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연인에게 (11/22)

11. 연인에게

* * *

아르바이트를 할 사람을 구하는 곳은 카페, 편의점, 서점, PC방 정도였다. 시급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역시 카페가 제일 낫겠지.”

백성현은 턱을 괴고 스크롤을 내렸다. 슬슬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사실 지유환이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준 돈이 생각보다 커서 급하게 구할 필요는 없었지만 언제까지고 그 돈으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성현은 월세를 입금하라는 문자를 되새기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가능한 빨리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개중에는 그나마 손에 익은 일인 카페 아르바이트가 가장 쉬워보였다. 백성현은 경력도 있고 기본적인 음료도 제조할 수 있다는 소개와 함께 지원서를 작성했다. 주변 카페 세 군데에 일괄적으로 지원서를 보낸 그는 손을 들어 어깨를 주물렀다.

방학이라 그런지 하루하루가 더없이 길게 느껴졌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날은 더 그랬다.

공연히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놀리던 그가 인터넷 검색창에 이연 작가의 이름을 검색한 것은, 불현듯 그녀의 작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자마자 방대한 양의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나름의 호기심을 가지고 최근 문서부터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자수성가,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어두운 과거를 딛고 일어난. 끝내 요절해버린. 일정한 키워드들이 그녀를 설명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도 있네…….”

다큐멘터리의 러닝 타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영상에 달린 평도 좋은 편이었지만 백성현은 얼마 보지 못하고 창을 꺼버리고 말았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전시해 놓은 듯한 영상이었다. 마치 포르말린을 발라둔 것처럼. 개인의 비극이 완전하게 박제 되어 있었다. 왜인지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새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불편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그때였다. 언뜻 미리보기에도 결코 일상적인 문자라고는 할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에 백성현은 의아한 얼굴로 문자를 열어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이름이 첫 줄에 쓰여 있었고, 그 아래로는 생소한 표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한 성당의 주소가 연달아 도착했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삭제하지 못한 것은, 문자에 적힌 이름의 성씨가 자신의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그렇지 않은 종류의 예감보다 훨씬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다. 백성현은 그 문자를 못 본 것처럼 넘기려다가도 왜인지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져서 강혜숙에게 문자 하나를 보내고 말았다. 안부와 함께 누군가의 번호를 알 수 있겠냐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답장이 왔다.

그녀가 보내온 숫자 열과 방금 전 도착한 메시지의 숫자 열을 비교해 본 백성현은 제자리에 굳었다.

품이 남는 양복과 어색한 듯한 악수, 서럽게 울던 얼굴.

문자는 그의 부고를 알리고 있었다. 창밖의 매미 울음소리가 높이 치솟았다.

* * *

비단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쌍한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어떠한 비극적인 감정이 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몇 년 전, 우연히 한 프로그램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서 소개 된 한 가족의 사연은 아직까지도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기억 속에 숨 쉬고 있었다.

가난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끈적끈적하면서 뿌옇고 불쌍한 이야기였다. 사연의 주인공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한 집안의 가장과 그를 따라온 중학생, 초등학생쯤 되는 두 아들들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어머니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가장은 이렇다 할 능력이 없었기에 막노동판을 전전했고 일가족은 아버지가 벌어오는 일당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가장은 잠까지 줄여가며 공사판에서 자재들을 날랐다. 그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라거나 흙에 더럽혀진 신발이 자꾸 눈에 걸렸다. 몇만 원밖에 안 되는 일급이 담긴 봉투를 소중하게 쥐곤 주름이 패도록 웃는 모습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꺼림칙할 정도로 바람직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일을 마친 그가 돌아갈 곳은 한 평 반 남짓 되는 고시원이었다. 일가족은 행여 옆방에 사는 이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잔뜩 숨을 죽이며 살아갔다.

그런 삶을 겨우 영위해가면서도 아들들은 해진 운동화를 신고 아버지와 외식 한 번 나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양 굴었다. 그들은 고르고 골라 들어간 식당에서 값싼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면서 세상을 가진 듯 웃었다. 백성현은 웃고 있는 아들들을 보며 목이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당황하고 말았다. 이 가족을 위해 후원을 해달라는 자막과 함께 띄워진 숫자들을 보면서도 그랬다. 그 감정이 불편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윤리적으로 어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인가를 한참 동안 고민했었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잔뜩 숨을 죽이며 살아가지만 함께인 그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뭇 사람들은 동정할 그 장면 안에 직접 들어가 보고 싶었음을.

백성현은 한적한 성당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천장이 높은 성당 안에 한 발자국을 들이자 오르간 소리와 함께 연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발걸음을 물려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과 십자가 아래까지 걸어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색색의 모자이크를 지나 일견 신비롭기까지 한 빛이 사방에서 들었다. 백성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의식적으로 소리를 죽였다. 그는 애써 숨을 다 고르고 난 뒤에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사람들의 행렬 끝에 섰다.

십자가 아래 액자 하나와 꽃 몇 송이가 가만히 놓여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사람이 지금은 액자 안에서 박제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백성현은 소리 없이 손을 뻗어 그 초상 앞에 헌화했다. 헌화를 마친 이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였다. 미사포를 쓴 채였다.

“성실한 신도셨지요.”

“늘 자신의 죄를 말하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이렇게 사고를 당하실 줄은…….”

그들은 갑작스레 변을 당한 사람을 안쓰러워할 뿐이었다. 이 장례식에는 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상주조차 없는 장례식이었다. 기도문을 읊는 소리만이 높아져갔다. 헌화를 마친 백성현은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저 사진 속 남자는 자신과 코끝이 닮았다. 올라간 듯한 눈매가 무척 비슷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백성현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목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왜 이러고 계세요.”

자신과 닮은 남자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버린 쪽은 그였다. 이런 식으로 남겨진 사람은 버리고 간 사람을 원망할 수 없었다. 나눈 게 없고, 기릴 것이 없고, 그 무엇 하나 그리워할 만한 것이 없어서 슬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백성현은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새로 자란 풀들이 뜨거운 지열에 바싹 말라 있었다. 손이라도 가져다 대면 금세 바스라질 것 같았다. 수명을 다한 식물들을 묵묵히 바라보던 백성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대로변을 따라 걷자 무표정한 사람들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확신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자신은 이곳의 길을 모른다는 사실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그 날에, 뭔가를 했어야 했던 걸까.

그런데 무엇을. 대체 뭘 해야 했단 말인가.

할 수 있었던 게 있긴 했나.

그 어린 날에 비쩍 곯은 말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어른이 되고서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상대가 사람으로 바뀔 줄도. 그게 하필 아버지라는 존재가 될 줄도.

백성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살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든 살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끝까지 이러지.”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앞에서 빌었어야 했다. 그는 빌고, 저는 용서를 거절할 수 있었어야 했다. 가끔씩은 그를 두고 그대로 돌아 나온 것을 두고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는 멀쩡하게 살아있었어야 했다.

머리 위로 태양이 작열했다. 비스듬한 빛줄기가 도시를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발끝을 움찔거리고 있던 백성현은 이름 모를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가 들리기 무섭게 낯선 이는 다시 제 갈 길을 찾아갔다.

그 날, 소망원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백성현은 어쩌면 올지도 모를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 보았었다. 유독 화목한 가족이 많은 길 위를 보면서 섣불리 웃어보기도 했었다.

그는 엉성한 악수와 자기소개 후 자신의 불행을 방어막처럼 꺼내 휘두를 것이 아니라.

어린 너를 혼자 두고 가서 미안했다고. 너를 버린 뒤의 삶은 무척 힘겨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매 순간 후회했다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한 번만 용서를 해 달라고….

그렇게 몇 번을 빌고 또 빌고, 계속해서 빌었어야 했다.

“…….”

그럼 언젠가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

용서를 하고 싶었는데.

백성현은 정처 없이 걷다가 서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서점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베스트셀러 란까지 걸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백성현은 커다란 광고판에 걸려있는 얼굴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처음 저 역광에 잠긴 얼굴을 마주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도무지 그냥 갈 수 없을 만큼 강렬해서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시집을 덜컥 샀을 정도였다. 백성현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유환의 옆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정말 어디에든 존재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 7월 26일, 지유환 시인 새 시집 <말라붙은 고독> 출간 안내

출간 예정일이 불과 일주일 뒤였다. 백성현은 학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광고판 앞을 막아서기 전까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번에 출간 기념 팬 사인회도 한다고 하지 않았어?”

“와, 나 무조건 갈 거. 내 친구 저번에 실물 보고 왔는데 무슨 연예인보다 잘생겼대.”

“사인도 완전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해준다면서.”

“근데 두 시간 줄 서야 된대.”

천진난만한 떠들썩함 속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쩐지 마음에 박혀왔다. 백성현은 광고판 속 시인에게 눈을 맞췄다.

“…….”

나는 널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라디오에서 터져 나오는 소음을 모른 체 하는 것 말고, 괜찮다는 너의 말에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 말고….

문득 성준혁의 고함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 남자랑은 그렇게 못 하잖아, 이 새끼야.

- 번듯하게 살아야지. 너, 씨발. 왜 자꾸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그래.

이대로는 번듯하게 살 수 없는 것일까. 가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지유환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아픔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픔을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제 살을 파내어 사람들에게 시를 내주곤 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했다. 번듯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눈앞이 흐려져 갔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저기 갇혀 있는 그가 금방이라도 이쪽을 돌아볼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집까지 가는 버스를 찾아 그 안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얼마간 가다 멈춰 서고, 또 멈춰 서고, 계속 멈춰 섰다. 가야 할 길이 먼데 멈춰서는 일이 너무 잦았다. 이래서 먼 거리를 갈 때 버스는 좋지 않았다. 제일 뒷좌석에 몸을 구겨 앉은 백성현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뒤통수에는 표정이 없어서 사람들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시선이 향할 곳은 창밖뿐이었다. 비어있는 바깥풍경을 보면 자꾸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번지려 했다.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방에 돌아와서는 한참 동안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다. 뭔가가 씻겨 내려가기를 바라면서 차가운 물을 몇 분 동안이나 맞았다. 결국 변한 것은 체온뿐이었다. 차가워진 피부 위로 옷을 꿰어 입은 백성현은 좁은 방 한 칸을 계속해서 쓸고 닦았다. 책장을 세 네 번 반복해서 닦고, 책 위의 먼지를 걷어내고, 싱크대 구석구석을 씻어냈다. 그렇게 곧 흘러내릴 진땀을 기다렸지만 그 따위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백성현은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접어서 내려놓고 현관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 내일 또 올게요.

오늘 몇 시에 올 거라고, 꼭 그렇게 말해 주진 않았어도 오늘 그가 와주기로 했었다. 혹시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가 왔다 간 건 아닐까 싶어 공연히 초조해지기도 했지만 따로 문자를 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복도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백성현은 고개를 들어 그 발자국소리를 쫓았다. 구둣발 소리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지만 심장은 놀란 듯이 뛰고 있었다. 그 뒤로도 그였다면 좋았을 발자국 소리들이 무수히 스쳐 갔다.

