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당신의 괄호 (10/22)

10. 당신의 괄호

* * *

백성현의 단칸방은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이 계절 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외딴 섬 같았다. 세상과 동떨어진 곳인 것만 같아서 문을 열고 그가 나타나면 특별한 허락을 받은 사람이 된 듯했다. 백성현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지유환이 손에 든 비닐봉지를 흘긋 보았다. 그 경계하는 듯한 눈에 지유환은 평연하게 대꾸했다.

“아이스크림이에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지유환은 하루걸러 하루 꼴로 백성현의 집으로 갔다. 그는 백성현의 집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것들을 선물처럼 가지고 갔는데, 직접 만든 도시락이나 카페에서 사간 디저트는 반응이 좋았지만 공들여 고른 옷이나 지갑, 시계 같은 것들은 그다지 좋아해주지 않았다. 지유환이 짐짓 시무룩한 얼굴을 해서 받아주긴 했지만 두 번은 사오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였다. 오늘은 뭘 가져가면 좋을까 하다가 날씨가 더워졌으니 아이스크림을 사온 참이었다. 백성현은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아이스크림? 무슨 맛?”

“그냥 이것저것 사 왔어요.”

자연스럽게 봉투를 건네받은 백성현은 그 안을 보고 아연하게 말했다.

“…파는 거 종류별로 다 사 온 거야?”

조금 손이 묵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지유환은 고개를 내저으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걸이를 주워 옷장 안에 걸어주었다. 자신이 사준 바 있던 옷들은 아직도 구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지유환은 아주 약간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백성현을 돌아보았다.

“저 옷들은 안 입어주실 거예요.”

“어?”

“볼 때마다 저기 있어서.”

일부러 입어주면 좋을 것 같은 옷들을 고른 것이었다. 백성현은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뜯다 말고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그냥, 너무…. 원래는 안 그런 사람이 저런 식으로 입모양을 감출 때가 있었다.

“입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

“입고 나가는 게 싫은 거면 잠깐만이라도 보여주세요.”

풀이 죽은 듯한 지유환의 표정을 보던 백성현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싫은 게 아니라….”

지유환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이윽고 백성현의 입에서는 망설이는 기색이 잔뜩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네.”

“아이스크림… 뜯었으니까. 이거 다 먹고. 잠시만.”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은 백성현은 지유환에게도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지유환은 고개를 젓고 남은 아이스크림들을 냉장고 위 칸에 반듯하게 넣어 두었다. 그는 옷장 한 쪽에 박혀 있는 쇼핑백을 들고 미리 매트리스 옆에 가져다 놓고는 책상 의자에 앉아 백성현이 싱크대에 기대어 입을 오물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뭔가를 먹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작고 여린 존재를 먹여 키우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맛있어요?”

“응.”

백성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지유환은 가만히 그 장면을 보다가 아, 하고 장난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런 그와 반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던 백성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은 안 먹는다고 했잖아.”

“아, 마음이 바뀐 것 같아요.”

“냉장고에서 꺼내줄까?”

“한입만 먹으면 되는데.”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빤히 보던 백성현은 눈 깜짝 할 새에 지유환의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지유환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오는 온기 어린 손을 느끼며 백성현을 올려다보았다.

“뭐 하려는…,”

음성이 다가온 입술에 가로막혔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지유환의 턱을 들고 녹여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그의 입 안으로 넘겨주었다. 지유환은 놀란 마음으로 눈을 떴다. 백성현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과일 향이 훅 끼쳐 왔다.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단물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백성현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단물을 혀로 쓸었다. 그의 혀가 쓸고 지나간 입 주변이 간지럽게 피어올랐다.

꿀꺽, 하고 백성현이 준 아이스크림이 목 뒤로 넘어갔다. 그 소리를 들었을 백성현이 흐려진 눈으로 말했다.

“맛있어?”

“…….”

“너도 매일 말도 없이 했었잖아.”

지유환은 비스듬하게 올라간 백성현의 입꼬리를 쫓으며 아직 입 안에 남아있는 단물을 마저 삼켰다. 이내 그는 나른하게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맛있어요.”

“…야.”

“더 주실래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유환은 백성현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기를 싱크대 옆에 올려두고 매트리스로 그를 이끌었다. 백성현을 뒤에서 껴안은 그는 백성현의 흰 목에 고개를 묻어 쪼듯이 입술을 눌렀다.

“…읏. 잠깐만.”

쇄골에 더운 숨이 고였다. 백성현은 언뜻 몸을 비틀었지만 지유환은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벌써부터 붉어지려는 귓불을 이로 살짝 깨문 그는 조용하게 속닥거렸다.

“아이스크림 다 먹었으니까 옷 갈아입어요.”

지유환의 손은 이미 백성현이 입고 있는 셔츠 가장 윗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뭔가를 말해오지도 않는 백성현을 재촉하듯 지유환은 그의 뺨에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연신 입을 맞추었다. 보일 듯 말 듯 백성현이 고개를 끄덕여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지유환은 입매에 웃음을 매달고 윗단추부터 느릿하게 풀어냈다. 점점 백성현의 살결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형이 옷을 안 입어주시니까,”

“…….”

“직접 입혀드릴게요.”

팔을 뻗어서 매트리스 옆에 두었던 쇼핑백을 든 지유환은 그가 예전에 골랐던 옷을 꺼내 들었다. 백성현은 계속해서 몸을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지유환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백성현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았다. 백성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밀착한 살결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으로 쿵쿵 뛰었다.

백성현은 반쯤 고개를 돌려 중얼거렸다.

“더워….”

여름 특유의 습기가 어린 듯한 숨결이었다. 지유환은 다정한 투로 대답했다.

“많이 더워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백성현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벗겨냈다. 희고 마른 등이 보였다. 열기가 피어오른 눈으로 도드라진 척추 뼈를 보던 지유환은 그 위에도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마른 몸이 또 움찔거렸다. 꿈틀거리는 등을 살피던 지유환은 새 옷을 백성현의 팔에 끼워주었다. 기다란 팔은 순순히 따라왔다. 지유환은 그에게 옷을 입히면서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착하네.”

나름 고심 끝에 고른 옷이었다. 여름에 입을만한 얇은 흰색 셔츠이긴 했지만 유려하게 선이 잡혀 백성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준 지유환은 말을 이었다.

“다 됐어요.”

