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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iebesträume (사랑의 꿈) (15/22)

2. Liebesträume (사랑의 꿈)

* * *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면서 뜨겁고 습했던 땅위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높푸른 하늘에서 불어온 바람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잎들을 장난치듯 들었다 놓았다. 백성현은 투명한 유리 너머 누르무레하게 번져가는 이파리들을 가만한 눈으로 훑었다. 이쯤에서 강의를 마무리하겠다는 노교수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강의실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이번에는 수강신청 날짜를 놓치지도 않았고, 공강이나 점심시간도 고려한 만큼 만족스러운 시간표가 나왔기 때문에 그럭저럭 학교를 다닐 만은 했다. 물론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지유환의 시간표였다. 주 2회라도 노트테이킹을 해 줄 수 있도록 시간표에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꽤나 골머리를 앓았던 바 있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같이 들을만한 교양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아예 전공과목 필기를 해주기로 했었다.

“선배님!”

정외과의 필수 교양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백성현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춘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높이보다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나서야 상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이번 강의에서 같은 조가 된 여학생이었다.

먼저 부른 쪽은 그 쪽인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마침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가 남은 것은 백성현과 여학생 둘 뿐이었다. 백성현은 천천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번 강의, 참고 교재 제본한 거 혹시 필요하지 않으세요?”

으레 참고 교재라는 게 그러하듯 제 값 주고 사기에는 돈이 아까운 탓에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고 해서 넙죽 필요하다고 할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백성현은 간단하게 거절했다.

“괜찮아요. 참고 교재 범위가 그렇게 넓진 않은 것 같아서요.”

“어차피 저도 친구 거까지 제본했다가 필요 없어진 거예요.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여기.”

가방을 뒤적이던 여학생은 백성현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깔끔하게 제본 된 교재를 손에 쥐여주고는 도망치듯 뒤돌아나갔다. 횡설수설하다가 사라진 뒷모습을 보던 백성현은 눈매를 좁혔다. 그렇게 강의실의 문턱을 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받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다음에 돌려줘야겠네.”

백성현은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인문대 강의동으로 들어섰다. 집에서도 매일 볼 수 있는데 볼 때마다 설렌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전공 강의실로 한 발을 들인 순간, 이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백성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인사를 건네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지유환은 이미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백성현은 상대가 의도적으로 지유환에게 정확한 입모양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왜인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 분이 이번에 노트테이킹 해주신다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시선이 백성현에게로 번져갔다. 노트테이킹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이번 학기에 전공 강의를 필기해 주기로 한 것은 맞았으므로 백성현은 간단히 네, 하고 대답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번 학기에는 교양 맡으셨죠? 저는 그 때 전공 강의 노트테이킹 도와드렸었어요. 저도 국문과거든요.”

백성현은 그제야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 오는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아챘다. 백성현은 이미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코끝으로 물씬 비 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봄인데도 비가 많이 왔던 날, 학생회관 앞에서 지유환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대였다. 백성현은 저를 향한 그 눈을 멍하니 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날 마주앉은 두 사람이 무척 그럴듯해 보여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던 기억이 있었다.

“이번에는 전공 말고 다른 교양을 맡아달라고 하셔서, 누가 해주시나 궁금했었는데.”

밝고 쾌활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침 그녀의 등 뒤로 교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친구 분? 아니면 그냥 아르바이트?”

백성현은 아르바이트라는 대목에서 멈칫 굳었다. 그와 자신의 관계를 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녀의 눈길은 백성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친하세요?”

왜인지 그냥 친구라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답하기에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백성현은 입을 달싹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강단에 교수가 자리를 잡았고, 잠자코 대화를 읽고 있던 지유환이 턱을 괸 채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같이 살아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높낮이 없이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여자는 웃는 표정 그대로 멈춰 섰다. 놀란 것은 백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굳은 표정은 찰나처럼 지나갔고, 강의가 시작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잡담은 잦아들었다. 아, 많이 친하시구나, 하는 목소리를 끝으로 대화는 어영부영 마무리되었다. 마침 교수의 여상한 강의 소개가 시작됐다.

백성현은 반쯤 경악한 심정으로 지유환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상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막 하고 다녀도 되나 싶었던 탓이었다.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백성현은 재빨리 키보드를 타닥타닥 쳤다.

- 그냥 친구라고 하지 왜….

워드창에 홀로 쓰인 그 문장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 같아서 양심이 찔렸다. 지유환은 한 줄밖에 없는 필기를 확인하고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는 뭔가를 쓰는 대신 입모양으로 말했다.

- 친구 아니잖아요.

그 말에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는 창가 자리 중에서도 맨 뒷줄의 가장자리였다. 저번 교양에서 들었던 것과 일맥상통한 현대 문학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 교수의 이야기가 사담으로 넘어갔다. 그에 따라 백성현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을 때였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지유환의 오른손이 느릿하게 책상 위로 올라왔다. 조금씩 천천히 거리를 좁히던 그의 손은 이내 왼손을 부드럽게 맞잡아왔다.

깜짝 놀란 나머지 굳어버린 백성현과 달리 지유환은 책상 아래로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는 강의에만 집중하고 있는 양 블랙 보드를 살피는 것이었다. 지유환은 느릿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껴오더니 교수의 사담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틈을 타 미미하게 입 꼬리만 들어 올렸다.

백성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괜히 주위를 곁눈질로 살폈다. 맞잡은 손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을 수 있는 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몰래 손을 잡고 있어서 그런 지 손끝이 잔뜩 예민하게 곱아들었다.

손을 풀려고 하자 깍지를 껴오는 힘이 더욱 세졌다. 이제 손을 잡는 것쯤은 대단한 스킨십도 아닐 텐데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백성현은 힘으로는 손깍지를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나머지 한 손을 바삐 움직여 구조 사인을 보내듯 타자를 쳤다.

- 손 나증에 자ㅂ아

수업 내용을 확인하듯 노트북을 훑어본 지유환이 평소 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꼭 그 주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한참이나 맞잡고 있었다. 백성현은 강의가 끝날 때쯤에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백하게 손을 놓아주는 지유환을 보며 혼자서만 바쁜 심장 위를 꾹꾹 눌렀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녀는 내일 교양 시간 때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네며 강의실을 나가고 있었다. 백성현은 지유환이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며 노트북과 필기도구를 챙겨 넣었다.

“저 분이 교양 필기 해주시는구나.”

아무래도 같은 과라고 했으니 겹치는 교양도 있는 모양이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가방을 정리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다가 그렇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분명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닐 텐데 내일 보자는 말이 묘하게 귀에 걸렸다.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라 백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 때, 홀연히 머리맡에서 심각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평소보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백성현은 부러 긴장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오늘 저녁은 뭘 만들죠.”

백성현의 보폭이 점차 느려졌다. 지유환은 얼빠진 듯한 얼굴을 보며 고민스럽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듯 느려진 보폭에 속도를 맞춘 채였다.

“오늘 강의 끝나면 같이 장보러 가요. 음,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지유환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둘이서 먹을 저녁거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느냐는 듯 저를 돌아보는 얼굴을 앞에 두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레?”

* * *

한창 저녁거리를 사러 올 시간이라 그런지 마트 안은 북적북적했다. 타임 세일을 한다는 판촉부터 바쁘게 돌아가는 시식 코너까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백성현은 어색하게 카트를 밀었다.

지유환은 마감과 같은 중요한 일정으로 인해서 집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직접 장을 보러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집에서 주문을 할 수도 있지만 직접 사러 오는 게 재미있다고도 했다. 뭐가 신선한 재료인지 보면 아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며 살았던 백성현은 그런 걸 볼 줄 몰랐기에 연신 감탄을 흘리며 지유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채소 코너에 멈춰선 그는 카레에 들어갈 만한 재료들을 골라냈다. 신선한 재료들이 카트 안에 하나둘씩 쌓여가는 와중, 지유환이 당근을 집어 들었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그 팔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나 당근 싫어하는데.”

먹는 것에는 거의 가리는 것이 없었지만 딱 하나, 익힌 당근만큼은 먹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딱히 불평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지유환이 당근을 집기에 무의식중에 그런 말이 나온 것뿐이었다. 본인조차 조금 당황한 때에 지유환이 웃는 낯으로 왜요, 하고 물어왔다. 백성현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뭔가 물컹물컹해서 싫어.”

“편식하면 안 되는데.”

그 말에 지유환의 팔을 잡아당기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지유환은 편식을 하면 안 된다는 말에 걸맞게 재료들을 카트에 골고루 담았다.

“…….”

남은 건 계산뿐이었다. 하지만 지유환은 별안간 계산대로 향하던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필요한 재료는 이미 다 샀기에 어딜 가나 싶었는데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감아왔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좋아하는 단 것들을 앞에 두고는 사고 싶은 걸 다 고르라는 듯 가볍게 눈짓했다.

“어? 고르라고?”

“디저트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는 물론 보기만 해도 단 맛이 느껴지는 머핀, 쿠키 같은 제과류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백성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들렌과 슈, 초콜릿 쿠키를 쭈뼛쭈뼛 집어 들었다. 케이크도 집어 올까 하다가 다음으로 미룬 차였다. 지유환은 채소 코너를 앞에 뒀을 때와는 달리 반짝거리는 백성현의 눈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는 카트 안에 차곡차곡 쌓인 디저트들을 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다른 건 안 사도 돼요?”

역시 케이크도 사는 편이 좋을까. 백성현의 눈이 고민으로 짙어졌다. 그 망설이는 기색을 읽어낸 지유환이 평연하게 덧붙였다.

“하나만 더 사요.”

“그러면….”

