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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밤은 속삭인다 (6/22)

6. 밤은 속삭인다

* * *

어떤 사람들은 이름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으로 남는다. 2년 전쯤 캠퍼스를 함께 걸었던 기억, 강의가 일찍 끝나는 날엔 함께 저녁을 먹곤 했던 기억. 헤어지는 순간에는 얼굴값을 해서 싫다는 말을 하면서 떠나가던 뒷모습.

백성현은 학교 근처 카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 저녁쯤에 만나자는 약속을 먼저 잡은 건 그녀였다. 내키지 않으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인 문자가 따로 오긴 했지만 백성현은 고민 끝에 여기까지 왔다.

교제 기간은 1년이 조금 안됐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연애였다. 처음 만난 것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다. 그녀는 이미 6개월이나 먼저 일을 하고 있었기에 백성현에게 어떻게 음료를 만드는지, 어떻게 포스기를 사용하는지 따위를 모두 가르쳐줬었다.

다정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백성현은 번호를 달라고 했을 때 크게 고민을 하지 않고 번호를 찍어줬다. 그녀가 보내오는 모든 호감의 신호가 선명히 보였다. 가까이 있으면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거나, 괜히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온다던가 하는. 그런 건 티가 날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먼저 사귀자고 말을 꺼내온 것도 그녀였다. 그때에 가지고 있던 감정이 선명한 호감은 아니었지만 사귀어도 좋을 것 같았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말도 잘 통했으니까.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성현아.”

오랜만에 듣는데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백성현은 새삼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며 눈앞에 선 이가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플로럴 패턴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그녀는 2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상대의 감상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너는 2년 전이랑 똑같네.”

“…….”

“잘 지냈어?”

“응. 너는.”

백성현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강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미련이나 다시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여기로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백성현의 물음에 이가현은 나야 잘 지냈지, 하고 여상히 답해왔다.

“내 주변 애들은 군대 갔다 오면 폭삭 삭아오던데 넌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맞은편에 앉은 이가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 속의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움이 묻은 웃음이었다. 백성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글쎄. 고생을 덜 했나.”

“뭐야 그게.”

두 사람이 교제를 하던 때에도 백성현은 말수가 적었으므로 주로 뭔가를 종알대는 건 이가현의 몫이었다. 거기에 백성현이 대답을 하거나 가끔 맞장구를 치면 그녀의 얼굴에 기뻐하는 듯한 기색이 떠오르곤 했었다.

“계속 만나자고 문자 보낸 거 귀찮았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개강 총회 때 못 봤으니까.”

“그래서, 너 지금 여자 친구 있어?”

그녀는 질문을 하자마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진 말고. 난 남자친구 잘 사귀고 있으니까.”

“없어.”

이가현이 지금 남자친구와 잘 사귀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제야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완전한 타인임이 새삼 느껴졌다. 이가현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연애는 한 순간에 끝을 맺진 않는다. 그 전부터 전조증상이 수없이 발생한 뒤 결국 한 쪽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될 때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연애에서 견디지 못한 쪽은 이가현이었다.

그녀는 늘 조금 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했었다. 가끔은 혼자 연애를 하는 것 같다며 자신을 좋아하기는 하냐고 물었었다. 그럴 때마다 백성현은 의아했다. 이 이상 어떤 감정을 더 쏟아야 하는 것인지, 이미 연인인 사이인데 어떤 증명이 더 필요한 건지. 시간이 갈수록 온도 차는 점점 극심해져갔고 억지로 시간을 버티던 그녀는 떠났다. 마지막 순간은 폭언과 함께였다.

- 넌 얼굴값을 해서 싫어. 뭐가 그렇게 매사에 고고하고 무덤덤해? 우리가 사랑이긴 했어? 넌 그냥 연애를 하지 마. 아니, 너도 꼭 너 같은 사람 만나서 마음고생 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백성현은 물기가 맺힌 유리잔을 응시했다.

누군가를 원해서 잠 못 이루고, 상대가 가진 마음의 온도가 더 높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고, 끝없이 지레짐작하다가 결국 밤을 꼬박 새우는 뜨거운 감정. 백성현이 오늘 이곳에 나온 건 이제야 그 감정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 너도 꼭 너 같은 사람 만나서 마음고생 해.

결국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지유환과는 연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최소한의 관계의 정의도 없이 혼자서만 바라봐야 했다. 그녀가 그랬듯 마음껏 호감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연애에 강자와 약자가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이가현에게 본의 아니게 강자가 되어 오만하게 굴었다는 것도 함께 깨우쳤다. 깨달음은 늘 조금씩 늦는 법일까. 똑같이 아프고 나서야 미안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미리 주문을 해뒀던 모양인지 진동벨이 울렸고, 잠시 진열대 쪽을 눈짓해보인 이가현은 제 몫의 음료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카페 라테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일상 이야기를 하듯이 넌지시 말했다.

“원래 백성현이 이런 데 나올 성격이 아닌데. 너 나한테 미안해져서 나왔지.”

“…….”

“아, 드디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네.”

백성현은 입매를 굳혔다. 어떻게 알았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가현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널 꼬박 1년을 봤어.”

“…….”

“1년을 짝사랑했고.”

그것은 연애가 아니었다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거기에 미련은 없어 보였다. 이가현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짝사랑했던 사람의 특권이지.”

