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 그도 몰랐던 첫사랑
[여기로 오너라.]
전역하는 날, 본가에 도착한 이도가 할아버지 무상에게 전달받은 문자는 간단했다. 이미 강 여사는 그에게 필요한 짐을 꾸려 놓은 상태였고, 무상은 주소만 남겨 놓은 채 먼저 출발해 버렸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내려가면 될 것을.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강 여사는 이미 친구분과 약속 시간을 잡아 두어 어쩔 수 없으셨다며 무상의 행동을 변명했다.
부대에서 작은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전역 신고가 늦어져 이도는 생각보다 늦게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도 하루쯤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무상은 그걸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에 연락해서 차 보내 달라고 할게.”
강 여사는 무상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래도 갓 제대한 녀석을 차편도 없이 내려보내는 게 마음에 쓰였다.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도는 강 여사가 준비해 둔 자신의 짐을 챙겼다. 문자로 주소를 보낸 걸 보면 알아서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할아버지 무상이 지금껏 이도를 키워 낸 방식이었다. 이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해 낸 것이 아니라면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건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조기 졸업 하고 군대로 직행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이도가 솔선수범을 보이니 막내 고모 영란의 아들 정민도 현역 입대를 피할 수가 없었다. 요즘 재벌가 아들 중에 누가 현역으로 군대를 가느냐며 영란이 따져도 무상은 자신의 소신만 강조했다. 선흥을 이끌 인물이 되기 위해선 조그마한 흠조차 있어선 안 된다며 하소연하는 딸에게 못을 박았다. 영란은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민은 회장 자리에 도전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할 테니까.
이도는 군대 생활이 오히려 더 편했다. 무상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 자신으로 살아 볼 수 있었던 2년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가 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며 ‘선흥’이란 두 글자를 잠시나마 지웠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끝은 있었다.
무상이 있다는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야 이도는 작은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 이상의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자 곧 차편을 보내겠다는 짧은 답이 날아왔다. 이도는 잠시 기다리기 위해 정류장 대합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두 번째로 타고 온 버스는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았다. 하필 폭염 지수가 최고치를 찍는 날에 기계가 고장 났다며 버스 기사는 연신 손님들에게 사과를 했다. 모두들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하며 창문을 열었지만 안과 밖의 공기는 다를 바가 없었다. 더위에 단련된 이도 역시 견디기 힘든 더위였다.
다행스럽게도 대합실 안은 에어컨이 작동 중이었다.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아 이도는 얼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곧장 눈을 감고 잠시나마 부족한 잠을 청했다. 전역일이 다가오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입대 전부터 정해진 수순대로 그는 이제 곧 ‘선흥’의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게 될 것이다. 무상이 원하는 그 ‘권이도’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도망칠 것이라면 지금이어야 했다. 키워 준 은혜에 보답하는 건 나중의 문제였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진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허수아비 인생을 사느냐,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느냐. 군대에서의 시간은 이도에게 절대 해선 안 될 베팅을 고민하게 만든 위험한 휴가였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란 말이 나오는 것인가. 이도는 자기 자신에게 조소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하게 얽히는 것 같아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고 눈을 떴다. 그리고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여자아이는 얼굴이 붉어진 채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호들갑스럽게 떨어뜨렸다.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콩콩 때리는 모습이 우스워 잠시 바라보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구일지는 뻔했다. 이도는 핸드폰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세단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서자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넨 무상의 비서가 서둘러 짐을 받아 들었다. 이도는 그가 열어 준 뒷좌석 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무상은 없었고, 시원한 공기만이 그를 맞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차는 출발했다. 이도는 잠시 고개를 돌려 대합실 쪽을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얘가 이럴 녀석이 아닌데. 조금 더 기다려도 괜찮겠나?”
“당연하지. 우린 걱정 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네.”
무상이 그를 맞은 곳은 허름한 시골 별장이었다. 그리고 무상의 옆에는 웃는 모습이 인자한 어르신이 함께였다. 자신을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라고 소개한 그는 이도를 보자마자 손을 꽉 붙잡았다.
‘네가 이도구나.’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더운 날씨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을 붙잡혀 있던 손이 놓이자 이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허락을 구한 후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무상과 마주하자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군대에서 그가 배운 잠깐의 일탈이었다. 평소 중독과 절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무상이기에 이도는 성인이 되어서도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군대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게 쓰면서도 달달한 담배였다.
자신의 자제력으로 언제든 끊을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배란 존재는 그리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도는 별장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 사각지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용히 타들어 가는 필터를 바라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 개비 더 피울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소녀가 그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익숙했다. 그래, 정류장. 이도는 그제야 이 여자애가 별장 주인의 손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담배를 비벼 끈 그는 꽁초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까지 소녀는 얼음이 된 채 서 있었다. 눈빛이 매섭고 차갑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기에 겁을 먹은 건가 싶었다. 이도는 자신답지 않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그리고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미리 위치를 봐 둔 마당 한쪽의 수돗가에서 입을 헹구고 손을 씻었다. 담배 냄새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 번 비누칠을 했다. 곧 뒤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인자한 줄만 알았던 어르신이 손녀를 혼내는 목소리가 밖까지 흘러나왔다. 이도는 그도 모르게 잠시 웃었다.
