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초봄 (5/22)

5. 초봄

* * *

도서관 2층에 위치한 스터디룸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일도 그를 볼 수 있다며 몰래 기뻐했던 백성현과 지금의 백성현은 달랐다.

“평소처럼만 하면 되잖아.”

지난밤엔 거의 잠을 못 잤다. 때문에 자료 조사를 해야 하는 시를 몇 번이고 읽어보았었다. 그는 국어 영역이라도 공부하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써내려간 필기를 흘긋 바라보았다. 사실 시 자체는 크게 와 닿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했기에 새벽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다.

3번 스터디룸의 불투명한 문 뒤로 앉아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는 등을 보인 채로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는 데 열중해 있었다. 타닥타닥 거리는 자판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늘 그랬듯 곧은 자세였다.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한 발씩 나아갔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지유환이 고개를 돌렸다. 고장 난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그 과정이 느릿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백성현은 이제까지의 모든 생각을 허물고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이래선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비틀린 입꼬리가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심정 따위는 전혀 모를 지유환은 몇 초간 어색한 얼굴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마주 웃어주었다.

“오셨어요.”

곧바로 노트북의 화면을 끈 지유환이 오른쪽 자리를 가리켜왔다. 그의 시선은 백성현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나지막이 말했다.

“같이 조사하면 되는데.”

“아, 기본적인 것만 정리해온 거라 별거 아니야.”

지유환은 그 말과 달리 시를 해체라도 해놓은 듯한 필기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엄청 열심히 해오셨네요.”

“아마 틀린 게 많을 거야.”

“글씨도 예쁘고.”

마치 그게 칭찬처럼 들려서 백성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필기에 대해서는 지적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백성현은 평소 수업을 듣던 때보다도 더 열심히 지유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애드거 앨런 포는 반복구로 쓰일 말에는 울림이 있어야 하고, 발음을 끌어서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 시에서 반복구는…….”

지유환은 각 연의 마지막 행마다 그어진 밑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하얀 손이 종이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백성현은 그의 얼굴을 훔쳐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종이 위로 고정했다.

“nevermore. 다시는 절대, 라고 번역되는 부분이에요.”

“아… 응.”

“밑줄 그어오신 부분 맞아요.”

다정한 음성이 머리맡에서부터 울렸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nevermore, 하고 중얼거리는 발음은 부드러웠다.

“모음 o랑 자음 r은 울림을 주고 발음을 끌 수 있어요.”

“그렇구나…….”

“혹시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지금까지는 다 알겠어.”

너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계속 알겠다고 말했던 입모양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자꾸만 뻣뻣해지려는 목을 세우며 이어지는 설명을 들었다.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스터디룸을 빌린 적은 무수히 많았지만 누군가와 단 둘이 앉아 과제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곤조곤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좁은 공간을 울렸다. 지유환이 이렇게 말을 오래 하는 건 처음이었다. 가끔씩 설명 도중에 밑줄을 치거나 그가 부가적인 필기를 할 때는 몸이 조금 더 가까워져서 무릎이 스쳤다. 그럴 땐 낮은 호흡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백성현은 일부러 무릎을 빼서 옆으로 물렸다.

전체적인 내용은 그가 어젯밤 파악했던 것과 같았다. <갈가마귀>는 한 남자가 폭풍우가 쏟아지는 날 창문을 두드려 날아든 갈가마귀로 인해 비로소 연인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지유환은 이 시에서 갈가마귀는 피하려 했던 운명과 같다고 설명한 뒤 해당 시 구절을 읊어주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양탄자 바닥에 희미한 발소리를 딸랑이며 향로를 흔들고 다녔다.”

한 음절음절 정확한 발음이었다. 백성현은 낭독을 듣는 듯한 기분이 되어 멍하니 활자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향로에서 향이 뿜어져 나오듯이 공기가 더욱 농밀해졌다.”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에 마른 침이 넘어갔다. 백성현은 의식적으로 숨소리를 줄였다.

그 뒤로 지유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백성현은 갑자기 끊긴 낭독에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가 빤히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는 차분했다. 이윽고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의 신께서 너를 보내셨구나.”

“…….”

부지불식간에 불에 덴 것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정작 발화의 주체인 지유환의 얼굴에는 얼핏 웃음이 떠올랐다.

“이 시에서 이 문장을 제일 좋아해요.”

“…주인공 입장에서는 절망적인 대사인데.”

주인공이 갈가마귀를 두고 슬픔을 잊게 해 줄 망각의 약을 가져와 주었다고 착각하며 내뱉는 대사였다. 그러나 그건 주인공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망각은 불가능했다. 지유환은 선선히 답했다.

“그렇긴 한데, 좋아해요.”

“…….”