그 말로 인해 짧은 정적이 찾아왔지만 다행히 취업이니, 중간고사니, 학점이니 요즘 근황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이야기가 끊이지는 않았다.

“난 졸업반이야. 휴학했었거든. 대학 졸업하면 뭐하나 싶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준비했었지.”

이가현은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독서실에 다녔었다. 그 장면이 문득 떠올라 물어보니 그녀는 아주 잠깐 멈칫하고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한 번에 붙었어.”

“잘됐네. 열심히 준비했었잖아.”

“딴 지가 언젠데 뒷북치는 것 좀 봐. 너는 졸업하면 뭐 할 건데?”

“글쎄. 아직 3학년이니까… 많이 고민해봐야지.”

“너도 이것저것 바쁘겠다. 근데 이 카페 알바생 알바한 지 얼마 안 됐나 봐. 거품이 너무 많아.”

“…처음 아르바이트 할 땐 스팀 내는 거 어려우니까.”

“거품 좀 빼고 살살 잘만하면 되는데. 너도 금방 배웠잖아.”

마치 사귈 당시 같이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대화였다. 그녀도 같은 것을 떠올린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소음이 이어지다가 이가현이 말했다.

“솔직히, 나 너한테 했던 말 사과하러 나온 거 아니야.”

마지막에 했었던 말은 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백성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무려 1년이었다. 오히려 사과를 하러 왔다는 게 더 이상했다.

“내가 좋아했었을 만한 사람이 맞았는지. 그게 궁금해서 보자고 했어. 유치하긴 한데 그래야 완전히 정리가 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봐도……, 하고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이 짧은 재회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론 연락 안 할 거야. 마음껏 사랑받는 연애가 얼마나 좋은지… 드디어 알게 됐거든.”

그녀가 못을 박듯 말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녀와는 이걸로 끝이었다. 이가현은 두 사람의 인연을 이제는 놓아 주겠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미련하게 쥐고 있었을 인연의 끈이었다. 어쩌면 내내 마음속에 남아 거슬렸을지도 몰랐다.

백성현은 그제야 제대로 이가현을 바라보았다. 결연한 눈은 과거를 모두 털어낸 채였다. 지금 순간에 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백성현은 아주 작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말이 오만해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좋아해줘서, 고마워.”

이렇게나 힘들었을 텐데. 이가현은 백성현의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선선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

“적어도 내 1년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녀는 가만히 유리컵을 쥐고 있기만 한 백성현을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너… 그 사람 엄청 좋아하는구나.”

“…….”

“마음고생 하는 거 쉽지 않지.”

“……응.”

이가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이내 그녀는 이미 자신이 지나온 길을 따르는 이를 보는 것처럼 깊어진 눈으로 백성현을 응시했다.

“그렇게 조금만 더 마음고생 하다가… 그러다가 그냥 너는…….”

“…….”

“잘됐으면 좋겠다.”

감정의 안녕을 빌어주는 다정한 말이었다. 이런 사람이라 1년을 교제했었는지도 몰랐다. 백성현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헤어지는 순간에 관계의 종지부를 찍듯 말했을 뿐이었다.

“잘 지내. 가현아.”

거기에 서슴없이 웃으면서 멀어지는 사람, 그걸로 끝인 뒷모습. 어떤 인연은 그런 식으로 스쳐 간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단단해져있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느껴졌다. 누굴 좋아하는 경험은 그 경험만으로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 * *

“일찍 와있었네.”

수업이 시작되기 20분 전인데도 미리 와있는 그를 발견한 백성현이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비교적 의연하게 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이 있으면 왜인지 자꾸만 날이 서던 분위기도 조금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안녕하세요.”

“응.”

“기다리고 있었어요.”

백성현은 이제 그의 다정한 인사에 무뎌지기로 했다. 사실 일정 이상 마음이 번지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개인 과제는 다 했어?”

“네.”

교수가 예고했던 합평은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 제출은 오늘 해야 했지만 발표는 가나다순으로 이뤄졌다. 백성현이 골머리를 앓으며 겨우 써 온 시는 한참 뒤나 돼야 합평을 받을 예정이었다. 합평이라는 건 처음 해봤기에 백성현은 낯선 마음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명씩 앞으로 나가서 자기가 써온 시를 나눠주고, 낭독한 뒤 다른 학생들의 평가를 받는 순이었다. 교수도 한 마디씩 첨언하여 합평을 도왔다.

누군가 강단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같이 조별과제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꽤나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백성현은 그녀가 써온 시를 한 번 훑어보았다. 시를 읊는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겨울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눈꽃 씨앗을 모았다

무른 땅에 심어서 착한 눈사람으로 키우려고.

나는 그 애를 대신할 것이 필요했다.”

차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너는 자주 다쳤고 조금 울었다

네가 울 때면 눈물을 닦아주며 무화과를 입에 넣어주었다

심장을 맞대고 새벽을 함께 보낸 날엔

한겨울의 꿈을 꾸었다.”

낭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녀가 써온 시에 집중을 기울이고 있었다. 낭독이 끝나고 5분 정도의 고요한 시간이 지나자 교수가 말했다.

“생각은 다들 정리했죠? 합평 한 명씩 해볼게요.”

그녀의 말에 몇 명이나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부여하는 건 시를 읽은 학생이었다.

“네. 말씀 부탁드립니다.”

