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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청주파수 (4/22)

4. 가청주파수

* * *

이제껏 연인이라 불렀던 이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길고 피부가 희었다. 백성현은 그런 이들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해왔었다. 불편한 두근거림보다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이 좋았다. 사랑도 일종의 이야기와 같아서 발단과 전개, 절정의 단계가 있고 감정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버리면 그 뒤로는 소강하기만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백성현은 언젠가 소강해버릴 마음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발단과 전개 그 언저리 쯤에 머무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미지근한 연애를 해왔다.

백성현은 불도 켜지 않은 단칸방 구석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몇 시간 전부터 갖은 노력을 했지만 좀처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작은 창에서 스며 나오는 새벽빛을 쫓았다. 곧 있으면 동이 틀 모양이었다.

“망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백성현이 나직한 숨을 뱉어냈다. 자꾸만 그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지 버튼을 누르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학교 밖에서 보니까 새롭네요.

근사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는 그런 말을 해댔다.

- 밝은 계열 옷 입은 건 처음 봐서 그런가. 엄청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던 지유환의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 놀란듯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웃어주던 얼굴. 분명 그에게는 별 것도 아닌 말일 것이었다. 태생이 다정한 사람이니 그런 칭찬쯤은 일상적인 언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며 거울 앞을 서성거렸던 아침의 분주함을 보상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제가 한 음식을 처음 먹어본 사람이, 형…이에요.

- 안 그래 보이는데 무른 구석이 있어요.

기억이 단편들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백성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참았다. 아무렇지 않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더니 말을 놓으라고 하질 않나, 먼저 형이라고 불러오기까지 했다.

- 앞으로도 이렇게 해주세요.

그러고는 무뚝뚝한 표정을 허물었다. 그런 표정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마치 특별한 존재라도 된 듯한 오해를 하게 했다.

백성현은 매트리스 위를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버겁다고 생각하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여자친구…… 있으려나.”

그냥 그런 것들이 궁금해져왔다. 백성현은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매력적이고 다정한 사람이라서 지유환이 푹 빠져 있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비록 사소한 오해를 해버리고 말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지, 하며 넘길 수 있었다. 집요하게 탐색해오는 눈빛이나 웃음기를 거두고 다가오던 몸짓 같은 것들도, 모두 잘못된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고.

“…….”

그렇게 생각하면 쓸쓸해졌다. 홀로 남은 새벽이 더 초라해졌다.

“어쩌자는 거야…….”

혼자서만 바쁜 마음이 끓어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아침은 먼 세상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백성현은 어느새 화요일과 금요일을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버렸다.

* * *

강의실 내부는 어수선했다. 백성현은 늘 앉던 자리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학생들이 몰려있는 블랙 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벌써 몇 명씩 둘러앉아 조원은 몇 명씩이냐, 제출 기한은 언제냐를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문예 강의도 어김없이 조별 과제를 하는 모양이었다.

블랙 보드에 붙어 있는 A4 용지 위로 나열된 학생들의 이름 옆에 각자 몇조인지가 적혀 있었다.

- 백성현 : 2조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백성현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지유환의 이름을 찾았다.

- 지유환 : 2조

교수도 백성현이 그의 노트테이킹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같은 조가 된 것 같았다. 안도의 숨을 내쉰 백성현의 옆으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희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명단을 훑는 손의 주인을 알아내기 위해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땐 무표정한 얼굴의 지유환이 서 있었다. 백성현은 자리에 멈춰섰다. 반가운 마음이 고개를 불쑥 들어와서 당장이라도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은 천천히 내려가다가 백성현의 이름에서 멈추었다. 고작 몇 칸 아래가 그의 이름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같은 조가 된 걸 확인한 것 같았다. 지유환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같은 조네요.”

“…….”

“다행이다.”

스치듯 했던 새벽의 다짐을 비웃듯 심장이 놀란 것처럼 뛰어왔다. 백성현은 멍하니 지유환을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친 그가 입모양으로 인사를 해왔다. 그 장면을 또 다른 새벽에 몇 번이고 떠올리고 말리라는 것을 백성현은 직감하고 말았다.