말없이 손길을 받고 있던 백성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갈아입은 옷이 어색한 듯한 얼굴이었다.

지유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몸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딱 맞아 떨어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막상 입히고 보니 몸 선이 도드라져서 야릇한 느낌까지 들었다.

“왜? 별로야?”

“…잘 어울리네요.”

“…….”

“이거 입고 나간 적 없으시죠.”

“어. 왜?”

“앞으로도 밖에는 안 입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에 백성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어달라고 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유환은 뭐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백성현의 뺨을 쓸었다. 그 조심스러운 손짓에 백성현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자연스럽게 뒷머리로 손을 옮긴 그는 머리칼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예민한 시선이 오고 가는 와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유환이었다.

“저랑 있을 때만 입어주세요.”

상체를 기울인 지유환은 달싹이고 있는 백성현의 입술을 핥았다. 아랫입술을 입안에 넣고 아프지 않게 빨아올리자 단 맛이 났다. 지유환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멜론맛이네.”

“……아.”

백성현은 더 이상 키스를 할 때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묘하게 만족스러워진 지유환은 한창 빨고 있던 말캉한 살을 놓아주고는 입술을 포개어 물었다. 입술을 겹친 채로 고개를 은근하게 좌우로 움직이기도 했다. 미끈미끈하고 뜨거운 감각이 젖은 입술 사이로 피어올랐다. 녹아내릴 것처럼 뭉근한 입맞춤이었다. 그와 뜨거운 혀끝이 스칠 때마다, 긴밀하고 축축하게 이어져있음을 느낄 때마다 머릿속이 찌릿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낸 지유환은 입술을 혀로 느리게 훑었다. 몸에서 힘을 뺀 백성현은 진이 빠진 기색으로 풀썩 누웠다.

“하아….”

“힘들어요, 형?”

“그런 건 아닌데….”

백성현은 의아한 기색의 지유환을 보고만 있다가 그의 팔을 훅 당겼다. 지유환은 충분히 중심을 잡을 수 있었지만 몸을 기울여주었다. 백성현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지유환을 소심하게 끌어안았다.

“잠깐 이러고 있자.”

지유환은 자신의 각진 어깨에 조심스럽게 뺨을 비벼오는 백성현을 잠자코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형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

“매일 맛있는 걸 만들어주고, 잠들 때까지 재워줬을 것 같아요.”

“…….”

“형은… 사랑스러워.”

백성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지유환은 품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온기를 가득 안아주었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어서 방 안으로 볕이 들었다. 자연광 특유의 조도 낮은 색감이 방 안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 * *

- 오래 사는 것을 먹으면 오래 살게 되고

- 예쁘고 환한 것을 취하면 또 그렇게 된대.

뭉툭한 붓끝이 캔버스 위를 거침없이 누볐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면 지유환은 그 옆 스툴에 앉아서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녀는 수평선 위로 황혼을 그려 넣으며 중얼거렸다.

- 유환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녀는 장래희망이 평범한 직업인 건 재미가 없다며 이왕이면 바다가 되어보라고 했다.

- 넓고, 자유롭고, 아름답잖아.

가끔 그렇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눈을 뜬 지유환은 자신의 몸에 얽혀있는 팔다리를 보고 미소 지었다. 서로 떨어져 잠에 들어도 눈을 뜨고 보면 이렇게 엉켜있었다. 지유환은 어느새 품속에 파고들어 제 몸에 다리를 감고 있는 백성현을 가만히 보다가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나마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백성현의 집에서 이렇게 낮잠을 자고 있으면 더더욱 이 공간이 두 사람만의 도피처가 된 것도 같았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깥세상과 달리 이곳은 둘 만이 숨 쉬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지유환은 어느새 선잠에서 깨어 바르작거리는 백성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잘 잤어요?”

“……으응.”

“점심 뭐 드실래요. 만들어드릴게요.”

“우리 집에, 재료가….”

“재료도 사오면 되죠.”

“그렇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는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린 백성현은 다시 품에 폭 안겨 왔다.

“더 주무실래요?”

백성현은 대답 없이 고개만 계속해서 끄덕거렸다.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은 지유환은 백성현을 세게 한 번 안아준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눈을 뜨면 바로 뭔가를 먹을 수 있도록 집 앞에서 재료를 사와서 요리를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몸을 떼어내자 백성현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겨우 눈을 뜬 그는 잠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안 가면 안 돼? 계속 자자. 같이.”

“그것도 좋긴 하지만,”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손을 보던 지유환은 백성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손가락에서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백성현이 기분 좋은 것처럼 눈을 감아 내렸다.

“점심 드셔야죠.”

“안 먹어도 되는데….”

“형. 끼니 계속 거르면 건강에 안 좋아요.”

“…….”

더 이상 반박할 말을 떠올려내지 못한 것처럼 백성현이 손을 툭 떨어뜨렸다.

“잔소리쟁이….”

지유환은 그런 투정에도 작게 웃을 뿐이었다. 백성현은 끼니를 챙겨주지 않으면 거의 챙겨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허기를 참다못해 아주 배고픈 상태가 되면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건강에 있어서는 아주 나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나갈 준비를 마친 지유환이 현관에서 신발을 꿰어 신으며 백성현을 향해 말했다.

“좋아해요. 오늘도.”

“…….”

“금방 갔다 올게요.”

그 말에 뒤늦게 백성현이 손을 들어 어서 갔다 오라는 듯 손을 저어주었다. 지유환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원룸을 나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마트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익숙하게 장바구니를 든 지유환은 운전을 하고 오는 동안 생각해둔 메뉴의 재료를 하나씩 담았다. 장바구니 안에 담긴 생닭과 대파, 오이, 양파, 소면 등을 훑어본 지유환은 계란 한 판과 방울토마토, 수박까지 담고 나서야 계산대로 갔다. 기본적인 조리기구와 양념들은 그가 하나씩 사서 백성현의 집에 구비해뒀으므로 이렇게까지만 사도 될 것 같았다.

재료들을 사놓아도 지유환이 직접 요리를 해주지 않는 이상 그 양이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사둔 재료를 그대로 버리기를 반복하다가 그때그때 재료를 사 오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백성현의 말에 따르면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 정도라고 했으니 더더욱 걱정이 컸다. 지유환은 진지하게 조만간 그에게 요리 학원 등록을 권유해 볼 생각이었다. 그가 말만 한다면 직접 요리를 가르쳐줄 생각도 얼마든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이미 침대의 이불이 다 정리되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했어. 밖에 많이 덥지?”