“구원자라도 만난 것 같은 표현이잖아요. 비록 구원받진 못했더라도.”

구원 받지 못했더라도 구원자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 뒤로도 지유환은 차근차근 백성현이 해온 필기를 고쳐주었다. 그럴 때마다 백성현은 민망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틀렸지.”

“아니에요.”

틀린 건 아니라는 말과 달리 A4 용지에는 지유환의 글씨가 한가득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한 수준이잖아….”

두 시간 가량 그의 도움을 받았을 뿐인데 자료 조사는 거의 다 끝나 있었다. 이래서야 무임승차로 제명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백성현은 복도를 걸으며 지유환의 글씨를 눈에 담았다. 흘리듯 쓴 글씨체는 모난 데 없이 유려했다. 백성현은 가만히 서 있다가 주변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어 글씨를 쓰다듬어보았다. 당연하게도 겨우 종이였다. 세게 문지르면 손끝에 흑연이 묻어날 뿐인, 고작 글씨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런 스스로가 어딘가 초라하고 우스워서 백성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헛웃음이라도 지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 * *

인터넷에는 지유환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검색하다가 뭔가를 발견한 백성현은 눈을 크게 뜨고 사진을 클릭했다. 10년도 더 된 기사였다. 지유환 어린이가 청소년 문학상에서 장원을 받았다는 설명과 함께 어린 지유환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이게 뭐야.”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지유환은 지금만큼이나 표정이 없었다. 너무나도 무료한 표정이라서 장원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흰 피부와 새까만 눈, 지금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지유환은 자기보다 큰 형 누나들을 다 제치고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트로피를 소중하게 품에 꼭 안고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엄청 귀여웠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오른쪽 마우스를 눌러 사진을 저장하고 말았다. 놀라운 마음도 함께였다. 저렇게 어렸을 때부터 온갖 문학상을 휩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백성현은 곧이어 그가 첫 시집을 펴낸 게 불과 아홉 살 때라는 것을 알아내고 입을 벌렸다. 넘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렇게 빛나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그와 자신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백성현은 지유환 어린이의 인터뷰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았다. 유난히 차분했던 수상자라고 묘사된 그는 글을 쓰는 데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열심히 쓰다 보니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다, 등등의 수상 소감을 내놓았다고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어린 아이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아, 얘 진짜 뭐야.”

저랬던 지유환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의 지유환이 됐다고 생각하니 묘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보다 키도 훨씬 컸으니 무척 잘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 백성현은 애틋하고 사랑스런 마음을 담아 어린 지유환의 사진들을 차곡차곡 저장했다.

까만 밤이 그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 * *

강의 회차가 쌓이자 본격적으로 과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최대학점인 19점을 꽉 채워 시간표를 만들었기에 필기는 물론 개인 과제, 조별 과제까지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과제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제 슬슬 창작시 하나씩 써봐야죠?”

교수의 말에 강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연해진 것은 백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는 난색을 띠는 학생들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다들 왜 그래요. 이론을 배웠으면 실기도 해야지.”

교수는 이미 등단한 지가 십여 년 넘게 지난 현직 작가였다. 그녀에게 수업을 듣기 위해서 이 학교를 선택한 학생들도 있을 정도로 문학계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시간은 2주면 충분하죠? 돌아가면서 합평도 할 겁니다.”

합평이라는 단어에 학생들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순응하는 이들과 달리 백성현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묵묵히 타자를 쳐야 했다.

이번 과제는 학점을 위협하는 의외의 복병이 될지도 몰랐다. 근심으로 가득 찬 백성현의 얼굴을 흘긋 본 지유환이 공책 모퉁이에 뭔가를 써내려갔다. 처음엔 필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노트를 옆으로 내밀어오는 걸 보니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시 써본 적 있으세요?

백성현은 내밀어진 공책과 지유환을 번갈아 보다가 우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주 어렸을 때 동시나 몇 번 써봤을까 싶었다. 지유환은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다시 샤프를 집어 들었다.

- 같이 써보실래요?

“어?”

- 뭐든 처음은 어렵잖아요.

“정말? 그래도 돼?”

얼떨떨한 마음을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지유환은 오히려 그 물음이 의아한 것처럼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노트테이킹을 위해 시작한 강의인데 조별과제에 이어 개인과제까지 그의 손을 빌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유환은 그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미미한 웃음을 띠운 채로 다음 문장을 썼다.

- 저도 뭔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그거라면 이미 많이 도와줬는데.”

백성현은 자신의 입모양이 정확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유환은 늘 익숙하게 입모양을 읽어냈다. 이번에도 우물우물 거리며 말한 것임에도 단번에 알아듣곤 또 다른 이유를 들어왔다.