강의 시작 시간이 되자마자 들어온 교수는 출석을 부른 뒤 곧바로 조별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는 무작위로 추첨되었으며 혹시라도 구성원이 무임승차와 같은 염치없는 짓을 하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교수실로 찾아오라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에 왁자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면서도 같은 조가 된 이들을 둘러보기 바빴다. 백성현의 조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은연중에 상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 오갔다.

조원은 총 다섯 명이었다. 국문과 신입생이라고 소개한 여학생과 지난번에 F가 떠서 재수강 중이라는 남학생, 복학생 한 명까지. 백성현을 제외하고 모두들 국어국문학과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백성현이라고 합니다.”

“국문학과세요?”

“과는… 정치외교학과요.”

그가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쏟아졌다.

“정외과인데 이 강의 들으시는 거 처음 봐요.”

“우와, 필교도 아니실 텐데.”

지금이야 다른 확실한 이유가 있지만 애초에 이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수강 신청이 망했기 때문이었다. 백성현은 의례적으로 조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나 학번을 묻는 겉핥기식의 대화는 금방 끝이 났고 지유환의 차례가 되었다. 조원들은 묘하게 차분해진 기색으로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지유환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국어국문학과 지유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간단한 소개에 백성현의 맞은편에 앉은 복학생이 분위기를 허물 듯 장난스럽게 말해왔다.

“에이,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번에 문동 봄호에 글 실린 거 잘 봤어요.”

“아, 저도 그거 읽었어요. 엄청 좋던데.”

그제야 백성현은 지유환을 향한 눈빛들이 반짝거린다는 것을 눈치챘다. 문동이니 봄 호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가 좋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지유환이 대강 분위기를 파악한 뒤 감사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고 나서야 본격적인 과제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어떤 시를 발제할 건지부터 정하고 역할분담을 하면 될 것 같아요. 적절한 길이, 반복구의 사용, 독창성이 다 드러나는 시가 뭐가 있을까요?”

조별과제의 주제를 읊은 남학생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지유환에게로 돌렸다. 백성현은 그들의 대화를 적당히 간추려 타이핑했다. 지유환은 턱을 괸 채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길이/반복구/독창성 면으로 발제할 수 있는 시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인지 조원들의 시선은 하나 둘 씩 자연스럽게 지유환에게로 모여들었다. 백성현은 잠자코 모니터만 보는 지유환을 위해 눈치껏 한 줄을 더 써넣었다.

- 음… 너한테 물어보는 것 같아.

그 문장을 본 지유환은 소리 없이 웃으며 조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제를 하려면 어느 정도 시 분량이 있어야 할 거예요.”

“맞아요. ppt도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ppt로 다룰 만큼 긴 시가 별로 없을 텐데…….”

여학생이 맞장구를 쳐왔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입모양을 바라보았다. 말을 할 때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습관이 있는 것인지 입모양이 불분명했다. 백성현은 그녀의 말도 옮겨 적기로 했다.

- ppt로 다룰 만큼 긴 시가 별로 없을 것 같대.

예상대로 모니터를 흘긋 바라본 지유환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외국시 발제는 어떠세요. 비교적 장시가 많고 신선하니까.”

그의 의견이 나오자 조원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순식간에 발제의 초안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간단히 방향만 잡아줬을 뿐인데도 진행 속도는 일사천리였다. 외국 작가의 이름과 시 제목이 분주히 책상 위를 오갔다. 어느 정도 의견이 모아지자 조장을 맡은 복학생이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애드거 앨런 포 <갈가마귀>로 결정된 거죠?”

다들 괜찮다는 분위기였지만 백성현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가 타자를 쳤다.

- 괜찮을까???

자료조사를 맡게 된 백성현은 저 작품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나름의 불안함을 담아 물음표를 세 개나 쓴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백성현과 눈이 마주친 지유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노트북을 가져가서 뭔가를 타이핑했다.

