일찍 집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당장 창밖만 봐도 벚나무가 길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괜히 사람을 들뜨게 하는 풍경이었다.

집까지는 아직 3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버스가 중간 중간 멈춰 설 때면 집까지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부러 처음부터 다시 세어보곤 했다. 그러던 와중 핸드폰 화면 위로 반가운 이름이 떴다.

백성현은 고민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로부터 그간의 안부를 묻는 강혜숙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전에도 물어보셨으면서…. 원장님께서는 잘 지내시죠?”

- 그럼. 잘 지내지. 그래도 오늘은 네 안부가 제일 중요하지 않겠니?

“네?”

버스가 멈춰 섰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유독 커다랗고 예쁜 벚나무 앞에 멈춰 섰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가, 누군가는 그를 찍고, 누군가는 프레임 안에 영원히 남을 한철의 웃음을 지었다.

- 오늘 성현이 네 생일이잖니.

누구나 알법한 봄노래가 울리고, 사람들을 새로 실은 버스는 복잡한 도로를 향해 다시 덜컹이며 달려갔다. 백성현은 손잡이를 잡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 그간 내가 챙겨주지도 못했지. 이번엔 선물 준비해 둘 테니 시간 되면 한 번 와주렴.

- 아이들도 네가 생일이란 걸 듣더니 편지를 쓰는 거 있지. 네가 저번에 사왔던 도화지. 응. 거기에다가. 한 장 가득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쓰여 있어. 지금도 옆에서 예쁘게 꾸미고 있단다. 얼마나 열심히 했냐면,

정말로 옆에서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강혜숙은 문득 잠깐만, 하고 말을 끊더니 아이들에게 뭔가를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수화기에서 멀리 떨어진 소리가 났다.

- 응? 맞아. 성현 선생님. 지금 통화 중이야.

- 그럼. 좋은 생각이다.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웃음기 가득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성현아, 잠깐 들어봐.

시작!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스피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백성현은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도 음정도 제각각인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 사랑하는 선생님. 생일 축하합니다.

낯설기 짝이 없는 호칭이었다. 여름 소풍 뒤로도 소망원에 어른이 필요한 행사가 있으면 한 번씩 가서 아이들을 통솔하는 걸 돕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선생님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일을 하지도 못했다. 백성현은 뜨겁게 달아오른 호흡을 목뒤로 넘기고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다들 노래도 잘 부르네요.”

- 그렇지? 조금 이따가 문자로 편지 사진도 보내줄게.

“…혹시,”

- 응?

백성현은 내내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냈다.

“혹시 저번에 소풍 같이 갔던 제 친구가 알려드린 건가요? 제가 생일이라고.”

성준혁도, 원장님도 갑자기 제 생일을 알게 되었을 리가 없었다. 짚이는 구석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조금의 공백 뒤로 망설이는 듯한 강혜숙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스피커에서 들려온 대답에 백성현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한참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지만 멀리 있는 벚나무가지에 꽃이 아니라 희부연 솜사탕들을 걸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뭉개지고, 어룽지는 꽃잎들. 밝고 경쾌한 봄노래가 여전히 버스 안을 울리고 있었다.

* * *

평소보다 일찍 도착해서 도어락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현관에 놓인 꽃다발이었다. 일부러 거기에 둔 거라기보다는 급하게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고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백성현은 몸을 숙여 흐트러져 있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집안에서 온갖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이내 분주한 부엌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성현은 식탁 가득 올라간 접시들을 보고 멍하니 자리에 섰다. 인덕션 앞에 서있던 지유환이 몸을 돌린 것은 그 때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히고, 그의 눈이 이내 백성현이 들고 있는 꽃다발로 내려갔다. 드물게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지유환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벌써.”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5시인데, 오늘 강의가 좀 일찍 마쳤어.”

“…….”

“근데 이게 다… 뭐야.”

백성현은 식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갖 종류의 음식과 고풍스런 장식의 은촛대, 디저트 트레이, 은제 식기까지. 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건지는 몰라도 식탁에는 빈 구석조차 없었다. 백성현의 시선이 케이크 트레이 옆 촛불에서 멎었다. 두 개의 숫자, 2와 5. 백성현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지유환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식탁을 뒤로 하고 부엌 안으로 발을 들인 백성현은 입을 벌렸다. 인덕션 4구에 모두 냄비가 올라가 있는 것은 물론, 테이블 위에 올라가지 않은 음식들도 아일랜드 식탁 위에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언뜻 봐도 제가 좋아하는 반찬밖에 없었다. 어디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오븐 안에서는 에그타르트도 구워지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도저히 둘이서는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지유환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처럼 콧등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

“만들어주고 싶은 게 너무 많더라고요.”