백성현은 재빨리 하나를 더 집었다. 카트 한 구석에 초콜릿 케이크가 추가되었다.

* * *

넓고 외로워 보였던 부엌은 지유환이 서 있는 것만으로 꽉 차 보였다. 부엌의 인덕션이나 선반은 보통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백성현도 그 높이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으므로 얼마 전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오늘은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부엌에 난 창문으로부터 노을이 번져왔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원래는 끼니를 챙겨먹는 데 시간을 정해놓지 않았지만 규칙적인 삶을 사는 지유환과 같이 살다보니 점심에는 점심을, 저녁에는 저녁을 먹게 되었다. 때문에 이 맘 때쯤에 식사를 차릴 때면 늘 저녁노을과 함께였다.

“네. 오늘은 없어요.”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성현은 아쉬운 마음으로 지유환의 옆을 기웃거리며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능숙한 칼질이나 깔끔하고 간결한 요리 과정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뭔가를 눈 깜짝 할 새에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게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요리하는 거 보는 게 재밌어요?”

미리 씻어두었던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가른 그는 말없이 한 쪽을 백성현에게 내밀었다. 백성현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우물우물 씹었다. 그 다음은 지유환이 썰기 시작한 것은 당근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카레에는 당근도 들어갈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근을 노려보았다. 정말 넣을 생각인 건가.

“응.”

예쁘게 썬 감자를 냄비에 넣고 볶던 지유환이 당근으로 손을 가져갔다. 백성현은 지유환의 옆에 서서 불시에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백성현은 눈을 치뜨며 그 자세 그대로 지유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넣게?”

“…….”

“다시 생각해 봐. 너 요리 잘하잖아….”

“아.”

하지만 지유환은 때때로 냉정할 때가 있었다. 백성현은 감자를 볶던 냄비에 당근이 와르르 들어가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당근은 비타민A가 풍부하다고 했던 것 같아요.”

“…….”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먹어보는 게 어때요.”

권유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이미 그는 당근을 포함한 나머지 재료들도 함께 볶고 있었다. 백성현은 지유환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런 부분에서 미묘하게 완강했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떨어지려고 하자마자 그의 팔을 잡아챘다. 눈 깜짝할 새에 입술이 맞부딪혔다. 짧게 쪽, 소리를 내며 건조한 듯 마른 입술이 떨어지고 백성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지유환은 고체 카레를 냄비에 넣으며 말했다.

“곧 있으면 완성되니까 식탁에 앉아있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 입맞춤 한 번에 묘하게 서운했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럴게.”

백성현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식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것저것 다 한 사이에 뽀뽀 한 번에 이렇게 부끄러울 일인가.

정말 지유환에게 단단히 홀리긴 한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널따란 어깨를 보고 있자니 이참에 편식을 고쳐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중증이네….”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의 집에 처음 왔던 날에도 여기 앉아서 그가 뭔가를 만들고 있는 걸 기다렸었다. 끝이 툭툭 끊어지는 말투에 저를 싫어하는 건가 지레짐작을 했던 날이기도 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나눴던 첫 식사는 정말이지 어색했었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지도 몰랐다.

“…쟤는 근데 왜 다짜고짜.”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유환은 절대 첫 만남에 식사를 권할 만큼 오지랖 넓은 성격이 못 되었다.

“왜 그랬던 거지….”

공상을 깨고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당사자였다. 그는 양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보기 좋게 담긴 카레에서 향긋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올라왔다. 그 때가 얼마나 어색했든 간에 이제는 그와 마주앉아 뭔가를 나눠먹는 게 당연해졌다. 백성현은 자그맣게 감탄을 흘렸다.

“우와.”

예전에 먹어봤던 평범한 음식도 지유환이 만들어 준 것은 몇 배로 맛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카레보다 점도가 있고 색이 짙은 카레는 이제껏 먹어왔던 카레와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었다. 물컹해서 싫어하는 당근은 숨을 참고 먹었다.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목 뒤로 넘긴 뒤에는 잘했다는 것처럼 웃어주는 통에 편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릇이 어느 정도 비어갈 때 쯤, 백성현은 식탁 위에 있는 지유환의 커다랗고 하얀 손을 톡톡 두드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시선이 백성현의 입모양을 향했다.

“예전에, 오므라이스 해줬던 날 있잖아.”

“네.”

백성현은 장난스러운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왜 갑자기 저녁 먹고 가라고 했었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지유환의 손이 멈췄다. 지유환은 수저를 내려놓고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백성현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난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제가요.”

지유환이 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한 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무척 생소한 말이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라 오히려 놀란 쪽은 백성현이었다. 유리잔을 내려놓은 지유환은 빙빙 돌리지 않고 직구의 대답을 내놓았다.

“맛있는 걸 해주고 싶었어요.”

“…….”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인데, 잘 보이고 싶었고.”

조금쯤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생각했을 줄은… 몰랐네요.”

백성현은 처연하게 아래를 향한 기다란 속눈썹을 보며 마음이 덜컹했다. 마치 지유환에게 동물 같은 귀가 있었다면 축 처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어어, 하고 목소리를 끌던 백성현은 다시 커다란 손을 두드리고 열심히 변명을 시작했다. 지유환의 얼굴이 다시 저를 향했다.

“아니야. 내가 오해했어.”

“…….”

“미안. 이제는 아닌 거 알아….”

더 말해보라는 처연한 눈길에 응해 백성현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어, 그리고 오므라이스는 효과 있었던 것 같아.”

“정말요.”

“응. 그 날 있고 얼마 안 있어서 네가 엄청 좋아졌,”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기던 백성현의 말이 뚝 멎었다. 지유환의 눈매가 언뜻 기울었다.

“…….”

“…….”

삐걱거리던 백성현은 스르르 시선을 내려 얼마 남지 않은 카레를 욱여넣듯 입안에 넣었다. 찰나처럼 지나간 말이니 뭐라고 했는지 못 알아들었을 테다. 이내 그는 담백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

“오늘도 맛있었어.”

“…….”

“설거지는 내가 할게. 식탁에 놔둬.”

잔뜩 억누른 듯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백성현은 양치를 하기 위해 휙 발길을 돌렸다. 마치 저번에 산타는 정말 있다고 했을 때처럼 꾹꾹 눌러 담은 웃음이었다. 백성현은 치카치카 소리가 날 정도로 힘주어 양치질 했다. 뒤따라 들어온 지유환도 조용히 서서 칫솔 위로 치약을 짜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지유환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잔뜩 번져 있었다. 그는 칫솔질을 하려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청 좋아해주셔서….”

그 서두에 백성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유환은 한참을 웃고 나면 눈 밑이 붉어지곤 했다. 그는 붉어진 눈가를 가릴 생각도 않으며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감사합니다.”

“…….”

백성현은 입 안에 물을 한가득 머금은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지유환은 기어코 세면대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성현의 귓등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저녁이 또 하루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잠자리가 바뀌어 잠들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해결 방안은 꽤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지유환이 직접 방까지 와서 백성현을 재워주기도 하고, 같이 이야기를 하며 놀다가 거실의 소파베드에서 나란히 누워 잠들기도 했다. 때때로 긴 밤을 보낼 때면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에게 뒤엉키곤 했다. 그런 날엔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빈틈없이 겹쳐져 온기를 나누었다. 중독 될 수밖에 없는 온도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아침을 함께 맞는 일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간혹 각자의 방에서 따로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물론 한밤중에 서로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있었고 말이다. 지유환은 등을 보이고 자고 있다가도 백성현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마주 안아 주었다.

그렇게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정신을 차리면 온 세상이 환해져 있었다. 백성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시야에 들어찬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감탄을 흘렸다. 부드러운 햇살이 창백한 얼굴 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색소 옅은 피부는 마치 세공된 것처럼 투명했다. 창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빛이 기다란 속눈썹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지유환은 잠버릇이랄 게 없었다. 종종 뒤척이는 편인 백성현과는 다르게 죽은 듯이 얌전하게 잤다. 백성현이 몸을 일으켜 세수와 양치를 하고 올 때까지도 지유환은 한밤중이었다.

마감이 있는 기간의 지유환은 유독 아침에 약했다. 같이 살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루 중에 애교가 가장 많아지는 때이기도 해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침의 지유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새 시침이 7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백성현은 지유환을 흔들어 깨웠다.

곤히 잠든 얼굴 그대로 순순히 흔들리던 지유환의 눈가가 작게 떨렸다. 이윽고 드러난 까만 눈동자는 예상대로 가물가물 거리고 있었다. 백성현은 희고 마른 뺨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일어나.”

“…….”

“좋은 아침.”

금방이라도 다시 감길 듯한 눈이 본능적으로 입모양을 쫓아왔다. 지유환은 으음, 하고 목안을 울리다가 불시에 억센 힘으로 백성현을 끌어당겨 단단한 팔 안에 가두었다. 금방 자세가 무너지고 커다란 몸에 안긴 꼴이 되었다.

“몇 시예요….”

평소에 비하면 확연히 발음이 뭉개져 있었다. 백성현은 그런 지유환의 손바닥을 끌어다 7자를 커다랗게 써주었다.

“일곱 시…?”

끄덕끄덕.

날렵한 코끝이 쇄골 위를 지분거려왔다. 백성현은 어깨를 움찔거리다가도 지유환의 품에 순순히 안겨있었다.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머리맡을 울렸다.

“좋은 아침….”

“…….”

“조금 더 자요, 형….”

“어제도 이러다가 늦게 일어났으면서.”

어차피 폭 안겨있었으므로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지유환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자요….”