- 도와드릴게요. 같이해요.

강의 시간에 필담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백성현은 도리질을 치고 키보드를 다시 가져왔다.

- 아니야 괜찮아 내가 할 일_

백성현이 열심히 타자를 치는 와중 지유환의 커다란 손이 키보드 위를 침범해왔다. 가만히 얼어붙은 백성현의 손을 피해 기다란 손가락이 자판을 하나하나 꾹꾹 눌렀다. 그가 곁눈질로 보며 한 손으로만 타자를 치고 있는 탓인지 가끔 손마디가 얽히기도 하고 손가락이 손등을 스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백성현은 숨을 죽였다.

- 같이 해요.

그는 온점을 치자마자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턱을 괸 채 무료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도와준다고 하면 고마운 일이긴 했다. 해본 적도 없는 시에 관한 자료조사를 혼자서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뻔했다. 제대로 시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백성현은 망설이다가 지유환의 오른팔을 톡톡 두드린 뒤 작게 말했다.

“……고마워. 잘 부탁해.”

그제야 지유환이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내내 노트테이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조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별 과제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세 명이 주로 말을 했고 백성현은 대화 내용을 옮겨 쓰기 바빴으며 지유환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둘이서 대화를 할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여러 명이 있을 때는 의사소통에서 한 템포 뒤처지는 것만으로 그들과 분리되는 어떠한 선이 생긴 것만 같았다.

섞여들지 못한다고 해서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맥락과 상관없는 말을 해도 아무도 몰랐으니까. 지유환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백성현을 보다가 또 한 손으로 툭툭 자판을 눌렀다. 백성현은 일찌감치 두 손을 터치패드 쪽으로 얌전히 모은 뒤였다.

- 우산은 언제 돌려주실 건가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빌렸던 검정색 장우산을 돌려준다는 걸 매번 잊어버려서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었다. 백성현은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움직였다.

- 금요일.

그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던 듯 지유환이 간결하게 답했다.

- 내일.

내일. 고작 그 두 글자에 백성현은 두근거려야 했다. 금요일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어느 순간부터 설레는 일이 되어있었다. 그게 정확히 언제를 기점으로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을 꼬박 새운 새벽일 수도 있었고, 그 언젠가 눈 맞춤이 오갔던 날일 수도 있었다.

- 응. 알겠어.

백성현은 묘하게 간지러워진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내일도 그를 볼 수 있다.

* * *

“진지하게 말이지.”

“뭐.”

“백성현은 대체 무슨 낙으로 사냐?”

수업이 끝나기 전에 전화를 걸면 모조리 무시한다는 것을 드디어 터득한 성준혁은 제일 마지막 교시가 끝날 때쯤에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 백성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술을 마시자는 거면 나가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카페에서 만난 상태였다. 저렇게 불만 가득한 얼굴로 조잘조잘 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술을 못 마시는 게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백성현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왜 또 시비야.”

“아니 그렇잖아. 술도 안 좋아하고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도 아니야. 너 요즘 알바도 구한다고 하지 않았냐?”

“알바는 이미 구했고 너는 술 좀 줄여라. 그러다 지방간 걸려.”

“야, 그렇게 치면 대학생들 다 지방간 환자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수능을 끝으로 입시로부터 해방되고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짐과 동시에 대부분의 이들이 무지막지하게 마셔댔다. 마치 그것이야말로 두 번 다시 안 올 청춘을 즐기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백성현은 그의 스무 살을 떠올려보았다. 그땐 술값만큼 아까운 게 없었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만 했었다. 술자리에 나갈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나라도 더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마음껏 낭비해도 되는 시간이라. 그런 게 과연 있었나 싶었다.

백성현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여상히 물었다.

“취업 준비는?”

“그런 얘기를 할 거면 술을 마시러 갔어야지.”

“잘 안 되냐?”

“취준 할수록 그냥 장사나 할까 싶다니까. 이건 뭐 전공 살릴 수 있는 회사도 거의 없고 자소서랑 면접만 죽어라 파고 있으니.”

