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권
1. 아웃사이더
2. 공회전
3. 은유법
4. 가청주파수
5. 초봄
6. 밤은 속삭인다
7. 해열
1. 아웃사이더
* * *
“개강이 벌써 내일이라니…….”
모든 것이 순조롭게 망해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수능을 치고 대학에 들어가기 무섭게 국가의 부름에 따라 군대에 다녀왔는데 정신차려보니 무려 24살이나 먹은 상태였다. 실상 그는 고등학교 입학식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를 정의내린 바 있었다.
백성현은 수강신청을 망친 제 시간표를 내려다보며 턱을 긁적였다. 수강신청 날짜를 잘못 안 나머지 그는 수강정정기간 동안 남들이 버린 과목들만 이삭줍기하는 아낙네마냥 주워담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운이 좋아 전공과목들을 건지긴 했지만 교양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 있긴 하려나. 그는 과대조차 누구인지 모르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OT는 물론 MT 같은 과 행사에도 일절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유일한 친구 성준혁도 이번 학기부터 휴학계를 낸 뒤 취업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았다. 별안간 올해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의 학번을 떠올려 본 백성현은 질린 듯한 얼굴을 했다.
신입생 때는 고학번 선배들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이제 제가 그런 입장이라 생각하니 묘하게 입맛이 쓴 백성현이었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 * *
묘하게 정문 앞이 북적거린다싶었는데 신입생을 대상으로 동아리 홍보물이며 음료수 같은 것들을 나눠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성현은 표정만 보고도 한눈에 새내기들과 헌내기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마침 그의 옆으로 상기 된 얼굴의 여학생이 스쳐 지나갔다. 저렇게나 들뜬 얼굴이라니. 대학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5월이 되어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백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음료수를 나눠주는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신입생이신가요?”
만면에 미소를 띤 여자가 백성현을 향해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고단할 대학 생활인데 공짜 음료수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백성현의 대답에 왜인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본 여자는 환한 얼굴로 음료수를 손에 쥐며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과세요?”
“정외과요.”
뭘 이런 것까지 묻나 싶었지만 백성현은 순순히 제 신상을 털어놓았다. 여자는 순간 음료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잘됐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눈을 빛냈다.
“저도 정외과예요! 혹시 학회 들어오실 생각 있으시면,”
순간 여자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제 뒤편을 바라본 백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한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백성현은 언짢은 얼굴을 했다.
누가 봐도 잘난 얼굴이었다. 백성현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목구비 중에서도 옅은 쌍꺼풀이 진 눈과 남자답게 솟은 콧대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웬 사내놈의 얼굴을 이렇게 샅샅이 보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분명 무지하게 잘생긴 얼굴인 건 확실했다. 그 잘난 놈이 백성현의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 아! 음료수, 드릴게요. 신입생이시죠?”
방금 전 백성현과 대화를 나누던 여자는 얼빠진 얼굴로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음료수를 놈에게 내밀었다. 아아, 저게 마지막 남은 음료수일 텐데.
백성현의 애틋한 시선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음료수를 낚아채듯 받은 놈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방금 봤어? 엄청 잘생기지 않았냐?”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백성현은 애처롭게 뻗었던 손을 거두고 쓸쓸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여자는 뒤늦게 음료수가 다 떨어졌음을 깨닫곤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이 여자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에 백성현은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공짜 음료수조차 녹록지 않은 개강 첫날이었다.
* * *
개강 첫 주이니만큼 그다지 출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옛 버릇이 어디 가지 않아서 백성현은 첫 수업 10분 전부터 강의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공부에는 도가 터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올 때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아 학생 대표로 선서를 했으며, 휴학 직전까지는 정치외교과의 수석을 지켰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무려 수강 신청 날짜를 잘못 알았다는 것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흠이었지만 스물네 살이나 먹어서 그런지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그는 이번 과탑은 좀 힘들겠다 싶으면서도 못하면 또 어떤가 싶은 헐렁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좋은 쪽으로의 변화는 아닌 것 같았다.
‘문예의 이론과 실기 I’
흰 보드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글씨를 보며 백성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최대한 1교시와 2교시만 피하자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과목들을 주워 담았더니 그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던 교양까지 듣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배우게 될 지 지금의 그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과목명 끝에 붙은 1은 또 뭐란 말인가. 2도 있다는 걸까. 의식의 흐름대로 이것저것을 생각하다가 백성현은 자리에 엎어졌다.
창가 자리라 바로 바깥이 보였다. 오늘은 꽤 날씨가 좋은 듯했다. 눈을 감자 앞자리 여학생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너 그거 들었어.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이번에 우리 학교 들어왔다며. 아마 이 수업도 들을걸. 의식이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상한 부분에서 예민한 백성현은 수능 전날도 숙면을 취했으면서 오랜만의 등교를 앞두고 새벽 3시까지 담뱃불을 태웠으니 졸릴 만도 했다.
누군가 옆에 와서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성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 한 채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묘하게 사위가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때마침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고등학교 때의 버릇을 아직까지도 채 다 버리지 못한 백성현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 끝에 음료수가 걸렸다. 오늘 아침 받지 못한 그 음료수였다.
백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흘끗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잘난 놈-음료수 스틸해간 놈-이 앉아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백성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백성현도 딱히 제가 먼저 나서서 아는 척할 성격이 되지 못했기에 잠자코 정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교수는 3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꽤나 젊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강의계획서를 앞에서부터 돌리고 나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는 동안 백성현은 제 손에 든 강의계획서를 훑어보았다.