지유환은 제멋대로 아침잠을 연장하고 백성현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자기 덩치를 생각 못하고 파고드는 탓에 백성현의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형한테, 좋은 향기…. 잠꼬대처럼 지유환이 중얼거리는 통에 백성현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도 결국 이렇게 됐다. 지유환은 7시에 일어나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정작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내일도 여덟 시나 돼야 눈을 뜰 게 뻔했다.

“하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백성현은 어느새 다시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다가 기다란 속눈썹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지유환이 좋다고 했던 향기는 늘 그에게서도 나는 향기였다. 같이 살다보니 생활패턴부터 체취까지 서서히 닮아가는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여덟 시가 될 때까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예쁜 얼굴을 감상했다. 요즈음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 지유환이었다. 그의 얼굴, 손길, 체취 같은 것들로 하루가 열리고 닫혔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백성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같이 사는 거 되게 좋네….”

고른 숨을 내쉬는 지유환의 콧등을 매만져본 백성현은 얼굴을 붉히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귀엽다.”

아침은 늘 조용하고도 분주했다. 백성현은 꾸벅꾸벅 졸면서 양치질을 하는 지유환을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찍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거실로 나와 커피 머신 앞에 선 백성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원두를 갈았다. 지난 여름 방학 동안 카페 아르바이트를 한 덕에 머신을 다루는 것이 다시 손에 익은 덕분이었다.

에스프레소 두 개를 연달아 내린 그는 하나는 얼음이 가득 든 잔에, 하나는 뜨거운 물이 든 잔에 부었다. 곧바로 포터 필터를 닦아내는데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부터 한가득 껴안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

발소리도 없었기에 백성현은 의외로운 마음으로 등 뒤를 흘긋 보았다. 목 위로 고개를 턱 얹은 지유환은 숨을 작게 들이마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음. 진짜 좋은 향기 나는데.”

“…….”

“원래 향수 안 쓰잖아요.”

백성현은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눈짓했다. 8시 20분. 원래라면 그가 컨디션을 되찾을 즈음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애교스럽게 구는 건 그다지 없던 일이었다. 백성현은 몸을 돌려 여상하게 답했다.

“그냥 로션 있는 거 썼는데?”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자 지유환이 고맙다는 듯 입가를 올렸다. 그는 진하고 따뜻한 커피를 좋아했다.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자신과는 취향이 달랐다.

“저한테는 그런 향이 안 나던데.”

“아니야. 내가 느끼기에는 비슷한데….”

“비슷한데?”

“원래 사람은 자기 체향은 잘 모른대.”

그래요?, 하고 한 모금을 넘긴 지유환이 등 뒤의 아일랜드 식탁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늘 첫 모금을 마신 뒤에는 스쳐가듯 칭찬을 해주곤 했다.

“맛있네. 오늘도 고마워요.”

“……응.”

지유환과 연인 관계라는 것을 다 떠나서 그는 같이 살기에 이상적인 상대였다. 이 넓은 집이 쾌적하게 유지되는 것은 그가 깔끔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로 빨랫감이나 설거짓거리조차 쌓이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집을 비우는 시간에는 그가 따로 고용한 사람이 청소를 해주었기에 백성현은 간단한 심부름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월세를 비롯해 식비, 교통비까지 자질구레하게 돈 쓸 일도 아예 없어져서 그는 늘 부채감 아닌 부채감을 안고 있었다. 유리잔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백성현이 서두를 꺼냈다.

“혹시 생활비가 한 달에 얼마 정도 나와? 나도 어느 정도는 부담하고 싶어서.”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서 있던 지유환이 천천히 눈을 마주쳐왔다. 그가 걸친 짙은 계열의 헨리넥 셔츠가 단단한 몸 선에 맞아떨어져 우아해보였다. 간결한 동작으로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더 마신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가 먹여주고 싶어서 먹이는 거고.”

“…….”

“여기서 재우고 싶어서 같이 살자고 했는데.”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어조와 말투였다.

“왜 돈을 주고 싶어 하세요.”

백성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유환은 대답 없는 백성현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어 툭 뱉었다.

“저랑 결혼했다고 생각하세요.”

“…뭐?”

“결혼한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놀라운 부분이었다. 장난으로 한 말이라면 늦게라도 눈매를 사르르 휘며 농담이에요, 하고 덧붙일 텐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심이야?”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시려고요.”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두 뺨을 감싸오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유리잔의 열감이 그대로 옮겨갔는지 뺨이 달아오를 정도로 홧홧했다. 지유환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상체를 기울여 말캉한 입술을 겹쳐왔다.

직접 내린 커피향이 달콤하게 번져왔다. 입술을 보드랍게 머금고 고개를 양쪽으로 느릿하게 젓던 그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아 잠옷차림인 백성현의 윗도리를 들춰내 허리 아래 맨살을 지분거렸다.

“혹시 생각 있었던 거면 접어요.”

“…….”

“어차피 안 놔줄 거긴 한데.”

지유환이 유감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백성현은 멍하니 입을 뻐끔거렸다. 그제야 지유환은 피식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떨어져나가기 직전에는 굳어있는 백성현을 놀리듯 뺨 위로 쪽, 하고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좋아해요, 형.”

예쁘게 눈을 휘는 남자를 보면서 백성현은 어느새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덕분에 그는 그날 내내 결혼이라는 글자가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 * *

비교적 부드러워진 분위기 때문인지 개강 뒤 백성현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1학기만 해도 전달사항이나 과제와 관련된 최소한의 연락만 해오던 이들이 안부를 묻거나 사담을 걸어오기까지 했다. 전공 강의실에서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게 된 것은 그 일련일 가능성이 컸다.

“성현아, 너 여자 친구 생겼다며?”

복학직후 개강총회 때 술자리에서 보았던 것 같은 동기 중 한 명이 너스레를 떨며 물어왔다. 백성현은 눈매를 좁히며 되물었다.

“뭐?”

“어, 아니야? 어디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같은 과 여자애라고.”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데도 이렇게 백성현에게는 종종 근거 없는 헛소문이 돌 때가 있었다. 성준혁이 술자리에서 말해줬던 것들만 해도 몇 개는 됐다. 대학교란 원래 안줏거리 삼기 위해 남의 이야기를 지어대는 곳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어이가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또 누가 그런 영양가 없는 헛소리를 하고 다닌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정정은 칼 같았다.

“여자친구 없어.”

사귀고 있는 사람은 있지만. 백성현은 입 밖으로 낼 생각 없는 말을 삼키고 교재를 정리했다.

“이상하다….”

“야, 성현이가 없다잖아. 그럼 없는 거겠지.”

“그럼 혹시 소개팅 같은 거 관심은 없어? 안 그래도 지금 여대랑 잡힌,”

때마침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백성현은 칠판을 고갯짓하며 입을 열었다.

“자료 월요일까지지?”

“어? 어어. 웬만하면 주말까지는 보내 놓을게.”

“벌써 가려고?”

대충 고개를 까딱인 백성현은 다음 전공 때 보자고 하는 말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기들과의 대화는 왜인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소개팅에 같이 나가주지 않겠느냐, 술자리에 와주지 않겠느냐. ㅡ하나 같이 백성현에게 필요가 없는 제안들뿐이었다.

“스물넷이나 돼서….”

상대는 신입생이니 어쩌니 하며 시시덕거리던 것을 떠올린 백성현이 미간을 구겼다. 차라리 성준혁처럼 술자리에 목숨 거는 타입이 나았다.

그보다 오늘은 오랜만에 지유환과 도서관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제껏 과제나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만났던 것과는 다르게 오늘 만남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 시집 몇 개만 추천해줘.

지난 밤, 백성현은 눈앞에 있는 현직 시인에게 시집 추천을 부탁했었다. 그의 집에 차고 넘치는 시집 중 몇 개를 추천받을 생각이었는데 왜인지 그는 백성현에게 도서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서재에만 가도 빼곡하게 꽂혀있지 않느냐며 물어도 옆에 나란히 앉아 미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이유를 캐묻자 손에 들고 있던 소설책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 형이랑 도서관 가는 게 좋아서요.

- …….

- 데이트 같기도 하고.

그러고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백성현을 안아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번쩍번쩍 들리는 게 마치 곰 인형이라도 된 듯해서 백성현이 질색하는 자세였지만 지유환은 그렇게 백성현을 꼭 안고 고개를 비비며 파고드는 걸 요즈음의 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 때에 소설책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백성현은 고개를 휘휘 젓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잠을 잘 때까지도 놓아주지를 않아서 떼어놓느라 고생을 했었다. 힘은 또 얼마나 센 지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매일같이 체격차를 확인하고 있는 백성현이 힘없이 늘어져 있을 무렵에야 지유환은 백성현을 놓아줬었다.

백성현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도서관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학교 재단에서 도서관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이 괜히 공강이 생기면 도서관으로 몰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미디어 자료나 휴식 공간이 있는 1층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한 발자국씩 위로 올라갈수록 소음은 옅어져갔다. 그 모든 건 3층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백성현은 순문학 코너 근처 빛이 드는 자리로 걸어갔다. 익숙한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니 지유환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거기에 얼마간 앉아있을 때였다. 누군가 제 자리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백성현은 고개를 들어 옆을 확인했다.

“어.”

백성현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제본을 받은 것을 돌려주려고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던 차였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상대가 제일 처음 건넨 말은 인사였다.

“아, 안녕하세요.”

몇 번쯤 이런 상황이 있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상대가 이런저런 말을 걸어올 때마다 백성현은 그 호감을 쉽게 인지하곤 했었다. 예전엔 대강의 호감을 가늠하는 게 다였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누군가를 끙끙 앓아 본 적이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그게…. 저도 선배님이랑 같은 전공 듣거든요.”