손을 든 이들 중 한 명을 가리키자 지목받은 학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잘 읽었습니다. 시에서 감수성이 느껴졌어요. 눈꽃 씨앗을 심어서 착한 눈사람으로 키운다는 진술도 신선했고요.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다 너무 평범해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흠, 하고 다시 시가 쓰인 종이로 시선을 주었다.

“다친 ‘너’를 위로해 주는 ‘나’. 서사라고 할 수 있는 게 이게 다예요. 그래서 뭔가 혼자만의 매몰된 감상을 읽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풍부한 서사가 있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뒤로 몇 명 정도 더 비슷한 의견을 내었고 교수는 합평을 정리해주었다.

“생각해볼 만한 지적들이에요. 지금 시 자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 자체는 특별하고 좋지만 그게 너무 계속되다 보면 감정 과잉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신입생이고 제대로 시 쓴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한 것 같은데, 좋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네요. 계속 써보세요. 그럼 분명 나아집니다. 다음 학생 시도 한 번 볼까요?”

합평은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망했네.’

백성현은 자신의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강단에 서서 이런 저런 지적을 받을 자신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했다.

학생들은 서로 고쳐야 할 점을 서슴없이 꼬집어주고 어떤 표현을 두고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새삼 이곳에 모인 게 대부분 국문학과라는 게 실감이 됐다. 교수는 합평이 끝나고나서야 다시 강의실 앞으로 나와 총평을 내리듯 말했다.

“첫 합평인데 생각보다 다들 잘 써왔네요. 이런 식으로 종강 때까지 강의 한 회차당 몇 명씩 합평 해볼게요. 흠, 그리고 이제 슬슬 중간고사 공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벌써 중간고사를 준비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백성현은 벌써부터 쏟아질 시험 범위에 눈앞이 아득했다. 졸업을 염두에 두고 무리해서 19학점을 꽉꽉 채워두었으니 4월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문예 강의의 중간고사는 필기시험으로, 이때까지 배웠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출제될 예정이라고 했다. 수업만 잘 들었으면 누구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문제를 냈다는 말에 그나마 안도가 되었다. 노트테이킹을 하면서 어느 하나 흘려들은 것이 없었으니 필기만 잘 살펴보면 중간고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백성현은 수업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돌아가고 있던 녹음기를 껐다. 자연스레 시선을 향한 곳에는 지유환이 있었다. 합평을 하는 동안에 말 한마디 없이 잠자코 앉아있던 그는 백성현이 쓴 시가 담긴 종이에 시선을 줬다. 이내 지유환의 표정이 짐짓 장난스러워졌다.

“읽어봐도 돼요.”

이제는 그것이 물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성현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현직 시인에게 이렇게 엉망인 글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물며 지유환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시였다.

“어차피 합평할 때 다 볼 텐데.”

“그래도 안 돼….”

“제 거랑 바꿔 봐요.”

은근한 목소리는 이래도 안 되냐는 듯 백성현을 부추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 제안은 정말로 구미가 당겼다. 지유환의 새까만 눈동자가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듯 반짝였다. 백성현은 고민 끝에 자기가 쓴 시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곤 참혹한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무 못 썼어.”

“처음 썼는데 어떻게 잘 써요. 괜찮으니까 보여주세요.”

“너무 못 써서 나한테서 정 떨어질 지도 몰라.”

“그럴 일 없으니까 이리 주세요.”

“야, 너…… 왜 이렇게 집요해.”

지유환이 가만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날 수업은 거기까지였다. 백성현은 끝까지 그가 쓴 시를 보여주지 않았다. 나중에 필기랑 같이 보내줄 거냐고 나직하게 물어오는 지유환에게 집에 가서는 필기만 보낼 거라고 꼭 집어 말해주기도 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면서 그를 대하면 될 것 같았다.

* * *

와작, 하고 빈 캔이 일그러졌다. 백성현은 시험기간엔 물 대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카페인 음료를 달고 살았다. 나뒹구는 깡통들을 한쪽으로 밀어낸 그는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였다. 3점짜리 전공만 네 개에 부족한 교양 학점을 채우기 위해 접점도 없는 강의들을 이것저것 때려넣은 시간표였기 때문에 시험범위는 광활했다.

일단 전공부터 한 번에 정리하기로 한지도 무려 나흘이 지나있었다. 애초부터 시험 범위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문제는 강의 자체도 모호했기 때문에 중요해 보이는 내용을 스스로 터득해야 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백성현은 전공 교재의 목차를 옮겨 쓰고 줄기를 짠 뒤 곁가지를 쳐내는 식으로 필기를 완성해갔다. 그럼에도 아직 한참이나 남은 양을 보다 못한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공공외교 족보 있냐? 이현택 교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 ㅋㅋㅋㅋㅋㅋ그거 왜 들어ㅋㅋㅋㅋㅋ

성준혁이 휴학생인 지금은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2년 전만 해도 그가 여기저기서 족보를 구해오면 백성현이 필기를 정리해서 그에게 공유를 해주는 식으로 같이 시험공부를 했었다. 백성현은 키읔으로 도배된 문자를 보며 다시금 다수가 선택하지 않는 강의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깨달았다.

- 그래도 일단 구해보겠음 ㄱㄷ

노란색 메시지 창을 확인한 그는 다시 교재로 눈을 돌렸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을 자면서 미리미리 공부를 해놓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처음 노트테이킹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부터 지유환은 시험공부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사항을 명시했었다. 때문에 문예 강의의 시험공부로만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 정도를 통째로 날릴 생각으로 전공과목을 먼저 정리해두는 것이었다.