하루를 꼬박 들여 뭔가를 만들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처음 여길 왔을 때도 뭔가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줬던 그였다. 부엌을 훑는 백성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마음이 불어나고 불어나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그의 요리는 하나같이 너무도 맛있어서 죄다 좋아한다고 해서였을까. 이제껏 둘이서 마주 앉아 나눠먹곤 했던 음식들이 식탁 곳곳에 놓여 있었다.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차려진 상은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튼튼한 대리석 식탁이 무너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예쁘게 담긴 미역국을 보던 백성현은 파스스 웃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저를 위한 거라니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지유환은 트레이 위로 케이크를 올려두었다. 그걸 보고는 정말이지 낮게 소리 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케이크를 사는 마음을 안다. 어른이 되고, 처음 소망원에 가기 전 제과점에 들러 가장 큰 케이크를 달라고 했던 그 날부터, 저도 알게 되었다. 그가 사온 것은 그 때 샀던 것만큼이나 커다란 케이크였다. 그는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저런 케이크를 사들고 소망원에 갔었다.

백성현은 울컥하는 숨을 삼키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케이크가 왜 이렇게 커.”

“…….”

“너무 크다.”

하나둘씩 불이 붙는 촛불을 보던 백성현은 이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일주일동안 케이크만 먹겠어….”

“…….”

“너 단 거… 잘 먹지도 못하잖아.”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초라하게 사윈 음성에 울음기가 드리워져 갔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케이크가 너무 커서 눈물이 났다.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이 하나같이 저가 좋아하는 것뿐이라서 목이 메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그 가족이 만들었을 거라던 성준혁의 말과, 어지럽게 섞여 들려오던 아이들의 노랫소리.

살면서 이렇게 많은 축하를 받은 날이 있었을까.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축하받았던 적이 있기는 했었나.

정성껏 차려둔 식탁을 앞에 두고 백성현은 끅끅대며 울었다. 그 와중에도 걱정 말라고, 다 안 먹어도 된다는 지유환의 말은 또 너무도 다정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분명 슬픈 게 아닌데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만 같았다.

“초 불어야죠.”

두 개의 촛불에 불이 붙은 것을 본 백성현은 잠시 숨을 죽였다. 일렁이는 촛불들을 앞에 둔 지유환의 입술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멈췄다. 곧바로 지난날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 너는 노래도 잘 할 것 같아.

- 노래는 못 부르겠어요.

캐묻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백성현은 숨을 고르곤 일렁이는 촛불을 향해 입 바람을 내불었다. 촛불들은 두 번에 걸쳐 사위었다. 한낱 노래가 없어도, 이건 다시없을 축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성현은 촛불 끄트머리에 매달린 불빛을 보다가 활짝 웃었다. 울음기에 젖은 목소리가 공기 중을 울렸다.

“밤에, 가고 싶은 곳이 있어.”

“…….”

“오늘도 너랑 가고 싶어….”

어디인지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너만은 알고 있을 곳.

네가 데려가 준 그곳을.

* * *

오늘도 그는 지유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눈을 뜨면 벚나무가 가장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지점에 서 있게 될 것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점점 짙어져갔다.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순간순간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둘만 남겨져 이대로 종말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최초의 꽃나무를 찾아 숲을 거니는 위대한 개척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던 지유환의 발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향기만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여기구나. 난생 처음 꽃구경을 했던 곳이. 문득 지유환이 머리맡에서부터 속삭여왔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백성현은 천천히 눈을 떠서 지유환의 얼굴을 아로새기듯 바라보았다. 눈을 들어 살펴본 이곳은 그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얼핏 보면 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야 알게 돼서 미안해요.”

“…….”

“그 날도. 혼자 축하하게 해서 미안해요. 많이 서운했죠.”

원망할 사람 없이 원망하던 그 날의 자신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백성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

“넌 작년에도 축하해줬었어.”

그는 모르겠지만, 스물넷의 생일에도 자신은 벅차도록 축하 받았었다. 최초의 생일 선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날 봤던 벚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간밤에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감상을 남겨두고 싶어서 한참을 끄적거리기도 했었다. 그 날만큼은 왜 그가 시를 쓰는 지 알 것도 같았었다.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저 꿈결 같은 공백이었다. 뭔가를 망설이듯 멈춰선 지유환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때마침 벚꽃이 사르르 떨어져 내렸다. 우연히 올려다 본 지유환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 *

“…생일 축하 합니다.”

백성현은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낮고 풍부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노래조차 온기를 띠는 듯했다.

“생일 축하 합니다.”

“…….”

“사랑하는….”

조금쯤 음정이 다른 듯한 소절이 이어졌다. 백성현은 혼자서는 늘 잇기가 힘들었던 그 다음 소절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마주친 지유환은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노래를 이어갔다. 그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져갔다.

“성현 형.”

“…….”

“생일 축하합니다.”

잦아들 듯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백성현은 얼굴을 붉힌 연인을 보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입을 벙긋거리던 백성현은 그 어떤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

사실 다 알고 있었다. 오늘 네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와주겠구나. 어쩌면 노래를 불러줄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내 생일을 네가 알아냈구나.

- 뭐하고 있는 거지?

네가 곁에 없어서 깨어난 새벽녘.