백성현은 아,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같은 전공을 듣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워낙에 대형과였고, 백성현이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시야가 좁은 편이라 더욱이 그랬다.

“어쩌다 얘기하시는 걸 들어서요. 정말 여자 친구 없으세요?”

끝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요즘은 이런 것들이 보였다. 이를테면 상대가 여기 오기까지 했을 고민과 같은 마음 너머의 것들이. 백성현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없긴 한데….”

백성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180을 넘는 신장이었기에 상대의 시선이 자연히 위로 따라 올라갔다. 백성현은 가방 앞에 넣어둔 제본된 교재를 꺼내 여학생에게 내밀었다.

“저번에 받은 제본은 돌려줄게요. 받을 이유가,”

받을 이유가 없어서, 라고 말하려던 백성현이 눈을 좁히고 말을 순화했다.

“다른 필요한 친구 주세요.”

“아니에요.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받아주세요. 어차피 독강이라.”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충분히 마음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침묵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으신가 봐요.”

그래도 저 여학생은 자신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자신이었다면 절대 저런 질문을 입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편이 훨씬 나은 방법이긴 했다. 백성현은 저를 올려다보는 여학생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여학생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행동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이온음료를 내밀어왔다. 백성현은 그녀가 그 옆에 있던 쪽지를 숨기듯 다른 한 손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아, 이건… 여기 계신 거 보고.”

“…….”

“드리려고, 방금 사온 거라서요.”

백성현은 주위를 훑어보았다. 바로 몇 걸음 거리에 자판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는 바로 음료를 받아드는 대신 여학생을 내려다보았다. 예전 같았다면 받지 않겠다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말했겠지만 왜인지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나씩 받는 걸로 해요.”

그는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 자판기 앞에 섰다. 여학생은 얼결에 그 옆에 서서 이어진 백성현의 말을 들었다.

“똑같은 걸로 괜찮아요?”

뒤늦게 무슨 말인지 알아챈 여학생이 멍하니 빨간불이 들어온 버튼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루미늄 캔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백성현은 팔을 뻗어 음료를 건넸다. 같은 이온음료를 받아든 여학생이 멍하니 손 안에 쥔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선배님은 소문이랑 좀 다르신 것 같아요.”

“…….”

“소문이랑 다르게….”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백성현은 그 말보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인영에 더 주의가 가려는 것을 겨우 잡아두었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래도 조별 과제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이걸로 끝이라는 걸 아는 듯한 음성이었다. 백성현은 그제야 그녀가 내밀어 오는 음료를 받아들었다. 조금 미지근하게 식은 듯한 표면이 손끝으로 만져졌다.

“이번에 주제 잡을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쩌면 마지막일 인사를 듣는 도중에도 자꾸만 시야 끝에 누군가가 걸렸다. 반사적으로 옆을 바라 본 백성현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지유환과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다음 강의 때 뵐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여학생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백성현은 지유환의 시선이 느리게 그녀를 향하는 것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여학생은 우뚝 선 지유환의 옆을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지유환은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그쪽을 주시했다. 이온음료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백성현은 지유환이 저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장면을 숨을 죽이고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반듯한 걸음걸이에, 늘 그랬듯 무감한 표정이었는데도 뭔가가 다르게 느껴졌다.

“여기 계셨네요.”

“…아, 응.”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였다. 백성현은 지유환이 자판기 앞에 서서 뭔가를 골라 꺼낼 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었다.

애초의 목표를 상기시켜 준 것은 지유환이었다. 그는 매끄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집은 한 두 개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일단 고르러 갈까요.”

그 너른 등을 따라 책장으로 걸어가는데 별안간 갈증이 일었다. 무의식중에 들고 있던 음료의 풀톱을 잡아당긴 백성현은 한 모금을 목 뒤로 흘려보냈다. 미지근하고 단 액체가 입안에 남아 해갈이 된 것 같지도 않았다.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언뜻 보아도 지유환의 집에 있었던 것들과 겹치는 게 많았다. 아무 말도 없는 지유환을 보다가 가만히 서서 책등을 살피는데 등 뒤로 바짝 다가온 벽 같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책을 꺼내려던 백성현이 멈칫 한 것은 뒤에서 들려오는 가라앉은 듯한 음성 때문이었다.

“아까, 누구예요?”

책장간의 거리가 이렇게까지 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간격은 더없이 비좁게 느껴졌다. 지유환은 책을 붙잡은 채로 굳어버린 백성현의 손등 위를 가볍게 겹쳐 쥐었다. 태연한 음성이 이어졌다.

“형 얼굴에서 눈을 못 떼던데.”

“…….”

“성현 형 이상형이 뭐였죠….”

목소리가 평소보다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의 호흡이 닿는 목 뒤가 움찔움찔 떨렸다.

“아. 밝고 다정한 사람…이랬지.”

그건 그냥 전 여자친구에 대해 스치듯 했던 설명의 일부일 뿐이었다. 백성현은 일단은 책장 밖으로 나가자는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지유환과 나란히 마주보자마자 도주로를 막듯이 단단한 팔이 백성현의 옆을 짚어왔다.

“어때요, 방금 그 사람은.”

“…뭐?”

“좀 밝고 다정해 보여요?”

“갑자기, 무슨…….”

“그 사람은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제야 안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있는 것이 보였다. 지유환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설마 여기서,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지유환이 밖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춰오던 것이 떠올랐다. 백성현은 급하게 오른손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에 맞닿았다.

진짜 할 생각이었구나. 손을 치우라는 듯 눈짓하는 지유환을 본 백성현은 망연한 눈을 했다. 때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소리가 났다. 백성현은 반사적으로 지유환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밀리지가 않았다. 또각, 또각. 한 발짝씩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건너편 책장 즈음에서 멎었다.

백성현의 놀란 듯한 눈이 책장 너머를 향하는 것을 본 지유환이 흥미 없이 뒤를 눈짓하다가 다시 백성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미처 손으로 가리지 못한 눈가에 입술이 떨어진 것은 그 때였다. 눈 밑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던 입술이 떨어져나가고, 백성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나머지 한 팔로 지유환의 어깨를 꼭 잡고 밀어냈다. 입을 가리던 손을 떼자 지유환이 드디어 순순히 밀려났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어투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백성현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너 설마 질투해?”

지유환은 표정 변화 없이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답부터요.”

“…뭐라고 하긴.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지.”

“음료수는 왜 주셨어요.”

훨씬 전부터 다 보고 있었구나. 백성현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자 지유환은 낮게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이번에는 차마 막아낼 틈이 없었다.

건너편의 책장에서 작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지유환은 입술을 겹쳐왔다. 그는 백성현이 버둥거리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맞닿은 아랫입술을 머금고 빨아올렸다.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차례로 포개어오는 통에 입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백성현은 뒤로 잡히는 책장을 꼭 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았던 입술이 잠깐 떨어져나가고 무표정한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권태롭던 눈매가 화라도 난 것처럼 서늘해져있었다. 이런 얼굴은 정말이지 생소했다. 백성현은 몸을 슬슬 옆으로 물리면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 질투하는 거 맞잖아….

이번에도 단번에 입모양을 읽었을 지유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이제야 알았냐는 투로 대답했다.

“맞아요.”

“…어?”

아연한 표정을 한 백성현은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러운 기색 없이 가라앉은 것을 올려다보았다.

“다음에 누가 또 그러면.”

“…….”

“우리 이러는 거…,”

이온음료의 단맛이 남아있는 입술을 장난치듯 깨문 지유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직접 보여줄 거예요.”

“…….”

“그럼 다시는 말도 못 걸텐데.”

안 그래요, 하고 덧붙여오는 말에 백성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눈앞의 얼굴은 한 치의 부끄럼조차 없었다. 게다가 왠지 지유환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짓들을 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가까운 곳에서는 여러 명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소리도 함께인 것을 보니 이쪽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굳어있던 백성현은 재빨리 좁게 난 틈을 비집고 책장 밖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앞을 지나가는 학생 무리와 맞닥뜨린 그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였다. 조금만 더 오래 지유환에게 잡혀 있었다면 붙어있는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무리가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그는 홱 뒤돌아 지유환을 쏘아보았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이런 건 집에서만 할 거야. 밖에선….”

백성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손까지… 아니, 그냥 안 돼.”

나름 화를 낸 것이었는데 지유환은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안전거리를 벌리듯 멀찌감치 선 백성현을 흥미로운 듯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싼 공기마저 부드럽게 어르는 듯한 웃음이었다. 백성현은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속 거기 있으실 거예요.”

“…….”

“이리와요.”

그 재촉에 망설이다가도 다시 책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유환에게 단단히 홀려 있는 탓이었다. 그래도 화가 난 건 맞았기에 백성현은 바로 옆에 서 있으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이긴 했다. 이윽고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물음이 들려왔다.

“화났어요?”

“…….”

“몰랐는데, 제가 질투가 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뭘 주거나 하지 말라고 지유환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뒤로도 그는 책을 건네주면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얽거나 갑작스레 어깨 위로 고개를 묻어오거나 했다.

“…하아.”

백성현은 오늘만큼 순문학 코너가 한산한 것이 고마운 적이 없었다.

* * *

그래, 그 때만 해도 분명 지유환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남들이 다 지나다니는 도서관에서 입을 맞추거나, 이상형이 뭐니 하며 질투하는 건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었다. 애초에 스스로는 질투를 하지 않는 성격이라 정의내린 바 있었다.

“…….”