“눈 빠지겠네…….”

눈 안에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버석거렸다. 백성현은 눈썹 뼈 위를 꾹꾹 눌렀다. 주말에 휴강까지 겹쳐서 그를 못 본 지는 꼬박 닷새 째였다. 그동안 안부 문자 하나 없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서운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시험공부 잘 하고 있냐고는 물어볼 수 있잖아.”

뭉친 어깨를 두드리던 백성현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물어볼 수 있지.”

- 공부 잘 하고 있_

- 시험공부는 잘_

직접 만나서 공부를 하기로 한 날은 내일이었다. 백성현은 오래지 않아 자신이 닷새 동안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음을 상기해냈다.

- 시험공부 힘들지는 않아?_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반복한 백성현이 눈을 질끈 감고 화살표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는, 누르려고 했다. 얼결에 뭔가가 두 번 눌린 것인지 메시지가 가긴 했는데 자신이 보낸 메시지 위에서 토끼 이모티콘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

본의 아니게 이모티콘을 같이 보내버린 백성현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그 와중에도 이모티콘 속 토끼는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고 있는 중이었다. 백성현은 화면을 끄고 캔 더미 속으로 핸드폰을 밀어버렸다.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적인 내용으로 처음 보내 본 메시지가 울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토끼와 함께라니.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걸로 선배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끝장난 것 같았다. 떨구었던 고개를 든 백성현은 쉬고 있던 필기나 다시 하기로 했다. 공공외교의 가장 큰 자산은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해외 거주 동포,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보를 머릿속에 들이붓던 와중 선명한 알림음이 울렸다.

백성현은 퍼뜩 손을 뻗어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확인했다.

- 지유환님이 기프티콘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화면 가득히 카페라테와 치즈케이크 세트 기프티콘이 떠있었다. 백성현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뚝뚝한 듯하지만 깊고 낮은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귓가에 재생되었다.

- 저는 괜찮아요. 시험공부 힘내세요.

그 아래로 백성현이 보냈던 것과 같은 토끼 캐릭터가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왔다.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백성현은 가만히 메시지를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캡쳐했다. 자세히 보니 토끼 캐릭터가 생각보다 굉장히 귀여운 것도 같았다.

그 뒤로는 내일 몇 시부터 공부를 할지를 정하다가 열두 시쯤이 좋겠다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와의 대화가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대화를 캡처한 사진도 차곡차곡 늘어갔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 될 때 즈음이었다.

- 좋은 꿈 꾸세요.

문득 그는 어떤 꿈을 꾸는 지가 궁금해졌다. 백성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최근 들어 누구보다 자신의 꿈에 자주 나오는 인물을 향해 답장을 보냈다.

- 응. 너도.

- 좋은 꿈 꿔.

* * *

- 비밀번호는 234589* 예요.

- 벨 눌렀는데도 문 안 열리면 그냥 누르고 들어오셔도 돼요.

저번에 백성현이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것을 의식한 듯한 문자였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비밀번호를 알려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은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본의 아니게 비밀번호를 알게 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정작 문을 연 지유환은 조금 놀랐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딱 열두 시에 오셨네요.”

그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다만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새로워서 빤히 바라보니 지유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안경을 가리켰다.

“……안경이요?”

백성현은 그제야 자신이 그를 뚫어져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 미안해. 처음 봐서.”

“공부할 땐 웬만하면 끼고 해요.”

“그래? …잘 어울린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아무튼 들어오세요.”

워낙 얼굴이 하얗고 작은 편이라 그런지 안경도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훅 끼쳐왔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였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의 의자를 빼준 지유환이 말했다.

“에그타르트를 굽고 있었어요.”

“에그타르트?”

“네. 이제… 5분만 더 구우면 되네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백성현은 에그타르트를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에서 사이드 메뉴로 파는 것만 봤지 그런 걸 집에서 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혹시 못 하는 게 있어?”

진심으로 가득 찬 질문을 받은 지유환이 눈을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질문이 퍽 우습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백성현은 진지했다.

“왜 웃어.”

“많죠, 당연히.”

“대체 뭘 못하는데?”

“못하는 건 안 알려주고 싶어요.”

“왜? 약점이라서?”

“네.”

그가 노트북을 간단히 조작하자 테이블 옆의 프린터기에서 A4 용지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훑어본 지유환이 짐짓 비밀스럽게 제안했다.

“하나씩만 교환할까요? 못하는 거.”

백성현은 자신에게 있어 ‘못하는 것’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너무 많아서 뭘 하나 꼽아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럼… 너 먼저 말 해.”

그 말에 고민하는 듯하던 지유환이 순순히 자신의 약점을 말해왔다. 백성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은 공간지각능력이 남들보다 떨어져요.”

짐짓 어려워 보였지만 그 말이 시사하는 바는 간단했다.

“…너 길치야?”

명쾌한 해석에 지유환은 다시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네, 하고 대답했다.

“같은 맥락으로 지도도 잘 못 보고. 퍼즐도 잘 못 맞춰요.”

“저번에 1000피스 짜리 퍼즐 사지 않았어?”

“음…… 하나도 못 맞췄어요.”

저기, 하고 그가 가리킨 거실테이블 한 가운데에는 퍼즐을 맞춰보려고 시도는 한 듯 커다란 원목 판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퍼즐 조각들은 하나같이 상자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채였다.