“그렇게 덥진 않았어요.”

양손에 들고 있던 재료들을 내려놓은 지유환은 곧바로 부엌 한 쪽에 놓인 앞치마를 둘러멨다. 이 앞치마도 백성현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막상 그가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유환이 요리를 하려고 하면 백성현은 그 옆에 앉아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곤 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뭐라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앉아있기만 해도 된다고 하면 그 눈이 시무룩하게 가라앉곤 했으므로 지유환은 요리 과정 중 가장 쉬운 것을 떠올려내고 입을 열었다.

“지단도 부쳐야 하니까 달걀 세 개 정도만 깨주세요.”

칼질이나 불을 쓰는 일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과정은 지유환이 했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가져온다거나 달걀을 깨서 푸는 일 정도의 난이도 최하의 과정은 이런 식으로 백성현이 도와주기도 했다.

“응. 금방 해줄게.”

계란을 꺼내는 백성현을 곁눈질로 확인한 지유환은 도마를 꺼내 대파와 양파를 일정한 크기로 잘랐다. 마찬가지로 그가 사둔 냄비에 물을 붓고, 생닭과 함께 손질한 재료를 넣어 화력을 최대로 높였다. 이런 식으로 육수를 내어 소면을 삶아 초계 국수를 만들 생각이었다. 옆에 서서 계란을 풀고 있던 백성현이 보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단 내가 부쳐도 돼?”

“해 본 적 있으세요.”

“없긴 한데.”

“…….”

“내가 해볼래.”

사실 지단 부치는 것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걱정이 돼서 지유환은 쉽사리 그러라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고 하든 간에 자신이 해내고 말겠다는 듯 이미 백성현은 프라이팬을 꺼내고 있었다. 충분히 달궈지지도 않은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는 백성현을 보며 지유환이 중얼거렸다.

“프라이팬 쓰실 때, 손 데지 않게 조심하세요.”

“응.”

“다 되면 써는 건 제가 할게요.”

“어? 왜? 그냥 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백성현은 지유환이 요리를 하던 모습을 따라 하듯이 프라이팬 위의 열기를 가늠하다가 그 위에 계란물을 들이부었다. 지유환은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칼은 위험해서 안 돼요.”

“…….”

“불 조금 줄여도 될 것 같아요.”

프라이팬에 부은 계란물의 가장자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백성현은 일단 그의 말에 따라 불을 줄이기는 했지만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내가 몇 살로 보여?”

지유환은 그런 질문을 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평연하게 대답했다.

“스물네 살이시잖아요.”

“…아.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지유환은 생닭이 끓는 동안 부엌에 기대서서 백성현이 지단을 부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듯 긴장한 기색으로 프라이팬을 노려보던 백성현은 이제 어느 정도 익은 계란을 뒤집으려는 것처럼 뒤집개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그가 나름 주의를 기울여 계란을 뒤집었고, 그와 동시에 동그랗던 지단이 네 갈래로 찢어졌다.

“…….”

백성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습하듯 열심히 뒤집개를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지단이 아닌 에그 스크램블에 비슷한 모양이 되어갈 뿐이었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지유환을 올려다보았다.

“…….”

“일단 옮길까요.”

지유환은 벽에 기대있던 몸을 떼어 백성현에게로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프라이팬 안의 계란 조각들을 도마에 옮겨 담은 그가 낙담한 듯한 백성현의 머리를 넉넉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목소리에는 얼핏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처음이잖아요. 괜찮아요.”

“…….”

“잘 하셨어요.”

지유환은 계란 조각들을 모양 좋게 썰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계란 지단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섬세한 칼질을 거치자 전보다는 훨씬 그럴듯해졌다.

“괜히 한다고 했나 봐. 미안.”

“아니에요. 맛있을 거예요.”

차갑게 씻은 소면 위에 찢은 닭고기와 오이, 계란 고명이 올라갔다. 거기에 육수를 부은 지유환은 방울토마토도 반으로 갈라 그 위에 올려주었다.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상을 편 백성현이 선풍기를 켜고 앉았다. 그럴듯한 모양새의 국수를 본 그가 감탄하듯 입을 벌렸다.

“와….”

“드셔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백성현이 소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을 먹자마자 옅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번져갔다. 정작 음식을 만든 지유환은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눈앞의 상대를 보기만 했다.

“닭고기를 연겨자랑 같이 무쳤는데, 맵진 않아요?”

“아냐. 하나도 안 매워. 너무 맛있어.”

“다행이다….”

약간의 걱정이 어려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늦은 점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백성현은 먹는 중간중간 칭찬을 쏟아부었고, 지유환은 칭찬을 들을 때마다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다가도 작게 웃곤 했다.

“이러고 있으면,”

“응?”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이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 백성현이 먹을 밥을 해주고,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마치 같이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선풍기가 고요하게 돌아갔다.

얼음물이 담긴 컵 표면으로 물방울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을이나 겨울 즈음에는 같이 살지 않을래요. 목 밑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킨 지유환은 묵묵히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을 쌓아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때그때 설거지를 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미미하게 들려오던 매미소리 같은 이명이 갑자기 높게 치솟았다.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인지를 순간적으로 상실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떻게든 손에서 그릇을 놓지 않으려고 힘을 주자마자 손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는 것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한 백성현이 시야에 스쳐 갔다.

발이요. 그릇 깨졌잖아요. 오지 마세요.

웅웅거리는 머릿속과 별개로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이렇게 시작되어서 앞으로 적어도 30분간은 계속 심해지기만 할 증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명과는 차원이 다른 어지럼증과 토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아? …려?”

눈을 뜨면 시각적 정보가 뇌를 혼란시켜 증상이 더 심해졌다. 이명에 백성현의 목소리가 가려졌고 눈을 뜰 수 없어서 입모양도 읽을 수가 없었다. 멈출 수 없는 쳇바퀴 안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집이었다면 본능적으로 길을 돌아 더듬듯 침실로 갔을 텐데 순간적으로 이 집의 구조가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디가 벽이었는지, 매트리스가 어느 쪽인지, 어디에 주저앉아있는 것인지를 인지할 수가 없었다. 발을 내어 걸으면 파편이 박혀올 것만 같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와중에도 지유환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형. 발이요. 뭐가 깨졌어요.