고전 명작을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하는 과제도 있었고 마르크스주의나 신역사주의와 같은 사상에 대한 발제를 하는 유형의 과제도 있었다. 백성현은 생각했다. 이게 과연 문예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백성현.”
“네.”
대답을 하고 나서도 그의 심도 깊은 고민은 계속되었다. 꽤나 재밌어 보이는 주제들이 있기도 했는데 결국은 글을 쓰는 것으로 귀결되는 강의였다. 시나 소설을 직접 써보는 과제도 있었다.
“……아, 그래서.”
뒤늦게 강의 제목과 목차를 연결 짓는데 성공한 백성현은 차분히 언제부터 수강철회기간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평문이나 발제문은 기계적으로 써낼 수 있었지만 창의력을 요하는 글쓰기에는 젬병이었다. 창작 욕구도 제로에 가까웠다. 그는 대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평생 분의 창작 고통을 느낀 사람이었다.
물론 졸업을 하긴 해야 하니 철회가 쉬운 판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철회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현진.”
교수는 계속해서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백성현은 다음 주에도 자신의 이름이 저 명부에 올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왠지 아닐 것 같았다.
“지유환.”
“예.”
가까운 곳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바로 옆이었다. 그가 호명되자 왜인지 일순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기분 탓이려니 하려 해도 앞자리에 앉은 이들까지 흘긋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것이, 뭔가 유명인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혹시 아이돌이나 배우 같은 건가. 백성현은 워낙 연예계에 문외한이었기에 진위 판단은 할 수 없었지만 저 얼굴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너무나 납득이 가서 문제였다. 같은 남자 얼굴 보면서 감탄이나 하고 앉았다니. 사실 백성현도 제 얼굴에 불만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 학기에 꼭 몇 번씩은 고백을 받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는 여학우들이 여럿이었다. 가장 최근의 연애가 끝났을 때, 그녀가 떠나가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 넌 얼굴값을 해서 싫어, 였으니 꽤나 신빙성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저 놈 얼굴은 그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백성현은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잘 생겼네.”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린 거라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괜히 멋쩍어진 백성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햇빛이 꽤나 세졌다고 생각하며 창문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강의 소개에 대한 흥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햇빛을 등지자니 시선이 향할 곳이 한 곳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백성현의 두 눈에 지유환의 얼굴이 들어찼다.
햇빛 아래 드러난 피부가 더욱 말갛게 보였다. 녀석은 도통 표정이 없었다. 그럼에도 올곧은 자세로 몇 분이고 앉아있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뒤에서부터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아이돌이 맞는 것 같았다.
“실제로 보니까 더 멋있는 것 같아.”
“이미 등단했다고 했지? 나는 언제 등단하나.”
“죽기 전에는 하겠지, 뭐.”
잔뜩 소리를 죽인 대화였지만 바로 앞에 앉은 백성현에게는 그대로 다 전달이 되었다.
등단이라니? 백성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마 등단이라는 건 소설가나 시인이 됐다는 얘기일 텐데. 아이돌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 수업이 아마, 국문과 학생들한테는 필수 교양이었죠?”
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기 중을 비집고 들어왔다. 백성현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교수는 출석부를 다시 한 번 꺼내어 슥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국문과 학생들이 가장 많네요. 요즘 여러분들의 진로는 어떻게 되나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보는 건데, 나중에 선생이 되고 싶은 거예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예요?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겠죠.”
그녀의 물음에 대해 모두가 한 마디씩 하고 있을 때 지유환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물론 그 둘 중 해당사항이 없는 백성현도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네요. 이미 등단한 사람도 보이는 것 같고.”
교수는 뒷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지유환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쏠렸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시선을 던지든 간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
교수는 가볍게 화제를 바꿔본 것뿐인지 다시 강의 목차 설명에 열중했다. 지유환에게 몰렸던 관심도 차츰 분산되기 시작했다. 백성현은 제 옆에 앉은 이가 아이돌이나 배우가 아닌 작가였다는 것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그는 꽤나 유명인사인 것 같았다. 본인은 관심조차 없는 것 같지만.
뭐,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백성현은 지유환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저 놈이 이상할 정도로 잘생겼다고는 해도 그냥 같은 인간이었다. 여자면 몰라도 남자에게 이런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그 날 수업은 30분을 못 채우고 끝났다. 끝까지 백성현과 지유환은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고, 또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 *
슬슬 아르바이트를 찾아봐야 했다. 백성현은 군대 가기 전 제일 마지막으로 했던 브런치 카페 알바를 떠올려봤다. 그곳의 남자 사장은 이상하리만큼 백성현에게 시급을 높게 쳐주고 밥도 잘 챙겨줬었다. 다른 알바를 구하려는 낌새만 보이면 계속해서 시급을 올려주는 게, 군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브런치 카페에 뼈를 묻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시급에 눈이 멀어 계속 브런치 카페 알바를 한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백성현이 머리를 짧게 깎고 입대를 알리며 이제껏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을 때 남자 사장은 눈물을 보이며 술을 한 잔 같이 하자고 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백성현은 끔찍한 경험을 했었다. 자신이 시킨 양주 몇 잔에 꼴아버린 사장이 그를 주무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 허벅지를 주무를 때만 해도 이 사람이 왜 그러나 싶었는데 그가 자신의 엉덩이로 손을 옮겼을 때 백성현은 그를 내동댕이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의도가 담긴 손이었다. 호모포비아는 아니었지만 딱히 남자에 취향이 없었던 백성현은 그를 흠씬 패주었고 깽 값으로 그 달 알바비를 다 꼴았다.