“진짜구나…….”

“제 차례는 끝났어요.”

출력이 끝난 듯 미약한 기계음이 연달아 울렸지만 지유환은 프린터기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백성현은 그를 대신해서 막 인쇄가 끝난 A4 용지를 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제일 상단에는 커다랗게 <문예의 이론과 실기 I> 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백성현은 열감이 느껴지는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나는,”

백성현은 이번에도 진심을 담아서 조곤조곤 중얼거렸다.

“에그타르트도 못 만들고 스테이크도 못 구워.”

“…….”

“너처럼 맛있는 오므라이스도 못 만들고 시도 어떻게 쓰는 지 몰라.”

“…아.”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

초침이 한 칸씩 자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얽혔고 그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이윽고 지유환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졌다.

“칭찬 받으려고 한 게 아닌데.”

지유환은 민망한 것처럼 콧등을 찡그리고 웃었다. 그의 시선이 백성현 너머를 향했다.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허둥지둥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그타르트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도 함께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갓 구운 에그타르트는 겉이 노릇하게 잘 굽혀 있어서 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때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직접 먹어보지 않아도 맛있을 거란 것쯤은 짐작이 갔다. 백성현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달콤한 필링으로 채워진 에그타르트를 단숨에 두 개나 먹어치웠다. 세 개째로 손을 뻗던 백성현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요리 천재가 아닐까?”

딱히 꾸며내려 하지 않아도 훌륭한 맛이었기에 칭찬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유환은 칭찬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사람치고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까지 먹어본 디저트 중에 제일 맛있어.”

“……정말요.”

“시인하다가 나중에 베이커리 열어도 되겠다.”

그러면 또 아무 말 없이 에그타르트가 가득 담긴 접시를 슬쩍 밀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티가 나는 지유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백성현은 공부를 하면서 계속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삼켜냈다.

“그러니까, 언어는 음성과 의미의 결합체인데 소쉬르는 그 둘을 시니피앙, 시니피에로 정의했다는 거네.”

“네. 정확히는 시니피앙은 음성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시니피에가 그게 가지는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죠.”

예를 들면 ‘빵’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그 음성 자체는 시니피앙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밀가루를 주원료로 해서 소금, 설탕, 버터, 효모 따위를 섞어 반죽하여 발효한 뒤 불에 굽거나 찐 음식이라는 의미는 시니피에였다.

백성현은 정리 해 둔 필기를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문학작품에서는 행간에 공백을 넣는 여백 자체로 시니피앙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럴 때 여백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엇인가 의미를 가질만한 요소가 된다.

- 이때의 여백은 잠재 기호라고 부른다.

“잠재 기호……. 뭔가 어려운 말이다.”

“생소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의미를 가진 여백이 되려면 맥락이 중요하겠네.”

“네. 공백이 서사의 일부가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몇 시간을 꼬박 같이 필기를 정리하니 요약본은 금세 완성되었다. 하루나 이틀을 통째로 날릴 각오를 한 것치고는 허무할 만큼 빨리 끝내버렸다. 어느덧 시침은 4를 가리켰다. 활짝 열린 큰 창에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백성현은 베란다에 꽃 화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화분들 옆에 물 조리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아 식물도 직접 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꽃 화분이 많네.”

마지막으로 목차를 정리하던 지유환이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거 다 직접 기르는 거지?”

“네.”

“식물 기르는 거 힘들지 않아? 물도 제때 줘야 되고, 햇볕도 쬐여줘야 하고.”

“재밌어요. 물 주는 것도, 햇빛 아래에 두는 것도. 비가 심하게 오면 집 안에 들여놓고, 가끔 영양제도 줘요.”

식물에 대단한 정성을 쏟으며 키운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대로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은 싱그럽고 생명력이 넘쳐보였다. 선인장도 번번이 죽여 본 경험이 있는 백성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난 절대 못할 것 같아.”

“할 수 있어요. 좋아하게 되면.”

“…….”

햇빛이 늘어져 창밖 풍경이 얼비쳐보였다. 오랜만에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가고 있는 듯했다.

문예 강의 필기가 끝났으니 각자 공부를 하기로 했기에 백성현은 혹시나 싶어 챙겨온 전공 교재를 정독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유환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노트북으로 문서를 작성해나갔다. 하얀 얼굴이 나른하게 흐려져 있었다. 오후의 나른함에 몸이 느물느물해진 건 혼자만이 아니었다.

백성현은 노트북 위를 톡톡 두드리고 나서 작게 물었다.

“어제 또 밤 샜어?”

“…….”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를 몰랐더라면 얼굴에 서린 졸음을 두고 신경질적이라고 오해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그냥 졸려서 그런 거란 걸 알았다.

“곧 낮잠이라도 잘 기세길래.”

“…제가요.”

“응. 잠깐 잘래? 깨워줄게.”

그 말에 지유환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는 듯 턱을 괴고 손으로 입가를 감싸고 있다가 왼손으로 노트북 화면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럼 30분만.”

백성현은 입매를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유환이 졸음에 유독 약하다는 것을 새로이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워낙 어깨가 넓어서인지 엎드려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백성현은 희게 드러난 목선을 몰래 훔쳐봤다.