백성현의 말소리가 울려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전혀 해석이 안 됐다. 지유환은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는 백성현이 놀라서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형.”

“…….”

“안 다쳤어요? 죄송해요. 여기서 이렇게….”

평소와 달리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으니 놀랐을 수도 있었다. 눈이 마주친 백성현은 떨리는 입술을 떼어냈다.

- …랐어.

놀랐어?

몰랐어?

- 내가 …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 …도 돼.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유환은 안심하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주었다. 휙휙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울고 있는 얼굴만이 선명했다. 백성현이 울고 있는 얼굴만 보면 마음이 죄여 들었다. 그 얼굴만큼은 참기가 힘들었다.

“곧 괜찮아지니까.”

“…….”

“울지 마세요. 심각한 거 아니에요.”

지유환은 손을 들어 떨리고 있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의 손은 두세 번 정도 헛손질을 한 뒤에는 천천히 내려갔다.

* * *

시간은 여름을 관통하기 위해 달음박질쳤다. 가속도가 붙을수록 그에 대한 후유증처럼 이명이 심해져 갔다. 어느 정도의 귀울림은 익숙했지만 고막을 찢을 듯한 선연한 고통은 무뎌지기가 힘들었다.

- 보청기를 착용하신 상태에서 청능 훈련을 진행하셨을 때,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른쪽 귀는 정상 수치라고 봐도 좋을 만큼 적응이 잘 됐어요.

훈련에 매진한 이유는 하나였다. 기구 자체와 상성이 맞지 않았음에도 꾸역꾸역 착용하다 보니 이제는 거의 적응이 된 상태였다. 담당의는 이렇게까지 단시간에 적응을 하는 건 드문 사례라며 고양된 어투로 말하기도 했었다. 조용한 공간에서는 입모양을 보지 않고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올라갔다.

지유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흐릿한 정신을 팽팽하게 당길 수 있는 것에는 카페인만 한 것이 없었다.

버튼을 누르자 포터필터에 분쇄된 원두가 가득 찼다. 도장처럼 생긴 탬퍼로 표면을 평평하게 누른 그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 문제는 메니에르가 재발이 됐다는 건데…….

몇 초 지나지 않아 전용 잔에 에스프레소가 흘러나왔다. 지유환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나온 것을 확인하고 추출된 원액을 뜨거운 물이 담긴 머그컵에 부었다. 투명한 물이 순식간에 검게 번져갔다. 그렇게 지유환이 손잡이를 쥐고 자세를 바로 했을 때였다.

순간 주변의 사물들이 회전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빙글 돌았다. 지유환은 반사적으로 한 쪽 손을 뻗어 아일랜드 식탁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갓 추출한 커피는 얼룩이 되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고르는 도중에도 머릿속은 산란했다. 형체 없는 이미지들이 망막 위를 산발적으로 어지럽혀오는 탓에 그는 파편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하던 일들을 모두 멈추고 질서 없는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지유환은 한 걸음씩 내디뎌 침실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희미한 시야 끝에 걸린 커튼이 들썩였다. 지유환은 눈을 감아 내렸다.

- 사람마다 증상 수준이 다른데 환자분의 경우는 강도가 무척 높은 정도예요. 이대로 현상이 반복되면 또 청각 손실이 올 수가 있어요.

오른쪽 귀 말입니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독한 굴레였다. 그 날도 꼭 지금과 같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 밤낮을 심하게 앓았었다. 이런 감각은 어쩌면 죽음에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열이 들끓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이대로 자유로워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꼬박 앓은 사흘 뒤에도 새로운 아침은 꾸역꾸역 찾아왔다. 세상이 유난히도 조용하던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자 커튼은 흩날리는데 바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TV를 켜도, 라디오를 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발소리도, 온갖 잡음도, 어수선한 말소리도……. 익숙하던 소리들이 단 하나도, 나지가 않았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세상은 한없이 낯설어졌다.

지유환은 뭉개져버린 것 같은 사고를 겨우 일깨워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런 순간엔 늘 먼 곳을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었는데, 지금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이제껏 봤던 것과 다른 얼굴이었다. 수줍은 듯한. 왼쪽 눈 밑의 눈물점과, 끝이 올라간 눈매.

“아…….”

지유환은 겨우 몽롱한 정신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만큼 집이 넓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혼자 살기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이 끝없이 공간 확장을 하는 것처럼 넓어져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백성현을 앞에 두고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때의 선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지유환은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뭔가를 써야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백지 위에 온갖 유해한 감정을 뱉어내면 조금씩 나아지곤 했었다.

날카롭게 깎아낸 심이 툭 부러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유환은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침잠하려는 머릿속에 제 머리를 품에 안고 울고 있던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울고 있었다. 최초로 애틋한 사랑스러움이라는 것을 느꼈던 눈매가 오직 저를 향해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아픈 것이 마치 그의 아픔이라는 것처럼,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백성현은 자신을 안고 그렇게 울었다

“……하아.”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목 안이 뜨겁게 죄여왔다.

* * *

창문을 열어두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백성현은 축축한 풀냄새를 맡다가 눈꺼풀을 감아 내렸다. 그 날 이후로 눈만 감으면 어두운 시야에 맺히는 상이 있었다. 벽에 기대어 일어나지 못하던 지유환의 모습.

“…….”

주저 앉아있는 그를 앞에 두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그릇이 깨졌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치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선했다.

보고 있으면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희게 질린 그의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괜찮냐고 묻는 것뿐이었다. 백성현은 깨진 조각들을 줍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나 깨달았었다.

그때 이후로 백성현은 이명, 어지럼증 따위의 검색어를 몇 번이고 검색해보았다. 그렇게 한다고 그의 상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닐 텐데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찾아보게 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관련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다 보니 어느새 난생처음 보는 병명이 화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 귀울림, 구토감 등을 증상으로 든 병명의 후유증이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청력 손실…….”

똑똑, 하는 소리에 백성현은 검색창을 급하게 끄고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든 들어올 수 있게 비밀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지유환은 노크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노크를 한 뒤 문이 열리면 허락을 받은 기분이라고도 말했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백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두어 번 노크를 하면, 문을 열어준다.

백성현도 사실 그 과정을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문을 열었을 때 커다란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은 꽤 즐거웠다. 그의 그림자가 느껴지면 언제고 들떠 오르는 기분이었다. 백성현은 문을 활짝 열고 인사말을 건넸다.

“왔어?”

