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8. 물결의 이유 (8/22)

목차

2권

8. 물결의 이유

9. 문장론

10. 당신의 괄호

11. 연인에게

12.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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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결의 이유

* * *

하루를 꼬박 써서 한 문장을 건지는 일은 허다했다. 지유환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추려내고 나머지 종이들은 미련 없이 파쇄기 안에 밀어 넣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하얀 종이들이 조각조각 났다.

- 네 시는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무서워.

인생에 있어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인 백발의 시인은 어느 겨울날 중학생에 지나지 않는 지유환을 앉혀놓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늘어놓았었다. 그때에 유난히도 직선적으로 응시해오던 시선과 그 안에 어려 있는 걱정 같은 것들이 아직까지도 불쑥불쑥 떠올랐다.

- 그래, 유환아. 나는 네 시가 무섭다.

지유환은 출판사로부터 온 메일을 확인했다. 원래 주기적으로 원고 의뢰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최근 들어 그 빈도가 잦아졌다. 물론 요즘은 모든 의뢰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스스로를 좀먹는 일이었다. 지나가듯 떠오른 감상, 경험,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어느새 글이 되어 있곤 했다. 실상 글쓰기란 기억을 파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유환은 시야 끝에 걸린 시집의 제목을 잠시간 응시했다.

어느덧 자신은 써도 되는 것은 무엇인지, 글이 되어버리기 전에 깊은 곳에 숨겨두어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번 주까지 검토를 해야 할 교정본을 향했다. 출판사 측에서도 이제 글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는 편이었기에 특유의 레이아웃이 적용 되었을 때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만 확인을 하면 됐다. 그렇게 검은 글자를 기계적으로 읽어 내려갈 즈음이었다.

- 예전에는 마냥 네 글이 무섭기만 했는데…….

지유환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마우스 휠을 굴려 페이지를 내렸다.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노인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유환은 눈꺼풀을 스르르 감아 내렸다.

- 요즘은 슬프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구나.

- 난 네게 티끌만 한 희망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한다. 네 몸 어딘가에는 꼭 있었으면 해.

생의 남은 날들을 걱정으로 채우길 좋아하는 노인이 그냥 흘리듯 한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다음 한 마디가 도저히 잊히질 않았다.

- 시인은 자기가 쓴 글에 잡아먹히는 법이거든.

그건 활자에 생명을 부여하는 듯한 말이었다. 순간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이명이 머릿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지유환은 턱을 단단히 조이고 책상 위의 달력을 바라보았다. 5월이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 없이 그 계절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새하얗게 나부끼는 레이스 커튼이 시야를 스쳤다. 지유환은 잠시 숨을 멈추고 입 안으로 약을 털어 넣었다. 눈을 감고 마음속의 파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는 것까지도 그의 몫이었다.

* * *

“저번 검사 결과와 크게 달라진 건 없네요. 왼쪽 귀 100dB, 오른쪽 귀 59dB에서 61dB.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프는 안정적인 편이에요. 이명은 어떤가요?”

담당의가 종이에 숫자를 써가며 느리게 설명했다. 그가 손짓과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이들을 많이 상대하기 때문이었다. 지유환은 귀를 가리켜보이는 담당의를 향해 간단히 답했다.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담당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늘 이맘때쯤이면 이명이 심해졌기에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앓고 계시는 이명 자체는 약물치료로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일단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는 약을 처방해드리긴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라서요.”

올해로 9년째였다. 여름이 가까워지기만 하면 이명이 심해졌다. 지유환은 가장 더운 계절이 될 때마다 머리를 뒤흔들어놓는 듯한 소리와 진동을 버텨야 했다. 담당의는 대답이 없는 지유환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청기는 적응이 잘 되고 있나요?”

왼쪽 귀는 완전히 청세포가 죽은 상태였다. 그에 비해 오른쪽 귀로는 어느 정도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보청기의 도움을 받으면 그나마 소통이 가능했다. 다만 문제는 모든 소리를 증폭시키는 보청기와의 상성이 지독히도 나빠서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에 있었다. 그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용해도 똑같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어지러움은 물론 심각한 두통이 뒤따랐다.

예전부터 고려하고 있었던 수술을 하지 않기로 한 것도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는 기구에 적응하는 것조차 번번이 실패한 바 있었다.