- 사실은 시 쓰신 거 제일 먼저 보려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가장 큰 이유라는 것처럼 눈매를 기울여 웃기도 했다. 그 스스럼 없는 웃음에 마음 한 쪽이 움찔, 하고 조여들었다. 백성현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마저 필기를 해나갔다. 어젯밤 보았던 어린 지유환의 사진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렇게나 큰 상을 받고도 무표정하던 소년이 저를 보고는 웃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뭉근하게 끓어올랐다.

지유환이 필기를 할 때마다 백성현의 희미한 시선이 그 커다란 손 위를 몰래 더듬었다. 뼈마디가 불거진 창백한 손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손이라 그런 건지 샤프를 쥐고 있는 뼈마디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휘어있었다. 그가 글자를 쓸 때마다 손마디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백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끝나고 나면 또 화요일과 금요일이 오기를 기다릴 걸 알면서도 백성현은 어서 강의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옆자리는 너무 불편했다.

* * *

일주일 중 가장 빨리 하루일과가 끝나는 날은 목요일이었다. 공강과 7, 8 교시 강의가 난무하는 다른 날들과 달리 목요일에는 세 시 반이면 집에 갈 수 있었다. 백성현은 오늘은 곧바로 집에 돌아가는 대신 어느새 눈에 익은 오피스텔의 로비로 들어섰다. 마침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입주민으로 보이는 근사한 차림새의 남녀가 나왔다. 그들은 문 앞에 서 있는 백성현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스쳐 지나갔다. 저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맞는지 살피는 눈이었다.

백성현은 자신이 그들과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날 때부터 부유하지도 않았고, 타고난 여유를 휘두를 줄 아는 능력도 그에게는 없었다. 새삼 지유환과의 격차가 느껴졌다. 그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백성현은 자신의 주변에서 유일하게 ‘그런 부류’에 속한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과제를 명목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느낌이라 선뜻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하아.”

그는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서야 도어벨을 눌렀다. 하지만 그렇게나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초인종 소리가 끊길 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두 번 세 번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문 너머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친 백성현의 시야 안에 낯선 모습의 지유환이 들어왔다.

“……어.”

금방 잠에서 깬 듯한 얼굴이었다. 날카롭던 눈매는 졸음에 누그러져 있었고 한 글자씩 정확히 말하던 발음은 티가 날 정도로 뭉개진 상태였다.

“죄송해요, 방금 일어났어요…….”

웅얼거리듯 말한 지유환은 졸음기를 몰아내듯 눈을 비비곤 뒤로 물러섰다. 이제 보니 창백했던 얼굴에는 작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늘 몸에 맞아 떨어지는 듯한 셔츠나 니트 차림만 보다가 얇은 면 소재의 반팔을 걸친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드러난 목이 유난히 희었다.

거실 중앙의 테이블에는 그가 미리 준비를 해 둔 것인지 시집과 노트들, 시작법에 관한 책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걸 손수 다 준비해 놓고 졸았다는 얘기가 됐다. 내내 아무 말도 없는 백성현과 눈이 마주친 지유환이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어제 갑자기 비평 의뢰가 들어와서 밤을 샜거든요.”

“…….”

“한 번 잠들면 잘 못 일어나서…….”

오래 기다리셨죠, 하고 말하는 음성은 목이 잠겨있는 탓인지 평소보다도 더 낮았다.

“얼마나 잤는데?”

백성현의 물음에 지유환이 곤란한 듯 콧등을 찡그리다가 작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졸다가 갑자기 눈이 뜨였는데, 한 시간이나… 지나있더라고요.”

한 번 잠에 들면 깨어나지 못하니까 계속 버티고 있다가 졸아버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답답하셨을 텐데.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

“그럼, 빨리 시 쓸까요.”

지유환은 전동 연필깎이에 새 것으로 보이는 연필들을 집어넣었다. 윙, 하는 소리가 끝나자 뾰족하게 깎인 연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성현은 그런 연필을 두 개나 건네는 지유환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그가 연필을 가리키며 덧붙여왔다.

“집에서는 연필로 쓰는 게 습관이 돼서요.”

“…….”

가만히 연필을 받아든 백성현의 머리 위로 나지막한 음성이 드리웠다.

“아, 딸기도 있어요.”

“…딸기?”

“어제저녁에 장 보다가 맛있어보여서.”

아직 나른함이 남아있는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시 다 쓰시면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하는 느린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다. 백성현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주억였다.

본격적으로 노트를 펴고 마주 앉으니 과외라도 받는 모양새였다. 지유환은 재능 넘치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좋은 선생님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뭔가를 써내려고 하기 보다는 일상적인 문장에서 시작하는 게 좋아요.”

“예를 들면?”