그러므로 교양 과목을 맡아서 필기를 해준다는 이와 지유환이 짧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쪽으로 온통 신경이 쏠리는 것은 기분 탓이어야만 했다.

“이번에 좌담회 참석하세요?”

대부분이 강의나 학과 행사에 관련된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요. 날짜가 안 맞아서.”

“정말요? 당연히 오실 줄 알았는데. 친분도 있으셨던 걸로 기억해서요. 그 작가님 이번에 젊은 작가상도 받으셨잖아요. 작품 되게 좋던데.”

어느 날 지유환이 누군가 공들여 포장한 것이 분명한 초콜릿을 들고 집에 왔을 때부터 증세는 더 심해졌다. 그 초콜릿의 출처가 바로 그녀였다. 단 걸 못 먹는 지유환은 그런 걸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다음날 초콜릿이 사라져있었다. 그 때의 말로 표현 못할 서운했던 감정이 다시금 덮쳐오는 듯했다.

“성현 씨도 혹시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오세요.”

한낱 대화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백성현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손을 멈췄다.

“제가 진행 담당이거든요.”

통성명을 한 뒤로부터 종종 이런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서슴없는 호칭에 백성현은 아, 네, 하는 어색한 대답을 내놓고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두 사람간의 짤막한 대화가 이어졌다. 백성현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유환을 흘긋거릴 때나 가끔 길을 가다 낯선 이들이 그에게 사인 요청을 할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며칠 전에는 무려 교양 강의동을 향하는 두 사람의 나란한 뒷모습까지 우연히 맞닥뜨린 바 있었다.

“다음 강의 때 봬요. 성현 씨도 잘 들어가세요.”

그녀는 첫인상처럼 활발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복도를 걷는 와중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질문 하나를 고르고 골라냈다.

“…유빈 씨도 1학기 때부터 필기해주셨으면, 많이 친하겠네.”

그 질문을 하기까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백성현은 그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양 말을 이어갔다.

“어떤 분이신지도 궁금하고.”

입모양을 주시하던 지유환이 느지막이 대답을 한 것은 그 때였다.

“유빈 씨요?”

“어? 응. 유빈 씨. 둘이 있으면 어떤 얘기하는 지도 궁금하고….”

“왜 그런 게 궁금하세요.”

생각지 못한 반문에 백성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유라면 많았다. 그와 2학기째 같이 앉아서 수업을 듣는 사람이니까. 사실 예전에 비 왔을 때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것도 봤었는데, 그 때 되게 친해보였으니까.

‘난 그 때 못 본 것처럼 도망이나 쳤었는데.’

며칠 전에는 둘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봐서. 그 모습이 왜인지 예전 그 때랑 겹쳐보여서, 마음이 덜그럭거려서. 하나같이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아니야. 그냥, 한 번 물어봤어.”

짧은 구간을 걸으면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지유환은 왼쪽으로, 백성현은 오른쪽으로 가야지 각자 다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도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백성현은 발끝을 보고 걸었다. 이윽고 오른쪽으로 몸을 튼 백성현은 고개를 들어 웅얼거리듯 말했다.

“다음 수업 잘 해. …집에서 보자.”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못 할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와 가까워 보이는 상대에 대해 궁금해 한 게 다였다. 미묘하게 싸늘했던 대답이 침묵의 순간부터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등을 돌려 얼마쯤 걸어가는데 텅 빈 복도가 묵직한 발걸음소리로 공명했다. 뒤따라오는 듯한 발소리였다. 이내 아프지 않게 손목을 잡아끄는 악력이 느껴졌다. 망설이다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어딘가 착잡함이 어려 있었다.

“미안해요, 말투가 이러니까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가 너무…,”

한 차례 호흡을 고른 지유환이 다시금 읊조렸다.

“강의 끝나면 데리러 갈게요. 조금 이따 봐요.”

집이 아니라. 생략된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유환은 기어이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백성현을 놓아주었다.

강의실로 향하는 내내 괜한 걸 물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다고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누구나 나름의 인간관계가 있고, 그 선이 존재하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좀 물어볼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싫어할 질문인가. 조금쯤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앉아있던 백성현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머뭇거리며 집어 들었다. 도착한 문자 위에는 성준혁의 이름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 선경대 경제 시사 동아리 신입부원 대모집!!

백성현 대환영! 우리 같이 취업 준비해요~♡

직접 한 자 한 자 친 것으로 보이는 허접한 문자 아래에서 해괴한 이모티콘이 윙크를 해대고 있었다. 저런 걸 돈 주고 사다니, 성준혁의 미추관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려면 이런 걸 사야지….”

백성현은 화면을 수놓은 토끼들을 울적하게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 지유환이 종류별로 사서 보내준 귀여운 분홍 토끼 이모티콘들이었다. 받자마자 입까지 벌린 채로 한참을 구경하고 있자 저도 똑같은 걸 샀다며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속닥거리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백성현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별 생각 없이 답장을 보냈다. 성준혁에게는 신입생 때부터 지겹도록 동아리 가입 권유를 받아왔기에 이런 수작은 익숙했다.

- 휴학했는데 동아리 계속 해?

숨 쉴 틈도 없이 답장이 도착했다.

- 나 저기 명예 회장이야

“…….”

- OT만 와도 되니까 이번에야말로 어떤 곳인지 한 번 제대로 알아보는 건 어떠신가요??

- 아웃풋 최고의 취업 동아리

- 동아리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 다들 오고 싶어서 안달난 동아리인데 백성현 군에게는 아주 활짝 열려있답니다. ^^

- 매일 집에만 있지 말고 활동 범위를 좀 넓혀보세요 ^^

쭉쭉 읽어나가던 것과 달리 마지막 문자에서는 오래도록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유환과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는 모든 일상을 그와 공유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좁디좁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등장한 지유환의 존재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제껏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때문에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사소한 행동들에도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백성현은 한참동안 답장을 썼다 지웠다하기를 반복했다. 이 다년간의 질척한 수작을 받아들일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 OT가 언젠데.

잠깐의 정적 뒤 말풍선이 쏟아져 내렸다. 일주일 뒤라는 말만 확인한 백성현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의도야 학구적이지만은 못했다고 해도 오리엔테이션에 온 이상 제대로 소개를 들을 생각이었다. 막 씻고 온 탓에 머리카락은 아직 약간 젖어있었다. 지유환에게는 성준혁과 둘이서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왔다. -너에게 의존하는 것이 싫어서 활동 범위를 넓혀보고자 동아리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러 간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간에 지유환도 시상식에 참여하는 일정이 있었기에 밤이나 돼야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 연합 동아리에다 그 규모도 큰 모양인지 오리엔테이션을 소강당에서 한다고 했다. 현수막이 걸린 입구 주위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소강당 앞에 선 성준혁이 백성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든 것은 그 때였다.

“야, 여기!”

그 부름에 성준혁의 주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 몇몇의 주의가 백성현에게로 몰렸다. 성준혁은 퍼석하게 죽어있던 눈들이 한 사람의 등장만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야야, 안 돼. 쟤 임자 있어.”

백성현 이름 들어봤지?, 어 그게 쟤야. 말했잖아 실물은 더 잘났다고. 근데 사귀는 사람 있다니까, 하는 말소리가 거리를 좁힐수록 또렷하게 들렸다. 백성현은 그제야 강의실에서 듣던 헛소문의 근원을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긴 다리를 뻗어 입구까지 걸어간 그는 간략한 개요가 쓰인 브로슈어를 받아들었다. 성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2학기에는 추천으로만 입부할 수 있는 거 알지? 내가 너 죽어라 추천했다. 명예 회장 추천이니까 넌 그냥 프리 패스야. 일단 너도 오리엔테이션 한 번 들어보면 아, 여기가 바로 내가 남은 대학 생활을….”

“안 들어가?”

줄줄 쏟아지는 말을 익숙하게 끊어낸 백성현이 가볍게 소강당 안을 눈짓하자 성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엉? 그야 당연히 들어가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처럼 성준혁은 고개를 주억이다가 이미 멀찌감치 걸어가는 백성현을 따라 소강당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명예 회장으로서 남아있는 학생들에게 당부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네도 6시까지 서 있다가 대충 다 들어온 것 같으면 그냥 문 닫고 들어와!”

백성현은 새삼스럽게 성준혁이 동아리 활동이고 학과 생활이고 죄다 열심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네 오는 것은 물론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부러 성준혁의 자리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래서, 오늘 OT 끝나고 뒤풀이 가주시는 거죠?”

“저번에 선배님 안 오셨을 때 다 엄청 걱정했거든요. 술자린데 안 오실리가 있느냐고.”

“그 때 어디 아프셨던 거예요?”

“오늘은 오실 거죠?”

남녀 할 것 없이 모여든 이들의 질문에 성준혁은 곤란한 낯을 했다. 백성현은 본의 아니게 그가 술자리를 빼먹은 것을 듣고 내심 놀란 상태였다. 개요를 기계적으로 훑고 있는 와중 옆에서 성준혁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우리 나름 취업을 위한 동아리인데 나도 취업을 해야지, 얘들아. 휴학까지 해놓고 언제까지 술만 마시겠어.”

“그럼 오늘도 안 오시게요?”

단번에 아쉬운 소리를 내는 이들을 앞에 두고 성준혁은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OT는 뒤풀이까지가 OT잖아.”

“아…, 선배님 정말 잘 배우셨다….”

“이렇게 또 배워가네요.”

“역시 고학력자….”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인사가 오갔다. 6시가 가까워지자 어수선하던 소강당 안도 점점 조용해져갔다. 성준혁은 혀를 끌끌 차며 백성현에게 중얼거렸다.

“다들 원래 이렇게까지 날 반겨주지 않는데.”