그 후로 교훈을 얻은 것이 있다면 돈에 눈이 멀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남자가 엉덩이를 만지면 기분이 꽤 많이 더럽다는 것뿐이었다.
다음 수업까지 2시간 정도가 남아있던 참에 교내 카페에 간 백성현은 삼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샀다. 군대 가기 전만 해도 이천 원이었는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백성현이 낮게 한숨 쉬었다.
교내 카페 옆에 걸린 게시판에는 이런저런 홍보물들이 붙어있었다. 개중에는 알바를 구하는 구인광고도 있었다. 언어 과외를 구하는 글도 있었고, 필기 알바를 구하는 글도…….
“필기?”
공부 귀신 백성현은 필기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존재였다. 남녀공학 고등학교 때를 다닐 때부터 그의 노트 필기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대리 노트테이킹, 주 2회. 월급 150…….”
게시물에 손까지 짚어가며 문구 하나하나 뜯어보던 백성현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주 2회면 한 달이라고 해 봤자 8회 정도인데 월급이 150만 원이었다. 실화인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파격 조건이었다.
“요청사항, 필기 해주실 분과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홀린 듯이 게시물 하단에 적힌 핸드폰 번호에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평균 학점과 이름, 나이를 쓰고 게시물에서 요구한대로 시간표까지 첨부한 백성현은 메시지 전송버튼을 누르곤 미지근해진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아메리카노가 3천원이라는 게 알게 뭔가. 이 아르바이트만 따내면 교내 카페 주인이 헤까닥한 나머지 아메리카노의 가격을 5천원으로 올린다고 해도 사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2분쯤 지났을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우웅, 하고 울렸다.
- 대리 노트테이킹 언제부터 가능하신가요?
백성현은 하게만 해주신다면 당장 지금부터도 가능합니다, 라는 말을 최대한 순화시켜 답했다.
- 편하실 때부터요.
- 오늘은 괜찮고, 노트테이킹은 이틀 뒤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틀 뒤라면 어떤 강의 말씀하시는 건가요?
- 마침 같은 강의를 듣고 계신 것 같아서요. 문예의 이론과 실기 I 강의입니다.
백성현은 수강 철회 계획을 산뜻하게 지우며 고용주에게 보낼 학생증과 통장 사본 파일을 뒤적였다.
- 예. 알겠습니다.
* * *
대학교란 철저히 새내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라서 웬만해서는 -과 행사에 열심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2학년으로 밀려난 뒤부터는 개강총회나 종강총회 따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성현도 그러했다. 심지어 그는 1학년 때 멋모르고 나갔던 개강총회에서 선배들의 술 강권에 잔뜩 취한 뒤부터는 술자리에 나가지도 않게 되었다.
백성현은 당시 신입생들 중 유독 도드라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본의 아니게 그 해 숱한 관심을 받았다. 백성현은 제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러려니 했었지만 신입생 환영회나 입학식 때와 비교해서 술자리에서 받은 관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백성현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여자 선배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뿐더러 술 게임을 명목으로 여기저기 지분거리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 때문에 백성현은 술자리에 대한 환멸이랄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성준혁과 친한 것은 신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성준혁은 집행부니 학회니 여기저기 열심히 다니는 몇 안 되는 소수 중 한 명이었고, 과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이야 성준혁이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된 백성현을 조금씩 챙겨주면서 친분을 쌓았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취업 준비를 명목으로 반 년짜리 휴학계를 냈으니, 백성현은 무료할 따름이었다.
- 너 빨리 복학해라.
별안간 심술이 돋은 백성현은 성준혁에게 화내는 듯한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했다. 동시에 그의 핸드폰이 카톡! 하고 울었다.
- 성현아, 너 복학했어?
백성현은 의아한 눈으로 카톡을 보낸 이의 이름과 프로필 사진을 훑어보았다.
“남영준?”
직접 그 이름을 발음해보고 나서야 백성현은 어렵사리 기억 한 편에 묻혀있던 인물을 떠올려냈다. 몇 년 전쯤 안면만 튼 이들 중 한 명이었다.
- 응.
백성현은 그 뒤로 딱히 덧붙일 말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답장을 보냈다. 보내자마자 메시지 옆의 1자가 사라졌다.
- 너 진짜 개강총회도 와?
- 그게 무슨 소리
리, 까지 친 백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개강총회는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린가. 그는 절대 그런 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주워들었어?’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에게 또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준혁이가 말했었는데 애들 아무도 안 믿었었거든ㅋㅋㅋ 너 술자리 싫어하는 거 유명하잖아ㅋㅋㅋ 진짜 올 생각이면 테이블 같이 잡고 마실래?
두 번이나 메시지를 정독한 백성현이 이마를 짚었다. 성준혁 짓이었나. 성준혁은 한 번씩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루가 되게 털린 주제에 또 이런 짓을 벌인 거다. 백성현은 고민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전화는 재깍재깍 받는 놈답게 연결음이 두 번을 채 못 갔다.
- 응, 성현아. 왜?
“지금 왜란 말이 나오냐.”
-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누가 먼저 너한테 말했구나? 정규? 민석이? 아, 영준인가. 제일 입 가벼우니까.
“난 개총 같은 거 갈 생각 없어.”
그대로 백성현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기 직전이었다. 이런 패턴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성준혁은 전화가 끊어질 것을 직감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야! 너 오랜만에 복학했는데 애들이랑 안면 트고 그럼 좋잖아!
“귀찮게 안면 틀 생각 없다니까.”