순식간에 잠든 얼굴은 창백했다. 백성현은 그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핏기 없는 투명한 피부와 기다란 속눈썹, 우뚝한 콧대 같은 것들을 눈으로 몇 번이고 덧그렸다. 아래를 향하는 속눈썹의 모양이라든지 곧게 뻗은 콧대를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았다. 지유환이 한 번 잠에 들면 쉽게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다행이었다. 별안간 백성현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백팩 안을 뒤져 연습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샤프심이 튀어나왔다. 샤프심 길이를 조절한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희미한 선을 그었다. 이내 그는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부터 하얀 이마, 콧대를 슥슥 그려나갔다. 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정물이었다.

- 좋아하는 사람을 그려보세요.

언젠가의 미술 주제가 아득하게 떠올랐다. 그 어렸던 날에 지유환을 알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의 얼굴을 가장 크게 그렸을 것이다. 도화지 가득히 그를 채워 넣고 공들여 채색을 했겠지.

백성현은 조악한 솜씨로나마 종이로 옮겨온 지유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해요?”

잠겨있는 목소리가 공기 중을 울렸다. 연습장을 쥐고 있던 백성현은 순간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졸음기가 남아있는 눈을 반쯤 뜬 채로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느른한 눈매 끝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백성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잘못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시험공부… 하고 있었지.”

여기서 계속 얼굴을 보고 있었다고, 그 얼굴을 옮겨 그리고 있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지유환은 졸음기 가득한 눈으로 웅얼거렸다.

“아아, 방해했으면 죄송해요.”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여 백성현이 맞은편에 있는 걸 확인하곤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잠을 청했다. 깜짝 놀란 것처럼 펄떡 뛰던 심장이 그제야 진정이 되었다. 주섬주섬 연습장을 다시 가방 안에 쑤셔 넣은 백성현은 익숙하게 트레이 위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집히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트레이 가득 들어있던 에그타르트를 혼자서 거의 다 해치운 것을 깨닫고 눈을 굴렸다. 입 안이 기분 좋게 달았다.

부엌에 있던 정수기를 떠올린 백성현은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 몸을 일으켰다. 늘 그가 요리를 하고 있을 때만 들어와 봤기 때문인지 혼자 선 부엌은 유난히 넓어보였다. 각종 조리 기구는 물론 유리컵들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도무지 혼자서 이걸 다 관리한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백성현은 그 흔한 얼룩도 없이 깨끗한 컵을 집어 들어 정수기에 가져갔다.

“이게 뭐지?”

정수기 옆에 자그마한 종이봉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백성현은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약국 명 아래에 있는 지유환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아픈가?”

약을 수령한 날짜는 불과 이틀 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약 봉투를 돌려 뒷면을 확인한 백성현은 물을 마시는 것도 잊고 가만히 멈춰 섰다. 여섯 종류의 약들의 이름과 그 설명이 죽 적혀 있었다.

- 중추에 작용하여 항우울, 항불안효과를 나타냄

- 신경전달 물질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항우울 효과를 나타냄

- 진정 및 안정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각종 불안장애를 개선

다른 종이봉투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성현은 들고 있던 약 봉투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몰래 봐버린 느낌이 들었다.

“…….”

백성현은 거실에 나와서 여전히 정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지유환을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해서 예전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게다가 그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면서 막상 해준 건 없는 것 같았다. 백성현은 몇 분이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TV 앞에 놓인 키가 작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원목 판 위는 깨끗했고, 퍼즐은 한 조각도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는 모서리가 평평한 퍼즐 조각들을 골라 하나씩 꺼냈다. 그는 지유환이 미술관에서 이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 하루 만에 해내는 건 힘들겠지만 이걸 다 맞추면 기뻐해줄 지도 몰랐다.

도안을 따라 한 조각 한 조각 맞추다 보니 점점 속도가 붙었다. 어느새 위쪽 가장자리를 다 맞춘 그는 갑자기 집중을 해서 뻐끈해진 목을 주물렀다. 그렇게 한참을 퍼즐에만 몰두했을 때였다.

“퍼즐 맞추고 계셨네요.”

머리맡에서 떨어지는 목소리에 백성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유환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윗부분이 채워진 도안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너무 집중을 해서 그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응. 아직 얼마 못 했어.”

“같이 맞출까요. 도움은 안 되시겠지만.”

자연스럽게 그가 옆자리로 앉아왔다. 은근한 향기가 스며왔다. 부드러운 러그에 무릎이 쓸렸다. 퍼즐을 잘 못 한다는 게 그냥 한 말은 아닌 듯 지유환은 가끔 이빨이 안 맞는 퍼즐을 억지로 욱여넣을 때도 있었고 한 조각을 맞추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조각을 잡는 족족 맞는 자리에 맞춰 넣는 백성현을 보며 그가 감탄을 흘렸다.

“잘 하시네요.”

“그냥, 보통이야.”

각자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눠서 맞추기로 했는데 백성현이 맡은 윗부분만 압도적인 속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지유환은 아래쪽 꽃밭 부분을 채우려고 하는 것처럼 손에 유채꽃 조각들만 가득 가지고 있었다. 백성현은 그를 흘깃 보고 흩어진 유채꽃 조각들을 재빨리 집어서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응.”

“제 눈엔 안보였는데.”

그 와중에 한 조각을 더 발견한 백성현이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지유환도 같은 걸 봤는지 두 사람은 같은 조각을 동시에 집었다. 워낙 조각이 작았기에 손끝이 스쳤다. 놀란 것처럼 먼저 조각을 놓은 것은 백성현이었다.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맡은 부분을 맞춰갔다. 어느덧 달이 뜬 파란 하늘을 반 정도 완성한 백성현은 돌연 방금 전까지 정리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무언가 분명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공백을 잠재 기호라고 했던가.