“…….”

“애들 계속 흘긋거리는 거 못 느꼈냐? 반 이상은 너 보러 온 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하여간에 외모지상주의가 이렇다며 성준혁은 짐짓 구슬픈 노래를 흥얼거리곤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미리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놓고자 소책자만 주구장창 읽고 있던 백성현으로서는 모를 말이었다. 그보다 진위 확인이 먼저였다.

“진짜 취업 준비한다고 술자리 안 나간거야?”

“아, 그거.”

소강당을 비추는 불빛의 조도가 낮아졌다. 강단에 서있던 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성준혁은 성심껏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전날에 너무 마셔서 술병난 거야. 아무리 나라도 이틀 연속은 힘들지.”

“…….”

할 말을 잃은 백성현은 침묵을 택했고, 앞쪽에서는 ppt가 시작됐다.

저쪽은 명예 회장 따위가 아니라 동아리 회장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동아리를 병행하는 것보다 하나의 동아리를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하는 것이 취업에 유리하다고 의견을 밝힌 뒤, 동아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직접, 간접적으로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활동들도 많았다. 정기적으로 진행된다는 자체 면접이나 토론, 봉사 활동 등의 프로그램들을 보면 취업 동아리라는 성준혁의 말도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오리엔테이션은 일곱 시를 조금 넘겨서야 끝이 났다.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괜찮았던 발표였기에 정말 그의 말대로 남은 학교 생활동안은 동아리 활동을 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마침 슬슬 대외활동 기록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소책자를 챙겨들며 자리를 정리하는 백성현을 보며 성준혁은 눈을 찡긋거렸다.

“뒤풀이는 요 앞에 뉴욕 비어에서 하기로 했어.”

“…….”

익숙하게 거절하려던 백성현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입을 스르르 다물었다. 어차피 지금 집에 가도 지유환은 없었다. 게다가 그 집은 혼자 있기엔 너무 큰 곳이었다. 지유환이 있어야만 꽉 찬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그 대답에 도리어 놀란 것은 성준혁이었다. 눈을 홉뜨고 서 있던 그는 얼마 안가 방정맞게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정말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냐며, 역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며 떠드는 것에는 도로 취소를 하고픈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렇게 가게 된 술자리였다.

“하아….”

건배사를 따라 휩쓸리듯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은 백성현은 정말로 그 때 돌아갔어야 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저희 소주 인당 한 병씩만 더 주세요!”

“여기는 맥주도요. 야, 야. 꿀주 태워 꿀주.”

성준혁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걸 배워온 곳이 동아리인 모양이었다. 뒤풀이 장소는 꽤 규모가 큰 학교 근처 술집이었는데, 동아리 부원만으로도 술집이 꽉 찼다. 동아리 사람들은 안주가 오기 전에 미리 한잔, 마실 때는 원샷이라는 무언의 규칙이 있는 것처럼 마셔댔다. 하나같이 성준혁이 술자리에서 고수하던 자세였다.

“선배님이 저희 동아리 들어오실 줄은 몰랐어요.”

백성현은 그럭저럭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게 통성명을 한 상태였다. 어떻게 저를 아는지는 몰라도 맞은편에 앉은 남자후배는 그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퍽 반가운 듯 인사를 해왔다.

“아직 완전히 정한 건,”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얘가 또 우리 정외과 수석이에요. 고오급 인력이라는 거지.”

입을 막듯 열변을 토한 성준혁은 그런 의미로 또 한 잔 하자는 것처럼 소주잔을 들어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 후배는 백성현의 비어있는 술잔을 보고 재빨리 소주를 부었다.

“아! 술잔이 비어있었네요.”

뒤늦게 눈치 채서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굳이 채워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새도 없이 넘치도록 소주가 차올랐고, 다시 건배사가 시작됐다. 백성현은 시끌벅적한 술집을 둘러보다가 진동조차 없이 잠잠한 핸드폰을 꼭 쥐었다 놓았다. 휩쓸리듯 입 안에 털어 넣은 소주는 오늘따라 맛이 없었다. 쌉싸래하게 남은 잔향이 싫어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은 지유환도 늦게 들어온다고 했으니 빨리 오라는 문자도 오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일찍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백성현이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성준혁은 다 들리도록 혀를 찼다.

“그러면 안 된다고, 백성현아.”

“…….”

“너 연락 기다리는 거지? 커플 아닌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아, 좀 다물어.”

“다물긴 뭘 다물어.”

“…….”

“조금만 좋아하면 아무 문제없다던 사람 맞냐? 조금? 이게 쪼오끔이야?”

성준혁이 차였을 때 위로를 한답시고 자신이 직접 했던 말이었다. 백성현은 술이나 더 마시라는 뜻으로 비어 있는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콸콸 부어주었다. 성준혁은 보기만 해도 맛이 없다는 듯 치를 떨었다.

“소맥 비율 1:1? 절교 하자고 돌려 말하나본데….”

말만 OT 뒤풀이일 뿐 실질적으로는 동아리 회식이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이 밀려들어와서 테이블 곳곳에 의자를 끌어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중 대다수가 백성현과 성준혁이 앉아있는 테이블까지 와서 아는 체를 해왔다. 이번에도 몇 명의 무리가 와서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하고 있는 때였다.

감흥 없이 정면을 바라보던 백성현은 놀란 듯 숨을 삼키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얼굴 위로 얼마 전 도서관에서 음료수를 건네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녀는 먼저 아는 체를 하고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성준혁이 넉살 좋게 웃으며 물어왔다.

“어? 둘이 아는 사이야?”

“그…. 강의가 몇 개 겹쳐서요. 조별 과제 때 많이 도와주셨었어요.”

“진짜? 와, 나도 복학하면 같이 조별 과제해야 되는데. 얘 엄청 잘 가르쳐주지 않아? 말투가 좀 정이 없어서 그렇지.”

그 말에 그제야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여학생은 인사와 함께 꾸벅 고개를 숙이곤 동기들과 자리로 찾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성준혁이 신기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저번에 말했었잖아. 너 사진보고 소개 시켜달라고 했던 동아리 후배 있었다고.”

“…아.”

“쟤한테는 너 사귀는 사람 있다고 안 될 것 같다고 했었거든. 전공에서 둘이 안면 텄을 줄은 몰랐네.”

백성현은 잊고 있던 이야기를 상기해냈다. 그러고 보니 성준혁이 저에게 누군가를 소개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던 때가 있었다. 꽤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그건 그녀가 다짜고짜 제본을 쥐여 준 것이 아니었단 걸 의미하기도 했다. 백성현은 옅게 미간을 구겼다. 그런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도 더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마셨는데도 술자리는 파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약간쯤 정신이 몽롱해지니 잊고 있던 우울감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는 성준혁에게 했던 말마따나 연애를 할 때도 어느 정도 마음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사람을 사귀었다. 조금만 좋아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말한 것은 그 맥락에서였다.

“하아….”

분명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유환에 대한 마음은 끝도 없이 넘쳐흐르기만 했다. 누군가를 질투해보는 것도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래서야 나중에는 집착도 하게 되진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었다. 질척거리다가 미움 받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지금만 해도 혹시라도 문자가 오진 않을까 싶어 핸드폰을 뚫어져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안 돼…. 적당히 하자….”

뭐든 적당히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백성현은 큰 맘 먹고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게다가 지유환은 다른 일도 아니고 시상식을 위해 집을 비운 것이었다. 그것도 잘은 몰라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시상식이라는 것 같았다. 박수는 못 쳐줄망정 왜 문자를 안 보내 주냐고 칭얼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원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은 새까맣게 변했다. 내내 입안에 맴돌던 말이 툭 튀어나온 건 그 때였다.

“…보고 싶다.”

백성현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사실은 너무 질투가 났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에 그가 상대의 입모양을 보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지유환을 훔쳐보는 것도 싫었다.

“수제 초콜릿….”

어디서 그런 걸 받아와서.

그렇게나 넓은 캠퍼스에서 하필 그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걸 봤을 때는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았었다. 둘만 있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그녀는 같은 국문과라고 했으니 분명 저보다 아는 것도, 공통된 관심사도 많을 터였다. 얼마 전 지유환에게 갑작스럽게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몇 권 읽어도 보았지만 그걸로 하루아침에 견문이 넓어질 리는 없었다.

“국문과면… 글도 잘 쓰겠다.”

지난 교양 강의에서 직접적인 욕만 듣지 않았다 뿐이지 처참한 평을 받았던 자신의 시가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너무 울적해서 바닥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혼자 뭐라는 거야.”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혼잣말을 하다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백성현을 본 성준혁은 미간을 구겼다. 분명 주량의 반도 채 먹지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았다.

“야, 벌써 취한 거 아니지?”

백성현은 침울하게 아래를 보던 눈을 들어 성준혁을 보았다. 우울한 눈을 마주한 성준혁은 움찔하다가 설마하는 눈으로 물었다.

“아, 씨발. 설마 너….”

“…….”

“연락 없어서 이러는 거….”

“…….”

“와, 나 진짜….”

“…….”

“너 백성현 맞냐? 그리고 너 이러는 거 별로 안 좋다. 나 봐. 좋은 거 좋다고 있는 대로 다 표현하다가 100일도 안 돼서 차였잖아.”

계속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백성현은 그제야 어떤 단어에 반응한 것처럼 되물었다.

“…차였다고?”

“그래. 너도 봤잖아, 어? 너도 나처럼 되고 싶냐?”

“……차여?”