포기하듯 다시 고개를 묻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머리맡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나 싶어 움직이지 않았는데 재차 확인하듯 똑똑, 하고 울렸다. 백성현은 아주 느린 동작으로 일어났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그가 두어 번 노크를 하면, 문을 열어준다.

발밑에 커다란 그림자가 져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왜인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금 늦었죠. 이것저것 사오느라.”

근처 마트라도 다녀온 것인지 그의 양손에는 음식 재료가 한 가득이었다. 지유환은 오늘도 자신에게 뭐라도 먹여주기 위해 뭔가를 잔뜩 사 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전광판 속에 멈춰있던 인물은 어느덧 눈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이 아닌 정면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먼저 저를 불러왔다.

“형.”

지유환은 멍하니 서 있는 백성현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고작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에 장례식장에서부터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주체 할 수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야에 투명한 막이 생긴 것처럼 주변 모든 사물이 흐릿해졌다. 그것이 질량을 가지고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자마자 지유환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환아.”

백성현은 홧홧한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게 너무나도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아스라이 느껴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도,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성준혁의 말을 들으면서도, 박제된 남자의 초상 앞에서도. 방금 전 서점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까지도. 불쑥불쑥 치솟아 오르던 말이 있었다.

“정말로….”

가만한 시선이 저를 향했다. 백성현은 진심으로 궁금했던 그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나로 괜찮을까?”

그 말을 기어코 입 밖으로 낸 순간의 그 감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후련함이라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아직 속 안에 잔재해있었고, 서러움이라기엔 애틋함이 더 컸다. 작열하는 태양 빛이 방 안을 헤집었다.

지유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백성현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눈매를 좁힐 뿐이었다. 백성현은 차오르는 홧홧한 숨을 죽이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나랑 있으면 즐거워?”

“…….”

“정말 내가 네 옆에 있어도 될까?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잘 하는 것도 없어. 스물 넷 먹도록 이렇게밖에 못 커서 너한테 뭐 하나 해 줄 수 있는 게,”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해보았다. 비쩍 곯은 말을, 죽어버린 그 남자를 대했을 때와는 달라야 했는데. 정말로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해 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없어……. 유환아. 하나도.”

백성현은 흔들리는 눈을 들어 지유환을 응시했다. 올려다본 시야 속 그는 슬퍼보였다. 우는 건 자신인데, 저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는 손을 뻗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이마를 스치는 손끝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내 그가 심장 부근 위를 몇 번인가 누르고는 읊조렸다.

“형이 우는 걸 보면 여기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정말로….”

“…….”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해요. 형은 이미 많은 걸 해줬는데.”

그는 주문을 거는 것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 질 거예요.”

그 말이 마치 어떻게든 괜찮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이번에도 그 혼자 짊어지려는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터뜨리듯 말해버리고 말았다.

“……너는 안 괜찮잖아.”

지유환은 늘 혼자서만 견디려 했다. 아프다는 내색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말꼬가 트이자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몸이 작게 떨려왔지만 백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안 괜찮으면서, 매일 괜찮다고 하잖아. 왜 사실대로 안 말해주는 건데.”

“…많이 나아졌다고 저번부터 말했,”

“유환아.”

“…….”

“라디오, 고장 났어.”

그 말에 주변을 떠다니던 공기나 먼지 같은 것들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지유환의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제대로 된 소리가… 하나도 안 나온단 말이야….”

이제껏 숨소리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던 것과 달리 목구멍 안에서 뭔가가 고통스럽게 번져갔다. 지유환은 그림처럼 멈춰있었다. 저를 위해 잔뜩 사온 재료들을 뒤에 두고, 미동조차 없이 굳어있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저 발가벗겨진 기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한 치부가 드러났을 때의 수치스러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후회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말을 뱉었다.

백성현은 눈물을 훔쳐내며 두서없이 말했다.

“미안해. 너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텐데. 네가 나한테 조금은 기대줬으면 해서, 나는….”

지유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빛바랜 듯 서 있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무언가를 견디듯이 눈을 감아 내렸다. 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잔뜩 숨을 죽인 호흡.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지유환의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린 것은 한참 뒤였다.

“저도… 무서워요, 형.”

창백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성현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안 들리는 게 무서워요.”

백성현은 숨도 쉬지 못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청기를 빼고 있었어요. 도움이… 안 돼서.”

“…….”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형한테 자랑까지 했는데.”

자조하듯 웃은 지유환이 고통스럽게 읊조렸다.

“요즘은 형 목소리도 들리지가 않아.”

지유환이, 늘 괜찮다고 말하던 그가, 지금 눈앞에서 뚝뚝 울고 있었다. 지유환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뺨 위를 흘러 내렸다. 그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않고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형체 없이 스러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그가 우는 모습은 가슴에 박혀왔다. 무너지는 것 같다던 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가 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어 지유환의 창백한 뺨을 훔쳐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체온만큼 뜨거운 물기가 다시 차올랐다. 손끝이 열상이라도 입은 듯 홧홧했다.

그는 늘 단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포장했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 절망스런 내면과 마주하니 심장이 괴로울 만큼 죄여왔다. 백성현은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환아.”

상체를 기울인 그가 품에 안겨 왔다. 일상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유환은 잘못도 없이 소리를 빼앗겼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일부를 잃은 것이다. 어깨 위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미동도 없이 울기만 했다.

“형.”

지유환은 그 자세 그대로 뭔가를 말해오기 시작했다.

“해 준 게 없다는 말 하지 마세요.”

“…….”

“이 따위 세상인데도.”

“…….”

“형은 나를 살게 하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니까.”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온통 젖어있었다.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저로 괜찮으냐고 했던 말이 한낱 투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지유환은 넉넉한 손으로 백성현의 얼굴을 감쌌다.

“형 말대로 안 괜찮아요.”

“…응.”

안 괜찮은 현실. 이제껏 그런 현실을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괜찮다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그런 게 어떻게 괜찮아질 수 있겠어요.”

애써 괜찮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범람하듯 넘쳐흘렀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시설을 전전한 일. 누군가 쓰다듬어주지 않아도, 사랑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밤들. 혼자서 이겨낸 스스로가 씩씩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날들.

“…….”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괜찮지 않은 것들 투성이였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누구라도 저를 쓰다듬어 주길 바랐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혼자서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신은 그다지 씩씩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안 괜찮아도 돼요. 우리는 이대로도 충분히…….”

지유환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백성현은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이 조악한 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던 그는 어느새 이 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

젖어있는 눈매가 애틋했다. 한참을 바라만 보던 백성현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사소한 표정이.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벅차도록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아픈 위로를 건네 오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마음이 끌어 올랐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백성현은 입모양으로 고백하고 말았다.

- 좋아해.

입매를 읽던 지유환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늘 들리지 않는 곳에서 숨죽여 내뱉던 고백을 마침내 그의 앞에서 하고나니 심장이 요동쳤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지유환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저 얼굴을 정말로 좋아했다. 무표정을 허물고 눈 부시도록 웃는 얼굴. 지유환은 눈물을 걸친 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언제 말해주나 했어요.”

보잘것없는 고백에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그는 온기를 확인하듯 천천히 입술을 맞춰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포개졌다. 입술이 맞닿은 것만으로 입안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해졌다. 그때, 고개를 튼 지유환이 은근하게 뭔가를 물어왔다. 입술 사이의 공기가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제가 좋으세요.”

“……응.”

고개를 끄덕인 뒤에도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말요.”

“응. 정말 좋아해….”

저번 가로등 아래에서의 자신을 따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성현은 피식 웃으면서도 시선을 맞추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좋아해. 지유환.”

거기에 그가 얼굴을 붉혀올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시선을 피한 지유환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백성현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는 백성현을 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면, 돼요. 형.”

“…….”

“전 그거면 돼요….”

달음박질 치는 듯한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백성현은 조용히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도, 온갖 집기를 쓸고 닦아도 요동치던 마음이 마침내 누그러들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연인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이다.

“형 눈이… 빨개졌네요.”

다정한 웃음기가 묻어있는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백성현은 비식 웃으며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그렇게 말하는 지유환의 눈가도 온통 붉어져있는 상태였다.

“…야, 네가 더 심해.”

피부가 희어서 붉은 기가 도드라져보였다. 지유환은 몰랐다는 것처럼 미미하게 웃고 말 뿐이었다.

“붓겠다. 세수하러 가자.”

곧장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몇 번이고 눈가를 씻어냈다. 백성현은 수건을 꺼내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지유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상체를 약간 기울인 채 얌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 됐다는 것처럼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자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내 지유환은 현관 쪽을 고갯짓하며 작게 말했다.

“그럼 이제….”

백성현은 잠자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지유환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같이 저녁 만들까요.”

그는 백성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서 재료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재료만 봐서는 어떤 음식을 할 것인지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지유환은 싱크대 옆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재료 몇 개만 씻어주세요.”

백성현은 얼결에 그의 옆에 섰다.

“어, 씻기만 하면 돼?”

“네. 콜드 파스타 만들 건데.”

“…….”

“토마토소스랑 오리엔탈 소스 중에 고르시면 돼요.”

뭐든 좋으니 어서 둘 중에 하나를 골라보라는 듯 눈을 마주쳐왔다. 그 지극히 일상적인 눈 맞춤. 백성현은 얼마간 멈춰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토마토소스 좋아하는데.”

가만히 서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지유환의 눈매가 휘어졌다.

“저도요.”

백성현은 그와 나란히 서서 재료를 씻었다. 오늘도 칼이나 불을 사용하는 건 지유환의 몫이었다. 할 일을 끝낸 다음에는 의자를 끌어와서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같이 씻은 재료를 써는 소리와, 파스타 면을 넣은 냄비가 끓는 소리. 토마토 드레싱을 흔드는 찰랑거리는 소리, 어린 잎 채소를 뜯어 넣고 치즈가루를 뿌리는 소리. 완성된 파스타는 몇 분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럴듯했다.

“상 펴고 올게.”

남은 건 낮은 상 앞에 마주 앉아 그가 만든 음식을 먹는 일 뿐이었다. 백성현은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물씬 나는 파스타를 한 입 크게 먹었다. 이번에도 지유환은 포크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자신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기만 했다.

“어때요. 입맛에 맞아요.”

“응. 너무….”

입안을 감도는 어린 잎 채소의 향긋함이, 새콤한 토마토가. 함께 흐르는 물에 씻어낸 재료들이 어우러진 맛이. 벅찰 만큼 맛있었다.

“너무…… 맛있다.”

다행이라는 듯 웃어보인 지유환은 뒤늦게 포크를 집어 들었다.

“많이 있어요.”

오래된 선풍기가 버겁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계절 특유의 축축한 공기가 지금만큼은 왜인지 기꺼웠다.

찬물로 씻어낸 것도 소용이 없었는지 밤이 되도록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백성현은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별들을 대신해서 곁에 있는 연인을 눈에 담았다. 마주한 살갗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피어올랐다. 그 소리를 한참이나 듣다가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지유환의 곧은 시선이 느껴졌다. 오직 저에게만 집중한 얼굴이었다.