젓가락이 또다시 그의 앞에 놓인 콩나물무침 그릇으로 다가왔다. 키 크는 나이라 그런가. 이도는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자 효은 앞에 반찬 그릇을 놓아 주려 했는데, 그때마다 어르신의 질문이 날아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밥그릇에 담긴 밥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 채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반찬을 엄청 좋아하는 건가. 이도는 딱 그대로의 추측만 했다.
딸깍. 문이 잠기는 소리에 2층으로 올라가던 이도는 걸음을 멈췄다. 이름도 듣지 못한 소녀의 방은 그가 묵기로 한 공간의 맞은편에 위치했다.
잠자리에 예민한 무상은 타인과 같이 방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도는 2층 방을 쓰기로 했다.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내며 어르신은 그에게 여분의 이불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맞은편의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이도는 그 뜻을 알아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그는 성인이고, 그녀는 나이가 어린 중학생이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였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순간, 순식간에 일어나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단단히 문을 잠그는 소녀의 행동이 대견스러웠다.
이도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2층에 나 있는 창문을 모두 단단히 잠그고 확인했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눕자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며 도망쳤던 잠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랜만에 그는 아주 편안하고 달콤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는 군 입대 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습관처럼 아침 운동을 해 왔다. 어제 숙면을 취한 덕분에 운동을 나서는 이도의 기분이 상쾌했다. 가져온 운동복을 챙겨 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무상은 이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도는 간단히 아침 인사를 전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운동 가는 게야?”
“네.”
“우리는 낚시를 가기로 했는데. 너는 어쩔 셈이야?”
그렇게 묻는 무상의 옆자리에 두꺼운 자료들이 놓여 있는 게 이도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지금부터 파악해야 할 ‘선흥’에 관한 자료라는 걸 곧장 알아챘다.
“저는 앞으로 근무할 부서에서 배울 업무에 대해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혹시 몰라서 내가 윤 비서한테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입사하면 기획 팀으로 발령이 날 거다. 그쪽에 관한 자료들이야. 하나도 허투루 보지 말고. 가장 밑바닥 일까지 다 파악하고 있어야 최고로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걸 명심해라.”
“……네.”
이도는 싫은 내색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휴가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서는 그 순간에도 무상의 눈은 이도의 행동을 살피기 위해 고정되어 있었다. 매 순간 숨통이 조이는 삶을 그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별장을 빠져나온 이도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심장이 뛴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어른들을 배웅하고 나자 그 아이와 둘만 남았다. 무엇 때문인지 쌩쌩 찬바람을 일으키며 그녀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들어간 이도는 곧장 2층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뛰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2인분의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니 같이 앉으려면 몸부터 씻어야 했다. 솔직히 입맛은 없었다. 하지만 홀로 아침을 먹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샤워를 하고 젖은 상태 그대로 식탁 앞에 앉았다.
“이거, 먹으면 되지?”
물음을 던져도 소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를 주고받는 게 이리도 어려운 사이일까. 잠시 답답함을 느낀 이도는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그는 대부분 무상과 함께 식사를 했다. 조용했고, 식사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도는 그 습관대로 조용히 밥을 입으로 집어넣기만 했다.
“언제 가세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를 투명 인간 취급 하는 줄 알았던 소녀에게서 갑작스런 질문이 날아왔다. 이도는 그녀를 마주 보며 간단히 대답했다.
“……몰라.”
정말 그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에 불만 많으시죠?”
그의 대답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던 걸까? 이어진 질문에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소녀의 눈에는 보였던 걸까. 도망치고 싶어 하면서도 그럴 용기조차 없는 그의 이중적인 태도와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모를 원망과 그 자신에 대한 실망까지. 이도는 꼼짝없이 어린 소녀에게 변명조차 못했다.
“군대 갔다 오신 게 불만이신가? 뭐, 나라 지킨다고 2년 동안 자기 시간 뺏긴 거 이해는 돼요. 그래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시는 아저씨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안전하게 살고 있고. 나는 그런 아저씨들한테 여섯 살 때부터 매년 감사 편지도 보냈어요. 한 번도 답장은 못 받았지만.”
군대. 편지. 답장. 어째선지 그녀가 도전적으로 내놓은 말들이 귀엽기만 했다.
“암튼, 불만이라도 어쩌겠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저라고 이해도 안 되는 수학 문제 계속 풀고 싶겠어요? 해야 하는 거니까. 남들도 다 하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세상 불만 혼자 다 가진 듯한 표정 좀 풀지 그래요? 아저씨가 자꾸 공포 분위기 조성해서 밥이 목구멍에서 스탑하고 있잖아요.”
사랑스럽다.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그보다 더 철이 든 것처럼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도는 소녀를 보면서 그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래서 배려하듯 대답했다.