적어도 지유환은 억지로 소리를 끌어올린 고통스러운 세상에 사느니 희미하고 안온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다시 보청기를 끼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는 불과 두 달 전쯤부터 다시 보청기에 적응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담당의의 권유에 따라 언어치료와 음악치료를 병행하고 보청기 착용 시간도 꾸준히 늘려가고 있었다. 의사는 침묵을 지키는 지유환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적응이 잘 안 되시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청능훈련 성적 자체는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습니다. 잘하고 계세요.”

지유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귀에 쑤셔 넣은 기구를 빼버리고 싶을 만큼 신경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처음의 순간을 생각했다. 신기할 정도로 나긋했던 누군가의 음성을 떠올렸다.

* * *

3월, 담당의의 마지막 권유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는 그의 말에 따라 지유환은 새로 맞춘 보청기를 착용하고 집을 나섰다. 향한 곳은 아침의 도서관이었다. 대략 40데시벨. 책 넘기는 소리와 책장을 정리하는 소리, 뭔가를 써내려가는 소리 정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만 아주 잠깐씩 보청기를 쓰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는 아침이면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곤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날도 지유환은 쌀쌀한 공기 안에 숨어 있는 선명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따라 걸었다. 이 시간대의 도서관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종이숲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훑어보던 책장의 반대편에서 네댓 권은 되는 책들이 한번에 빠져나간 것은 그때였다.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빈 공간 너머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친 지유환이 눈매를 좁혔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말수도, 표정이랄 것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는 노트테이킹을 할 때만은 잔뜩 집중한 듯한 얼굴로 강의를 거의 통째로 노트북 화면에 옮겨줬었다. 성실하고, 조용한 사람. 그러면서도 어딘가 퍼석퍼석한 사람. 그게 백성현에 대한 인상이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우물쭈물 하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먼저 고개를 미미하게 까딱여왔다. 그게 퍽 수줍어보여서 지유환은 허물어지듯 웃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입모양으로 말하자 무표정한 얼굴이 당황한 듯 번져갔다. 이내 상대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지유환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걸음씩 책장 옆을 걸었다. 책장이 끝나는 지점까지 걸어가면 어차피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집을 한 아름 든 백성현은 길을 가로막듯 서 있는 지유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시집 다 고르셨어요.”

평소보다 자신의 목소리가 크게 느껴져서 지유환은 저도 모르게 속삭이듯 묻고 말았다. 다행히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전달 되었는지 백성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가 시집을 집까지 사다 줬을 때도 입모양만 보고 의사소통을 했으니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아, 네.”

입모양이 반듯하게 벌어졌다. 매끈한 입술 위를 보던 지유환은 찰나처럼 스쳐 간 목소리에 멈칫했다. 가만히 서 있던 지유환은 일부러 긴 대답이 나올만한 질문을 골랐다.

“…어떤 거 고르셨어요.”

“윤선도 시조집.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포함한……,”

직접 가져온 시집들을 죽 읽어내리던 백성현이 뭔가 실수를 한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 소음 속에 홀연히 들려온 목소리는 공기 중을 나긋하게 울렸다. 저렇게나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의 목소리도 딱딱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 본 백성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느낌이 강했다. 입모양만 예쁜 게 아니라 그 발음도 정확한 편이었다.

“……잘못 가져왔어요.”

지유환은 재빠른 걸음으로 책장 안에 숨어든 백성현을 눈으로 좇았다. 막상 책들을 앞에 둔 백성현은 뭘 고를지 모르겠다는 듯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지유환은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처음 시를 읽어보는 거면 문태준 시인이나 김기택 시인을 읽어보세요.”

“…….”

“글이 어렵지 않아서 잘 읽힐 겁니다.”

추천해주고 싶은 책들이 하필 백성현의 머리맡에 꽂혀 있었다. 손을 뻗어 책을 뽑는데 어디선가 달큰한 샴푸 냄새가 났다. 지유환은 순간적으로 손끝을 움츠렸다. 잉크와 종이 냄새로 가득한 이 종이숲에 이런 향기가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꽃향기가 나는 샴푸를 쓰는 건가.