“우린 행복해질 거야.”

그의 말대로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세계 어딘가 우연 같은 행복이 살아 숨 쉬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 숨소리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찾아낸 날에.

그에게 한 아름 안겨주고 싶었다.

찾는 건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고, 그보다 너의 마음에 들 지 모르겠다고.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

연인은 무수한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춰왔다. 생명에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이제껏 홀로 지나온 외로운 밤들을 허물어버릴 만큼 따뜻했다.

* * *

밀려있는 메시지를 보게 된 것은 어플 위에 떠오른 숫자가 세 자릿수를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조별 과제가 끝난 뒤에는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단체 채팅방, 관심 없는 광고나 안부 한 두 마디를 보내온 이들을 제외하고 남은 건 성준혁과의 채팅방 하나였다. 심지어 그와의 채팅방에는 몇십 개나 되는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백성현은 뒤늦게나마 그 문자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 백성현ㄴㄴㄴ

- 성현이 형

- 대답해라ㅏㅏㅏ

- 대답좀요ㅛㅛㅛ

거의 반 이상이 시답잖은 메시지들이었지만 지치지도 않고 하루걸러 하루 꼴로 안부를 물어오고 있었다.

- 살아있는 거 확실????

- 생사확인 요망

- 오 진짜 죽었나본데;;

백성현은 웃음을 흘리며 채팅방을 아래로 내렸다.

- 오늘 생사확인 하러간다!!!!!!!!!

그 메시지로 끝이었다. 백성현은 아직 책상 한 쪽에 놓여있는 메탈 시계를 물끄러미 보다가 핸드폰을 꽉 쥐었다. 무슨 말을 보내야 할 것 같긴 한데 손가락은 키패드 위를 헛돌기만 했다.

성준혁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사귄 친구였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알고도 함부로 동정하려 들지 않았었다. 쓸데없이 정이 많고 걱정도 많아서 우울한 기색을 보이는 날에는 저가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둘이서 술을 진탕 마시기도 했었다. 그 구김살이 없는 성격에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문득 허탈한 듯 이를 악물던 성준혁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 내가 너한테 친구긴 하냐?

이렇게 앉아 그가 보냈던 수많은 메시지들을 보고 있자니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본의가 아니긴 해도 그를 속인 게 맞긴 했다.

얄팍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는 백성현에게 이제껏 성준혁 같은 친구는 없었다. 늘 먼저 다가오던 쪽은 그였으니 이번에는 용기를 내야 했다. 백성현은 한숨을 내쉬다가 키패드를 두드렸다.

- 시계 돌려줄 테니까 잠깐 보자.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일말의 망설임이 일었지만 그대로 보내버렸다. 놈은 속상한 것도 빨리빨리 잊는 성격이라는 게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답장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림음이 울렸다.

- 언제?

그 두 글자를 보자마자 성준혁의 기웃거리는 듯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연이어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 내일 학교 앞에서 봐도 되고….

성준혁에게 있어 시계는 없어도 그만인 물건인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천천히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그럼 내일 저녁 7시쯤 보자.

몇 마디가 더 오간 뒤에 학교 앞 술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잡혔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심성이 모질지가 못한 녀석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쏟아부었던 말들도 그 잔정 많은 성격에 비추어보면 그저 걱정이었다.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방관하기 십상이었다. 무너진 관계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고, 관계의 견고함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는 습관이 있었다. 백성현은 그 무기력함에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그런 그가 성준혁에게 늦게나마 문자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외적으로 친구로서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답장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려고 한 것치고 재깍재깍 답이 왔다.

“진작 문자 보내볼 걸 그랬나….”

어쩌면 이제껏 많은 관계들을 놓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쉽게 이어질 수 있었던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지레짐작과 속단으로 그냥 흘려보냈던 건 아니었을까. 세상에는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만도 않을 것이었다.

“…모르겠다.”

그럼에도 끊어졌다 맺어지는 사람과 사람 간의 매듭을 엮어나간다. 백성현은 제 손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매듭들을 떠올려보았다. 별거 아니라 여겼지만 그 사소한 인연들은 그를 계속 살아나가게 했던 것들이었다.

* * *

막상 보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성준혁은 만나자마자 안주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물 시킬까? 아니면 닭발?”

백성현은 일단 소주는 두 병 시킬 거고, 하고 덧붙이는 그를 보며 물었다.

“술 많이 마시게?”

“아니 뭐, 막차 타고는 가야지.”

막차라고는 해도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백성현은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두 개 다 시키고 술은 천천히 마시자.”

“그러지 뭐. 안 그래도 오늘은 몸 좀 사릴 거다. 저기요, 저희 주문 좀 할게요.”

주문을 마치자마자 소주 두 병과 함께 유리잔이 서빙 되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술집은 여름 방학인데도 성황이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다트 앞에서 웃고 떠드는 왁자한 소리에 음악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백성현은 벌써부터 소주 한 병을 양옆으로 흔들고 있는 성준혁을 보다가 같이 서빙 된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랐다. 성준혁과 술을 마실 때는 간간이 물을 섞어 마셔야 페이스를 맞출 수 있었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잔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반 잔을 조금 넘게 채운 뒤 성준혁은 건배를 하자는 것처럼 잔을 들었다.

“몸 사린다며.”

“안주 오기 전에 첫 잔 마시는 건 예의지.”

유리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났다. 백성현은 그게 대체 누가 만든 예의냐, 하고 묻는 대신 소주를 목구멍 뒤로 넘겼다. 씁쓸한 동시에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남았다.

“주문하신 게살 계란탕 나왔습니다. 닭발도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첫 잔을 마시기 무섭게 냄비가 놓인 버너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아르바이트생은 불을 켜주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떴다. 그의 말대로 매콤하게 잘 양념 된 닭발도 금방 버너 옆에 놓였다. 벌써부터 매운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비어있던 잔을 채운 성준혁이 먼저 서두를 뗐다.

“네가 먼저 보자고 할 줄은 몰랐다.”

“……연락한다고 했었잖아.”

“그 날 그렇게 집 가서 한참 생각해봤는데….”

성준혁은 소주로 가득 채운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말로만 몸을 사린다고 했지 정말로 빼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실처럼 풀린 계란과 게살을 휘휘 젓다가 백성현에게로 눈을 고정했다.

“넌 말만 안했지 티는 옛날부터 있는대로 다 냈었더라.”

“…뭐가.”

“내가 처음 누구 소개 해준다고 했던 날 기억하냐? 그때 너 같은 수업 듣는다는 후배랑 카톡하고 있었지.”

학기 초에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백성현은 대체 너는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묻던 성준혁의 말이 떠올라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랬지.”

“그땐 어떤 후배길래 그렇게 꼼꼼히 보나 했었어. 생전 카톡이라고는 안 하는 놈이.”

“…….”

“나 연정이랑 헤어지고 얼마 안 됐을 때 막창집에서도 한잔 했었잖냐. 그때 옆 테이블에 국문학과 학생회 있었고. 왜, 네가 눈 돌아간 것처럼 팼던 놈. 그땐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가 안 갔었는데 옆 테이블에서 죽어라 욕하던 이름이….”

성준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잔을 채웠다.

“그 후배 분 이름이었던 것 같아서.”

흔한 이름이 아니잖아,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덤덤했다. 백성현은 묵묵히 소주잔을 비워냈다. 그땐 마음을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저 지유환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반쯤 정신을 놨었다.

“생각해보면 네가 누굴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거였는데.”

“…….”

“…남자, 라고. 내가 함부로 말한 것 같다. 미안해. 혼자서 말도 못했을 네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닌데.”

계란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언뜻 쉬워보여도 결코 입 밖으로 내기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성준혁은 내내 마음에 남았던 무언가를 털어내듯 말을 이어갔다.

“아직 내가 너한테 그 정도까지 친한 친구는 아닌가 싶어서 말이 세게 나갔던 것 같다.”

그 날 그의 말이 유독 따끔했던 건 그 안에 염려가 가득해서였다. 아무 대가 없이 상대의 낙관적인 미래를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백성현은 잔을 맞부딪히며 고개를 까딱였다.

“친한 친구 맞아.”

“어?”

“맞다고.”

“…….”

“그냥 내가 겁이 좀 났어.”

모든 걸 털어놓게 되면 경멸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성준혁이 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서운해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습관적으로 미움 받을 거라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구나. 백성현은 불을 조절하고 소주병을 들었다.

“고맙다. 이것저것.”

잔을 몇 번 기울이고 나니 소주 한 병이 동 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근황부터 시작해서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 취업 설명회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와중 성준혁이 장난스러운 낯으로 툭 던졌다.

“야, 근데. 저번에 윤세진이랑 강선재랑 마셨던 날.”

“어.”

“좋아하는 사람 예쁘다며, 이 새끼야.”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백성현의 동작이 멈칫했다. 사실이었다. 나이나 학교, 어디서 만났는지 등을 캐묻는 그들에게 얼굴이 예쁘다고만 했던 기억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지유환의 얼굴을 되새기던 백성현은 픽 웃었다. 비록 저보다 한 뼘은 더 크고 가끔은 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몸이긴 했지만.

“예쁘잖아.”

“와…. 이 새끼 좀 봐….”

“너도 볼 때마다 잘 생겼다고 했잖아.”

“잘 생기긴 무서울 만큼 잘 생겼지. 근데 예쁜 건….”

졸릴 때마다 느릿하게 감기는 옅은 쌍꺼풀이 진 눈과 기다란 속눈썹, 깎아 만든 듯한 이목구비부터 창백한 피부까지. 백성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뻐, 걔.”

“……후배 분한테도 그런 말 하냐?”

“아니. …근데 알고 있을 걸?”

“허. 이 새끼가 연애를 하더니….”

성준혁은 팔불출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한 말이었다. 지유환처럼 예쁘고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백성현은 부정할 생각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다음 소주를 깠다. 성준혁은 주는 대로 다 받아마셨다.

“너 오늘 몸 사릴 생각 없었지.”

“내가 술 마실 때 몸 사리는 거 봤냐?”

술집 특유의 붕 떠있는 듯한 분위기에 맞춰 벌써 몇 병이나 비워냈다. 테이블 한 쪽에는 빈 병이 수두룩했다. 간간히 물을 마셨다고는 해도 오랜만에 위장에 알코올을 쏟아부으니 취기가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백성현은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고 가방을 뒤적였다. 손으로 몇 번 바닥을 더듬자 차가운 금속 재질의 시계가 만져졌다.

“시계. 들고 가.”

시계를 넙죽 받아 든 성준혁의 얼굴도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껴. 여기서도 놓고 가면 답도 없어.”

“넵, 형. 끼고 갈게요.”

“아, 근데….”

“엉?”

백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빡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나, 집에 가야 돼.”

“씨발, 너 취했지….”

막차 시간은 벌써 간당간당했다. 내내 바르던 백성현의 자세도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성준혁은 한 잔 가득 물을 따라 백성현에게 밀어주었다.

“야, 야. 물 마셔. 집 어떻게 가게? 걸어가? 택시?”