“음…… 아무 말이나 써도 좋고, 일기를 써도 좋고.”

“일기면 그냥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인 건데 거기서 시 소재가 나와?”

“네. 재밌잖아요. 사소한 것.”

백성현은 그제야 자신이 뭔가를 묻기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간밤에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었다. 번호까지 매겨뒀었는데 막상 본인을 앞에 두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거나 적어보세요. 한 페이지 가득 쓰고 마음에 드는 한 문장만 있어도 돼요.”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가 났다. 샤프나 볼펜으로 쓸 때와는 다른 소리였다. 그는 졸음을 매단 느른한 눈으로도 쓰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기를 쓸까 했던 백성현은 떠오르는 말들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갔다.

올해 개화 시기는 작년보다 사나흘 정도가 늦다

올해 벚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꽃구경을 하러 간 적이 없는 것 같다

쓰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말 투성이였다. 그냥 종이를 구겨 버릴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또 아까웠다. 한참을 쓰고 나니 종이 한가득 아무 말이 적혀 있었다. 백성현은 어느새 앞에서 들려오던 연필 소리가 멎어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

지유환이 연필을 쥔 채로 팔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잠든 것 같아서 깨울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직 저녁 시간이라기엔 이른 감이 있는 애매한 시간대였다. 멀리서 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거실은 어느새 오렌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해가 지는 이 공간에는 잠들어있는 그와 자신밖에 없었다. 사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순간이었다.

백성현은 미동도 없이 엎드린 지유환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앞머리에 가려진 흰 이마부터 높게 뻗은 콧대, 솜털 같은 그림자를 만든 속눈썹까지. 강의를 들을 때마다 신경이 쓰이던 커다란 손도 훔쳐보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백성현의 손끝이 지유환의 커다란 손 위로 가닿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도드라진 손마디를 만져보았다. 찌르르한 감각이 번졌다. 그대로 손을 떼려다가 조심스럽게 창백한 손등도 쓸어보았다.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백성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부드럽잖아.’

지유환의 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

드러난 팔이 춥진 않을까 싶어 백성현은 소파 위의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둘러주었다. 한 번 정도는 뒤척일 법도 한데 정말이지 죽은 듯이 잤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백성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턱을 괴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와 비슷한 자세로 엎드려 마주 보기도 했다. 무의식적으로 연필을 쥔 것은 지유환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을 때였다.

“…….”

백성현은 바로 정자세를 하고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선은 계속해서 정면을 흘깃댔다.

“……어요.”

앞에서부터 웅얼거리는 음색이 새어 나왔다. 백성현은 웃지 않기 위해 입매를 당겨야 했다.

“저 또… 잤어요?”

평소와 달리 말꼬리가 미미하게나마 올라가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이 백성현을 향했다. 얇은 쌍꺼풀이 진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감겨주면 곧바로 다시 잠에 들것만 같은 눈이었다. 지유환은 대답 없는 백성현을 재촉하듯 느물거리며 말했다.

“…형?”

“괜찮아. 얼마 안 잤어.”

그러기에는 이미 해가 다 져버린 상태였지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으니 얼마 안 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지유환은 책상을 더듬거리며 시집과 연습장을 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죄송해요… 잠들 줄 몰랐는데.”

하루를 꼬박 새고 겨우 한 시간 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지유환이 손에 잡힌 시집을 뒤로 넘겼다. 책이 아직 빳빳하기 때문인지 그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단색의 표지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도 잠들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지유환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눈을 좁혔다. 백성현은 말을 덧붙였다.

“나 때문에 잠도 푹 못 자는 것 같아서…….”

“시 같이 쓰기로 했잖아요.”

“…….”

“빌려드리고 싶은 시집도 다 골라뒀는데.”

지유환이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오른쪽에 쌓여있는 시집들을 눈짓했다.

“읽기 쉬운 것 같은 것들로 추려놨어요.”

“아…….”

“시를 많이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거든요.”

지유환은 졸음기를 씻어내듯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바람에 그가 두르고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성현이 그 장면을 보며 작게 탄식할 동안 지유환은 솜씨 좋게 담요를 낚아챘다. 손에 쥔 담요를 내려다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 이래서 따뜻했구나.”

곧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담요를 어깨 위에 두르곤 눈을 마주쳐왔다.

“계속 글 쓰고 계세요.”

일어나는 걸 보는 것도 한참이었다. 그는 담요를 두른 채로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서 뭔가를 꺼냈다. 오래지 않아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 왔다. 분명 그가 계속 글을 쓰고 있으라고 했지만 자꾸만 고개는 부엌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하얗고 폭신폭신한 담요를 두른 그의 어깨로 자꾸 시선이 갔다.

“……북극곰 같다.”