왜인지 나란히 서서 책을 읽으면서도 옆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유환은 곤란한 듯 책등을 꼭 쥐고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오랜만에 보청기를 착용해서인지 스스로의 숨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서둘러 페이지를 넘겨 이 책과 저 책을 오가길 반복하는 백성현의 모습을 눈치챈 것도 한참 뒤였다.

“정서에도 주파수라는 게 있대요.”

“…….”

“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유난히 그 주파수가 반응하는 구절이 있을 겁니다. 그런 울림만 느껴져도 충분해요.”

그때에 다시금 마주치던 눈빛. 지유환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다가 그대로 닫힌 입술에서 겨우 눈을 뗐다. 백성현의 뒤로는 푸른 공기가 내렸다.

아주 조금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새 기구로 인한 부작용이 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지유환은 부지런히 책장을 넘겼다. 무엇을 읽는지 모르겠다는 감상이 고개를 들고 나서야 그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 날의 아침에 가장 큰 울림을 남긴 것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나긋함이었음을, 도서관을 나서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 * *

백성현이 집까지 병문안을 와준 날 이후로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감기는 빨리 나았지만 그보다 큰 열감이 몸 안에 뿌리를 내렸다. 곧 그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술렁거렸다.

지유환은 늘 앉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두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나무초리에 제법 푸른 기가 돌았다. 벌써 여름이 코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한여름이 되면 가지마다 빽빽하게 새잎이 돋을 것이었다.

그는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백성현보다 빨리 강의실에 도착하곤 했다. 강의실에 일찍 가는 습관이 생긴 이유는 하나였다. 백성현은 언제나 수업이 시작되기 15분 전에는 도착했기에 그보다 더 일찍 강의실에 가야 자연스럽게 왼쪽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강의실에서 보청기를 착용하면 체감상 집이나 도서관의 몇 배로 소음이 심해지긴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으면 인문관으로 걸어 올라오는 학생들이 한 눈에 보였다. 지유환은 턱을 괴고 그들을 얼굴을 무료하게 훑어보았다. 무리지어 다니는 학생들과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 틈으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오늘은 연한 스트라이프 셔츠에 일자로 떨어지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용 플라스틱 컵을 들고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유환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백성현은 교내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지유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 두 번 마실 일은 없었지만 백성현이 좋아하는 맛이 어떤 것인지는 대강 알 것도 같았다. 다음에 그를 집으로 초대하면 직접 커피를 내려줄 생각이었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경사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일도 이제는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언제 창가를 보고 있었냐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답지 않게 괜히 문 쪽을 흘깃거리고 있는 와중 낯선 이들이 불쑥 눈앞을 가로막았다. 온 신경이 문 쪽에 쏠려 있었던 탓에 뒤늦게 지유환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나란히 선 여학생 두 명이 쭈뼛거리며 무언가를 말해오고 있었다. 지유환은 어렵지 않게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자신의 시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우물우물 지나간 말이긴 했지만 대충 자신들은 신입생이며, 시집을 잘 읽었다고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지유환은 잠자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와 옆자리에 가방이 놓인 것은 그때였다.

“안녕.”

백성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지유환은 그 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그는 더 화사해보였다. 본인은 어두운 계열의 옷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았지만 역시 밝은 옷도 무척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응. …아, 얘기 중이었구나.”

백성현은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그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라는 듯 자리에 앉자 여학생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인, 이라는 단어를 들은 지유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내밀어온 볼펜을 받아들었다.

가끔씩 이렇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므로 지유환은 웬만하면 긍정적인 답을 내놓는 편이었다. 책의 속지 중 가장 첫 페이지에 흘린 듯한 글씨체로 이름을 쓴 그는 표지를 반듯하게 닫아 책을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시집을 돌려받고도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처럼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백성현은 옆자리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물쭈물하던 여학생들은 이내 사인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하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백성현은 벌써부터 새하얀 워드창을 켜고 뭔가를 드문드문 쓰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어 넌지시 화면을 바라보니 곧바로 가장 상단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사인도 있었구나

- 신기하다

“그냥 이름만 쓰는 거예요.”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도 백성현은 왜인지 지유환을 보는 법 없이 키보드만 타닥타닥 눌러대고 있었다.

- 너는 너무………

온점만 눌러대는 그를 보며 지유환은 고개를 기울였다.