“내가 비켜 줄게.”
그는 식사를 다 마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 때문에 체하게 만들 순 없었다. 돌아서 2층으로 향하는데 뒤늦은 부름이 따라왔다.
“저기요.”
또 무슨 야단을 치려나 싶어 이도는 돌아서기가 겁났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이 자꾸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반응이었다.
“내가, 도, 동네 구경 시켜 줄……?”
“괜찮아.”
우선은 거리를 두는 게 맞았다. 그에겐 이 아이와 동네를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무상이 가져다 놓은 자료들이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가 시켜서 그런 거…….”
뒤늦게 변명하는 말이 2층 계단을 타고 올라오자 또다시 이도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2층 방 안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도는 얼른 자료 하나를 집어 올렸다. 그는 내용 속에 빠져들며 곧장 집중했다.
앉은 자리에서 3권을 정독하고 나자 허리와 목이 뻐근했다. 이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방 안에 나 있는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봤다. 그가 가지 않으면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소녀는 총총총, 재빠른 걸음으로 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핸드폰을 챙기고 운동복 상의를 주워 입었다.
빠르게 뒤따라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 지리는 그녀가 더 잘 알 테니 지름길로 빠져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는 이도는 무작정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별장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제처럼 핸드폰을 꺼 놓은 채 조용한 동네를 밤까지 돌아다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부탁이 있었다고 했으니 그녀 혼자 돌아다니게 만든 게 알려지면 이도도 어르신에게 면목이 없었다.
이곳저곳 찾다 보니 저절로 동네 구경을 하게 되었다.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이 그림 같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종이를 찢어 버린 후 그가 탈출구처럼 갖게 된 취미는 사진이었다. 특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다 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강가를 지나자 여름 풍경은 더욱더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신이 나 여러 장의 사진을 찍으며 개울 쪽으로 들어서는데 핸드폰 화면 안에 한 여자가 걸렸다. 여기 있었군. 처음 든 생각은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안도감.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불안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이도는 잠시 멋진 풍경 속 소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물수제비를 뜨려는지 돌을 주워 와 하나둘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튀기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자세를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도는 당장이라도 다가가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번을 성공한 소녀가 홀로 기뻐하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도는 저절로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핸드폰을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소녀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도는 피할 수 없다 생각하며 개울가 쪽으로 다가갔다. 두 손을 그대로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선 소녀는 또 말이 없었다. 이도가 한 발 더 다가서자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건가. 이도는 그냥 모른 척해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녀를 지나쳐 다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도 인사는 건네는 것이 맞겠다 생각하며 돌아서자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그녀가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그 순간 개울의 돌다리 밑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소녀가 보였다.
이도는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를 보고 놀란 소녀는 숨까지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이도는 얼른 물속에서 나와 적당한 곳에 그녀를 눕혔다.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으니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선이 또렷하지 않았다. 이도는 걱정이 돼 심각하게 소리쳤다.
“괜찮아? 말해 봐.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그가 몸을 흔들자 소녀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강물을 위협할 정도의 엄청난 눈물이 소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놀라서 그런 건가 싶었다. 그만 울어. 너 그러다 실신해. 참다못한 이도가 한 소리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소녀가 그의 품에서 스르륵 눈을 감아 버렸다.
이도는 얼른 소녀를 업고 뛰었다. 시골이니 병원은 없을 테고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찾는데 등에 업힌 소녀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엄마…….”
아무래도 실신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이도는 안도하며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때마침 낚시에서 돌아온 두 어른들은 이도와 그녀를 놀란 눈으로 맞았다. 의사이기도 한 어르신은 얼른 소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 이도는 그때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길로 읍내로 나선 그는 문을 닫기 직전인 작은 약국에서 필요한 약들을 사 와 어르신에게 내밀었다.
“……혹시 몰라서요.”
“이걸 사러 거기까지 갔다 온 거야?”
어르신은 물에 빠진 자신의 손녀를 봤을 때보다 그녀를 위해 약국을 다녀온 이도를 보고 더 놀라워했다. 그는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약을 건네고 돌아섰다. 원래 그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는 듯.
그날 이후론 소녀를 볼 수 없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맞았는데 마주치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며 시니컬하게 혼내 줬으면 했다. 물수제비를 성공하고 활짝 웃던 모습을 다시 한번 마주하길 바랐다.
하지만 소녀는 그가 떠나는 날까지 꽁꽁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보면 또 언제 볼 줄 알고. 인사는 해야지.”
“또 만날 일 있겠습니까?”
이도는 평소대로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않으며 돌아섰다. 두 어르신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 후 차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무상은 곧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이도는 창가로 고개를 돌려 이제 익숙해진 시골 풍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찍어 놓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지워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사진에서 손이 멈추었다. 폴짝 뛰어오르며 환호하는 소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한참을 그 화면에 빠져 있었다. 그런 손자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무상의 시선을 그는 알지 못했다.
에필로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