괜히 사람들이 치킨집 사장하려는 게 아니더라, 하고 덧붙이며 성준혁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곧 그가 흡연부스를 향해 고갯짓을 해왔기에 백성현은 다녀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백성현에게 있어 흡연욕구는 참으려면 참아지는 정도였다. 예전부터 한 개비 씩 피던 버릇 때문에 술에 취하면 유독 생각이 날 뿐 그 외에는 거의 손에 대지 않았다.

성준혁이 흡연 부스에 다녀오는 동안 백성현은 오늘 한 필기를 다듬기로 했다. 그는 적어도 수업 당일을 넘기기 전에는 늘 필기를 고쳐서 보냈다. 오늘 필기는 대부분 조별 과제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녹음본을 다시 들을 것 없이 오자나 탈자만 살피면 됐다. 백성현은 빠르게 문서를 훑고 파일을 넘겼다.

- 0324 문예의 이론과 실기 I 필기.hwp

- 오늘 자 필기 정리해서 보내. 혹시 보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줘

이렇게 파일을 보낼 때마다 지유환은 늘 늦지 않게 답장을 해줬다. 이번에도 파일을 보낸 지 1분도 채 안 돼서 새 알림창이 떴다.

- 오늘도 감사합니다.

- 수업 늦게까지 있으셨던 걸로 아는데 푹 쉬세요.

백성현은 미리보기로 떠있는 메시지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감사합니다, 푹 쉬세요.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별 것도 아니었을 말들이 이렇게 다정하게 느껴진다는 게 이상했다.

“뭐야? 누구랑 카톡해?”

반대편 자리에 구부정하게 앉은 성준혁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의 시선은 백성현의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성현은 뜨끔한 마음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냥 같은 수업 듣는 후배.”

“아아. 근데 성현아, 너 소개 받을 생각 있냐?”

“소개?”

“어쩌다가 내 폰에서 네 사진을 봤는지 계속 소개 시켜 달라고 해서. 어떠냐? 착하고 똑똑한 애긴 한데. 나랑 같은 동아리였어.”

성준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핸드폰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서 답장을 보내고 싶었다.

“너 만나는 사람 없잖아. 맞지?”

“…….”

“딱히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거 아니야.”

초조한 듯 손톱 끝으로 액정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백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준혁을 바라보았다. 잘난 얼굴 썩혀서 뭐하냐, 좋은 사람이다, 하는 말들은 죄다 흐릿하게 들렸다.

성준혁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상대도 좋은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늘 아닌 척하면서 자신을 챙기려 들었으니까. 백성현은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인생은 단조롭고 바쁘기만 해서 별 재미도 없는 인생처럼 보인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암튼 생각해 봐. 연애 안 한 지도 벌써 2년쯤 됐지? 그쯤 되면 사람이 고플 때잖냐.”

그 뒤로도 성준혁은 최근에 본가에 갔다 온 얘기, 면접 다녀온 얘기 등으로 한참을 떠들다가 돌아갔다.

백성현은 집으로 가는 길에 대화창을 켜서 지유환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대부분 필기를 보내주고 그에 고맙다는 대답뿐인 전형적인 대화밖에 없었지만 고맙다는 말이 듣기 좋아서 쉽게 질리지 않았다.

푹 쉬라는 말에 적당한 답장을 몇 개쯤 떠올리던 백성현은 한 자 한 자 눌러 답을 보냈다.

- 고마워. 너도 푹 쉬어.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시야 끝에 달이 걸려서 충동적으로 한 마디를 더 보내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 잘 자.

왜인지 보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오는 것도 같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잘 자라는 문자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었다. 조마조마하게 말풍선을 바라보는 가운데 1이 사라졌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 형도 잘 자요.

우뚝, 하고 백성현의 발걸음이 멎었다.

* * *

어쩌면 불가항력이었다. 백성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의 이름을 검색해버리고 말았다.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자마자 웹문서들이 쏟아졌다. 백성현은 그중에서 한 문학평론가의 시집 해설을 클릭했다.