느릿하게 물을 마시던 백성현이 대답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다가 눈을 꼭 감았다.

“…….”

성준혁은 그대로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백성현을 보며 술기운이 달아남을 느꼈다.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에 술을 들이붓긴 했지만 정말로 취해버릴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백성현은 취한 티도 내지 않고 잔을 기울였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마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도 좋은 게 좋은 거겠거니 계속 마셨는데.

그제야 테이블 위로 뒹구는 수많은 빈 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성현은 평소의 주량을 훨씬 넘어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 이렇게 취한 건 또 처음 보네.”

당장 백성현을 어떻게 집에 보내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30분 남짓 남은 막차를 타고 가려면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불가능했다. 아예 잠이 든 것 같으니 택시를 태워 보낼 수도 없었다. 성준혁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잠금 화면조차 없는 백성현의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부를 터치했다.

- [유환]

성준혁은 성씨까지 제대로 붙인 다른 이들과 달리 유일하게 이름으로만 되어 있는 저장명을 보고 푸스스 웃었다.

- 혹시 성현이 데리러 와주실 수 있으세요?

- 지금 취해서 못 일어나고 있어서요.

- 저번에 뵀던 성준혁입니다.

위치까지 첨부해서 문자를 보낸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술병을 치워달라고 하는데 답장이 도착했다. 간결하기 짝이 없는 답이었다.

- 지금 가겠습니다.

“진짜 사귀긴 하나보네….”

이 시간에 부른다고 바로 나오는 것은 사귀는 사이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성준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백성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야, 좀 일어나 봐. 야, 백성현.”

“…….”

“아니, 취할 것 같으면 조절을 해야지. 무슨 스무 살짜리도 아니고. 야, 일어나 보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데 백성현의 눈가가 떨렸다. 알았으니 그만 좀 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싶었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백성현이 언제 제대로 눈을 뜰 지만 기다리고 있는 와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밑에 진 그림자에 재빨리 고개를 들자 지유환이 우뚝 서 있었다.

“어….”

그 얼굴을 본 순간 방금 전부터 묘하게 주위가 조용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로 오겠다는 문자를 받은 지 10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도착을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지유환은 왜인지 이때까지 봤던 것과 다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마침 근처에 나와 있어서요.”

백성현이 눈을 뜨고 있을 때와는 달리 묘하게 냉랭한 느낌이었다. 그는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뿐이라는 것처럼 물어왔다.

“많이 마셨나요, 성현 형.”

“아마 오랜만에 마셔서….”

“주량이 많이 약한 것 같은데.”

그쪽이 억지로 먹였느냐는 듯 조용히 비난하는 눈이었다. 성준혁은 술집 안의 사람들이 은근하게 지유환이 서 있는 쪽을 흘긋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백성현은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성현이가 억지로 먹인다고 먹는 애가 아닌데요, 뭐.”

성준혁은 지유환을 뚫어지게 보다가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에 묻힐 정도로의 목소리로만 말했다.

“그보다, 둘이 사귄다고 들었는데요.”

백성현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그렇게 티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상대가 어떤 이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유환은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무심해보였기에 백성현을 좋아하긴 하는지 의심이 갔다.

“아.”

눈매를 좁히던 지유환은 이미 알고 있는 거라면 신경 쓸 것도 없다는 것처럼 엎드려 있는 백성현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겼다. 자연스럽게 뒷머리를 감싼 그 손길이 익숙한 것처럼 백성현은 무의식중에도 고개를 비비적댔다. 성준혁은 냉랭했던 지유환의 눈매에 애틋함처럼 보이는 감정이 어리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지유환은 변명과 닮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대신 짧게 답했다.

“네.”

그게 마치 당신이 알고 있으면 뭐?, 라는 느낌이라 성준혁은 더 캐물을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짧은 순간에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봐버린 것만 같았다. 지유환은 대화를 마무리 짓듯 간결하게 말했다.

“문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알려주세요.”

“……성현이가,”

새로운 화제를 꺼내자 지유환의 시선이 아래로 빗겨 내려갔다. 성준혁은 입모양을 살피는 듯한 그의 시선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성현이가 누굴 그렇게 좋아하는 걸 처음 봤어요. 후배 분 때문에 누구랑 싸우기까지 했었는데.”

무슨 말이냐는 듯 지유환의 눈매가 기울었다. 성준혁은 미동조차 없는 백성현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그냥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하세요.”

“학기 초에, 국문과 학생회 중 한 명이 그 쪽 험담하는 거 듣고 성현이가 눈 뒤집힌 것처럼 달려들었어요. 어찌저찌해서 고소까진 안 갔는데… 아무튼, 얘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주먹 휘두르는 건 처음 봐서요. 많이 무뚝뚝해보여도 그 쪽 엄청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조금 놀란 듯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지유환은 웅크리고 있는 백성현을 말없이 응시했다. 무감각해보였던 표정이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을 목격한 성준혁은 서서히 말을 멈추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는 형이 말을 안 했나 본데.”

“…….”

“제가 고백한 겁니다.”

성준혁은 놀란 듯 눈을 홉떴다. 은연중에 당연히 백성현이 먼저 고백을 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오해를 아무렇지 않게 정정해준 지유환은 가보겠습니다, 하고 상체를 기울여 백성현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어, 어떻게 데려가시게요?”

백성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지유환은 엎드려 있던 백성현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제 목에 팔을 두르게 하고 무릎 뒤와 등을 받쳐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 주변 시선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끝까지 태연한 얼굴이었다.

“장난 아니네….”

성준혁은 그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 * *

- 형, 저예요.

몽롱한 와중 귓가에 속삭여오는 듯한 음성만은 선명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백성현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몸이 붕 떠오른 것도 같았다.

이내 등 뒤로 푹신한 시트가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가죽 냄새에 백성현은 부스스 눈을 떴다. 분명 성준혁과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여기는 차 안이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백성현은 시야에 담긴 얼굴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유환이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가웠다. 백성현은 소리 없이 웃다가 운전을 하고 있는 지유환의 뺨을 콕 찔렀다. 곧바로 그의 시선이 백성현에게로 옮겨왔다. 마침 빨간불이 들어와 차체가 멈춰선 때였다.

“너 왜 여깄어?”

실없이 웃는 얼굴을 빤히 보던 지유환이 순순히 대답했다.

“데리러 왔어요.”

“아, 맞아. 나 집에 가야 해. 근데.”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잡념들이 하얗게 번져갔다. 백성현은 평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지유환의 눈동자를 멍하니 보다가 입을 벙긋거렸다. 취기 때문인지 무슨 말을 하든 괜찮을 것만 같은 이유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성을 넘어선 목소리가 제멋대로 공기 중을 울렸다.

“너희 집에 가도 돼?”

잠깐의 정적 후 신호가 바뀌고 차가 묵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유환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혹시 귀찮게 군걸까 싶어 눈치를 살피는데 그가 한숨을 쉬더니 그대로 핸들을 꺾었다. 바깥 풍경이 점차 낯설어지는 걸 보아 방향을 바꾼 것 같았다. 다시 신호에 걸려 차가 자리에 섰을 때 왼쪽에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응?”

앞 차의 후미등에 비친 지유환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그런 말을 해요.”

반사적으로 숨소리를 참은 백성현은 그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오늘따라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은 오싹할 만큼 제 취향에 들어맞았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환아 너,”

팽팽하던 공기를 단숨에 풀어내듯 백성현은 배시시 웃었다.

“되게 예쁘네….”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린 지유환은 어이가 없는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백성현은 연신 방싯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너처럼 예쁜 애는 처음 봐.”

“…….”

“진짜로. 너 정말, …예뻐.”

말을 하다가 얼굴을 붉힌 백성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휙 돌렸다. 이윽고 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는 옆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성현은 열을 식히려는 것처럼 차가운 창문에 뺨을 비비다가 서서히 눈을 감아 내렸다. 재차 정신을 차린 것은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즈음이었다. 벌써 두 번째로 느끼는 부유감이었다. 희미한 엘리베이터 기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 20층입니다.

“으응….”

등 뒤를 옭아맨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분명 걷고 있지 않는데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뭔가를 묻기도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디퓨저의 향기가 끼쳐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곳에 눕혀졌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신발이 벗겨졌다. 그 뒤로도 오고 가는 낮은 발걸음소리가 잠결처럼 스쳐 갔다. 백성현은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줄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제게 시선을 고정한 지유환이 있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백성현은 뒤늦게 지유환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 위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조심스럽게 손등을 쓸어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백성현은 느릿하게 손을 뒤집었다. 그대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자 지유환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다만 지유환의 존재가 무척이나 반가워서 백성현은 깍지를 끼지 않은 나머지 손을 들어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유환아.”

겨우 상체를 일으킨 백성현은 침대에 걸터앉은 지유환에게 바짝 다가갔다. 지유환은 하는 양을 지켜보듯 침묵하기만 했다. 아직까지도 그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이건 술김에 꾸는 꿈일지도 몰랐다.

“왜 대답 안 해주지….”

볼멘소리를 낸 백성현은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냐는 듯 지유환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 자세로 목을 감싸 안자 조금쯤 놀란 듯한 기색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외에 특별한 반응을 해오지는 않았다.

꿈이구나. 백성현은 묘한 확신을 갖고 지유환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그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이렇게 빤히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꿈에서 깨고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눈코입의 모양을 한참 살펴보았다. 나른함이 깃든 눈과 활강하는 콧대, 도톰한 입술 같은 것들은 봐도 봐도 예뻤고, 신기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백성현은 손을 들어 마른 뺨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작게 꼬집어도 보고, 손가락으로 지분대기도 했다. 꿈속의 지유환은 눈가를 움찔하면서도 다 받아주고 있었다.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백성현은 눈을 감고 코끝을 비볐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어?”

오늘따라 붉은 빛을 띠는 듯한 입술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꿈속의 그가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그대로 입을 맞추려는 것처럼 고개를 틀어 와서 백성현은 얼굴을 뒤로 뺐다. 꿈인데도 자신이 취해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안 돼. 술 냄새 나….”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빛났다. 위험하다, 라는 자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지유환은 느리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

그는 원래 이렇게 대놓고 반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역시 이건 꿈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백성현은 다시 입을 맞춰오려는 그를 피해 하얗게 드러난 목께에 고개를 묻었다. 그 위에 얼굴을 비비적거리자 잠시 물러났던 커다란 손이 당연한 것처럼 턱을 쓸어주었다.

“……이런 사람이, 무뚝뚝하다고.”

픽 웃는 소리와 함께 머리맡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지유환의 목은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그 살결을 응시하던 백성현은 갑작스런 충동에 입을 벌려 그 위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라도 그에게 흔적을 남겨보고 싶었다. 이 정도로 세게 빨면 자국이 생길 게 뻔한데도 지유환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기만 했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예상대로 순흔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백성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됐다.”

하얀 목에 키스마크를 단 지유환은 어리광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가늘게 웃었다.

“좋아?”

“아, …으응. 좋아.”