커다란 지유환이 저런 담요를 두르고 있으니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날렵하고 창백하다는 느낌이 강해서 잊고 있었는데 그는 19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절대 작은 편이 아닌 백성현도 고개를 들어야 그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뭘 먹고 저렇게 컸을까.”

결국 백성현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거실로 나온 그의 손에는 딸기가 한가득이었다. 새빨갛고 반질반질한 딸기는 한입에 먹을 수 있도록 예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는 마치 당장 먹어보라는 것처럼 자그마한 은제 포크도 꽂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과일을 먹은 지도 무척 오래된 것 같았다. 백성현은 포크를 쥐고 입으로 가져갔다. 물기가 남아있는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자 과즙이 시원하게 퍼졌다. 적당히 단단한 과육을 씹을 때마다 특유의 달콤한 향이 났다. 신기할 정도로 달고 맛있었다.

“어때요.”

“엄청, 맛있어.”

놀란듯한 표정을 짓자 지유환은 접시를 백성현 쪽으로 더 가까이 밀어주었다.

“더 있어요.”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맛있는 게 있으면 늘 조금씩 아껴먹었던 때의 기억이 설핏 머리 위를 스쳐 갔다.

그건 가난한 습관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꼭 마지막까지 남겨놓는 바람에 결국 못 먹게 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유환은 이제껏 몇 번이나 맛있는 걸 줬으면서도 원하면 얼마든지 더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집으로 초대를 하고, 서슴없이 과제를 도와준다. 시선이 마주쳐도 도무지 피하는 법이 없었다.

백성현은 그런 그를 보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너는…… 원래 그래?”

그런 걸 묻고 만 건 그 질문 아래에 수많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직접적으로는 묻지 못할 것들이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지유환이 의아한 눈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원래 친절한 성격인가… 해서.”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듯 침묵하는 그를 향해 백성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집에 초대했잖아. 맛있는 것도 만들어주고.”

“…….”

“그냥 신기해서. 나는 누구 과제를 이렇게 도와준 적도 없어서, 그냥…….”

지유환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주 잠시 흔들리는 것도 같던 눈동자는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백성현은 자신의 부차적인 설명이 궁색해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어느새 아래를 향했던 고개를 든 그는 잠자코 지유환의 입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다. 가지에 가지를 치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좋겠다.

지유환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간단히 답했다.

“네.”

“…….”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백성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과제를 돕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당신이 특별한 게 아니야ㅡ 그런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는 왜인지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나 달고 맛있게 느껴지던 딸기도 몇 개 더 먹지 못했다. 원한다고 해서 계속 요구하는 건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면서 또 실수를 해버린 느낌이었다.

지유환은 그 뒤로도 시작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여러 시집들과 함께 관련 서적들을 안겨주었지만 백성현은 제대로 된 문장을 하나도 써내지 못했다.

불편한 시간들이 흘렀다. 백성현은 눈치를 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곧 가봐야 할 것 같아.”

그가 저녁을 만들어준다고 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맛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를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어 삼키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유환은 약속에 대한 추궁도, 어디를 가느냐는 물음도 없이 나지막이 발음했다.

“데려다드릴까요.”

백성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고마워. 덕분에…….”

“…….”

“많이 배웠어.”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은 자라선 안 되는 마음을 방치한 자신에게 있었다.

차라리 예전의 습관처럼 원하는 건 끝까지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괜한 걸 물었다.

그에게 쓸데없는 질문만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에도 그의 말과 행동들을 마음껏 특별한 신호로 오인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오해조차 마음껏 할 수 없게 되었다.

* * *

늘 그래왔듯 계절은 사람들의 관심 없이도 부지런히 그 모습을 바꾸었다. 노트테이킹은 이제 완전히 손에 익었고 문예 과제도 발표만 남겨둔 상태였다. 세상은 순조롭게 봄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풍에 온기가 스미는가 하면 꽃봉오리의 옆으로는 초록 새싹이 움텄다.

- 너는…… 원래 그래?

- 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노트테이킹을 했다. 여전히 그의 옆자리는 불편했지만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밤을 꾸역꾸역 지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백성현은 걷다가 문득 멈춰 서서 흐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뻗은 매끈한 가지 위로 연분홍빛의 꽃잎이 드문드문 돋아있었다. 아직 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건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는 방금 전에 나눈 전화 통화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갑작스럽게 소망원으로부터 온 전화에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꽤나 반가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었다. 강혜숙은 으레 인사말처럼 건네는 요즘 잘 지내니, 언제 또 올 거니, 같은 말을 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전공 과제를 하고 있던 백성현은 천천히 얼어붙었다.

- 성현아, 이런 말이 너한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 말씀하세요.