- 아무것도 아니야

- 사인해달라는 사람 많지?

- 저번에 만났던 윤세진 기억나?

워낙 타자가 빨라서 순식간에 문장이 줄줄이 화면에 나타났다. 지난번의 술자리를 떠올린 지유환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이름에 여상하게 답했다.

“네. 기억나요.”

그에 손을 잠깐 멈칫한 백성현이 계속해서 타자를 쳤다.

- 기억한다니 잘됐네

- 걔도 너 사인 받고 싶대

어느새 검은 글자가 들어찬 페이지를 물끄러미 보던 지유환은 아무 말 없이 상체를 백성현에게로 기울였다. 그대로 노트북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백성현에게 눈을 맞추자 옅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백성현은 다시 애꿎은 화면으로 눈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노트북만 보고 계셔서요.”

“…….”

“보고 싶었는데.”

지유환이 말을 마치자마자 백성현이 놀란 것처럼 퍼뜩 고개를 돌려왔다. 지유환은 그제야 자신을 똑바로 봐오는 백성현을 응시하면서도 아무 말도 안 한 것처럼 일상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영화보기로 한 거,”

“…….”

“이번 주 주말로 할까요.”

“그 전에.”

노트북에서 손을 뗀 백성현은 의도를 가늠하듯 일순 멈춰 섰다가 툭 뱉었다. 무감한 척 하는 말투였지만 좀처럼 숨겨지지 않는 당혹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잖아.”

“방금 전이면….”

지유환은 애써 변명하지 않고 말꼬리를 늘일 뿐이었다. 그는 지금처럼 백성현의 주의가 오롯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수업 시작 전 특유의 어수선한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어오는 것을 느끼며 지유환은 느리게 읊조렸다.

“저만 보고 싶었나, 해서요.”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지유환은 평소보다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노트북 화면을 바로 했다.

마침 교수가 들어와 강단 앞에 섰다. 백성현은 당황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시야에 들어온 백성현의 귓등이 붉어져 있었다.

지유환은 수업 내내 열려 있는 오른쪽 귀로 백성현의 소리를 들었다. 보청기를 낀다고 해서 새 안경을 맞춘 것처럼 세상이 단번에 선명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꾸준한 훈련을 해야만 소리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지유환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 중에서도 백성현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가 교수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소리, 강의실이 조용해진 순간에 그가 타이핑을 하는 소리, 가끔씩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까지. 백성현에게는 말 할 일은 없겠지만 수업 자체보다 그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던 적도 많았다.

- 요즘 학생들의 습작을 보면 쓰기 쉬운 메타포가 남발되어 있다는 인상을 가끔씩 받아요. 이를테면,

워드 창 위로 글자들이 오타 한 번 없이 매끄럽게 조합되었다.

-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죠. 그럴 듯해 보이고, 글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도 해서 자주 사용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글이 연인에 대해 다루고 있고, 두 사람이 어렵게 결실을 맺었다 싶으면 종종 등장하는 비유가 있어요.

- 맞습니다. 프시케와 에로스. 다들 어디서 한 번쯤은 본 것 같지 않나요?

- 유명한 장면도 있죠. 두 사람이 불 한 점 없는 침실에서 숨결과 손길로만 서로를 느끼는 장면. 이때 불을 켜서 얼굴을 확인하는 건 금기사항입니다.

백성현의 옆얼굴은 그린 것처럼 반듯했다. 문예 강의가 있을 때마다 저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눈을 감아도 유려한 옆선이 그려졌다.

- 이런 은유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기존의 해석대로 가져다 쓰기만 하면 이제는 식상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선하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은유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일상에 감각을 곤두세워보는 겁니다.

백성현은 무엇인가 집중할 때마다 입술을 질끈 무는 습관이 있었다. 지유환은 어느새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를 따라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왜 저런 습관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때마침 백성현이 옆을 흘긋거리다가 자신을 따라 하는 지유환을 보고 아, 하고 입술을 놓았다.

“…습관이라서.”

지유환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동시에 치아에 짓눌렸던 그의 말캉한 입술이 미끄러지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메타포를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따라 하지 마.

- 다들 다음 강의까지 하나씩 생각을 해보세요. 과제는 아닙니다만 언젠가 분명 글 쓰는데 재산이 될 거예요.