- 이 새끼 방금 나한테 복학 빨리하라고 안 쓰던 이모티콘까지 보낸 주제에 말이 많네. 한 번 나가보라고! 한 번이 어렵지 계속 나가면 너도 그럭저럭 괜찮을 거라니까?
성준혁의 말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협소성은 백성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사람 사귀는 건 물론 안면 트는 것까지 귀찮은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끊어야지, 하고 다시 백성현이 핸드폰을 고쳐 쥐었을 때 수화기에서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가현이가 부탁하더라.
“…….”
- 너 그렇게 군대 가고 2년 동안 사과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고. 직접 만나서 사과한대. 그래도 한 때 사귀던 여자애잖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끝내.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백성현이 눈매를 좁혔다. 그녀는 백성현에게 얼굴값 운운하며 이별을 고했던 전 여자친구였다. 그렇게 끝나고 나서 우연히라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백성현에게 있어서는 이제 와서 마무리고 뭐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 여자에게는 꽤나 마음의 짐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다음부턴 이런 짓 하지 마. 오늘만 가고 더 이상 안 갈 거니까.”
- 넌 진짜 어쩔 수 없는 외골수다. 너 같은 새낀 진짜 첨 봐.
“가본대도 지랄이네, 이 새낀.”
- 그래. 잘 마무리하고 와라. 그래도 한 때 좋아했었잖냐.
전화는 맥없이 끊겼고 백성현은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정말 걜 좋아했었던 걸까. 남들처럼 손잡고, 입을 맞추고는 다 했었지만 지금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었다. 한 때 그 기억들을 사이에 두고 미미하게나마 존재했던 감정은 이미 모조리 휘발된 지 오래였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백성현은 오래 전 나눴던 감정이 사랑이었고 말고를 떠나서 그녀와 연인이었다는 사실 하나에 대한 예의로 개강총회에 나가기로 했다. 물론 대화를 마치면 그대로 귀가할 생각이었다.
* * *
정외과 백성현이 개총에 나온다는 사실은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워낙 술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백성현이라 그 잘난 실물 한 번 보자는 사람이 반, 진짜 잘난 얼굴이라고 설파하는 사람이 반 정도였다.
“야, 백성현이 오는 거 확실하냐? 개총 시작한 지가 언젠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뒤풀이부터 온댔어. 3학년이나 돼서 학회 설명이나 듣고 앉아야겠냐?”
“우린 들었잖아.”
“그럴 수도 있지, 이 새끼가.”
오늘 개강 총회를 하는 과가 많았기 때문에 학교 주변의 술집은 대부분 북적이고 있었다. 정외과가 뒤풀이를 하기로 한 술집에는 이미 국문과가 뒤풀이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술집이 꽤 넓었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삼삼오오 짝지어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하나둘 씩 술잔을 손에 들었다. 과대가 뒤풀이의 시작을 알리는 건배사를 읊기 시작했다.
“자, 건배!”
첫 잔은 원샷이다, 꺾어 마시는 거 걸리는 사람은 한 잔 더 줄 거다, 하는 으름장도 흔히 있는 멘트였기에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렇게 술자리가 조금쯤 무르익었을 때였다.
누군가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술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거짓말처럼 약간의 정적이 일었다.
“야, 저 사람이 백성현이야?”
누가 봐도 잘생긴 놈 한 명이 문 앞에 우뚝하게 서 있었다. 앉아서는 고개를 들어야만 얼굴이 보일 정도로 키가 크기도 했다. 술집의 조명은 어두웠지만 저 놈의 얼굴이 잘났다는 것 정도는 못 알아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민석은 그의 얼굴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백성현은 저것보다 조금 더 예쁘장하게 생긴 느낌이었다. 눈초리가 올라간 게 여간 까칠해 보이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백성현과 달리 그냥 무지막지하게 잘생겼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백지장 같은 무표정으로 술집 안을 둘러보던 놈은 긴 다리를 뻗어 정외과가 아닌 국문과 쪽으로 걸어갔다.
“국문과인가 본데.”
“세상에 잘생긴 놈들 왜 이렇게 많냐.”
푸념하듯 말한 민석은 소주잔에 소주를 채운 뒤 원샷했다.
“백성현은 진짜 언제 온대? 곧 있으면 다른 과 여자애들도 온다던데.”
“어, 어? 왔다!”
민석의 옆에서 소맥을 말고 있던 정규가 문을 가리키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호들갑 덕에 정외과 사람들의 시선이 백성현에게 몰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백성현이 술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백성현은 갑작스레 몰린 시선에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라는 생각을 하며 대충 안면이 있는 이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술집의 왼쪽은 국문과가, 오른쪽은 정외과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성현의 테이블은 딱 한 가운데에 위치했다. 백성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과대가 아는 척을 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재작년 때 뵈고 처음 뵙네요.”
백성현은 자신보다 한 학번 낮은 과대를 보며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현재 과대의 얼굴이나 이름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 그때 음료수!”
바로 왼쪽 테이블에서 자신을 향한 듯한 여자 목소리가 나서 백성현은 고개를 돌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교문 앞에서 음료수를 나눠주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백성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신입생 아니셨네요?”
음료수를 나눠줬을 때와는 달리 꽤나 짙게 화장을 한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애교 있게 웃어보였다. 백성현은 또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뭐…….”
“왠지 새로 들어온 애들 중에 안 계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잘생긴 사람은 기억 잘 하거든요.”
오히려 대놓고 이런 칭찬을 하는 건 귀여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백성현이었다. 술게임을 빙자해서 이런저런 스킨쉽을 하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아, 고마워요.”