- 어젯밤에, 연락이 왔었단다.

누구의 연락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소망원을 통해 그에게 연락을 할만한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반가움도, 못내 쌓아두었던 그리움 때문도 아니었다.

백성현은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가져갔다.

- 많이 갑작스러울 거란 거 안다. 알려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하지만 선택은 네 몫이야.

- …….

- 언제든 좋으니 다시 전화해주렴.

어렸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상상해보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나 이제부터는 계속 같이 살아가자고 말하는 두 사람. 혼자 둬서 미안했다며 처절하게 용서를 빌 사람들. 백성현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아직 끊기지 않은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 만나지…… 않을 겁니다.

소망원에서 산 것은 5살 때부터였지만 원생 기록표에 적혀있는 내용에 따르면 시설에 가게 된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였다. 이전에 지내던 곳이 망해버린 탓에 소망원으로 거처를 옮긴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성현은 더 이상 그들이 열흘 안에 다시 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생각했던 어린 애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열흘이 한 달이 되고, 반년이 되고, 일 년이 되도록 그들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주고 또 줬었다.

백성현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강혜숙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 만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그즈음 서서히 어두워지는 화면 위로 통신사로부터 온 문자가 출력되었다.

- 백성현 고객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4월 8일 하루 동안 300분 무료통화(국내 음성 통화에 한함)가 제공됩니다. 고객님께서 제휴사의 할인 혜택 또는 무료…

무언가가 울컥하고 목 안을 헤집었다. 속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생일…이었구나.”

통신사가 아니었더라면 까맣게 잊고 있었을 생일이었다. 그는 초봄에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이렇듯 선선한 4월의 어느 봄날에 태어났다는 게 싫었다. 차라리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날에 태어난 편이 나았을 것이었다.

아주 추운 겨울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혹한에 태어난 핏덩이를 돌볼 여유가 없어서 그랬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한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무더위를 살아가기엔 높은 체온의 아이가 짐이었을지도 몰랐다.

백성현은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내리는 벚꽃잎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선선한데.

이렇게나 예쁜 벚꽃이 피려 하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무작정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화요일도 금요일도 아니었으니 우연한 만남은 도서관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학생들이 하나둘씩 내려왔다. 캠퍼스는 평소에 비해 텅텅 비어보였다. 애매한 점심시간이라 다들 강의실로 발길을 돌린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정했던 보폭은 점점 더 빨라졌다.

결국엔 뛰듯이 걸어 3층 순문학 코너에 도착했다. 백성현은 숨을 고르며 책을 고르고 있는 몇몇과 낮잠을 자는 사람들 사이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혹시나 싶어 책장 사이를 다 둘러보기까지 했다. 순문학 코너를 세 바퀴나 돌고 나서야 백성현은 가만히 우뚝 섰다. 뒤늦게 맥이 탁 풀렸다. 늘 이곳에서 바른 자세로 활자를 응시하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백성현은 어디에 가면 지유환을 볼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단 한 군데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도무지, 생각나는 장소가 없었다. 그는 막막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 남몰래 마음을 키워가는 사이에도 여전히 접점이라곤 전무했다.

백성현은 핸드폰에 저장된 지유환의 연락처를 응시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 통화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누를 수 있게 될까.

무의식적으로 나아가다 보니 창가 자리 앞까지 와버렸다. 백성현은 책상 위를 가만가만 쓸어보았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라 그런지 따뜻했다. 백성현은 허탈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그도 여기에 앉아 있곤 했다. 특별한 노력 없이도 저의 모든 시선을 끌어가던 지유환이, 바로 여기에. 백성현은 누군가를 따라 하듯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다가 이내 무너지듯 자리에 엎드렸다. 무기질적인 따뜻함이 번져왔다. 순간이지만 행복해졌다. 그 이후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게 비참했다.

특별하지 못한 건 스스로의 잘못 같았다.

‘나는 이렇게나…….’

백성현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면 햇볕 냄새가 났다. 건조하고 바싹 마른 듯한, 참을 수 없이 외로운 냄새가.

* * *

이제껏 생일이라고 해서 케이크를 챙기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스물네 살의 생일만큼은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 오기가 어디에서부터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별 것도 아닌, 시트를 여러 겹 쌓아올려 겉에 크림을 바른 것에 불과한 케이크라는 것을 이제껏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울컥 들었다.

멍하니 강의를 끝까지 다 들은 백성현은 곧바로 제과점에 가서 오직 자신만을 위한 케이크를 샀다. 초가 몇 개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제 나이를 댔다. 스물네 개가 필요해요. 커다란 초가 두 개였고 작은 초는 네 개였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백성현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케이크를 들고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딱히 생일이 언제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오늘이 그의 생일임을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성준혁과도 생일이 언제니 뭘 챙겨주니 하는 낯간지러운 대화는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태어난 날은 모두들 으레 축하를 받던데.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런 말을 듣던데.