백성현은 유채꽃밭 쪽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정적이 내려앉아 있는 이 순간도 어쩌면 분명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 *

어렸을 때의 기억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음에도 이상하리만큼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소망원에서 단체로 동물원을 갔을 때였다. 동물원은 소풍으로 간 것치곤 지나치게 쇠락한 곳이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은 하나였다. 검은 구슬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말 한 마리. 그 누구도 말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말이 나이가 먹었고 배가 고픈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은 기괴할 만큼 배만 풍선처럼 불러 있었다. 임신을 한 걸 거라는 생각보다 말의 상태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TV에서 보던 아프리카 기아들이 너무 먹지 못해서 배만 불러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빗질도 하지 않는지 군데군데 털이 엉망으로 뭉쳐있었고 입가와 눈가만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백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말에게로 손을 뻗었었다. 그러나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의 손은 멈췄다. 말도 머리를 앞으로 내밀지 않았고, 그도 더 이상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말의 눈동자 안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고 숨이 턱 막혀왔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 말이 투레질을 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옆으로 다그닥 거리며 걸어갔다. 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말을 향해 먹이를 흔들고 있었다. 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울타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자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재빨리 먹이를 쥔 손을 뒤로 뺐다. 그걸 세 번 정도 반복했다. 말은 계속해서 여자아이의 손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여자아이의 뒤에는 당연한 것처럼 부모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우습다는 듯이 간헐적으로 웃던 여자아이는 다시 말에게 당근을 내밀었다.

백성현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번에도 손을 뒤로 빼려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꼭 잡았었다. 그제야 말은 당근을 입에 물고 느리게 씹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의아한 듯 백성현을 올려다보았었다. 이상한 남자애를 본 것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백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었다. 그러지 마. 아이의 부모님이 못마땅한 얼굴로 백성현에게 뭐라고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 전에 강혜숙이 다정한 낯으로 동물을 놀리면 안 돼요, 같은 말을 했기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왜 그 말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냥 천진하던 아이는 악마 같았고, 그런 나쁜 짓을 해도 묵인하는 부모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이 부러웠었다는 감상이 나이를 먹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다. 정작 말을 놀리지 말라고 말한 자신에게는 그 흔한 칭찬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 날 밤엔 울타리에 갇힌 말이 되는 꿈을 꿨다. 당근을 든 아이들 가운데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꿈이었다.

친부모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소망원에서 오는 전화를 의도적으로 받지 않았다. 백성현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해뒀으면서도 그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휩쓸리듯 말해버릴 지도 몰랐다. ㅡ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딱 한 번만 만나보겠습니다, 하고.

아직까지도 한번 씩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은 우스웠다. 먹이를 기다리는 실험쥐가 된 것만 같았다. 매번 부스러기만 주워 먹은 주제에 그 제대로 된 맛이 궁금해서 먹이가 나오는 통로만 기웃거리는 실험쥐.

-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렴.

- 너의 선택이 어떻든 난 너를 존중할 거란다.

백성현은 자신의 생일에 왔던 문자를 이제는 다 외워버렸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많이 읽었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 올려다본 하늘은 나뭇가지와 그 위로 피어난 빽빽한 나뭇잎들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사이사이로 새어 나온 빛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함부로 시원하다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온도였다.

기대라는 감정은 가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까끌까끌한 벤치 위를 의미 없이 손으로 쓸던 백성현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답장을 보냈다.

- 한 번만 만나볼게요.

그렇게, 보내버리고 말았다.

간밤에는 직접 만나서 얻게 될 것들과 어쩌면 잃게 될지도 모를 모든 것들을 저울질 해봤다. 사실 이제 와서 잃을 것은 없어보였다. 궁금함이 가장 컸다.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일정은 생각보다 빨리 잡혔다.

이틀 뒤 오후 6시, 소망원에서.

이틀 동안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누워있다가도 긴장이 돼서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백성현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끊임없이 상상해보았다. 그 입에서 가장 처음 나올 말이 무엇일지도 짐작해보았다. 인사일까, 사과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죄일까. 최소한 일상적인 인사는 아니었으면 했다.

백성현은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길 위에 단란한 가족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 모습을 보면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가족. 그 단어는 언제고 생소한 울림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소망원까지의 두 시간 반이 단숨에 지나가버렸다.

그는 부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소망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어른이 시설에 오면 아이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졌었다. 백성현은 혹시 모른다는 기대와 앞선 체념으로 뒤숭숭한 정서가 아직 제 안에 남아있는 줄 몰랐었다. 시간은 정확히 여섯 시였다. 원장실의 문을 열기 직전, 그는 지금 바로 목구멍을 긁으면 심장을 토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장실 안은 조용했다.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은 강혜숙이 보였다. 그녀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늘 그랬듯 평온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왔다.

“성현이 왔니.”

그 말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던 남자의 몸이 천천히 비틀렸다. 마치 뒤를 돌아보려는 것 같아서 백성현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 후 찰나의 순간이었다. 중년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길을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의 남자였다. 남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 같은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걸치고 있는 정장은 묘하게 몸에 맞지 않아 품이 남아보였다. 그의 자신 없는 듯한 표정, 애매하게 내밀어진 손 같은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반갑다. 성현이라고 했지.”