예의상 작게 웃어 보인 백성현은 시선 끝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백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 백성현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냥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알아서 눈을 피하는 백성현이지만 괜한 오기가 생겨서 그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왜 저 놈이 저기 있지. 친구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림과 동시에 그의 표정이 미미하게 비틀렸다. 분명 이름이,
“지유환! 오랜만이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인사를 건넨 녀석은 그의 친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지유환은 어깨에 얹혀있는 손을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 떨궈냈다.
“오랜만이네.”
그럼에도 음성은 평온한 것이, 백성현은 저 놈 한 성깔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무기질적이었다. 그게 지유환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의 표정은 하나같이 빛이 바래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결코 속해있지 않은 것 같은 놈이었다. 대각선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히 시선 끝에 그 얼굴이 걸렸다. 백성현은 스스로가 왜 저 지유환이라는 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꾸 저쪽을 바라보게 됐다. 백성현은 지유환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는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지유환이라는 놈은, 묘하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아귀가 맞지 않아 들어가지 않는 퍼즐 조각 같았다. 저 혼자만 도드라져있었다.
백성현은 친하지도 않은 동기들이 잔을 채워줄 때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잔을 비워냈다. 누군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후배고 선배고 몰려들어 한 잔씩 채워준 탓에 벌써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자신은 술자리와 맞지 않았다. 벌써 족히 두 병은 마신 것 같았다.
“어, 어디가?”
백성현의 옆에 앉은 영준이 그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백성현은 입모양으로 담배, 하고 말했다. 영준은 제 옆의 여자에게 성현이는 담배 피러간대, 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에 여자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번져갔다. 백성현은 언제 합석했는지도 모를 다른 과 여자들을 무심히 바라본 뒤 흡연부스로 걸어갔다.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기에 조금씩 바닥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흡연부스에는 이미 몇몇 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폐부로 스며들어왔다. 뻐근한 느낌에 백성현은 가만히 벽에 몸을 기댔다. 어지럼증이 머리를 덮쳐왔다.
“……이래서 안 온 댔는데.”
안면을 트기는커녕 어색할 뿐이었다. 별 재미도 없고, 왜 자신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기에 한숨만 푹푹 나왔다. 역시 성준혁 놈을 조져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낸 백성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터까지 없었다.
“뭐, 되는 게 없네.”
대충 옆에 있는 사람 아무나 잡아서 불 좀 빌려달라고 할 요량이었는데 가장 가까이 있던 무리가 담배꽁초를 버리고는 우르르 몰려나갔다. 벽에 기대 숨만 고르던 백성현은 누군가 흡연 부스로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백성현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도 들지 않은 채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소매가 잡힌 사람은 멈칫하고 발걸음을 멈추더니 낮게 말했다.
“무슨 일이죠.”
상대방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백성현은 웬만해선 저보다 큰 이를 보지 못했던 터라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연한 쌍꺼풀이 진 싸늘한 눈.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무미건조한 얼굴까지.
“……아, 미안합니다. 잠깐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백성현은 손에 든 하얀 개비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왜 사과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큰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이제 보니 지유환의 담배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지유환은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입에 물고 있던 담배 끝을 백성현이 손에 쥔 담배 끝으로 가져갔다. 백성현이 손을 조금 들고 있었기에 지유환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높이는 어느 정도 맞았다. 지유환이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자 맞닿은 담배 끝에서 불이 안온하게 번져나갔다. 백성현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백성현은 필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아,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폐 안을 가득 채운 유해한 연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기만 했다. 백성현은 다시 한 번 지유환에 대한 감상을 늘려나갔다. 말수가 더럽게 없는 놈이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말 많이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유환은 자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놈인 것 같았다.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숨이 막혀왔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정치외교과 백성현 씨 되시죠.”
지유환은 정말 아무런 맥락 없이 툭 뱉었다. 백성현은 입으로 담배를 가져가던 손을 뚝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저 쪽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쪽은 국어국문과 지유환 씨고요.”
그 말에 지유환의 눈가가 설핏 좁아진다.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불쾌감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일 뵙죠.”
그렇게 말하고 지유환은 등을 돌려 부스를 나갔다. 뭘 내일 뵙는다는 말이지. 너랑 내가 왜 내일 뵙는 거냐. 이번만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백성현은 맥없는 대답을 뱉기만 했다.
“……그래요.”
그 대답을 지유환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꽤 괜찮은 놈일지도 몰랐다. 그 뒤로도 백성현은 어렵사리 불을 얻어 두 개비를 꼬박 피우고 나서야 흡연 부스에서 나왔다.
술집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고요했다. 모두가 한 곳을 보고 있었다. 백성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또 그 놈이었다. 그런데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한, 그 놈이었다.
지유환은 누군가의 머리 위로 소주를 붓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머리를 적시고 있음에도 상대방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포식자의 덫에 걸린 초식동물의 모양새였다. 소주병을 허공에서 두어 번 털어낸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똑바로 말해봐.”
지유환은 제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자에게 눈을 맞췄다.
“내 얼굴 보면서. 또박또박 말해줘야 알아들을 거 아니야.”
나지막한 목소리는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남자는 모두가 자신을 측은하게 본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어떻게 해서든 제 공포를 감추려는 듯한 발버둥이었다.
“뭐, 씨발!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래. 그 맞는 말 다시 한 번 해 봐.”
지유환은 지루한 듯 나른하기까지 한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남자는 안쓰러울 정도로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지유환이 새끼 존나 불쌍하다 그랬다 왜! 씨발, 너 보청기 없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다며? 내가 틀렸냐? 새끼, 얼굴 반반하면 뭐해, 장애인이잖아.”