백성현은 텅 빈 눈으로 낡은 원룸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렇게 들어가버리면 그대로 생일이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주차장 앞에 홀로 선 지 몇 분쯤이 지나고 나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끝나버릴 것 같다고 섣불리 초조했던 생일은 사실 제대로 시작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조악한 원룸은 오늘따라 비좁게 느껴졌고 매트리스는 평소보다도 더 딱딱했다. 백성현은 작은 냉장고 안에 쑤셔 넣어놓은 케이크 상자를 보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언가 마음이 답답하고 서운한데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 불빛이 든 것은 그때였다. 핸드폰 화면이 순식간에 밝아져 백성현은 눈매를 찌푸렸다. 누군가로부터 새 메시지가 와있었다. 또 통신사나 광고 문자일 것 같아서 아예 확인을 하지 말까 했지만 결국은 화면을 보고 말았다.

- 창작시 과제 다 하셨어요?

백성현은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그는 발신인의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지유환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부터 자세를 바로 한 백성현은 침착하게 액정을 터치했다. 대화방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 아니. 아직 덜 했어.

고작 저 한마디의 문자에 깊게 침잠했던 우울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모를 감정 체계였다.

- 시 초안 봤어요.

그건 그의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엉망인 글이었다. 아무 말이나 적어보라는 말에 따라 헛소리만 늘어놓은 글이기도 했다.

- 벚꽃에 대한 이야기가 많던데.

- 혹시 직접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백성현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하게 더듬거렸다.

“직…접?”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다시 문자를 읽어보기도 전에 또 알림음이 울렸다.

- 벚꽃 보러 가실래요?

언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제멋대로 손이 먼저 움직여 답이 날아갔다.

- 응.

- 갈래.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백성현은 이어진 그의 메시지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샤워도 해야 했고 옷도 갈아입어야 했다. 갑작스레 바빠진 마음이 날개를 달았다.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에 가장 최근 메시지가 떠있었다.

- 한 시간 뒤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 * *

뜨거운 물줄기가 머리 위를 두드렸다. 몽롱했던 정신이 점점 선명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오겠다는 그의 의중이 무엇일지 넘겨 짚어보려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설마 하는 마음을 품었을지 몰라도 요즘은 그런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악감이 번졌다.

지유환은 백성현에게 있어 한없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모를.

백성현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거울 앞에 서서 서둘러 옷을 입기도 했다. 그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아직 20분 남짓. 바깥은 어두웠다. 이렇게 달빛이 몰려든 시간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들떴다.

그는 다시 대화방에 들어가서 메시지를 읽어보았다. 자신에게는 그렇게나 어려웠던 연락이 지유환에게는 너무나도 쉬워 보였다.

이렇게나 말갛게- 창작시 과제 다 하셨어요, 라니.

“나도 이렇게 보내볼 걸 그랬나.”

시간을 살피던 그는 약속 시간 5분 전쯤이 되었을 때 집을 나섰다. 몸 안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1층에 내려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밤공기가 훅 밀려왔다.

미등을 켠 검은색 세단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다른 차들과 쉽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주변에서 저렇게 고급 차량을 타는 사람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운전자 석에 기대있는 실루엣을 보며 백성현은 한 걸음씩 걸어갔다.

몸에 맞아 떨어지는 셔츠를 입고 윗단추 두어 개 정도를 끌러낸 채였다. 다리선은 길게 떨어져 세련돼 보였다. 무언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아래를 응시하고 있던 그의 고개가 백성현을 발견하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누구도 먼저 섣불리 인사하지 않았다. 서로를 응시하기만 하는 진득한 침묵을 끊어낸 것은 지유환이었다. 그는 묵묵히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백성현도 아무 말 없이 조수석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불러내서 놀라셨죠.”

“조금.”

“가보면 좋을 것 같은 데가 있어서.”

운전석에 앉은 지유환이 조수석을 흘깃 보더니 백성현에게로 천천히 몸을 낮춰 왔다. 순간적으로 백성현은 시트에 등을 바짝 붙였다. 커다란 손은 안전벨트를 향했다. 벨트가 쇠붙이에 마찰하는 소리가 난 뒤 딸깍, 하고 안전벨트가 채워졌다.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백성현은 그가 떨어져 나간 뒤에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지유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백성현은 운전대를 검지로 두드리고 있는 그를 곁눈질로 보고 미미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아무 상관 없었다. 지유환은 그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차라서인지, 그가 운전을 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승차감은 전처럼 안락했다. 다만 라디오 하나 틀어놓지 않은 차에 가만히 앉아있자니 피부를 짓눌러오는 듯한 압력이 느껴져 버거울 뿐이었다.