- …….

익숙하게 문을 열려다 말고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발걸음을 멈췄었다. 방문에 귀를 대고는 잠시간 숨 쉴 수 없었다. 잔뜩 소리를 죽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는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잠들었을 그 시간에.

너는 내게 불러줄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잖아.

버스에서 들었던 원장님의 마지막 대답이 귓가를 스친다.

- 저번에 소풍 같이 갔던 제 친구가 알려드린 건가요? 제가 생일이라고.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어지던 그 대답에 버스 안이라는 것도 잊고 뜨거운 숨이 차올랐었다.

- 어제 전화가 왔었단다. 네가 음식 중에 뭘 좋아하는 지 물어봤어. 혹시 갖고 싶어 하던 게 있었는지도. 작년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다고, 이번에는 제대로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더구나.

오직 저만을 위한 노래가 끝나고 백성현은 지유환의 품에 바르작거리며 파고들었다. 솟구치는 감정을 뭐라 정의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머리맡에서 다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주 안아주는 팔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초봄에 태어난 걸 축하해요.”

- 이런 날에 태어난 사람도 있겠죠.

“생일마다 벚꽃을 보는 소감은 어때요.”

- 그 사람은 생일마다 벚꽃을 보겠어요.

1년 전 벚꽃 나무 아래에서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야 알아줘서 미안하다는 듯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참아오던 무언가가 터져버리는 감각이었다. 백성현은 표정을 허물고 말았다. 투명한 막이 생긴 것처럼 시야가 어룽져갔다.

“응. 너무 좋아.”

초봄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이렇게나 예쁜 꽃이 핀다고.

“너무, 너무 예쁘다.”

오늘은 평생 듣지 못했던 노래를 두 번이나 들었다고. 백성현은 일기에도 쓰지 못할 말들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생일 축하해요.”

“…….”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달아오른 얼굴로 백성현은 숨을 죽였다. 지유환은 가끔씩의 미소를 비추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뺨을 훔쳐낸 백성현은 하얗게 웃었다.

그런 말들을 꼭 들어보고 싶었지. 남들이 생일마다 으레 듣곤 하는 그런 말을 저도 한 번쯤은.

“응. 태어나서 다행이야. 정말로….”

흐릿하게 어룽진 벚꽃잎이 흩날렸다. 그 아래 선 백성현은 지유환의 시에서 보고 기억해두었던 아름다운 표현들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쏟아냈다.

네가… 내게 눈부신 밤이고 온 세상을 가득 메울 따뜻한 노랫소리야.

유난히 일찍 맞은 아침, 창가로 내리쬐는 햇살. 그 옆을 날아다니는 정령 같은 불빛이지.

생명의 원소이자, 나의 새로운 근원. 살아갈 목적인 동시에 살아낼 과정. 그건 너야. 네가 그런 거야.

그랬던 네가, 오늘은 봄이 되었구나.

“고마워.”

“…….”

“이런 봄은… 본 적이 없었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비가 내렸다. 망울을 틔운 꽃들은 이미 겨우내 이야기를 하얗게 잊은 것만 같았다. 은실 같은 달빛 줄기 하나하나가 새 봄을 엮어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지유환이 작게 속닥여왔다. 온 몸의 세포가 바쁘게 반응했다.

“처음 만났던 때가 요즘도 가끔 떠올라요.”

“…….”

“참 풋풋했잖아요. 서로 처음인 게 많았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무기질적이었던 얼굴. 다가가기조차 힘들어보였던 오롯이 혼자인 그 모습이. 그 장면 옆으로도 여러 순간들이 필름처럼 이어졌다. 우산을 나눠 쓰고도 온통 젖어버렸던 그 날, 숨결이 이어지던 구원 같던 순간. 둘이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던 무더위와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던 세상. 눈물나게 찬란했던 우리의 기억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걸 그리워하게 되겠죠.”

“…….”

“돌아갈 수 없으니까 더 빛나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언젠가는 지금을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

“그래도 성현 형.”

한 음절조차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말들을 몸속에 붙들어 놓고 평생을 살아내고 싶었다.

“저는 앞으로의 우리를 더 기대하고 있어요.”

“응. 나도, 나도 그래.”

“모든 추억들은 여기 살아있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사랑해요, 우리.”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고 꺼내보아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도록 한 장면 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분주히 옮기면서. 그곳에서도 벚꽃이 휘날리고, 네가 웃고 있을 수 있도록.

“숨을 쉬는 한, 우리가 있는 한….”

그 언젠가 생명이 닳아버려도, 네가 준 언어만큼은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에 영원히 찬란하게 살아있도록.

“나는 형의 연인이에요.”

초침이 느려지고, 두 사람의 사이로 나부끼는 바람결은 시계태엽만큼 느슨해진다.

연인은 그곳에 서있다.

그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그 순간을 담아낼 수는 없다.

< - Spring landscape with lovers (연인이 있는 봄의 풍경) >

꼴라쥬,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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