백성현은 천천히 눈을 홉떴다. 그것은 추악한 말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방의 치부를 까발려 그 위에 서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유환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손에 쥔 소주병을 테이블 위로 내리쳤다.
무지막지한 파열음이 들렸다. 지유환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소주병의 파편을 맨손으로 쥐고 남자에게 걸어갔다.
“넌 항상 나처럼 되고 싶어 했지.”
“…….”
백성현은 지유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랬다.
“그게, 잘 안 된 모양이네.”
“너, 너 미쳤어?”
“생각보다 청력을 잃는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
“나처럼 될 수 있어.”
남자는 그 자리에 다리가 풀린 채 벌벌 떨었다. 지유환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 남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경악과 공포, 두려움. 사람들은 각각의 표정을 띤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그냥 술집을 나와 버렸다. 전 여자 친구와 만나지도, 남아있는 이들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술집에서 나오자마자 백성현은 제 심장 주위를 세게 두드렸다. 참고 있던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 * *
“야, 너 어제 개총 안 갔었냐?”
기본음으로 설정해둔 벨소리는 아침에 들으면 묘하게 신경을 돋우는 구석이 있었다. 백성현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팔을 휘저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째 익숙하다 했는데 성준혁이었다. 아침부터 사람을 깨운 주제에 한다는 말이 저런 거라니. 백성현은 입 속으로 씨발, 하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갔었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속도 메슥거리는 게, 몸 상태가 영 별로였다. 백성현은 그 이유가 어제의 술자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진짜? 근데 왜 이가현이 너 못 만났다고 나한테 전화 온 거지?”
“……몰라.”
사실 이가현을 만나기 전에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체력이 없었다. 성준혁은 힘겹게 말을 뱉고는 잠자코 있는 백성현을 눈치챈 듯 혀를 쯧쯧 찼다.
“너 술병 났지? 안 봐도 뻔하다. 새끼, 또 주는 대로 다 받아마셨겠지. 같이 해장이라도 하러 갈래?”
“술 이제 절대 안 마실 거니까 신경 꺼.”
묘하게 가시가 돋친 백성현의 어투에 성준혁이 알아서 납작 엎드렸다.
“미안하다. 나도 이제 너한테 술자리 가라고 강요 안 할게.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놈이야 넌.”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거냐.”
“너 진짜 해장 안 해도 돼?”
겨우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백성현은 묘하게 해가 높이 떠있는 것처럼 주위가 밝은 느낌이 들어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이내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침이 1을 가리키고 있었고, 분침은 3을 가리키고 있었다.
“……좆 됐다.”
첫 수업이 12시였으니 이미 수업 하나는 빼먹은 셈이었다. 인생 최초의 자체 공강이었다. 그건 그러려니 하더라도 알바가 걸린 교양 수업이 2시에 시작했다. 그것만은 빠져선 안됐다. 한 달에 필기만으로 150만 원을 준다는 수업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렇게 돈지랄을 하는 건지도 보러 가야 했다. 때문에 지금 중요한 건 학교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야, 끊어.”
“뭐? 왜? 뭔 일 있,”
뚝, 하고 전화를 끊은 성현은 겨우 옷가지를 꿰어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왜인지 초췌한 꼴이었다. 하루 만에 3년은 족히 늙은 모양새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백성현은 대충 씻은 뒤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집을 나섰다.
그는 제대를 하고 나서 자취를 시작했다. 요리나 청소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기에 그의 방은 겨우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은 방도 아니었고, 넓지도 않았다. 평범한 자취방이었으나 나름 학교와는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뛰면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이기에 성현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학교 정문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백성현은 발개진 얼굴로 숨을 고르며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온 문자가 떡하니 와있었다.
- 죄송하지만 노트 테이킹은 다음 주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월급은 오늘분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맥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뒤지게 뛰어왔는데 다음 주부터라니. 백성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두 번째 문장이었다. 일하지도 않은 몫을 받으라 이건가. 왜인지 그런 건 껄끄러웠다. 성현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생각보다 오래갔다. 받을 생각이 없는 건가 싶어 전화를 끊기 직전에 연결음이 멎었다.
상대방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성현은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 핸드폰을 고쳐 쥐고 보니 통화시간은 1초씩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백성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평연하게 말했다.
“노트테이킹 해드리기로 한 사람입니다.”
- …….
“오늘 분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럼 다음 수업 때,”
- 백성현 씨.
차분한 음성이었다. 백성현은 순간 자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듣는 순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버렸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백성현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다시 상대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할 때까지도.
- 문자로 보내주십시오.
“……네.”
- 끊습니다.
백성현은 화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5초 정도 지났을까, 정말로 전화가 끊겼다. 어느 호구가 노트 테이킹 알바를 150만 원이나 주고 구하나 했더니 그 호구가 지유환이었다. 호구와 지유환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백성현은 왜인지 굳어버린 손가락을 어렵사리 움직여 문자를 보냈다.
- 다름이 아니라, 오늘 분은 돈 안 받을 겁니다. 그거 말씀드리려고 전화 드렸던 거고요.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같이 보낼까 하다가 너무 한심해보여서 그만뒀다. 답장은 10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 제 사정 때문에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건데요. 받으셔도 됩니다.
-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럽니다.
백성현은 문자를 보낸 뒤 삼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사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꽤나 일찍 도착해서 다음수업까지 아직 20분가량이 남은 상태였다. 카페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 답장이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백성현은 무심하게 액정으로 눈을 돌렸다. 지유환의 성격은 아직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대충 알아서 하십시오, 같은 답장이 올 것도 같았다.
