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hidden track. (13/22)

hidden track.

* * *

“소원은 나무에 걸 거니까 예쁘게 써야 해요.”

높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소망원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소원을 거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어떤 소원을 빌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를 단 소년은 둥그렇게 모여 앉은 아이들과 달리 한 구석에 홀로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은 종이를 받아들고도 뭔가를 써내려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은 소년이 있는 구석을 곁눈질하고는 일부러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선명한 악의가 담긴 음성이었다.

“백성현 또 싸웠다며?”

“못 됐어.”

“쟤는 왜 저렇게 자기 멋대로지?”

“아무튼 나는 쟤 싫어. 넌 무슨 소원 쓸 거야?”

소년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난 인형 사달라고 해야지. 또 강아지 키우고 싶은데. 스쳐 가는 소원들을 들으며 소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뭘 갖게 해달라고 할까. 아니면 하루 종일 단 것만 먹게 해달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가족이 생기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한참을 고민하던 소년은 혹여나 누가 볼까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손이 저릴 정도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소년은 눈치라도 보듯이 주위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재빨리 소원을 써낸 아이들은 이미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왁자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의 소원을 걸어주던 강혜숙은 소년의 앞에 멈춰 서서 다정하게 말했다.

“성현이 것도 걸어줄게. 이리 줄래?”

소년은 주춤거리다가 몇 번이나 접어서 꼬깃꼬깃해진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강혜숙은 곧바로 소년의 종이를 나무에 걸어주었다.

결국 소년이 낸 쪽지는 백지였다. 그렇게나 오래 고민했으면서 소원 하나 적어내지 못했다.

아름드리나무는 소년에 비해 너무나도 커서 고개를 아플 정도로 젖혀야 그 끝이 보였다. 소년은 혹시라도 종이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까 봐 못 박힌 듯 서서 한참동안이나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써내지 못했으니, 그 대신 모두를 위한 소원이라도 빌기로 했다.

소년은 주문을 거는 것처럼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여기 걸린 소원들이 다….>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척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어떤 아이들은 원하는 걸 갖게. 어떤 아이들에게는 가족이 생기게.

모든 소원들이 이루어지고, 조금쯤 시간이 남아서 제게도 기회가 닿는다면.

<그때는…,>

<사람들이….>

소년은 말간 눈으로 나무초리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모두들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못된 아이가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게 말을 걸게 해주세요. 누군가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누군가는 저만을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세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오직 저만 보는 사람이 나타나게 해주세요.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한 번쯤은 저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기게 해주세요. 소년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우두커니 선 소년의 뒤로 해질녘의 땅거미가 내렸다. 가지 위로 새로 돋은 무수한 소원들이 바람결에 너울거렸다. 설익은 소원들을 지키고 선 소년의 그림자가 길어져 갔다.

hidden track. 소년을 사랑해줘

꼴라쥬 (collage) 2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