좋은 비유와 좋지 않은 비유를 비교하는 ppt를 스크린 가득 띄운 교수는 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한 시간 반을 꽉 채운 강의였다. 정해진 시간을 1분이라도 넘기는 법이 없는 교수는 오늘도 칼같이 강의를 끝내고는 어서들 가보라는 듯 의자 위에 벗어둔 외투를 챙겨 들었다.

이쯤이면 백성현은 바로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정리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노트북도 닫지 않은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오늘 수업 이게 끝이지?”

“네. 이제 끝이에요. 6시에 하나 더 있으시죠.”

“방금 그거 휴강이라고 문자 왔어. 다음에 보강한대.”

즉 오늘은 더 이상 스케줄이 없다는 말이었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가만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가 뭉근하게 끓어올랐고, 늘 어딘가를 간지럽게 했다.

“괜찮으면.”

지유환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백성현은 무척 하기 힘든 말을 하는 것처럼 겨우 입을 열었다. 이내 말을 툭 던진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같이 있을래?”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의 초침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지유환은 한동안 대답 없이 앉아 있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 *

5평 남짓의 원룸은 매트리스와 책장, 작은 부엌이 다였다. 생활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딱히 요리를 하지도 않는 듯 조리 기구나 그릇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성현은 문을 열 때부터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집 안을 보여주기 싫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유환은 그저 휑한 주방을 보고 백성현이 평소 뭘 먹고 지내는지에 대한 걱정을 했을 따름이었다.

“밥 잘 안 챙겨 드시죠.”

“어? 응.”

“몸에 안 좋은데.”

어쩌다 열어본 냉장고 안은 생수병과 에너지 드링크가 주를 이루었다.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는 비타민 음료가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손에 쥐고 보니 유통기한도 이미 지나 있었다.

“이거, 유통기한 지났어요.”

비타민 음료를 손에 들어 보이자 백성현이 눈을 홉뜨고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알아.”

유통기한이 지난 음료를 계속 넣어둘 이유가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지유환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이거 저번에….”

“…….”

침묵이 대답이 될 때가 있었다. 비타민 음료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지유환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 사드릴게요. 이건 버려요.”

“아니야. 안 버릴래.”

하나뿐인 의자를 놔두고 매트리스에 앉은 백성현은 아무튼 안 된다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유환은 천천히 고집을 부리는 백성현의 옆으로 갔다.

매트리스의 머리맡에는 익숙한 뭔가가 놓여있었다. 마치 늘 손닿는 곳에 둔 듯한, 자신의 시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표지의 접히는 부분이 해져있었다. 시집을 샀다는 얘기도 한 적 없으면서 여기서 저 책을 읽곤 했던 건가.

백성현이 혼자 누워 자신이 써낸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이 눈앞을 지나갔다. 어쩌면 이 방의 유일한 시집으로 보이는 자신의 책과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료. 그리고 지금도 자신만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선까지.

왜 모르고 있었을까. 하나같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들뿐이었다.

* * *

- 나는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

한가로운 바람, 흰 포말이 이는 푸른 파도, 어쩌면 한 마리의 새. 그녀는 그런 것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 언젠가는 가장 자유로운 곳으로 갈 거야.

그녀가 자유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스스로의 존재가 거대한 구속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를 가려는 거냐고,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늘 먼 곳을 더듬는 눈동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이며 글 같은 것들을 가르쳐준 것도 그녀였다. 그녀에 대한 시를 써서 보여주면 그 눈이 마침내 자신을 향하기도 했다. 지유환은 그런 순간순간들을 좋아했다. 순수한 기쁨으로 차올라 방긋 웃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마음 깊이 아꼈다.

- 너는 어쩜 이렇게 예쁠까. 어떻게 내가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와락 끌어안아 오곤 했다.

비운의 천재 예술가ㅡ 그녀는 그런 이름으로 남았다. 그녀의 어릴 적 삶은 가난 포르노가 되었고 비극적인 끝맺음은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누구도 그 안 깊숙한 곳을 보려 하진 않았다. 늘 그랬듯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껍데기였다.

껍데기.