“네. 조금 늦었죠.”

지유환은 오늘도 어김없이 뭔가를 불쑥 내밀어왔다. 아무것도 사올 필요가 없다고 신신당부해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봉투가 묵직했다. 백성현은 얼결에 봉투를 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이거?”

“집에 있던 거예요.”

백성현은 봉투에 들어있던 것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아날로그 디자인을 따온 듯 스피커와 버튼 모양이 투박한 라디오였다. 그가 전자제품을 들고 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백성현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라디오?”

“어렸을 때 쓰던 건데, 찾은 게 신기해서 들고 왔어요.”

“이거 작동하는 거야?”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라디오를 이리저리 살피던 백성현이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 건가 싶어 백성현은 눈을 맞추고 다시 물었다.

“이거, 작동해?”

“네. 한 번 들어보실래요.”

요즈음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선풍기를 틀어놓곤 했다. 백성현은 선풍기가 밀어내는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지유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콘센트를 꽂은 지유환이 간단히 버튼을 조작하자 라디오에서 드문드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매트리스에 앉아 놀란 듯 웃었다.

“어, 진짜 되네.”

그러고 보면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그의 침실에서 이름을 불렀을 때는 뒤를 돌아봐줬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눈에 익은 그 등을 물끄러미 보던 백성현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유환아.”

반응이 없는 뒷모습에 백성현은 조금 더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환아.”

“…….”

“다 됐어?”

거의 소리치듯 뱉어진 질문에 지유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라디오를 손에 들고 있는 채였다. 백성현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얀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네.”

“이제…….”

백성현은 부러 입모양에 신경을 쓰며 말했다.

“…다 됐나, 싶어서.”

“거의 다 됐어요. 잠시만요.”

그가 주파수를 조작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오래지 않아 스피커로부터 누군가 매끄럽게 사연을 읊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주파수를 외운 것인지, 소리를 다 듣고 주파수를 조절한 것인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백성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유환은 라디오를 머리맡으로 가져오며 넌지시 말했다.

“이거 이제 형 드릴게요.”

“어렸을 때 썼던 거면 소중한 거 아니야?”

“소중한 거니까. 형 드릴게요.”

“…….”

그와 나란하게 누우면 머리맡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홑이불을 나눠 덮었다. 라디오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의 사연이 한창이었다.

[이번 사연자님이 …… 신청해주신 곡을 함께 ……]

가수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백성현은 노래 대신 곁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새삼스럽게 그가 여전히 옆에 있음을 확인한 백성현은 단조로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푸른 색 공기가 허공을 떠돌았다.

가만히 마주 보면 세상에 남은 것은 두 명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매미가 여름을 죽일 것처럼 울었지만 지유환은 말없이 손을 잡아 올 뿐이었다. 창문 틈새로 풀잎 향기가 실린 바람이 불어왔다.

세상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누워있는데.

그 날 바랐던 것은 하나였다. 이 계절이 아주 길었으면 했다.

* * *

여름 방학이라고 해서 대단히 새로운 나날들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현은 여름 방학 동안 공부하기로 한 제2외국어 강의를 듣다가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잡생각이 들 때는 방 정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방 안을 둘러본 그는 문득 정리할 집기가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림살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방이 어느새 생활감 넘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생활용품이나 잡화, 옷, 심지어 라디오까지. 이 방 안에 지유환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더 힘들 정도였다. 멍하니 책상 위를 세 네 번 반복해서 닦던 백성현은 손끝에 걸리는 묵직한 무게감에 멈칫했다.

“아…!”

책상 한 쪽에 놓아두었던 라디오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닥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에 백성현은 두 눈을 홉떴다. 그는 재빨리 라디오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일단 외견상에 흠집은 없어 보였다.

“하아. 다행이다.”

아무것도 없이 썰렁하던 집이 이제는 썩 보금자리 같아졌다. 매트리스에 누워 시집을 펼쳐보아야만 그를 떠올릴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그의 흔적이 녹아있었다.

그때,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인종?”

노크가 아니라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곳에 올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백성현은 라디오를 매트리스 옆에 놓아두고 한달음에 문 앞에 가서 섰다. 철컥, 하고 문을 연 그는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인영에 앞으로 나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칫했다.

“백성현! 살아있었냐?”

지유환이 아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름용 양복을 빼입은 한 성준혁이 복도에 서 있었다. 백성현은 눈매를 좁히고 입을 열었다.

“어… 뭐야. 말도 없이 웬일이야.”

“와, 쌀쌀맞은 것 좀 봐. 여름방학이라고 잠수 탄 게 누군데.”

성준혁은 집이 멀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만취한 그를 종종 이 방에 재워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앞으로 술을 줄이겠다고 다짐하듯 말하긴 했으나 같은 상황이 꽤 여러 번 반복됐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불쑥 집에 찾아온 적은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준혁은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앞에 들를 일 있어서. 네 생각나서 한번 와봤지, 뭐.”

“아…. 채용 설명회인가, 그거?”

백성현도 오며 가며 공기업 채용 설명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현수막을 본 적이 있었다. 성준혁은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볼멘소리를 했다.

“카톡 답장도 잘 안 하니까 살아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생사 확인하러 온 거야?”

“어. 그렇지. 근데 물 한 잔만 주면 안 되냐?”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한 백성현은 잠시 들어오라는 듯 몸을 뒤로 뺐다. 이제 곧 지유환이 올 시간이었다. 성준혁은 지유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이 마주쳐봐야 좋을 일은 없었다. 같이 교양을 들을 뿐인 후배가 자취방까지 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내는데 등 뒤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집이 화사해진 것 같은데.”

“…전에는 어땠는데?”

“어땠기는. 우중충했지.”

물컵 가득 물을 따라서 건네주자 성준혁은 목이 말랐던 것처럼 단번에 끝까지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현은 슬쩍 핸드폰을 꺼내 지유환에게 문자를 보냈다.

- 어디야?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조금 있다가 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풍선 옆의 1이 사라졌다.

- 한 10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 것 같아요.

“10분…….”

잠깐 들른 것뿐이라고 했으니 10분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백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 응. 천천히 와.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나니 뒤늦게 성준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백성현은 단번에 성준혁과 눈이 마주쳤다. 잔뜩 가느스름해진 눈을 보아하니 또 뭔가를 잔뜩 묻고 싶은 눈치였다.

“수상한데.”

“뭐가, 또.”