성준혁은 이어진 백성현의 반응에 얼어붙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내가 너랑 같냐, 하며 귓등으로도 제 말을 듣지 않았을 백성현이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눈을 급하게 아래로 내리깔았다. 성준혁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올라간 눈매 끝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뺨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이내 백성현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서럽게 중얼거렸다.

“근데 내가 걜….”

“……뭐?”

“너무 좋아해.”

주변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많은 이들의 시선이 뚝뚝 울고 있는 백성현을 향했다. 저와 상관없는 외부인의 시선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양 백성현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너무 좋아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백성현은 급하게 제 뺨을 닦아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손이 테이블을 더듬어 라이터를 챙기는 것을 본 성준혁은 얼이 빠진 채로 대답했다.

“어, 어…. 그래. 갔다 와.”

올해로 4년을 꼬박 가까이에서 보아왔지만 백성현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봤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준혁은 소주 세 병 분의 취기가 단박에 날아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의 핸드폰화면이 밝아졌다. 이제 보니 낯선 번호로부터의 문자가 몇 개나 와있었다.

내용은 하나같이 간결하고 사무적이었다. 성준혁은 떨떠름하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 내가 봤을 때 우리 성현이는 아직 찐한 연애를 못해봤어. 하긴, 네가 누굴 열렬히 좋아한다는 건 상상도 안 간다, 야.

성준혁은 혀를 끌끌 찼다. 예전에 했던 그 말은 오늘부로 취소였다. 게다가 이제 보니 백성현은 차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차이기는 개뿔이….”

다들 뭔가를 잔뜩 묻고 싶은 눈으로 저를 보았지만 성준혁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을 따름이었다. 묘하게 처진 기류를 알아챈 누군가가 술 게임을 주도하자 다시 분위기는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 * *

불투명한 유리벽 안은 바깥보다 덜 소란하고, 비좁으며, 매캐했다. 벽에 붙어선 백성현은 담배 케이스를 열어 한 개비를 꺼냈다. 아직도 목 안이 뜨거웠다. 울었다는 자각이 있긴 했지만 그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백성현은 토끼눈이 된 스스로의 모습을 창에 비춰보고 다시 한 번 눈가를 슥슥 닦아냈다.

전원을 끈 핸드폰은 자리에 고이 두고 온 것 같았다. 이 쯤 되면 문자가 한 통쯤은 와있을 것 같아서 빈손이 더욱 허전하게 느껴졌다.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깨물던 백성현은 뒤늦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불안함이 아주 약간 가라앉음과 동시에 시야가 취기에 울렁거렸다.

우뚝 선 저를 제외하고도 주변은 여전히 바쁘게 흘러갔다. 문이 열리고, 부스 안으로 들어온 한 무리의 잡담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취기 어린 웃음소리를 냈다. 담배 끝이 빠르게 타들어갔다.

어느새 꼬박 두 개비를 피운 백성현은 어느새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무리들도 다시 술자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백성현은 별안간 누군가 저를 향해 가까이 온다는 것을 그림자를 보고 알았다. 한 개비를 더 꺼내려던 백성현의 손이 뚝 멈췄다.

“여기서 뵙네요, …선배님.”

마주한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성준혁이 말했던 동아리 후배, 백성현의 입장으로는 두어 개쯤의 강의가 겹치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소란스럽게 들어왔던 무리 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이제 보니 흡연 부스에 남은 것은 단 둘이었다. 여학생은 한참을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네.”

“……제가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죠.”

의외로운 질문이긴 했지만 백성현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네.”

사실이었기에 대답은 간결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려지는 얼굴이 흡연 부스 안의 매캐함에 가려졌다.

“사실 복학하시기 전부터 좋아했어요. 준혁 선배 통해서 이것저것 많이 여쭤보기도 했고….”

“…….”

“준혁 선배가 사귀는 사람 있다고 해서 포기 했었는데, 선배님께서 직접 여자 친구 없다고 하셨잖아요. 좋아하는 사람만 있으신 거, 맞죠.”

“…….”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 안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이래서 지유환이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뭔가를 주거나 하지 말라고 한 것인지도 몰랐다. 호의로 비롯된 행동이 늘 이상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좋아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안 사귀지도 않으시는 거라면,”

그 때였다. 등 뒤로 문이 열리고, 여학생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지만 뒤돌아 볼 수 없었다. 이런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숨을 죽여, 마음을 꺼내기 직전의 순간.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떠세요.”

저벅저벅하는 구둣발 소리는 왜인지 바로 뒤에서 멎었다. 거절의 말을 골라내 입을 열기도 전에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짙고 달콤한, 여기 올 일이 없을 인물의 향기였다. 백성현은 눈을 홉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려던 그는 저보다 큰 인영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그 때였다. 단단한 팔이 어깨를 끌어안듯 감싸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갔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여학생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백성현은 시야에 가득 찬 권태로운 옆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빼앗아간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가져가 깊게 빨아들인 당사자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백성현을 응시하다가 담배 연기를 옆으로 뱉어냈다. 고막을 긁어오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좁은 부스 안을 울렸다. 찰나처럼 지유환의 눈매가 좁아들었다.

“생각보다 독한 거 피우시네요.”

갑작스럽게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백성현은 목 밑까지 차오르는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면서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둘이서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

“아무리 봐도 둘이 마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몸에 맞아 떨어지는 짙은 남색 슈트를 갖춰 입은 지유환이 웃음기조차 없이 중얼거렸다. 옷을 보아하니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여기로 온 것 같았다. 그의 높은 콧대에 걸쳐진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냉랭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백성현은 어깨를 움찔했다.

“저기, 누구신데,”

여학생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태연하게 고백을 훼방한 지유환은 여전히 백성현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제야 백성현은 지유환이 제게 한 짓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잠깐만, 너 지금….”

얼굴을 붉힌 백성현을 내려다보던 지유환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내 그는 백성현의 달아오른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바로 앞에 선 이의 눈에 잘 보이도록 노골적으로 쓰다듬는 기색이 역력한 손길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채로 타들어가는 담배가 피부 위로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듯하게 흔들렸다.

“형 발로 걸어가실래요,”

“…….”

“아니면 제가 직접 데려다드려요.”

여기서 말하는 ‘직접’의 의미는 종종 그러했듯 안아들고 가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백성현은 그제야 지유환이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유환이 저렇게 냉랭한 눈으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생소한 얼굴에 백성현은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답이 늦자 지유환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대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백성현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고백을 받았다고는 해도 우선순위는 명백했다.

“…갈게. 잠깐만.”

백성현은 공기가 조여드는 것만 같은 압박감 속에 입을 열었다. 여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었다. 그게 퍽 당황한 낯을 앞에 두고 그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지유환의 눈길이 입술 위를 진득하게 쓸어 왔다. 백성현은 그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며 스러지듯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 * *

차 안이 이토록 싸늘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백성현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핸드폰만 챙겨 그대로 지유환의 세단에 올라탔다.

백성현은 지유환이 도착한 직후의 상황을 상기해보았다. 지유환의 입장에서는 도서관에서 이미 한 번 보았을 여학생과, 그 앞에 말없이 서 있던 자신을 본 게 최초의 장면일 터였다. 성준혁과 둘이서 마신다고 해놓고 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입모양을 읽었다면 고백을 한 것도 눈치 챘을 거였다. 음료수 하나에도 그런 건 주지 말라고 했던 나무라듯 말하던 그가 지금은 조용히 액셀러레이터만 밟고 있었다.

툭, 툭. 핸들을 검지로 두드리던 지유환은 일상적인 어투로 툭 뱉듯이 말했다.

“제가 오해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주세요.”

“…….”

“핸드폰은 일부러 꺼놓은 것 같고, 둘이서 마시겠다고 하고 나간 건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데.”

“…….”

“제가 틀렸나요.”

빗겨보듯 백성현의 입매를 보던 지유환은 그 입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들어올렸다. 차체는 주차장에 반듯하게 멈춰 섰다. 그의 잇새로 짓씹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고백이나 받고 있질 않나.”

그 말에 백성현은 숨을 멈추었다. 그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우선 핸드폰은 일부러 꺼놓은 게 맞긴 했지만 연락을 기다리는 제 모습이 초라해서 그랬던 거였다. 절대 그의 연락을 막아놓으려고 끈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동아리에 들고자 한 것도 원인을 따지자면 지유환 때문이 아니었던가.

지유환은 옆으로 상체를 기울여 손수 백성현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나고 그는 미련 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

“변명을 듣고 싶었는데.”

“…….”

“형은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어 보이시네요.”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의 로비 안으로 들어서는 길이 평소보다 배로 길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도달하고, 훤히 외우고 있는 숫자열을 눌러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한껏 벌려진 악어의 입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만 같은 초조함이 엄습해왔다.

백성현은 문이 열리자마자 불을 켜고 그의 방으로 급하게 발길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이제껏 느껴본 적 없던 강한 힘에 의해 끌어당겨졌다. 검게 가라앉은 지유환의 눈이 이질적으로 빛났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

“제가 아까 본 거, 무슨 상황이에요.”

그건 말해달라는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음성이었지만 백성현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대충 어떤 오해를 한 건지도 알 것 같았기에 백성현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동아리 뒤풀이였어. 그 후배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고. 뭘 묻고 싶다길래 들어준다는 게,”

“원래 그렇게 친절한 성격이셨어요.”

느릿하게 안경을 벗어 철제 테이블 위로 올려둔 지유환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아니지 않나.”