꿈속에서 지유환을 만나면 늘 자극적인 상황에 도달하곤 했다. 특히 이 침대 위에서는 진득한 페팅이나 유사 성행위를 몇 번이나 나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는 가본 적이 없었다. 백성현은 옷 안을 파고드는 지유환의 손길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하게 발음했다.

“근데 있잖아. 나, 너랑…….”

백성현은 척추를 더듬으며 올라오는 커다란 손에 상체를 조금 비틀었다. 지유환은 한 순간도 자신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고 싶은데….”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뚝 멈췄다. 백성현은 하얀 얼굴에 선명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언가를 더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는데 잊고 있던 수마가 발밑을 삼켜왔다. 순식간에 깊고 어두운 곳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백성현은 말을 잇기 전에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 * *

“…….”

지유환은 말을 하다말고 까무룩 잠들어버린 백성현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술김에 무릎 위로 올라오질 않나, 얼굴 위를 간지럽게 만지작대질 않나. 키스마크까지 만들더니 폭탄을 던져놓고는 나 몰라라 잠들어버렸다.

“하아.”

목 위로는 뜨거웠던 입술이 느껴지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키스마크를 더듬어 본 지유환은 어이없는 눈으로 백성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미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고 있는 얼굴이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백성현은 유독 술에 취하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봐오곤 했다. 예전에는 그런 대화를 한 적도 있었다.

- 너… 진짜 잘생겼네.

- 형이 훨씬 잘 생기셨잖아요.

- 아니야, 무슨. 너에 비하면 난…. 비교도 안 돼.

지유환은 연인의 이목구비를 뜯어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텅 비어있던 백성현의 눈이 저를 볼 때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다. 오똑한 콧대도, 처음 봤을 때부터 썩 마음에 들었던 입모양도. 눈 밑에 작게 난 눈물점까지도 애틋했다. 지유환은 속삭이듯 말했다.

“…예쁘네, 백성현.”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백성현이 잠결에 작게 웃었다. 지유환은 그를 향해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지유환은 그 뒤로도 얼마간 잠든 얼굴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조명을 껐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지유환은 백성현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잘 자요.”

선잠에 뒤척이지 않기를. 예쁜 꿈을 꿀 수 있기를.

당신 몫의 악몽까지 모두 나에게로 오기를.

오랜만에 무언가를 빌어보는 밤이었다.

* * *

백성현은 눈꺼풀 위를 두드리는 햇살에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매트리스 위는 평소보다도 훨씬 폭신하고 향기로웠다.

“으음….”

마른 햇빛 냄새에 숨을 크게 들이 쉰 그는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 촉감이나 온도를 느끼고 부스스 눈을 떴다. 넓은 침대, 근사한 그림들이 걸린 벽과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었다. 여기는 지유환의 침실이었다.

“어…….”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지난밤의 기억이 편린처럼 드문드문 떠올랐다. 성준혁과 술자리를 가졌고, 왜인지 지유환의 차에서 깨어났었다.

- 안 돼. 술 냄새 나….

- 다 됐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자신의 목소리에 백성현은 딱딱하게 굳었다. 바로 이 침대였다. 앉아있는 지유환의 무릎 위로 올라가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었다. 보드라운 하얀 목에 흔적을 남겼었던 기억에 백성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말도 안 돼….”

- 상관없어.

- 좋아?

그때, 지유환이 나직하게 내뱉던 말들이 재생되었다. 백성현은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탁 풀렸다.

“어, 꿈이었구나.”

지유환이 자신에게 그렇게 대놓고 반말을 할 리가 없었다. 사실 그를 두고 그런 야릇한 꿈을 꾼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다준 것까지만 현실이고, 아마 그 추태를 부린 것은 꿈인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하마터면 착각을 할 뻔했다며 작게 웃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간단히 이불 정리를 하자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침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당연하게도 지유환이었다.

“성현 형, 아침…. 아, 일어나셨네요.”

아침부터 저 다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좋은 아침이야, 하고 인사를 하고는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네. 좋은 아침. 아침 만들어뒀어요.”

문을 열어주며 지유환은 옆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드러난 목을 훑던 백성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해장국 만들어뒀는데. 같이 먹어요.”

지유환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지만 백성현은 그의 하얀 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가 봐도 입술 자국으로 보이는 선명한 흔적이 있었다. 지유환은 마치 보란 듯이 키스마크를 훤히 드러낸 채였다.

“…….”

걷고 있는 두 다리가 삐걱대는 것만 같았다.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의 속을 알 리 없을 지유환은 자연스럽게 앉을 의자를 빼주고는 북엇국을 떠다 앞에 놓아주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서 입맛이 돌았다. 특히 부드럽게 푼 계란과 얇게 썬 대파, 두부가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백성현은 얼이 빠진 것처럼 중얼댔다.

“잘 먹겠습니다….”

“네.”

나지막이 대답한 지유환은 먹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듯 턱을 괴었다. 이제 저 시선은 익숙했다. 일찌감치 놓여 있던 수저를 든 백성현은 천천히 한 입을 떠먹었다.

“어제….”

시원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담백한 맛에 감탄을 할 때쯤 지유환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많이 취하신 것 같던데.”

“…어? 으응. 맞아.”

“혹시 술버릇이, 집에 가는 거예요?”

“…응.”

재밌다는 듯 선선히 웃음을 터뜨린 지유환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건넸다. 너무 일상적인 어조라서 뭔가를 떠보는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블랙아웃은 없어요?”

“……아, 그게.”

조금은 기억이 난다고 하려고 한 순간 지유환의 무릎 위에 올라 탄 자신이 지껄였던 망발이 귓가를 스쳤다. 아직 뭐가 더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할 틈도 없었다.

- 근데 있잖아. 나, 너랑….

- 자고 싶은데….

백성현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그는 숟가락을 든 채로 혼이 나가는 듯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인 백성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네가 데리러 와준 것까지밖에 기억이 안 나네….”

“아. 그럼 눈 떠보니까 여기여서 놀라셨겠어요.”

“……아니야.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데리러는 얼마든지 갈 수 있는데….”

웃는 얼굴 그대로 지유환이 은근하게 눈을 맞춰왔다. 이어진 그의 말에 사정없이 양심이 찔려오는 것만 같았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진 말아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훤히 아는 지유환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식사를 마친 백성현은 도망치듯 지유환의 집을 나왔다. 그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지만 도저히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백성현은 데려다준다는 것도 만류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변명이 통해서 다행이었다.

“…어떡해.”

그런 망발을 내뱉는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술을 마시면 용감해진다지만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아….”

백성현은 우울한 눈으로 투명한 창문에 머리를 몇 번이나 쿵쿵 찧고 나서야 자책을 그만둘 수 있었다.

숙취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타격이 너무나도 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던 백성현은 새 문자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집에 잘 도착했어요?

- 블랙아웃은 걱정돼서 물어본 거였어요.

- 어제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모른 척해주겠다는 건가. 백성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상을 지었다.

“왜 이런 부분에서도 자상하냐고….”

게다가 한 사나흘 정도는 그를 피해 다닐 생각이었는데 바로 내일이 출간 기념 사인회였다. 그 날을 위한 옷까지 미리 사두었으므로 안 갈 수는 없었다.

“그래…. 모른 척 하면 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최선이었다. 지유환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는 것처럼 문자를 보내오지 않았던가.

- 응. 잘 도착했어.

- 너도 푹 쉬어.

스르륵, 하고 이불이 다시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 * *

「<말라붙은 고독> 출간 기념 지유환 시인 사인회」

서점의 입구부터 표지가 프린트 된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사인회가 시작하기까지는 20분이나 더 남아있었는데 줄이 벌써 입구 근처까지 늘어서 있었다. 줄의 시작이 어디인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현은 그들의 손에 공통적으로 들려있는 책이 이번에 나온 그의 신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우와….”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사인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인회 줄 이탈하지 말아주세요. 10분 뒤부터 번호표 나눠드리겠습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소리쳤다. 워낙 인파가 많아서 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통로가 막힐 정도였다. 그 말에 연령대는 물론 성별, 직업까지 다양해보이는 사람들이 나란히 대열을 맞춰 섰다. 몇몇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났다.

“대단하네….”

서둘러 신간을 구매한 백성현도 줄 끄트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지유환에게는 사인회에 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오늘은 오로지 그의 팬으로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백성현은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며칠 전에 새로 산 셔츠의 소매를 가다듬었다. 등 뒤에서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번호표 못 받으면 어떡하지?”

“그러게….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서점에서 사람들 이렇게 줄 길게 서 있는 거 처음 봐.”

“근데 우리 앞에서 끊기면 어떡해? 나 진짜 사인 받아야 되는데.”

확실히 어디가 줄의 시작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 사인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사인회를 위해 온 사람뿐만 아니라 그냥 서점에 들른 것 같아 보이는 이들도 현수막을 흘긋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줄에 합류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번호표 나눠드리겠습니다. 사인회 시간이 정해져있는 관계로 번호표 수령하지 못하신 분들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스치듯 바라본 학생들은 두 손까지 모으고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그가 문학계에서 대단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시인이라는 것이 실감됐다. 그렇게 번호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저 멀리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랄 만큼의 환호성에 백성현은 눈을 깜빡였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로 겨우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어떡해, 지금 왔나 봐.”

“맞네. 여섯 시 됐잖아.”

“야 미친, 내 친구 지금 앞에 서 있는데 진짜 말도 안 되게 잘생겼대.”

그 말에 괜히 심장이 두근대며 뛰어왔다. 백성현이 시집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번호표를 나눠주는 직원이 근처까지 왔다. 그의 손에 들린 번호표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번호표는 앞에서 보여주시면 됩니다. 성함은 미리 번호표에 써주시고, 사인 받으실 쪽도 미리 펴주세요.”

다행히 사인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성현은 쪽지 같은 번호표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표는 그의 바로 뒤에서 동이 났다.

“번호표 배부 완료 되었습니다! 사인회 시간이 정해져 있는 관계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하는 사람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고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듯 한창 사인이 이루어지고 있는 안쪽으로 걸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백성현은 번호표를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 초조해하던 학생 둘 중 한 명만 번호표를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어떡해…….”

한 명이 눈에 띄게 울상이었다. 백성현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번호표를 앞으로 내민 채였다.

“저기….”

“네?”

지유환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팬으로서는 다음번에 사인을 받아도 좋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기회는 무척 많았다. 때문에 어린 학생에게 내미는 번호표가 아깝지 않았다.

“이거, 드릴게요.”

“네? 정말요?”

학생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백성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듯했던 학생이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잔뜩 붉힌 채였다. 백성현은 여전히 웃음을 걸친 채로 번호표를 건네주고는 천천히 대열을 벗어났다.

안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마침 곁을 지나는 직원을 잠시 멈춰 세웠다.

“저기, 혹시 사인회는 몇 시까지인가요?”

“7시 반까지로 정해져있어요.”

“아, 감사합니다.”