정말 껍데기로만 남은 그녀를 보게 된 순간은 여전히 생생했다. 엎질러져서 무슨 색인지 알 수 없게 된 물감들과 찢어진 캔버스로 어지러워진 화실에서 그녀가 백합처럼 누워있었다. 숨을 잃은 채, 이제껏 보아왔던 것 중 가장 평온한 얼굴로.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언제고 떠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이어서는 안 됐는데. 눈부신 햇살 아래 그녀 취향의 레이스 커튼이 나부꼈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끝까지 그렇게나 한결같은 취향이었다. 그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정말로 가버리는 게 어딨냐고. 나를 두고 예쁘다고 했으면서. 사랑스럽다고 안아줬으면서, 이건 자유도 뭣도 아닌 도망이지 않느냐고 미친것처럼 쏘아붙였다. 영원히 감아 내린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그때의 나이가 열 넷이었다. 그는 세기의 천재가 목숨을 끊은 현장의 최초 목격자가 되어 여러 진술을 했다. 어른들의 질문은 끝까지 잔인했다.

- 최초 발견 당시 상황이 어떠했나요?

-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나요?

껍데기만 남아있었어요.

제가 알던 사람은 없었어요.

그 말만 반복했다. 그때에 누워있던 존재는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지도, 그 깊은 눈이 차오르지도, 와락 안아주지도 않았으니까.

언론을 막은 것은 핏줄이 이어진 아버지라는 존재였다. 한낱 예술가인 그녀가 기업 차원의 지원을 받았던 것도 그 아버지라는 사람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같은 성씨를 가진 그 남자를 처음으로 본 것은 장례식장에서였다. 무릎을 꿇고 사죄하던 모습, 지금부터라도 같이 살지 않겠냐고 말하면서도 진짜 같이 살자는 대답을 할 까봐 불안해하던 그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취향에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럴듯한 외견에, 연약하고 초라했으니까.

당신은 버림을 받았구나.

저 초라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어.

지중해에 그렇게나 가고 싶어 했으면서 하루도 화실을 벗어나지 못한 건, 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내가 아닌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해주길 바랐기에 그곳에서…….

그 남자로부터 매달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돈이 들어왔다. 핏줄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던 그녀의 유산도 모조리 자신의 이름으로 남았다. 돈은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건 평생을 짊어질 목숨 값이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기 파괴적이고 우울하며 절망적인 시를 써내는 작가.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꿋꿋이 시를 썼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시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썼다. 잠겨 죽지 않으려면 활자를 토해내야 했으니까.

보란 듯이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잘 살아가고 싶었다. 식물도 키우기 시작했고, 규칙적인 삶을 살고, 원고를 의뢰 받았다. 잘 해보고 싶었다. 정말로, 그럴듯하게.

어디든 작은 기쁨이 있을 거라고, 괜히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여전히 밤만 되면 턱 끝까지 수면이 넘실거렸다.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행복이라는 단어는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데. 다들 제멋대로 가져와서 쓰는 건 아니었을까.

그 날도 심해에 가라앉는 꿈을 꿨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확인한 핸드폰에는 오늘 비가 올 거라는 날씨 예보가 화면 가득 떠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는 가끔 주위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매번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처음 도서관에서 백성현의 목소리를 들었던 때부터 떠오른 궁금증은 하나였다. 저 사람이 웃으면 어떤 느낌일까. 왜인지는 몰라도 그런 게 궁금했다.

그때만 해도 백성현의 웃는 얼굴보다 우는 얼굴을 먼저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차를 몰고 정문 밖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묵묵히 걸어가는 인영이 눈에 띄었다. 비가 꽤나 오고 있었으므로 우산 없이 가기에는 힘들 정도인데도 맨몸으로 가만히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나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게 백성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걸 알아채자마자 지유환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차를 멈춰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타세요.”

머리카락이 빗물에 온통 젖어있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투박하게 닦아낸 백성현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까짓 얄팍한 호의는 필요 없다는 것처럼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지유환은 침묵을 지키다 조수석에 있는 우산을 들고 벌컥 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차가워서요.”

“…….”

“우산 쓰고 가세요.”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눈이 천천히 자신을 향했다. 마침내 그의 눈이 자신을 향했을 때 지유환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흰 뺨은 퉁퉁 부어있었고 고요하던 눈에는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었다. 서러움으로 얼룩진 눈가가 붉었다.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울고 있었다.