사냥을 앞둔 짐승처럼 유연하게 몸을 밀착한 그는 슬금슬금 빠져나가려는 백성현을 끌어당겼다. 그에게 가까워지는 일초 일초가 숨 막히게 길었으나 숨결이 이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술 사이를 벌리고 파고드는 혀는 전에 없이 거칠었다. 체격에 밀리다보니 어느새 방안까지 뒷걸음질 친 백성현은 숨 쉴 틈조차 없이 입맞춤을 받아냈다.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결합은 긴밀하고 집요해져만 갔다. 이윽고 비릿한 피맛이 입 안을 도는 듯해서 백성현은 헐떡이며 고개를 비틀었다. 입술이 떨어진 것도 잠시, 지유환은 그대로 고개를 내려 하얀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읏…!”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살갗을 파고들 듯한 날카로움이었다. 바짝 굳어 있던 백성현은 이내 그 위를 녹을 듯이 빨아 당기는 뜨거운 입술에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커다란 손아귀 안에 가둬진 목줄기가 절로 뻣뻣해졌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목을 고정시키고 빈틈없이 눈을 마주쳤다.

발이 가는대로 뒷걸음질을 치던 백성현은 허리 뒤로 느껴지는 딱딱한 책상에 가로막혔다. 그는 지유환이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책상 위로 깔릴 것만 같은 자세에서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방금부터 손끝이 자꾸만 떨려오는 건 저 웃음기가 날아간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백성현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무거운 정적을 견뎌냈다. 뚫어질 듯 그를 내려다보던 지유환은 눈매를 설핏 좁혔다. 이내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백성현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그가 지금처럼 간혹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면 지유환이 나무라듯 하곤 했던 행동이었다. 지유환이 낮게 뇌까렸다.

“입술.”

“…….”

“조금 더 세게 물면 피나요.”

백성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었지만 백성현이 하는 말을 읽어내기 위해 맹목적으로 입모양에 고정된 시선만큼은 전과 같았다. 그제야 백성현은 지유환을 바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난 거 알겠어.”

“…….”

“알겠는데…. 그러…지마.”

“…….”

“화… 내지마.”

저 차가운 눈이 가슴에 푹푹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울컥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밀어붙이는 지유환이 원망스럽고, 또 그가 이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게 서러웠다. 뺨을 적시는 눈물에 가라앉아있던 검은 눈동자가 아주 약간 떨렸다.

“…좋아하는 거 알잖아.”

“…….”

“나는, 너를….”

분명 저 눈이 밉고 원망스러운데, 그런데도 혹시 걱정을 시킨 건 아닌가싶어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백성현은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바쁘게 훔치며 읊조렸다.

“너무… 너무 좋아하는데.”

“…….”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화내.”

백성현은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묘하게 거칠었던 지유환의 숨결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한껏 밀착되어 있던 그의 몸이 조금쯤 뒤로 물러났다. 기울어있던 자세를 바로 해주듯 백성현의 등을 끌어안은 지유환이 긴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멈춰있던 그는 이내 조심스럽게 백성현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그 손길에 더더욱 서러움이 밀려온 것처럼 밭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뭘 그렇게…, 흐으. 잘못했어.”

“…….”

“흐, 윽…. 너는, 어디서, 이상한 거나…, 받아오고.”

입모양을 주시하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불명확한 입모양 때문인지, 그 내용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도 기다리고, 흐, 으, 있었단 말이야…, 근데 계속, 계속 문자가 안 와서….”

조심스럽게 백성현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낸 지유환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우는 건 반칙이잖아요.”

“…흐윽, 으…흐으…….”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이렇게 울어요….”

원망하는 듯한 말과는 달리 얼굴을 감싼 손은 깨어질까 두려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유환은 그렁그렁한 백성현의 눈가를 들여다보다가 손마디를 내어 그 물기를 훔쳐 주었다.

“너, 때문…, 흐으, 너 때문이잖아…, 으, 흐윽….”

엉엉 우는 백성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지유환이 천천히 백성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제가 나빴어요.”

“으, 흐으, …흐윽.”

“제가 못 되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달라고, 지유환은 사위어가는 목소리로 빌듯이 말했다. 그는 백성현의 몸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동안을 꼭 안고 있었다. 붉게 번진 눈가 위로 열을 품을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쪽, 쪽 하는 애틋한 소리 사이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 분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

“결국엔 문자를 몇 개나 보냈어요.”

백성현은 숨을 고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답장이 없더라고요. 혹시 전화는 받을까 싶어서, 몇 번이나 걸었는데… 옆에 있던 분이 알려주셨어요. 아까 전부터 수화기에서 계속 기계음만 나왔다고.”

“…….”

“그것도 모르고 몇 번이나 걸고 있었어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럴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그 때부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어요.”

“…….”

“시상식 중간에 나와서 형을 찾으러 가는 길이….”

말을 멈춘 지유환은 짐짓 미간을 좁혔다.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골라내는 듯한 침묵이었다. 이윽고 선택된 단어에 백성현은 멈칫했다.

“무서웠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시상식을 나와서 처음 본 장면이 아까의 그 장면이라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백성현은 망연히 그 얼굴을 보기만 했다. 고요한 목소리가 공기 중을 울렸다.

“가끔 생각 같은 것들이… 몸을 앞질러갈 때가 있잖아요.”

“…….”

“그 때는 제가 가진 모든 게 저를 앞질러가는 느낌이었어요.”

“…….”

“형은 늘 너무 쉽게 저를 그렇게 만들어요.”

“…….”

“그냥 그런 거예요. …형 하나인 거예요.”

백성현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지유환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지금 탓을 하고 있지도, 왜 저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원망하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알려주고 있었다. 저에게 주어진 진리를 말하듯 담담한 어투였다. 사소하고 유치한 감정들로는 상처 낼 수 없는 고결한 무언가가 그 안에 살아있었다.

이제껏 괜히 울적해하던 당신의 사소하고 속상한 일들은 잔가지조차 되지 못한다고, 그보다 훨씬 깊고 안전한 지대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여기에 있다고, 조금만 들여다봐도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그는 온몸으로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저는 그래요, 형.”

그토록 수수한 고백에 백성현은 숨을 멈추었다.

“…질투 한 것도 맞아요.”

문득 고개를 돌린 백성현은 지유환의 입술을 깨물 듯 입에 물었다. 약간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깨물었으나 반응하듯 흘러나온 옅은 호흡에 더 이상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방금 전 지유환이 목 위에 이를 박아놓고도 더 파고들지 못하고 빨아올리기만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뭔가를 말하고자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도 여전히 입술을 겹치고 있는 듯한 열감이 남아있었다.

“거기까진 어떻게 알고 왔어.”

“친구 분이 알려주셨어요.”

“…성준혁? 걔 번호를 어떻게,”

“미리 알아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

“거의 한 시간동안 여기저기 묻다가, 겨우 알아냈거든요. 제 주위에는 정치외교학과랑 관련된 사람이 거의 없어서.”

지유환의 어깨에 몸을 기대자 그에게서만 나는 달콤한 체향이 번져왔다. 백성현은 그 안에 오래도록 안겨 파묻혀 있다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빈 씨가 준 초콜릿은 맛있었어?”

이제 와서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따지듯 묻고 나니 속이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놀란 듯 중얼거렸다.

“…정말 모르셨어요?”

“뭘.”

“형이에요. 제가 아니라.”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성현의 얼떨떨한 반응을 본 지유환은 정말로 그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뚫어져라 봤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초콜릿도 형 거예요.”

“…그런 말 없었잖아.”

지유환은 백성현의 입술을 매만지며 비식 웃었다.

“그런 말을 제가 왜 전해줘야 해요.”

“…….”

“너무 무감한 거 아닌가. 유빈 씨가 슬퍼하겠네.”

말과는 달리 그의 입꼬리는 만족스레 말려 올라가 있었다. 백성현은 아, 하고 멍한 소리를 냈다. 그녀가 한 번씩 이런저런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마음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공 강의를 들을 때마다 모든 감각이 옆에 앉은 지유환에게 곤두서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제야 지유환이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같이 살고 있다느니 친구가 아니라느니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녀에 대해 물었을 때 되돌아왔던 반응이 왜 그렇게까지 싸늘했던 건지도.

“…아니, 근데. 초콜릿은 그럼.”

하룻밤 새에 없어졌던 초콜릿을 떠올리며 묻자 지유환은 그런 건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무감한 낯을 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초콜릿을 먹은 흔적이 남아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온 데 간 데 없이 통째로 사라져 있던 거였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백성현은 입을 작게 벌렸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몸으로 파고들며 속닥였다.

“형은 안 그럴지 몰라도.”

“…….”

“저는 질투 엄청 많이 하니까….”

백성현의 몸이 파고드는 힘에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위협적인 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 같은 몸짓이었다. 멍하니 앉아 응석을 받아주던 백성현은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말을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나도 질투가 났던 거였어.”

왜 네가 전부가 돼 버릴까봐 무서웠을까.

지유환은 백성현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곤 손가락 하나하나를 어루만졌다. 약지가 비어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걱정스러운 속닥거림이 들려왔다. 백성현은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조그맣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세상이라면…,”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가시 하나 없는 마음을 두려워했다.

“…그건 꿈같은 일일 텐데.”

그곳에서는 세상 모든 일이 시가 되고, 숨 쉬는 생명들은 향기롭고 다정할 텐데. 너를 닮아 안온하고 따스한 세상일 텐데. 차근차근 한 발자국씩 내디뎌서 가고 싶었다. 이 요동치는 마음 하나를 나침반 삼아.

한참 뒤에야 지유환은 집에서라도 간단하게 한 잔하자고 속삭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술자리 도중에 나오게 된 걸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5분 뒤에 나와요, 하는 목소리가 귓가로 녹아들었다.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백성현은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응. 곧 갈게.”

< - Liebesträume (사랑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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