7시 반이라. 혼자만 들릴 정도로 읊조린 백성현은 구름떼처럼 몰려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난간에 모여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백성현은 옆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에 멈칫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언뜻 보였다. 백성현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넓게 벌어진 어깨에 맞아떨어지는 연푸른색 셔츠, 반듯한 자세까지. 분명 어제도 봤는데 저기 앉아 있는 그는 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

지유환은 곧은 자세로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들여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앞의 사람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입모양을 주시하다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특유의 여유로움과 차분한 분위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먼 발치서 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결국 백성현은 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말았다. 손목이 아플 법도 한데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는 모습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늘 그랬듯 저 하얀 얼굴에 표정이라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백성현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백성현은 자신이 미소짓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인을 해준 지유환은 끝까지 눈을 마주치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옆에는 선물로 보이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무감하게 주위를 살피던 그와 눈이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다. 어느덧 한 시간 반 남짓의 사인회를 마친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어디서든 쉽게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도서관에서도, 그 넓은 잔디밭에서도, 지금 인파로 북적이는 서점에서도 저를 찾아냈다.

지유환의 눈이 아주 반가운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휘어졌다.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의 감탄 섞인 탄성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도 예쁘게 패는 보조개를 볼 수 있었다.

정말로 여기를 보고 있었구나. 백성현은 자연스럽게 설핏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이 저에게까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거라는 걸 알아챈 것처럼 지유환은 곧바로 눈을 내렸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사인회는 막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지유환이 등을 돌려 멀어지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 조금 이따가 지하 2층 주차장에서 봬요.

- 와주실 줄 몰랐어요.

그 밑에는 기쁜 듯한 토끼 이모티콘이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백성현은 소리 없이 웃고는 핸드폰을 꼭 쥐었다.

로비에는 팝업스토어로 보이는 꽃집이 있었다. 거기서 장미 꽃다발을 산 것은 오로지 그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지하 2층으로 가자마자 익숙한 세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지유환은 오지 않은 것 같았지만 백성현은 꽃다발을 든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좋아해줄까. 괜히 떨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헤드라이트가 반짝, 하고 빛났을 때 백성현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백성현은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얼굴이 붉어졌을 거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유환은 다정한 어투로 물어왔다.

“제 거예요?”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저런 걸 물을 때가 있었다. 백성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소리를 흘린 지유환이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프러포즈 같네.”

그 말에 얼굴은 한층 더 달아올랐다.

“꽃 예쁘네요.”

고마워요, 하고 그가 꽃다발을 가져갔다. 눈을 들어 확인한 얼굴은 무척 기쁘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역시 사오길 잘 한 것 같았다. 조수석을 열어준 그는 백성현이 안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유환은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내려놓고는 시동을 걸었다.

“위에서 보고만 계셨어요.”

그의 시선이 백성현의 입매를 향했다. 백성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줄 서 있다가, 양보했어.”

“양보?”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길래.”

“아, 그랬구나.”

“응.”

“형 덕분에… 한 명을 더 만났겠어요.”

차체가 부드럽게 나아갔다. 그는 핸들을 옆으로 꺾으며 나지막이 제안했다.

“집 가서 사인회 한 번 더 할까요.”

기꺼이 한 명만을 위한 사인회를 해주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 말에는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적이 내려앉은 자동차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유환은 묵묵히 핸들을 쥐고 있기만 했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온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

만취로 말미암은 말실수 이후로 오히려 그를 더 의식하게 된 것만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히 간지러워진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백성현은 최대한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시트에 몸을 구겨 넣었다. 빨리 그의 집에 도착해야 이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유환은 도착했어요, 올라갈까요, 하는 간단한 말만 했을 뿐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문 앞에 도착하고도 초조한 듯 불안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백성현은 아무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다.

“아. 오늘 사인회,”

말소리가 잡아먹혔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호흡이 뒤섞였다. 등 뒤에서 커다란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두 뺨을 감싸고 입술을 빨아올렸다. 백성현은 갑작스러운 키스에 몸을 굳혔다가도 그의 호흡을 따라 혀를 섞었다. 백성현을 품에 안아 들 듯 껴안은 지유환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조명이 머리 위를 밝혔다.

백성현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내내 잔재하던 긴장감이 단숨에 성감으로 치솟았다. 그 긴밀한 접촉에 머리로 열이 몰려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는 지유환의 맹목적인 시선을 느끼며 속삭였다.

“사인, 해 준다며….”

지유환은 말없이 백성현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지유환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다. 거기에는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느긋함마저 묻어 있었다.

“우리.”

“…….”

“오늘 잘래요?”

이틀 전 술에 취한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었다. 지유환은 굳어버린 백성현의 반응을 보며 그의 셔츠 깃에 손을 가져다 댔다. 픽 웃으며 뱉는 말에는 옅은 소름이 일었다.

“다 기억하고 있었네.”

숨이 막혀왔다. 백성현은 느릿하게 단추를 풀어내는 손길을 막지 못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떨어져 내렸다. 백성현을 벽에 몰아붙인 지유환은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은근하게 누르면서 뇌까렸다.

“말을 했으면,”

“…….”

“책임을 져야죠.”

쉴 새 없이 팽팽한 시선이 오갔다. 백성현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지유환이 입고 있는 연푸른색 셔츠의 제일 윗단추를 끌러냈다. 금욕적으로 끝까지 잠겨있던 단추가 하나하나 풀어짐에 따라 탄탄한 몸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백성현은 마른 침을 삼키고 눈을 들었다.

“책임 안 진다고 한 적… 없어.”

순간 지유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침묵에 압도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잔뜩 취했던 날 보았던 형형한 기색이 그를 스쳐 갔다. 백성현은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다가 벽에 막혀 멈춰 섰다.

“오늘은 허벅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

“형 안에 박을 거예요.”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원색적인 말이었다. 백성현은 벌써부터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가다듬고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확인한 지유환의 입매에서 웃음기가 증발했다.

두 사람은 샤워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나신이 됐다. 몸을 섞기 위해 같이 씻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유환은 흥분한 채로도 차분하게 몸 곳곳을 씻겨주었다. 그럼에도 허벅지 사이나 골반 위를 샤워볼로 문질러오는 느린 손길에는 다분한 의도가 섞여 있었다.

“흐…!”

혹시라도 성기가 맞닿을까 봐 백성현은 허리를 뒤로 빼며 신음했다. 지유환은 거품을 씻어낸 뒤에는 몸을 닦아주는 대신 부드러운 샤워 가운을 입혀주었다. 자연스럽게 발길은 침대로 향했다.

단단하게 조여진 턱선을 따라 쪽쪽, 하고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 간지러운 입맞춤에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지유환은 입을 벌려달라는 것처럼 뜨거운 혀로 입술 사이를 느리게 가르고 들어왔다.

“하아….”

입을 벌리자 그는 뒷목을 끌어안으며 은근히 혀끝을 깨물어왔다. 입안의 점막과 닿는 느낌은 언제나 생경했다. 삽입하듯 혀를 깊게 넣었다 뺀 지유환은 입안 깊은 곳을 문지르고 목 안으로 웃었다. 백성현은 흐름을 끊듯 잠시 입술을 떼어내고 말했다.

“늘 느끼던 건데.”

“…….”

“너 이런 거… 필요 이상으로 잘 하는 것 같아.”

진득한 입맞춤을 멈춘 지유환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게 뭔데요.”

그는 살짝 부풀어 오른 백성현의 입술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몸을 바짝 붙여왔다. 백성현은 숨을 고르며 답했다.

“…야한 거.”

그 말에 지유환은 눈매를 설핏 좁혔다.

“형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입천장을 두드리듯 훑은 것은 잠시였고 이내 집요하게 입안 곳곳을 헤집어왔다. 백성현은 그 감각에 몸을 떨면서도 본능적으로 지유환의 혀끝을 쪽쪽 빨았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입맞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침대 위, 밀착한 커다란 몸에서는 야릇한 향기가 났다. 정신없이 뜨거운 혀를 쫓다 보니 어느새 지유환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백성현은 입술을 떼어내고 천천히 다리 아래 깔려있는 남자를 감상했다. 지유환은 느른한 눈을 들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순간 찌릿한 흥분이 솟았다. 백성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까…….”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자 지유환은 손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대곤 조용히 숨을 골랐다. 커다란 짐승을 길들이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너 엄청, 야하게 생겼네.”

지유환은 그 말에 비식 웃으며 손바닥에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유환아.”

백성현은 지유환의 부드러운 입술을 가르고 그에게 검지와 중지를 물려주었다. 손끝에 뜨거운 혀가 감겨왔다. 백성현은 손가락을 작게 휘저으며 말했다.

“빨아봐.”

지유환은 뭐든 좋을 대로 하라는 듯 대답 없이 입을 벌려 손끝을 빨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굴리고, 이로 잘근잘근 깨물다가 펠라치오를 할 때처럼 힘주어 빨았다. 금세 손끝이 저릿해졌다.

거의 동시에 그의 따뜻한 손이 등허리로 파고들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세가 역전 되었다. 백성현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지유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적인 긴장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손은 이미 백성현이 입고 있는 가운을 양쪽으로 젖히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나신을 몇 번이고 보였음에도 살결이 드러나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백성현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형은…….”

지유환은 부드러운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흉곽을 매만졌다. 갈비뼈를 헤아리는 것처럼 하나하나 더듬자 백성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얌전히 자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유환은 손을 올려 유두를 작게 꼬집었다.

“늘 야했어.”

“아…! 흐으,”

몇 번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작은 유두가 빳빳하게 섰다. 지유환은 손가락 사이로 젖꼭지를 잡고 은근하게 압박하거나 비틀었다. 백성현은 그가 자극을 주면 주는 대로 밭은 신음을 터뜨렸다.

“흐, 읏…. 으….”

지유환은 갈증을 느끼며 나머지 옷자락도 마저 풀어헤쳤다. 흰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입술로 유륜을 비비다가 혀로 둥글게 덧그렸다. 백성현이 그의 머리를 껴안은 것은 그때였다. 지유환은 이를 내어 솟아오른 돌기를 아프지 않게 살짝 긁었다. 곧바로 백성현의 몸이 퍼뜩 튀었다.

“하윽…!”

백성현은 반사적으로 안고 있던 지유환의 머리를 밀어냈다. 지유환은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웃음소리를 흘리고 밀어내는 손을 잡아 내렸다. 이내 그는 그대로 등허리를 깊숙이 껴안고 대놓고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혀로는 계속해서 유두를 꾹꾹 눌러주면서 고개를 살짝씩 흔들며 솟아오른 돌기를 빨았다.

“흐으….”

“…….”

“유, 환아…, 잠, 깐만…….”

이미 발기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유환은 아랫도리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부피를 키운 성기 위를 길게 쓸어오는 손에 백성현은 잔뜩 복부를 조였다.

“…흐, 읏.”

“여기… 터질 것 같은데.”

“으응….”

백성현은 눈을 흘겼지만 홍조를 띄운 채라 효과는 전혀 없었다. 지유환은 오히려 고조되는 흥분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 반말, 하지마. 하…! 으…,”

지유환은 불시에 귀두와 기둥이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백성현은 허리를 비틀었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고 하기도 했다. 지유환은 다른 한 손으로는 백성현의 엉덩이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다가 얼마든지 존댓말을 써주겠다는 것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젖꼭지 빨아드리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오랜만에 봐도 구미가 당길 정도로 예쁘게 생긴 성기였다. 지유환은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구를 보며 입매를 당겼다.