샛길을 빠져나간 차는 큰길로 가더니 어느새 4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백성현은 새까맣게 가라앉은 바깥 풍경만 쉬지 않고 살폈다.

“라디오 틀어드릴까요.”

느린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백성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로부터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셨나요? 완연한 봄입니다. 수도권 지방도 드디어 개화시기를 맞아…]

TV든 라디오든 모두가 봄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여상한 곡 소개가 끝나고 봄날과 벚꽃을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이어졌다. 그와 같이 있으면 불편했고, 또 마음이 놓였다. 행선지조차 모른 채 떠나는데도 불안하지는 않다는 게 그 증거였다. 도로 위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만이 이곳이 수렁이 아님을 알게 해줬다.

이렇게 가다가 어디쯤에 멈춰설까를 생각했을 즈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해왔다.

“도착하면 눈 감으셔야 해요.”

이제껏과는 사뭇 다른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눈 떠도 된다고 하면 그땐 무조건 하늘을 보세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백성현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면 갈수록 빛은 옅어져갔다. 그와 단 둘이서 후미진 곳으로 간다는 것은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나름 구획된 것처럼 보이던 주변 경관도 점점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뒤에야 지유환은 차를 세웠다.

“이제 눈 감으세요.”

지유환이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백성현은 순순히 눈을 감아 내렸다. 조수석 문이 열렸을 땐 풀내음이 코끝을 어지럽혔다.

다리를 내어 디딘 땅은 무른 감이 있었다. 지유환은 자신의 옷자락을 쥐여 주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백성현은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눈을 꼭 감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은 것만으로도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 와있는 듯했다. 그 세계의 유일한 인도자는 지유환이었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커다란 등에서 향기가 났다. 백성현은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버렸다.

“눈 뜨셔도 돼요.”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백성현은 잠시간 눈을 감고 버티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말갛게 웃고 있는 지유환이었다. 그는 조용히 하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보였다. 백성현은 그제야 약속했던 것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눈 안에 더디게 들어왔다.

“…….”

올려다본 하늘에 넘쳐흐를 듯한 달이 걸려 있었다. 그 흔한 달무리조차 없는 밤이었다. 그 아래로 아름드리벚나무가 몇 그루나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수많은 가지 위로 얼마나 많은 꽃들이 움텄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달큰한 냄새가 날 정도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아…….”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꽃잎은 나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달빛을 받은 꽃잎에서는 달의 향기가 날 것만 같았다.

“형이 쓴 글에 꽃구경을 해본 적이 없다고 적혀있어서요.”

“…….”

“저만 아는 비밀장소였는데,”

“…….”

“이제는 형이랑, 저만 알아요.”

지유환의 창백한 얼굴이 달빛 아래 빛났다. 백성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광경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백성현은 그에게 충동적으로 묻고 말았다.

“너는 생일이 언제야?”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그는 순순히 답해왔다.

“12월이요. 형은요.”

백성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 생일은 한참 멀었어.”

같이 하늘을 응시하던 지유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 이런 날에 태어난 사람도 있겠죠. 그 사람은 생일마다 벚꽃을 보겠어요.”

백성현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말에 왜인지 목이 메여왔다.

“…그렇겠다.”

“생일에 벚꽃이 만발한다니. 부럽네요. 12월엔 죄다 얼어붙잖아요.”

그런 말을 하는 지유환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불쑥 익숙한 노래 가사가 머리 위를 스쳤다. 백성현은 마음속으로만 더없이 오늘과 잘 어울리는 노래 가사를 조심스럽게 읊어보았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지유환은 고개를 들어 나무초리의 끝까지 만발한 벚꽃을 살펴보고 있었다.

- 사랑하는…….

혼자만의 노래가 서서히 멎었다.

백성현은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선 그를 눈에 가득 담았다. 휘날리는 꽃잎 아래의 그는 아무 말 없이도 운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살아가면서 이 장면을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

저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좋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니, 행복했다.

백성현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를 확인하고 입모양으로만 작게 말했다.

“나는 너를. 정말로…….”

이윽고는 고백이 새어나가 버릴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아하나 봐, 유환아. 소리가 되지 못한 고백이 목 안에서 산산이 부서져내려 심장 언저리에 내리꽂혔다. 그게 숨도 못 쉴 만큼 아프고 뜨거워서 백성현은 환하게 웃었다. 그냥 그러기로 했다.

최초의 생일 선물이 이렇게나 아름답다. 만발한 벚꽃 아래 서 있자니 드디어 봄이었다.

백성현은 잠시 잊고 있었던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 생일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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