“너 저번에 그 사람이랑 어떻게 됐어.”

“누구.”

“저번에 술자리에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했었잖아.”

“…….”

“잘 됐어?”

대답을 고르던 백성현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긍정을 해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계산 하에서였다.

“잘 안 됐어.”

뭐라도 캐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빛나던 눈이 일순 흥미를 잃은 듯 푸시시 꺼졌다. 성준혁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혀를 쯧쯧 찼다.

“고백도 안했지?”

“…….”

“에휴, 답답한 놈…. 네가 고백하는데 안 받아줄 사람이 있겠냐?”

“뭐….”

“내가 그 얼굴이었으면 아주, 어?”

백성현은 그 호들갑에도 그냥 작게 웃고 말 뿐이었다.

“근데 채용 설명회에 양복까지 입고 가야 돼?”

“몰라. 현장 면접이라나 뭐라나. 귀찮게 아침부터 준비 했잖냐. 아, 답답해.”

성준혁은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고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원래는 시계 자체를 귀찮아했으면서 면접이랍시고 차고 온 모양이었다. 평소와 달리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나름대로 각 잡힌 양복을 보고 있자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같이 술만 마시러 다니던 성준혁이 정말 취업 활동을 하긴 한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있으니까 취업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네.”

“야, 학생 신분이 최고다. 나는 한 10년 있다가 졸업하고 싶다고.”

그 뒤로도 그는 답장을 좀 잘하라느니, 잠수를 탈거면 예고를 좀 하라느니 잔소리를 늘어놓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는 순간에는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었다고 툴툴거리기도 했다. 백성현은 그제야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연락 할게. 면접 잘 해라.”

뒤돌아 나가는 뒷모습에도 그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과는 잘 됐고, 그가 곧 이 방에도 올 거라고는 절대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성준혁과 친하다고 해도 지유환과의 관계를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시계를 보니 십 분이 조금 더 지나있었다. 백성현은 문을 닫고 현관 앞에 천천히 앉았다.

올려다보면 커다란 문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는 오래지 않아 저 문을 두드릴 누군가를 기다렸다. 지유환이 사다 준 초침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갔다. 은은한 디퓨저도 그가 제 것을 사면서 생각이 나서 같이 샀다며 안겨준 것이었다.

천천히 오라고 말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늦는 것 같았다. 비어버린 머릿속을 채우기 위해 그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지를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좋은 거… 사주고 싶은데.”

똑똑.

‘좋은’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한참 생각해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성현은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는 고개를 들어야 눈높이가 맞았다. 곧바로 열린 문을 보고 놀라기라도 한 듯 뒤늦게 안녕하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목소리가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왔어? 보고 싶었어.”

오늘도 어김없이 뭔가를 내밀어오는 손을 확인하는 대신 품에 파고들자 달콤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지유환은 의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마주 안아 주었다. 달래듯 머리를 쓸어오는 손길에 백성현은 지유환의 품에 묻은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형?”

“생각보다 엄청 늦게 왔네.”

천천히 오라고 문자를 보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그런 책망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유환은 머리 위로 입술을 눌러왔다. 그는 백성현을 안은 채로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내려두며 속삭였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지유환은 상체를 기울여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춰왔다. 은근하게 코끝을 비비면서는 다정스런 말을 해오기도 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는 보조개가 패도록 짙게 웃었다. 홀린 듯이 보조개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간지러워요.”

백성현은 그렇게 자세를 바로 하려는 지유환의 얼굴을 살짝 잡았다. 까치발을 들고 입술 위에 몇 번이나 짧게 입을 맞추었다. 지유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것과 달리 입술이 맞닿아있는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쪽, 쪽 하던 소리는 금세 깊어졌다.

뒷목을 감아오는 완강한 힘에 백성현은 눈매를 움찔했다. 이내 간지러운 감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파고들어 오는 혀가 느껴졌다. 지유환이 입 안 곳곳을 헤집어왔다. 집요하고 노골적인 혀 놀림에 절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속도를 조절하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혀를 엮어 올렸지만 그는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입 안 점막을 혀끝으로 세게 문질렀다.

“천천히….”

“…하아.”

“천천히 해….”

지유환은 말없이 백성현을 바싹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삼켰다. 그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두드리다가 입안을 쑤시는 것처럼 넣었다가 뺐다. 백성현은 그 선연한 자극에 몸을 떨었다. 그가 이렇게 부피감이 느껴질 정도로 입 안을 휘저어오면 발끝이 곱아들었다. 지유환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밀어 붙여왔다. 그가 깊숙한 곳까지 혀를 거칠게 집어넣었다 뺀 순간,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넓게 벌어진 어깨를 잡아챘다.

“하아…. 잠깐만….”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저를 향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왜요. 형 좋아하잖아요.”

지유환은 입꼬리를 당기고 속닥였다.

“입 안 휘저어주는 거.”

“…….”

“형이 시작했어.”

다시 허리를 감아 입을 겹친 그는 말과는 달리 느릿하게 입술 사이를 핥아 올렸다. 쪽쪽 거리며 쪼아오기도 하고 허락해달라는 듯 말캉한 살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 빨아오기도 했다.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몸이 점점 뒤로 밀리더니 어느새 침대에까지 닿았다. 백성현은 입술을 떼어내고 현관에 놓인 봉투에 눈길을 보냈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선수라도 치듯 입을 열었다.

“굳이 뭘 사올 필요 없다고 하시긴 했지만,”

“…….”

“정신 차려보니까 뭘 또 샀더라고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라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백성현은 헛웃음을 치려다가도 이어진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형한테 뭘 사갈지 하루 전부터 생각을 하는데….”

“…….”

“그러면 하루가 형으로만 가득해지거든요.”

“…….”

“디저트 가게라도 지나가면 형은 무슨 맛을 제일 좋아할까, 싶고.”

“…….”

“서점이나, 잡화점이나…. 근사한 곳이 있으면 다음엔 여길 같이 와야지… 생각하고.”

오늘은 쇼트케이크를 종류별로 네 개를 사 왔어요.

신기하게 요즘은 단 걸 먹어도 예전처럼 혀가 아릿하지도 않아요. 입맛이 점점 닮아가는 것 같은데.

평소엔 그렇게나 말이 없으면서 앞으로는 뭘 사오지 말라고 할까 봐 이런저런 말을 속삭여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 다정해서 백성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아.”