“벌써 이렇게 흘리고 계시잖아요.”

“…아, 제발. 유환아…….”

“네.”

“그런 말 좀, 하지마….”

백성현은 금세 수치심에 글썽거리는 얼굴이 됐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무미건조하면서 침대 위에서 몇 마디를 하면 저렇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얼굴을 차근차근 감상하듯 내려다보던 지유환은 제 몸에 걸쳤던 가운을 벗어 내리며 몸을 겹쳤다. 고개를 숙여 드러난 목 위를 질척하게 핥자 하얀 나신이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너무 좋아해서,”

“…….”

“가끔 괴롭히고 싶어져요.”

지유환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귓불을 입에 물고 빨아올렸다. 귓바퀴에 숨결을 흘려 넣고, 녹여 먹듯이 혀를 눅진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귓구멍 안에 혀를 슬쩍 넣었을 때 백성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입안에 대고 그랬듯이 몇 번 정도 혀를 앞뒤로 움직이자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비틀기까지 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원망스러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목선을 따라 입술을 찍어눌렀다. 백성현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도 어느 정도 잔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손에 감겨오는 피부는 탄력적이었다. 지유환은 옆구리와 등허리를 어루만지다가 유려한 목선에 이를 콱 박아넣었다.

“윽…!”

백성현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상체를 든 그는 침대 옆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백성현은 젤의 포장을 뜯는 지유환을 올려다보며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사 둔 거야?”

“네. 다리 좀.”

“…….”

“벌려주실래요.”

직접 다리를 가르고 그 사이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지유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성현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어버버거리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부탁조로 뭔가를 말하면 왜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백성현은 잔뜩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천천히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지유환이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옷자락까지 젖혀주자 두 다리는 완전히 활짝 열렸다.

탄탄하고 흰 허벅지가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백성현은 일부러 눈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벌렸, 어.”

대답 대신 지유환은 손바닥에 젤을 듬뿍 짰다. 차가운 젤을 체온으로 데운 그는 끈적이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웃음기 섞인 음성이었다.

“잘 하셨어요.”

지유환은 젤을 바르지 않은 손으로 허벅지 안의 움푹 패인 부분을 꾹 눌렀다. 조금씩 손을 내린 그는 통통하게 올라붙은 볼기를 벌렸다. 누구에도 보인 적 없을 구멍 위로 젤을 바르기 시작하자 백성현의 몸이 움찔대며 튀었다. 지유환은 고개를 숙여 허리와 뼈가 도드라진 장골 위를 쪽쪽 대며 손을 움직였다.

“…으.”

그가 입구 주변을 검지로 문질러왔다. 백성현은 하복부를 꿈틀거리며 차츰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에도 지유환의 눈은 백성현의 입모양을 쫓고 있었다.

“하…으, 왜… 사둔 거야?”

“아.”

생경한 감각이었다. 지유환은 골반 위 피부를 잘근잘근 깨물며 들어간 손가락을 느릿하게 휘저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형이랑 이런 거, 하려고요.”

느리게 아래를 풀어주는 손길은 집요했다. 백성현은 점차 늘어가는 손가락 개수에 잔뜩 숨을 죽였다. 지유환의 손가락이 빠져나갈 때마다 내벽도 함께 딸려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지유환은 내벽을 확장시키듯이 휘젓던 손가락들을 불시에 한 번에 빼냈다. 동시에 백성현이 작게 몸을 뒤틀었다.

“아으….”

잠시 멈춰선 지유환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뭐든 잘 해내니까 뒤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한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백성현은 잘 느끼는 몸이었다. 몸 어디를 만지든 얼굴을 발갛게 하고 허리를 움찔거리는 스물네 살짜리 남자라니. 머리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유환은 얌전히 아래를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백성현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무릎 뒤 오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 하려, 는…!”

지유환은 단번에 백성현의 하반신을 들어 올려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안 그래도 말갛게 드러나 있던 아랫도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였다. 백성현은 엉덩이만 들린 자세가 민망한 것처럼 다리를 빼려고 하다가 이어진 지유환의 행동에 신음을 터뜨렸다.

“흐, 아…!”

그는 골반을 꽉 잡고 회음부부터 비문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혀로 진득하게 쓸었다. 처음에는 핥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백성현이 예민하게 반응해오는 통에 하반신을 더 바짝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다.

“싫, 어…! 으…, 더럽, 다고. 읏….”

공들여 손가락으로 풀어준 보람이 있었다. 처음에 비해 훨씬 흐물흐물해진 입구 주변을 꾹꾹 누르던 그는 망설임 없이 비문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흐윽…!”

백성현은 고개를 뒤틀었다. 물컹하고 뜨거웠다. 끝을 뾰족하게 세워 점막을 더듬던 혀는 이제 사정없이 안을 휘젓고 있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감각이었다. 간지러운 동시에 애가 타는 것처럼 발끝이 저릿했다. 그렇게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에 이를 사리물고 있는 와중 지유환은 일부러 두껍게 만든 혀로 삽입이라도 하듯 비문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으윽, 흣…! 아 … 흐으!”

질척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입구를 집요하게 빨아올린 뒤에야 지유환은 하반신을 어깨에서 내려줬다. 뜨거운 숨을 뱉는 것은 백성현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좁은 구멍에 잔뜩 발기한 것을 집어넣을 것처럼 사나운 눈을 하고 다시 손가락부터 차근차근 집어넣었다.

“…하아.”

이번에는 가장 긴 중지부터 들어왔다. 백성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구부터 슬슬 풀어주며 깊숙한 곳까지 닿는 손가락의 부피감이 이제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손가락이 한 극점을 스치자 성감이 갑작스럽게 도드라졌다. 백성현은 순간적으로 허리를 굳혔다.

“하, 으…!”

이제까지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순간적으로 스쳐 간 찌릿한 쾌감에 백성현은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지유환은 느릿하게 손목을 돌리다가 슬쩍 손을 뒤로 물려 방금 전의 감각점을 꾹 눌렀다.

“아…!”

“여기가, 좋아요?”

이제껏 느껴본 적 없던 종류의 쾌감이었다. 백성현은 성기를 쥐고 흔들어 사정을 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저릿한 느낌에 굳어버렸다. 지유환은 대답이 없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오돌토돌한 내벽을 따라 손가락을 뒤로 뺐다가 단번에 감각점까지 푹 밀고 들어갔다. 백성현은 숨이 모자란 듯한 숨소리를 터뜨렸다.

“읏…! 이상, 해…. 유환, 흐으….”

그 지점을 얕게 두어 번 톡톡 두드린 그는 손가락을 완전히 빼냈다. 백성현은 아예 얼굴을 가렸다. 이런 느낌은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뒤를 자극당하면서 느낄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유환은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닥거렸다.

“지금 허벅지 떨리고 있는 거 알아요?”

그 말에 백성현은 숨을 삼켰다. 지유환은 태연하게 젤 옆에 있던 콘돔을 집어 들었다. 포장을 뜯고 씌우는 소리에 천천히 팔을 거둔 백성현은 눈을 크게 떴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젤로 번들거리는 손으로 제 분신을 길게 훑고 있었다. 마치 저를 두고 수음을 하는 것을 훔쳐보기라도 하는 느낌이라 원색적인 흥분이 밀려들었다.

“너….”

“저는 형이 기분 좋으면, 흥분 되니까.”

“…….”

“솔직히 말해주세요.”

윤활유에 젖은 성기가 그 자극에 꺼떡이고 있었다.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아으.”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지유환은 백성현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성기가 입구에 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한 것처럼 굳었다.

“힘 풀어요.”

그는 상체를 기울여 마침내 좁은 안으로 귀두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몸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에 백성현은 비명을 삼켜야 했다. 쉽게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지유환과 완전히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그 부피감을 견뎠다.

“으흐…. 흐으….”

지유환은 눈매를 좁히며 아주 조금씩 넣는 길이를 늘려갔다. 빼내는 것과 삽입을 반복해서 귀두만 들어가는데도 한참이었다. 지유환은 젤을 더 짜낸 뒤 접합부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렇게 다시 움직이려던 지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백성현의 콧대며 입술 위를 매만지면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형, 무리해서 할 필요는….”

“…흐….”

그 말에 백성현은 이를 사리물며 지유환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아니야. 넣어줘….”

재촉하듯 백성현이 감은 다리에 힘을 준 것은 그때였다. 백성현이 허리를 밀착하듯 움직임과 동시에 그의 구멍이 움찔거리며 성기를 삼켰다. 미끄러지듯 귀두가 쑥 빨려 들어간 순간 예민한 선단이 콱 조여졌다. 지유환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에 움직이는 것도 잠시 잊고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백성현은 허벅지를 덜덜 떨면서도 지유환의 허리를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쾌감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안에 넣은 것으로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좋…아? 넣으니까, 흐으… 조여?”

“…….”

“조이…냐고.”

남자의 몸에 넣었을 때 내벽이 어떤 식으로 달라붙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순식간에 쾌감에 달아오른 지유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구미가 당겼다. 백성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몰아쉬는 지유환을 더 긴밀하게 옭아맸다.

“하아…. 더 넣어, 봐.”

지유환은 고개를 숙여 백성현의 눈가와 코끝, 입가에 입술을 내리 누르며 허리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괜찮으, 니까. 흐으…. 천천히만 하면. 흣, 아…!”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게 밀고 들어갔다. 지유환은 어느새 반이나 들어간 성기를 보며 숨을 토해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좁았다. 제 것을 터뜨리려는 것처럼 꽉꽉 물어오는 압박에 지유환이 눈매를 좁혔다.

“조이냐고, 물으셨어요.”

“흐으… 으읏,”

우스운 말이라도 들은 듯 짓씹듯이 발음했다.

“백, 성현.”

이름에 반응하는 것처럼 뜨거운 내벽이 더 좁아들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자극이었다.

“끊어… 먹겠어.”

백성현의 목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같은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상대는 지유환이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될 정도로 오싹해졌다.

몸을 뒤로 물린 지유환이 벌써 3분의 1은 쓴 것 같은 젤을 더 짜내어 기둥에 덧발랐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다시 숨이 막힐 정도의 부피감이 밀고 들어왔다. 그는 단 한 순간조차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무섭도록 주의된 집중이었다. 그 빈틈없는 눈 맞춤에 마침내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충족감이 고개를 들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목덜미와 옆구리, 허벅지 안쪽까지 성적인 의도를 담아 야릇하게 지분거렸다.

“힘 좀, 빼 봐요.”

“…뺀 거야, 으, 뺀 건데…….”

저번 샤워부스에서 그랬듯 네가 너무 큰 거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백성현은 애꿎은 입술만 깨물어댔다. 낮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한 두 번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으….”

그는 천천히 피스톤질을 하면서 한 마디씩 말을 이었다.