- 지유환 시인의 언어는 한없이 어둠에 가깝다. 그는 가장 절망적인 지대에 홀로 서서 썩은 영혼들을 위한 시를 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평론가는 지유환을 두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축축한 죽음을 불어넣는 시인, 피부를 어루만져주기보다 뼈를 짓누르는 시인이라고 일컬었다. 문장만 봐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성현이 밤낮으로 신발장 위에 덩그러니 놓여만 있던 서점용 종이봉투를 단번에 뜯어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가 써내려갔을 활자를 직접 눈에 담아야 저 평론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빳빳한 표지를 넘겨 조심스럽게 시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에는 도무지 열감이란 것이 없었다. 문장 하나에 오래도록 시선이 붙들리기도 했고 다음 페이지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의 내면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손끝까지 심장박동이 미쳤다. 아무 허락도 받지 않은 주제에 그의 언어의 무덤에 무단침입한 도굴꾼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더는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핏기 없는 하얗고 반듯한 얼굴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렇게나 견고해 보이는 사람이 이런 글을 쓴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유환 같은 사람의 시는 그저 다정하고 따뜻할 줄로만 알았다.

백성현은 무릎을 세워 앉은 뒤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시에 있었던,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한 듯한 표현들이 눈에 밟혔다. 백성현은 그 상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의 눈빛이 오버랩 되었다.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던 낯선 눈빛.

그럼에도 지유환은 절대 죽음을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절망적인 시어들을 보며 읽는 이가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그가 써낸 하나의 진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에 곤두서던 것은 시각도, 후각도 아닌 청각이었다고. 세상이 사망선고를 받은 듯 날카로운 기계음이 머릿속을 할퀴었다고. 가청주파수는 그런 식으로 떨어져가는 거라는 담담한 서술이 내내 떨쳐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쓴 거야.”

가청주파수.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

“네 시는… 뭐가 이렇게 아파.”

그의 시에서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 거기서 살아갈 능력.

지유환은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딘가로 추방당한 사람들을 둔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처럼. 마치 그게 낮은 지대에서 같이 살아가자는 것처럼 들려서 백성현은 오래도록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서의 주파수라고 했던가. 백성현은 처음으로 정말로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글을 쓰게 될 때까지 그는 얼마 동안 홀로였던 걸까.

어떤 밤들을 보냈던 걸까.

“…….”

백성현은 창문 너머의 반쪽짜리 달을 보며 어둠을 생각했다. 아니, 같은 달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를 떠올렸다.

사람이 고플 때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솟구치는듯한 감정이 버거웠다. 들켜선 안 되는 마음이 요동을 쳤다. 백성현은 이 모습 그대로는 그에게 갈 수 없을 테니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아픈 글을 쓴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쓰다듬어 주고,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숨이 막히도록 자욱했던 어둠이 어느덧 앙상하게 말라버릴 때까지, 그냥 아무 말 없이 몇 번이고. 태어나서 누굴 이렇게 위로해주고 싶은 것은 처음이었다.

백성현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24년을 살아오면서 같은 성별은 가진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백성현은 소리 없는 밤을 지샜다. 머릿속이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잠이 안 와.”

지금의 마음은 호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나. 그 벗어난 마음이란 것이 정상적인 범주로 금방 되돌아올 수 있을 정도인가. 역시 이런 감정은 이상했다. 그가 징그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피부를 쿡쿡 찔러오는 것처럼 따끔했다.

어쩌면 모든 게 착각일 수도 있었다. 인간적인 호감에서부터 기인한 감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불쑥 치솟아 오르곤 하는 투명한 신음 같은 것들을 두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치부하기에는 못내 서러웠다. 백성현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옅은 숨을 뱉어냈다.

“하아…….”

좀처럼 정답을 적어내지 못하겠는 답안지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무엇하나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시험이라는 것은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지언정 답을 걷어갔었다. 그렇게나 간단히 끝났었다. 하지만 이 시험에는 종료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백지 같은 아침이 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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