지유환은 문득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뭔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그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등. 백성현은 지유환의 등에 대고 물었다.

“뭐 찾아?”

“…….”

그는 대답 없이 계속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전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 내 목소리 다 들려?

- 하루도 안 거르고 적응 훈련을 했는데, 정상수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응이 잘 됐대요.

백성현은 방금 전보다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유환아.”

- 앞으로도 꾸준히 훈련하면… 예전처럼도 돌아갈 수 있다고 하니까.

- 형 덕분이에요.

“유환아?”

왜인지 그는 계속되는 부름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백성현은 책상 앞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 지유환이 라디오를 집어 들고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예쁘게 웃는 얼굴이 초 단위로 끊어져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라디오 들을까요.”

“…….”

“오늘은 음악 채널 들어요.”

“…응. 그러자.”

지유환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콘센트에 라디오를 연결했다. 백성현은 익숙한 듯 전원을 켜는 지유환을 보며 작게 물었다.

“너… 괜찮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눈을 좁혔던 그는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작게 웃었다.

“아아.”

지유환은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지직 거리는 잡음에 얼어붙었다. 그가 아무리 스위치를 돌려도 같은 소리만 반복되었다. 라디오 방송은커녕 듣기 싫은 전자음이 방안을 울릴 뿐이었다. 지유환은 이상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해서 기계를 조작했다.

이윽고 그는 여전히 잡음을 토해내는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었다.

“형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

“많이 나아졌다고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다 됐다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어오는 얼굴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백성현은 가만히 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란한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유환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작게 속닥여왔다.

“어렸을 때, 이 채널을 제일 자주 들었어요.”

“…그랬구나.”

주파수를, 외워온 거였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주변 사물이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손을 내어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손 위를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겹쳤다. 그 얼굴 위로 눈도 뜨지 못하던 지유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어때요?”

지직 거리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백성현은 작게 웃었다.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응. …좋다.”

입모양을 보고 있던 지유환이 뒤늦게 다행이라는 듯 눈을 휘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백성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괜찮은 게 맞는지.

등 뒤에서 이름을 부른 일을 알고는 있는지.

왜 굳이 너는 주파수를 외워 왔어야만 했는지.

그런 질문들 없이도 이 여름은 얼마든지 흘러갈 수 있겠지만….

“…….”

자꾸만 무언가가 울컥울컥 차올랐다.

고장 난 소리가 여백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별안간 그 틈을 가르고 울려 퍼진 낮은 목소리에는 순간 마음이 덴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형은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어떤 말?”

“뭐였더라…. 아. 오래 사는 걸 먹으면 오래 살게 되고,”

“…….”

“예쁘고 환한 것을 취하면 또 그렇게 된다…라는 말.”

허무맹랑하죠. 아마 그렇게 믿고 싶었던 사람들이 만든 말인 것 같아요. 백성현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조금 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호흡을 확인하고, 심장소리를 귓가에 새겼다. 라디오의 산발적인 소음이 신경을 긁어 와도 백성현은 숨을 죽여 그의 박동에 귀 기울였다.

“처음 들어봐.”

왜 그는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을까. 왜 늘 괜찮다고 말하는 걸까. 백성현은 지유환의 체향을 쫓아 그의 곁에 파고들었다. 하얀 얼굴, 기다란 속눈썹 아래 갈퀴 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

문득 창가에서 흩어진 햇빛 위로 떠다니는 먼지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주 느리게, 점점 아래로 가라앉다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위태로워 보였었다. 그 집에서 켜켜이 쌓인 약 봉투를 발견했던 날, 잠이 들어있던 모습도, 창백한 얼굴로 햇빛을 받고 있을 때도. 가만히 우뚝 서 있기만 해도 왜인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백성현은 지유환의 팔을 끌어다 다시 그의 품 안에 들어갔다. 넉넉한 손은 얼마든지 안겨도 좋다는 것처럼 뒷목을 쓸어주었지만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백성현은 해로운 잡념들을 지우기 위해 그에게 주고 싶은 좋은 물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온갖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을 나열하다가, 늘어놓다가 의식이 사위었다.

* * *

짧은 잠에서 깨어나 바라본 바깥은 제법 어두웠다. 백성현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듣다가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는데 발밑에 뭔가가 걸렸다.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백성현은 발에 채인 묵직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메탈 재질의 시계였다. 백성현은 어렵지 않게 그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근데 채용 설명회에 양복까지 입고 가야 돼?

- 몰라. 현장 면접이라나 뭐라나. 귀찮게 아침부터 준비했잖냐. 아, 답답해.

그때 답답하다며 풀었던 시계를 그대로 놓고 간 모양이었다. 하여간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기저기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건 여전했다. 백성현은 시계를 책상 한 쪽에 올려두었다.

물 한 컵을 마시는 동안에도 지유환은 깨지 않았다. 백성현은 불현듯 든 생각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치고 침대로 걸어갔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지유환의 목이 희게 드러나 있었다. 백성현은 그 목 위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곧바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 지유환은 간지럽다는 것처럼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백성현은 나머지 한 손도 끌어다 열심히 그를 간지럽혔다. 이윽고 지유환의 입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지러어요….”

드러난 피부를 간지럽히는 손을 제지하듯 손목을 붙잡아오긴 했지만 힘을 주면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뒤트는 바람에 셔츠가 위로 들려 단단한 복부가 드러났다. 백성현은 이번에는 손을 내려 허리께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곧바로 잘 짜인 복근의 윤곽이 드러났다. 한숨을 내쉰 지유환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분명 지유환의 위에서 손을 놀리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되었다. 그는 잠에서 덜 깬 기색이 역력한 채로 백성현을 아래로 깔아 눕혀 읊조리듯 말했다.

“간지럽다니까….”

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쑥 들어왔다. 백성현은 토끼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번에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아, 미안. 장난이었어.”

“…….”

“미안, 아…!”

느릿하게 흉곽을 매만지던 그는 늑골을 헤아리는 것처럼 하나하나 더듬었다. 손발을 결박당한 것도 아닌데 커다란 몸에 깔려서인지 빠져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옆구리나 등허리를 은근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백성현의 몸이 비틀렸다.

“간지러우세요.”

백성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오가는 와중 불현듯 소리 없이 웃은 지유환은 그제야 옷을 내려주었다.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하는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번 정도 만에 그친 것을 보면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백성현은 지유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 문자 왔나 봐.”