“익숙해지시려면.”

“흐으…, 뭐, 라고?”

그의 성기가 몸을 가르고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백성현은 고통 섞인 신음을 삼켰다.

“하아…. 매일 저한테,”

“……흐으.”

“박히셔야겠어요.”

뒤늦게 지유환의 말을 이해한 백성현은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는 매일 박혀야겠다는 말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주었다.

어느 정도 삽입이 수월해졌을 때 지유환은 허리를 약간 비틀어 자세를 잡았다. 아직도 고통에 헐떡거리는 백성현이 뭔가를 물을 틈도 없이 그는 감각점을 향해 수직으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흐… 아…!”

어느새 허공에 뜬 백성현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대로 다시 똑같은 곳에 박아 넣으려고 하자 백성현이 허리를 비틀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지점에 닿지 않게 하려는 몸짓이었다. 지유환은 경련하는 것처럼 떨리는 종아리를 쓸어주며 일부러 감각점 주변에만 몇 번 꽂아 넣었다.

“으, 흑… 잠, 깐…!”

젤이 꿀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벽이 오물오물 물어대고 있었다. 지유환은 뜨거운 안을 짓이기는 듯한 느낌에 한쪽 눈을 감아 내렸다. 여전히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허릿짓은 점차 수월해져갔다. 백성현은 여전히 낯선 느낌을 피해 허리를 빼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 자극적이란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을 대로 놔두던 것도 잠시, 지유환은 침대 헤드 쪽으로 슬슬 몸을 물리려는 백성현의 골반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아는 것처럼 백성현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지유환이 조금 더 빨랐다.

“잠, 깐, 지, 유환, 읏…!”

단숨에 내벽을 꿰뚫었다. 피하던 부분을 직격으로 박힌 백성현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유환은 깊게 꽂아 넣은 채 허리를 느리게 돌렸다. 선뜩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아.”

움직이기 수월해진 내벽은 마치 몸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아래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백성현은 어느새 왈칵 새어 나온 눈물을 눈꼬리에 매달고 박으면 박는대로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위에서 한쪽 팔을 짚고 선 지유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자세로 허리를 흔들었다. 뇌수가 들끓기라도 하는 것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형이, 이때까지 여기만 썼다고요.”

지유환은 한 손을 내려 백성현의 성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주었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우는 얼굴이 무척이나 야하게 느껴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으…흐으.”

“이렇게… 돌아버릴 것처럼 조이는데.”

처음부터 느끼는 사람이 소수라고 들은 것에 비해 백성현은 너무나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첫 섹스에 찌르면 찔러주는 대로 신음을 흘리는 건 백성현 밖에 없을 것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흥분한 적이 없었다. 자꾸만 난폭하게 굴고 싶어져서 지유환은 이를 사리물었다. 이성을 애써 붙잡은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백성현의 젖은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게 뭐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백성현에게는 나지막이 대답해주었다.

“물고 있어요.”

이윽고 느리게 이어지는 추삽질에 백성현이 손가락을 꼭 물었다. 지유환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빨고 싶으면 빨아도 되고.”

그 말에 손끝을 조심스럽게 빨아오는 점막이 느껴졌다. 지유환은 픽 웃으며 아래를 추어올림과 동시에 입안을 휘저어주었다. 백성현은 키스를 할 때처럼 손끝을 따라 혀를 집요하게 놀렸다. 허릿짓이 점차 빨라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만 지유환은 백성현이 느끼는 지점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바로 주변만 얕게 찔러 넣었다.

“아, 으, 흐읏.”

백성현은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애가 탄 나머지 상체를 들어 지유환의 등을 껴안았다. 고통 속에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쾌감이 피어나 정신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삽입 섹스로 이렇게까지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지유환의 허릿짓이 멈추었다. 필요 이상으로 섬세한 손길이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올 뿐이었다.

“유, 환아….”

그는 일부러 움직여주지 않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저러는 것이 틀림 없었다. 여전히 그의 성기는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상체를 들어 지유환의 목덜미와 뺨에 쪽쪽거리며 입술을 내리눌렀다. 움직임을 재촉하듯 창백한 피부 곳곳을 빨아올리자 옅은 순흔이 남았다. 그에 지유환은 소리 없이 웃으며 뭉근하게 허리를 돌려주었지만 극점에는 닿지 못했다.

“아…. 유환아…, 응?”

“어떻게 해드릴까요.”

“알, 잖아…….”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느릿하게 읊조린 그가 얕게 허릿짓 했다. 백성현은 고여 있던 눈물을 수치심에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박아줘.”

“…….”

멈춰있던 지유환은 백성현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안에… 박아줘.”

노골적인 요구였다. 지유환은 웃음기조차 없이 그가 요구한 대로 깊은 곳에 쑤셔 박아 넣었다.

“흐윽…!”

무언가에 관통이라도 당하는 듯한 강렬한 쾌감에 눈앞이 표백되었다. 도무지 스스로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백성현은 입을 다물 새도 없이 허리를 떨었다. 허리 아래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고작 한 번의 깊은 삽입에 성기에서 희뿌연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사정을 하는 도중에도 그 몸 안으로 제 분신을 콱콱 박아 넣었다. 백성현은 물기 젖은 눈을 하고 허리를 튕겼다. 두어 번 정도 길게 이어진 사정 끝에야 몸이 늘어졌다. 탄탄한 허벅지는 쾌감의 여파에 잘게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절정을 맞은 것인지도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지유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이성을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한쪽 다리를 높게 들고 거칠게 박아넣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피치를 올려 허리를 움직였다. 백성현은 이미 사정을 하고도 신음을 터뜨렸다. 역치를 넘은 듯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아왔다.

“형은,”

“흑, 으읏…!”

“타고… 났나 봐요.”

“흐으….”

“조금 전에 뒤로 간 거예요. 알아?”

“몰, 라…, 흐, 으. 모르겠, 어.”

“지금도. 내 걸 물고, 놓아주질 않, 잖아.”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았을 때, 갈라졌던 내벽이 아래를 잡아먹는 것처럼 꽉 조여왔다. 머릿속이 마비되는 듯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비단 육체적 쾌감이 아닌 정신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지유환은 백성현과 빈틈없이 몸을 겹친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은 몇 번이고 더 박아서 안을 넓혀놓고 싶었지만 백성현이 축 늘어져있는 모습에 겨우 난폭한 마음이 잦아들었다.

백성현은 뒤늦게 자신이 지유환에게 박힌 채로 사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이 얼굴로 몰려들었지만 지유환은 여운을 느끼듯 두어 번을 더 느릿하게 허릿짓 하다가 천천히 성기를 빼낼 뿐이었다. 그가 빠져나가자 아래가 아쉬운 것처럼 뻐끔거렸다. 하복부조차 닦아낼 수 없을 정도로 탈력감이 들었다.

지유환은 몸을 늘어뜨린 백성현을 응시하다가 낮게 웃음을 흘리고는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진땀으로 젖은 머리칼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그 애정 어린 손길을 느끼고 있던 백성현은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야, 지유환…….”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너….”

“씻겨 드릴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책망을 하고 싶었지만 땀이 배어 나온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스럽다는 듯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어 누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하아.”

무언가를 따질 틈도 없이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백성현을 가볍게 안아 올린 지유환은 샤워실로 향했다. 몽롱한 와중 그가 자신을 욕조에 앉혀 정성껏 머리를 감겨주고, 다시 한 번 몸 곳곳을 씻겨주는 것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손길은 비문 근처에 묻은 젤을 씻어줄 때 유독 조심스러워졌다.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아프지, 그럼.”

그렇게 무식하게 큰 걸 넣었는데. 백성현은 뒷말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지유환은 물기를 닦아주며 다정스럽게 말했다.

“자고 가요.”

“…….”

“오늘은 더 손 안 댈 테니까.”

백성현은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찌릿한 둔통에 허우적거리듯 다리를 헛디뎠다. 그대로 넘어질 뻔한 몸을 반사적으로 껴안은 지유환은 머리맡에서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백성현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들어 눈을 흘겼다.

“…왜 웃어? 너 때문이잖아. 재밌어?”

“그게 아니라….”

쪽, 하고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에 감게 하고는 속닥거렸다.

“너무… 귀여워서요.”

등 뒤와 무릎 뒤로 탄탄한 팔뚝이 느껴졌다. 이내 허공에 떠오른 백성현은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세로 지유환에게 안겨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더는 발버둥치지 못했다. 그야말로 물먹은 솜처럼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얘는 왜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지. 백성현은 빨개진 얼굴을 지유환의 목께에 묻고 더운 숨을 고를 뿐이었다.

* * *

일부러 두 뼘 정도 열어놓은 커다란 창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밤을 수놓은 고층 건물들의 불빛을 훑던 백성현은 꼼지락거리며 지유환의 품에 파고들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허리 아래가 뻐근하게 아파와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 했지만 이를 사리무는 것으로 대신 했다.

“……으.”

간질이듯 턱 끝을 매만져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백성현은 지유환의 어깨에 고개를 턱 얹고 그에게 눈을 맞췄다. 검은 눈동자가 은은한 조명 아래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에 백성현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지유환은 예전부터 종종 이런 눈을 하곤 했다. 불이나 칼도 못 쓰게 하고, 제 커다란 손을 가져다 대며 손발이 작다느니 180이 넘는 남자에게 잃어버릴 것 같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했었다. 백성현은 습관처럼 지유환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넌 왜 그렇게… 나를 어린 애 보듯이 봐.”

이 언저리쯤 보조개가 있었는데, 하고 뺨을 더듬던 것이 무색하게도 선명하게 보조개가 드러났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검지를 제 뺨 위로 가져갔다. 폭 패인 볼우물이 손끝을 간질였다.

“거기가 아니고, …여기예요.”

검지를 얌전히 뺨에 대고 있는 잘생긴 얼굴이 다분히 애교스러웠다. 백성현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여기 있네.”

“어린 애 대하듯 형을 대한 적은 없는데.”

“…….”

“형이 더 어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종종 했어요.”

그렇게 말한 지유환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작고 어렸을 때부터 백성현을 섬기고 보살펴줬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서.”

“…….”

“제 아이였다거나, 처음부터 가족이었다거나….”

분명 그는 저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텐데 저런 말을 했다. 마치 저 깊이 가라앉아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본 것만 같은 말에 백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한 지유환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

“이런 걸 못할 테니까.”

쪽, 쪽하고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우린 연인이 좋겠어요.”

“……응.”

바깥세상은 한여름의 열대야가 한창이었다. 백성현은 눈을 감고 작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그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으면 시간과 함께 어디론가로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밤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부표가 되고, 등을 감싸는 매끈한 시트는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것이다.

이대로 어디까지 흘러갈지는 몰라도 눈을 뜨면 아침이 와있을 것이었다.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머리 위로 두른 채 우리는 같은 아침을 맞겠지.

지금만큼은 감각이라는 것이 연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했다. 지유환의 숨소리, 체향, 심장박동이 밤과 새벽 사이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틈으로부터 막연한 생명감이 피어났다. 백성현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영원을 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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