백성현은 자신이 스물네 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제 저런 인사쯤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와줘서 고맙다. 나는…….”

첫마디로 무슨 말을 할까, 의 답은 자기소개였던 모양이다. 백성현은 눈앞에 있는 중년의 아저씨가 뭘 말하든, 어떤 표정을 하든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설명에 따르면 분명 피가 이어진 사람인데 그냥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그의 부인이 병으로 죽은 얘기, 철없을 적 낳은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시설에 보내게 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절절한 사연, 심지어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백성현은 혼자 감정에 북받쳐 울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 그린 듯이 웃어보였다. 강혜숙은 내내 말 한마디도 없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성현이 입을 열었다.

“힘내세요.”

“…….”

힘든 사연이 있으셨군요. 힘을 내시면 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TV 속의 사연 같아서 일련의 후원 번호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서는 안됐는데…….”

“아니에요. 안 미안하셔도 됩니다.”

“…….”

“저는 이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백성현은 강혜숙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잠시만!”

“…….”

“내가 너무 늦게 왔니? 그래서 그러니?”

백성현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중년 남자를 한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닮은 부분을 찾아보려 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동물원 가보신 적 있으세요?”

“…….”

“어렸을 때 갔던 동물원에 어떤 말 한 마리가 갇혀 있었어요. 분명 무슨 병이 있는 것처럼 아파보였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았고.”

남자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백성현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누가 먹는 걸로 그 말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못하게 했어요.”

“…….”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

“그냥, 그랬다고요.”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거기까지였다. 백성현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하늘은 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번져 있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은 어딘가 느낌이 이상했다.

수능을 망치고 돌아오던 길도, 흠씬 맞고 돌아오던 날도 이런 기분이 들진 않았었다. 백성현은 창가에 얼굴을 기대었다. 차가운 유리가 뺨에 닿아왔다. 서럽게 울던 중년 남자의 얼굴이 희미했다.

원룸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흐려져갔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그렇게나 그리워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혼자 보고 싶어 하다가 용서하기를 반복하고

갈구하고.

달조차 어룽져 잘 보이지 않았다. 백성현은 늘어진 그림자를 보고 작게 웃었다.

그렇게 24년을 살았나.

24년이나. 살았나.

“…….”

그 오래된 동물원에서부터 칭찬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사람은 영영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또 기대를 해버리고 말았다. 주제 넘는 포만감을 기대했던 실험쥐는 폐기처리가 수순이었다.

“뭘 기대했던 걸까…….”

한심함을 느끼는 것도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는 누굴 기다려야 할까. 이제부터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했다. 가족. 어딜 가면 그런 걸 만들 수 있나. 가족…….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말들이 드문드문 솟구쳐 올랐다.

철컥, 하고 문이 닫혔다. 그는 언제든 볼 수 있게 침대 머리맡에 둔 시집을 더듬어 쥐었다.

“…….”

그가 숨결을 불어넣어 둔 활자를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줄어들까 했지만 시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목 안이 홧홧해져왔다. 이미 발화점은 한참 넘었다. 시집을 바닥에 내려둔 백성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어.”

어쩌면 정신이 나간 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수인 척 전화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객기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백성현은 그의 연락처를 띄우고 통화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딱 세 번 울릴 때까지만 기다리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라도 받는다면 실수라고 얼버무리면 됐다. 그러면 찰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세 번만…….”

허공을 헛돌던 손가락이 화면을 세게 눌렀다. 순식간에 전화를 거는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신호음이 길게 한 번 울렸고 백성현은 눈을 꼭 감은 채로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제발 받아줘.”

아니, 그냥 받지 마. 세 번만 울리면 알아서 끌 테니까.

……아니, 한 번만. 딱 한 번만 받아줘.

한 번 더 기계음이 울렸다. 백성현은 손가락을 종료 버튼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렇게 세 번째 신호음이 울리던 와중이었다.

달칵.

신호음이 끊기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정적이 일었다. 백성현은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 시간이 천천히 쌓여가고 있었다.

- 성현 형.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땐 마음이 내려앉는 듯했다. 낮고 풍부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백성현은 몸을 웅크리고 수화기를 조금 더 귀에 바짝 붙였다. 이어질 그의 말이 무엇이 되든 이것으로 훨씬 덜 불행해졌다. 늘 지유환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백성현은 베개를 끌어안고 그가 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

-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문자로 보내주시겠어요.

백성현은 눈을 감은 채로 계속해서 웃었다.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 제가 먼저 보낼게요.

“유환아.”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윽고 정말로 그가 먼저 문자를 보낸 듯 알림음이 울렸다. 백성현은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읊조렸다.

“너랑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 문자 보내뒀어요.

“안 되려나…….”

목 안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입 밖으로 내버리고 말았다.

“근데, 사실 나 너 좋아해.”

- 이제 끊을게요.

“엄청 좋아해. 정말 많이. 네가 알면 놀랄 정도인데…….”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화면을 보니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백성현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졌다. 오늘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뚝뚝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 전화가 잘못 걸렸나 봐. 미안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백성현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겨우 그런 걸로 만족이 될 리가 없었다.

-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백성현은 그가 보낸 문자를 보고 또 봤다.

- 너도 잘 자.

사람을 가진다는 표현은 몹시도 이상하지만, 그를 가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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