그렇냐는 듯 눈을 깜빡인 지유환이 머리맡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이내 핸드폰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갔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놀란 듯 아연했다.

“아….”

드물게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백성현은 그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왜?”

“오늘까지인 원고를 안 보내고 있었어요.”

“정말? 그러면 빨리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드라이브에 저장을 안 해둬서….”

지유환의 미간이 곤란한 듯 찌푸려졌다. 시계를 돌아보니 시간은 이미 여덟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성현은 뒤늦게 그가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어정쩡하게 몸을 물렸다. 지유환은 그 와중에도 침대 위를 간단히 정리하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서 원고 보내.”

“…….”

몇 걸음 만에 현관문 앞에 선 백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넌지시 물었다.

“뭐 빠뜨린 거 없지?”

지유환은 백성현을 빤히 보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내일 또 올게요.”

“……응.”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아쉬워지려는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먼저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낀 부드러운 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발걸음을 느리게 해서 걸었지만 원룸 건물의 입구 옆에 좁게 난 주차공간까지 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가 늘 타고 다니는 검은 세단은 오늘도 도드라져보였다.

차 앞까지 도착하고도 인사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백성현은 먼저 손을 떼어내고 지유환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잉, 하고 차창이 내려갔다. 백성현은 상체를 낮춰 그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조심해서 들어가.”

“…형도 조심해서 가요.”

“나야 바로 앞인데, 뭐.”

그대로 창을 올릴 줄 알았는데 지유환은 뭔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운전석을 열고 나왔다.

“뭐 놔두고 왔어?”

백성현은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팔이 뻗어 나와 뒷목을 감아올 줄은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입술 위로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가볍게 쪽, 하고 떨어지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백성현은 할 말을 잃었다.

“좋아해요, 형.”

“…….”

“오늘 이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순간이지만 향기로운 온기가 몸을 휘감아왔다. 지유환은 바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힘주어 안은 팔을 먼저 풀지 않았다. 그는 백성현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을 밀어내고 나서야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번엔 정말로 가보겠다는 듯한 마지막 말에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어서… 들어가요.”

“응. 알겠어.”

끝까지 다정하구나. 아쉬웠던 마음은 어느새 몽글몽글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백성현은 차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자리에 서 있었다.

골목길의 끝까지 간 차체가 좌회전을 해서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마음속으로나마 작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왼쪽으로 한껏 틀었던 고개를 바로 하자 시야는 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했다. 백성현은 그대로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해버린 탓이었다.

백성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단번에 발끝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크게 뜨인 눈이 저를 향해 있었다. 백성현은 반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순간적으로 변명으로 하기 좋은 수많은 말들이 뇌리를 스쳐 갔지만 무엇하나 소리가 되지 못했다.

“…백성현.”

성준혁이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심장이 놀란 것처럼 뛰어왔다. 백성현은 벙긋거리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주워섬기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눈앞까지 와서 멈춰선 성준혁은 처음 보는 것 같은 혼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

“…….”

“뭐냐고. 방금 내가 본 거.”

“…….”

“아니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백성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낮게 읊조렸다.

“봤잖아.”

그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왔을 만한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쯤 책장 위에 놓여 있을 시계를 찾으러 온 것이 뻔했다.

성준혁의 저런 표정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어떻게 그런 걸 숨길 수 있느냐는 듯한 얼굴. 저 표정 안에 감춰진 감정은 배신감일 수도, 어쩌면 경멸일 지도 몰랐다. 성준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너 원래 남자 좋아해?”

“…….”

“아니, 너 여자도 몇 번 사귄 적 있잖아. 걔들은,”

“…지유환이 처음이야.”

“…….”

“그리고 사귀는 거 맞아.”

“하.”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해져갔다. 이 상태라면 그 어떤 말이라도 그러려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준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이….”

“…….”

“잘 안 됐다며. 아니, 고백도 안 했다고 했잖아.”

“속이려던 생각은 아니었,”

“술자리에 불렀을 때. 그때도 당사자 옆에 놔두고 그런 말 한 거였어?”

성준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그는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내가 너한테 친구긴 하냐?”

“…….”

“…하. 어이가 없다, 씨발.”

백성현은 그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상황을 되돌린다고 해도 성준혁에게 먼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를 경멸을 감수 할 만큼 용기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랬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목 밑까지 그득그득 차올랐다.

내가… 남자가 좋아졌다고 먼저 말했으면 정말 네가 배신감을 안 느꼈을까.

정말로 말하기 전과 날 똑같이 대해줬을까.

네가 나였다면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그 많은 말들을 삼켜낸 백성현은 입매를 갈무리하고 성준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떻게든 그냥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성준혁에게서 허탈하다는 듯한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남자랑 사귄다는 거잖아.”

백성현은 그 목소리에 입매를 비틀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성준혁과 눈을 맞췄다.

“씨발, 몇 번을 물어 봐. 맞다고. 남자 좋아해. 그래서. 역겨워?”

“돌았냐? 내가 언제 역겹다고 했어.”

“…….”

“너 예전에 나한테 빨리 결혼하고 싶댔잖아. 애도 키우고,”

“…….”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네 입으로 그랬잖아.”

기껏해야 몇 년 전쯤이었다. 가족이 생기면 뭔가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럴듯한 가정을 이루면 매일 밤을 갉아먹는 외로움 따위는 눈 깜짝할 새 날아갈 거라 생각했었다. 남들보다 빨리 결혼이란 걸 하고 싶었던 것은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성준혁은 자신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백성현은 고개를 들어 그 눈 안에 그득 들어찬 걱정 같은 것들을 마주했다.

“남자랑은 그렇게 못 하잖아, 이 새끼야.”

“…….”

“번듯하게 살아야지. 너, 씨발. 왜 자꾸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그래.”

번듯하게 살아야지. 백성현은 아무 말도 되받아치지 못한 채 그 말을 곱씹기만 했다. 입을 벙긋거려봤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비단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성준혁의 입에서 나온 화살표가 자신을 관통해서, 저 아래의 위태로운 지대에 내리꽂히는 것만 같았다.

“충분히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백성현은 무덤덤하게 읊조리고는 휙 돌아섰다. 성준혁은 더 이상 그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온 방 안, 현관 옆에는 지유환이 두고 간 디저트가 가만히 놓여있었다. 백성현은 그 옆에 서서 한동안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꾸만 몸 안 어딘가가 따끔따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