- 그럼 오늘 뭐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백성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 어떤 부탁 말씀하시는_
건가요? 라고 쓰기 전 지유환으로부터 새로운 문자가 왔다. 시집 세 개의 제목과 함께 집 주소가 첨부되어 있었다.
- 수업 끝나시고 여기로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사실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충 훑어보니 주소도 여기서 가까운 편이었다. 서점도 학교 내에 있었으니 오히려 노트 테이킹 보다 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백성현은 때마침 나온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수업이 끝나고 서점에 들를 때쯤의 시간을 생각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 6시쯤 가겠습니다.
* * *
시집제목과 작가, 출판사가 순서대로 쓰여 있는 문자를 보며 백성현은 교내 서점 내에 있는 순문학 코너로 걸어갔다. 지유환이 사다 달라던 시집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백성현은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란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첫 느낌은 별거 없었다. 광고 포스터가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는데, 사진 속의 인물이 낯이 익다는 느낌뿐이었다. 왜 낯이 익는지 생각을 하기 전 역광으로 찍힌 옆모습에 대한 감상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눈빛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잔뜩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이었다. 백성현은 조용히 그 옆모습을 응시하다가 숨을 멈추었다. 포스터의 하단에 반듯한 폰트로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름 옆에는 신작을 소개하는 문구와 시집 제목도 있었다.
시집의 제목은 지나치게 명료했다.
<음각>.
왜인지 백성현은 그 책을 집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 표지에는 그의 얼굴을 흘려 그린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펼쳐 본 책날개의 작가 소개란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출판사에서 써넣은 듯한 수상내역이 작은 폰트로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대체 무슨 상을 이렇게나 많이 탔나 싶었다. 순문학에는 문외한인 백성현에게도 익숙한 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만 해도 여럿이었다. 백성현은 손에 든 시집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지 못했다. 그는 수능 지문을 공부했을 때나 시를 읽었었다. 그럼에도 충동적으로 지유환의 시집을 함께 계산해버린 그는 책 네 권이 담긴 묵직한 종이봉투를 꼭 쥐었다.
* * *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백성현은 월급 150만 원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척 봐도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들도 하나같이 외제 차였다.
‘돈이 많은 놈이었구나.’
그가 알려준 호수로 호출버튼을 누르자마자 로비의 자동문이 활짝 열렸다. 예상했던 대로 로비부터 비싼 티가 팍팍 났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 하며 샹들리에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까지 올라가는 것이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바로 책만 주고 오면 되는 거겠지. 왜인지 이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공간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20층에 도착한 백성현은 또 다시 아연해져야 했다. 한 층에 두 세대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중에 왼쪽에 위치한 집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백성현이 손을 들었을 때였다.
철컥.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백성현은 놀란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하얀 목선이 보였다. 아, 키가 나보다 컸었지. 고개를 들자 새까만 눈이 보였다. 그에게서부터 이제 막 샤워를 마친 듯한 홧홧한 온기가 느껴졌다.
“저녁은 드셨나요.”
다짜고짜 하는 첫마디가 저거였다. 지유환의 시선은 묘하게 자신의 입에 집중되어 있었다. 백성현은 마른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나지막한 음성이 드리웠다.
“드시고 가세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백성현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가져간 그가 현관문에서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누가 봐도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왜 그의 집에서 밥을 먹고 가야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거절할 명분도 딱히 없는 터라 백성현은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지유환은 손에 하얀 수건을 들고 제 머리를 털어냈다. 움직일 때마다 샤워 코롱 향기가 백성현의 후각을 자극했다.
“좋아하시는 음식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지유환은 기본적으로 위압적인 몸을 하고 있었다. 190cm는 넘어 보이는 키에 근육이 붙은 몸이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날렵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어깨선을 응시하던 백성현은 지유환의 높낮이가 없는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저번에 술집에서의 모습이 나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터였다. 그때와 비슷한 어조와 말투로 좋아하시는 음식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라니. 이건 빨리 나가라는 무언의 협박인가 싶을 정도였다. 자기가 들어오라고 해놓고서는.
백성현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지유환이 천천히 몸을 돌려 백성현을 응시했다. 이번에도 입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입 주변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을 들어 슥슥 닦아냈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지유환은 작게 눈을 좁혔다. 이번에도 웃음인지 뭔지 알 길이 없는 표정 변화였다.
“안 묻었습니다.”
“……예?”
“입모양을 봐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거든요.”
그제야 백성현은 자신이 무엇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몸을 굳혔다. 그 날 술집에서 본의 아니게 알아버린 사실이 있었다. 지유환은 백성현이 난색을 띄는 것을 보고 평연하게 덧붙였다.
“따로 없으시면 알아서 만들게요.”
그의 집은 역시 넓었다. 혼자 쓰기엔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누군가의 집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성준혁은 왕복 3시간이 넘는 곳에서 통학을 했으니 그 집엔 갈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처음 와본 자취집이 지유환의 집이라니.
‘……내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이상한 기분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요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봤을 때는 그 이상한 기분이 정도를 더해갔다.
“저기,”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고나서 백성현은 아차했다. 여기서 말해도 그에겐 음성이 닿지 않을 터였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부엌으로 발을 들여 채소를 볶고 있는 지유환의 뒤에 섰다.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갈피가 안 잡혔다.
잠시간 쭈뼛대던 백성현은 이내 지유환의 널따란 등을 검지손가락으로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저기요….”
지유환이 의아한 듯 눈썹을 들어 올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그는 백성현의 입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백성현은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뭐 도울 거 없을까요?”