“양 볼이, 부어있어요. 열도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백성현이 뭔가를 말해왔다. 거즈를 물고 있어서 의미가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이때까지 봐온 성격 상 백성현은 절대 서글서글하다고 할 순 없는 성격이었고, 스스럼없이 다가갈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마 거절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유환은 뒤로 물러서며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냥 차, 타세요.”

그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운전을 해서 오는 동안 백성현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침범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었다. 지유환은 그 선이라는 것을 좀처럼 넘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의 경계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여본 적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혹시 백성현이 불쾌할 만한 짓을 해버린 것은 아닌지를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빗길을 달리던 차가 백성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지유환은 창가에 바짝 붙어있는 백성현의 표정을 살폈다.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보던 백성현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뭔가를 말해왔다. 무슨 말일까 싶어서 지유환은 잔뜩 주의를 기울였다.

- …서 고맙습니다.

확실히 알아들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눈물을 매달고 있는 얼굴로 그런 인사를 했다.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웃음이 터져 나온 건 그 간극이 왜인지 애틋해서였다.

백성현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건물의 투명한 문이 활짝 열렸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지유환은 핸들을 두 손으로 쥐고 하나씩 불이 들어오는 원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조명이 하나씩 켜지다가 3층의 불이 켜지고 나서는 잠잠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은 부어오른 두 뺨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많이 아파서 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지유환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내비게이션으로 가까운 약국을 검색했다. 아파서 울고 있었던 거라면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그 뿐이었다.

“소독용 가글이랑 아이스팩 종류별로 주시겠어요. 아이스팩은 좀 많아야 할 것 같은데.”

한 손 가득 가글과 아이스팩을 사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지유환은 원룸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으로 시작하는 우편함들을 훑어보니 백성현의 이름이 적힌 청구서가 날아온 호수가 있었다. 지유환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해당 호수의 벨을 눌렀다. 그 후로 두어 번 노크를 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자다 깬 듯한 백성현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지유환은 아무 것도 못 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나요.”

“…….”

“잠깐이면 되는데.”

원룸은 좁긴 했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 잡다한 물건들이 각기 제자리에 놓여 있어서 깨끗한 것이 아니라 물건이 거의 없기에 깨끗하다는 느낌이었다. 책장에는 전공서적만 수두룩했다. 지유환은 어느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백성현에게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땐, 사랑니라는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었어요. 어감도 예쁘고.”

“…….”

“크면서 알게 됐는데, 사랑니라는 이름의 뜻은 그냥 살안니였어요. 살 안에 있는 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그냥 아픈 이.”

백성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지유환은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뽑을 때 많이 아팠겠어요.”

“…….”

“여기, 두고 갈게요. 내일 뵙죠.”

“…….”

“아프지 마세요.”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자꾸만 그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했다.

사랑니를 뽑았으니 많이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랑니를 뽑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빗길을 헤매며 울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숨 막히게 외로운 눈이었다. 아무나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유환도 그런 눈은 언젠가 모든 것을 잃었던 날 거울 속에서나 보았었다.

“…….”

그걸 알아챈 순간부터 심장이 초조하게 뛰어왔다.

어쩌면, 그도.

이 바다를 탈출하고 싶은 사람인지도 몰라.

전에 없던 높은 파도들이 일기 시작했다.

* * *

“시를 왜 쓰기 시작했어?”

“어렸을 때부터 글이랑 그림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어요.”

매트리스는 두 사람이 눕기엔 비좁았지만 그것으로 괜찮았다. 백성현은 벽을 등지고 지유환을 향해 모로 누웠다. 지유환도 옆으로 눕기는 마찬가지였다. 각자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두 사람은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뭔가를 쓰거나 그리는 게 놀이였어요.”

“신기하다….”

“그중에 시가 제일 재밌었거든요. 편지 대신 시를 써서 주기도 했어요.”

“나는 시 쓰는 게 제일 힘들던데.”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거니까요.”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의 주홍색 빛이 안온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손을 뻗은 지유환은 백성현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손가락 모양대로 반듯한 이마에 그늘이 졌다. 백성현은 그 손길을 느끼며 조그맣게 말했다.

“강아지나 고양이 키워본 적 있어?”

“아니요.”

“그럼 강아지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비슷한데. 형은요.”

“나는 다 좋아해.”

“저도….”

“응?”

“좋아해요.”

지유환이 짙게 웃자 보조개가 드러났다. 백성현은 멍하니 폭 패인 보조개를 보았다. 뒤늦게야 지유환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가 화제를 돌렸다. 지유환은 순순히 바뀐 화제에 따라가 주었다.

“오늘 있잖아. 문예 강의가 너무 어려웠어.”

“메타포 얘기 했었죠.”

“응. 나는 잘 쓴 비유랑 못 쓴 비유 둘 다 괜찮아 보이던데.”

“읽는 관점은 다 제각각이잖아요. 식상함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개인적인 시각에 불과할 수도 있고.”

지유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울렸다. 백성현은 낭독을 듣는 것처럼 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 이렇게 집에 와서도 복습을 해요.”

“아니야. 그냥,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잘 못 넘어가서.”

“문예 강의는 처음 들으시는 거잖아요. 대단하네.”

칭찬 같은 말에 백성현은 시선을 내려 눈을 깜빡거렸다. 지유환은 그 쑥스러운 듯한 모습도 하나하나 눈 안에 새겨 넣었다.

“에로스랑 프시케 얘기는 왜 나온 거였어?”

“어렵게 결실을 맺은 연인을 두고 에로스랑 프시케에 비유를 하는 게 식상하다는 말이었어요.”

“정말? 너도 식상하다고 생각해?”

“글쎄요…….”

자신을 보는 얼굴에 궁금증이 차올라 있었다. 지유환은 잠시간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팔을 뻗어 스탠드의 불을 껐다. 불을 끄자 사위가 어두워졌다. 저녁이었고, 커튼 사이로만 흐린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지유환은 의아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성현을 보다가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았다.

“식상한 지 아닌지, 직접 해볼까요.”

백성현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기만 했다. 지유환은 소리 없이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백성현의 눈을 가렸다. 이내 그는 단번에 백성현의 몸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일순 굳은 듯했던 백성현도 입술을 맞댈 뿐인 가벼운 입맞춤에 천천히 힘을 풀었다.

숨소리와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만 울렸다. 적어도 지금은 숨결과 손길만이 허용됐다.

지유환은 백성현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들린 백성현의 몸이 지유환의 위로 올라갔다. 지유환은 자신의 위에서 움찔거리는 백성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맞물린 입술 사이를 혀로 핥아 올렸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자마자 지유환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소리는 조금 더 질척해졌다. 그렇게 입맞춤이 더 깊어지려는 찰나 지유환은 행동을 멈추고 나지막이 물어왔다.

“이제 알 것 같아요?”

“…아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숨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지유환은 불시에 백성현의 눈을 가렸던 손을 떼어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주치던 시선에는 전류가 흘렀다. 지유환은 숨을 고르는 것도 잊고 멈춰 섰다. 자신을 보는 백성현의 눈빛이 너무나도 맑았다. 그렇게도 말간 눈동자가 쉴 틈 없이 자신을 쫓았다.

불과 얼마 전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만큼이나 무언가가 뿌듯하게 차올랐다.

“……형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나 타인의 마음을 선명히 느낀 적이 있었나. 누군가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던 것이 언제였던가.

“어떻게 그렇게….”

어떻게 그런 눈으로 나를 봐줄 수 있어요. 지유환은 그 옅은 눈을 한참이나 보았다. 그때의 시간은 평소의 것과 결이 다른 것만 같았다. 마음껏 바라봐도 혼이 나지 않는 사람이 생기다니. 이대로 갑자기 자전축이 반대로 기울어버린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충족감을, 지유환은 느꼈다.

지유환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은… 알겠어요.”

거칠어진 숨을 내뱉은 백성현이 중얼거렸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럼,”

“…….”

“복습 마저 해요.”

백성현은 열기가 인 눈으로 지유환을 내려다보다가 순식간에 그의 입안을 열고 파고들었다. 지유환은 놀란 기색 없이 백성현이 파고들어 오는 대로 입을 벌려 혀를 얽었다. 에로스, 프시케, 메타포 따위의 단어는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비밀스러운 입맞춤만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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