“불편하세요.”
워낙 높낮이가 없어서 그렇지 그건 분명 불편하세요? 라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뭐가 저렇게 직설적인 거냐. 백성현은 한숨을 내쉬곤 대답했다.
“뭐라도 돕고 싶은데요.”
“시집 사다 주셨잖아요. 그거면 됩니다.”
그리곤 지유환은 백성현을 부엌 식탁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요리를 하러 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하라는 듯 의자를 가리켜 보이기도 했었다. 사실 백성현은 요리를 할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실력은 겨우 라면이나 끓여 연명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지유환에게 도움이 될 순 없을 거라 자기합리화를 하고 식탁에 엎어져 앞을 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따뜻한 소리들이 귀를 휘감아 왔다. 채소를 볶는 소리, 사각사각 야채를 써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커다란 남자의 등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져오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잠을 덜 자긴 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저 무지막지하게 잘생기고 돈도 많은 놈은 요리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꿈꾸는 것 같은 몽롱함이 생각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 * *
“으음.”
백성현은 깨우지 말라는 듯한 음성을 냈다. 어떤 조심스러운 손길이 자신의 어깨를 건드리고 있었다.
다시금 톡톡 두드리는 손길은 간지러웠다. 백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거리다가 눈을 떴다. 왜인지 따뜻한 느낌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눈꺼풀을 어렵사리 열어 눈이 마주친 이에 대한 느낌은 간결했다. 잘생겼네.
‘그런데 왜 저 얼굴이 내 앞에…….’
오래지 않아 백성현은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몸을 덮는 모포와 조금 식은 듯한 밥과 반찬이 그 증거였다. 백성현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톡톡’ 두드리던 인물을 올려다봤다.
“저, 여기서 얼마나 잤습니까?”
“한 시간 정도.”
“깨우시지 왜…….”
“오므라이스, 식어도 먹을 만 할 거예요.”
여전히 무표정으로 대답을 한 지유환이 백성현의 앞으로 수저를 놓아 주었다. 백성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오므라이스를 한 입 떠먹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보통입니다.”
두 사람은 말수가 적었다.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이 부엌을 가득 메웠다. 백성현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입생, 이신거죠.”
그 질문에 지유환의 가만한 시선이 백성현을 향했다. 스무 살이 맞느냐는 질문을 돌려 한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직설적인 대답이 이어졌다.
“스물 셋이요.”
“…….”
“한 살 차이로 알고 있는데.”
역시 스무 살은 아니었구나. 백성현은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다. 그는 묘하게 등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계속해서 밥알을 씹어 넘기기만 했다.
그 뿐이었다.
* * *
“예전엔 문학이 학문의 일종이었습니다. 수사적 스킬을 늘리기 위해 글을 쓴 것이죠. 18세기부터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글이 보편화 되었는데…….”
백성현은 교수가 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타이핑했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사담까지 그대로 받아 적기도 했다. 그의 바로 옆에 앉은 지유환은 수업 내내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화면에 고정된 시선이 왜인지 조금쯤 신경 쓰여서 백성현은 쉬지 않고 타자를 치기만 했다.
“언어는 사회 공동체의 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물건을 여러분들은 뭐라고 부르나요?”
교수가 손에 든 볼펜을 가리켜 보였다. 백성현은 재빨리 그 말도 받아 적었다.
- 이를테면, 이 물건을 여러분들은 뭐라고 부르나요?_
커서가 깜빡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지유환이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펜, 하고 중얼거렸다. 오늘 수업이 시작되고 인사를 나눈 뒤 처음 한 말이 저것이었다. 백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지유환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한 필기로 수업을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강생들이 일률적인 답을 내놓자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이라고 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을 펜이라고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일종의 약속입니다. 혼자서 오늘부터 이 펜을 다른 무엇으로 부를 거야, 라고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이를테면… 그래요, 제가 오늘부터 이 펜을 코끼리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그 언어가 통용될 수는 없을 거예요. 코끼리라고 하면, 커다랗고 코가 긴 동물을 떠올리기로 다들 약속을 했거든요.”
지유환은 수업을 듣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뭔가를 메모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훨씬 수업 태도가 좋은 것 같아서 백성현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괜히 노트테이킹 알바를 구하는 게 아니었네…….”
애초부터 대충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렇게까지 열중하는 걸 보니 더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90분 남짓의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백성현은 노트북을 닫았다.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을 한 탓에 괜히 어깨가 뻐근해져오는 듯했다.
“녹음한 거 다시 들으면서 정리해서 오늘 필기한 원본이랑 같이 보내드릴게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성현이 옆자리를 바라봤을 때 이미 지유환의 시선은 백성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입매로 눈을 옮겨 입모양을 읽은 지유환이 미미하게 눈을 좁히며 대답했다.
“다시 정리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원본만 보내주셔도 됩니다.”
“월급 받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2초 정도 가만히 멈춰있던 지유환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유환이라는 사람 자체가 그다지 표정이 다채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월급 부족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부족할 리가요.”
백성현은 일주일에 총 180분 정도 노트테이킹을 해주고-심지어 자신에게도 필요한 필기였다-한 달에 150만 원을 받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주 약간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지유환은 부족하면 더 주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이라고는 해도 금전 감각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았다.
백성현이 주위를 정리하고 일어설 때까지도 지유환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문예의 이론과 실기 강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있었기에 지유환과는 주말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캠퍼스는 국내에서 손꼽힐 만큼 큰 편이었기에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봐도 좋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나 접점이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시선 때문일까, 별안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백성현은 뒷목을 긁적이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등을 돌려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