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73화 (에필로그1) (73/74)

에필로그

효은 ― 그녀만 아는 첫사랑

“응. 지겨워. 그래도 알잖아, 울 할아버지 고집.”

효은은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후 막대 아이스크림의 껍질을 벗겼다. 친구 지연이 학원 이야기와 거기서 마주친 잘생긴 남학생의 외모를 들뜬 목소리로 다다다, 말하는 동안 그녀는 얼른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메론 맛이 입 안을 감싸 안았다. 그제야 더운 기운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방학이 시작되고 시골 별장에 내려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방학도 잊은 채 하루 종일 학원을 오가고 있는데 효은은 책 한 자 들여다보지 못한 채 에어컨도 없는 시골의 여름을 오롯이 견디고 있었다.

할아버지 태호는 이게 계절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했다. 더운 게 당연한 것이고, 그 더위를 이겨 내는 힘을 기르는 것도 공부라고. 우리 강아지는 너무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싫은 잔소리까지 덧붙이며 커다란 부채를 찾아 부치기 시작했다. 땀으로 흥건히 젖은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자 더 이상 불평을 내놓을 수 없었다.

효은은 자신만의 살길을 찾기 위해 별장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읍내 버스 대합실이었다. 여름 뙤약볕을 피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유일한 장소였다. 효은은 에어컨 바람이 가장 시원하게 불어오는 입구 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는 길에 정류장 앞 슈퍼에서 산 아이스크림까지 입에 물고 나니 여기가 천국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 내 말 듣고 있어, 장효은?

“어, 어어. 그래서 이번엔 며칠 동안 좋아할 건데?”

효은은 친구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도 심드렁했다. 그녀는 또래 여자애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갑인 남자들이 뭐가 멋있다고. 하루 종일 시답잖은 장난과 농담, 유치한 행동을 하는 게 전부인 유아적인 놈들인걸.

그녀는 아이돌보다 배우에게 더 끌렸고, 바람둥이처럼 말이 많은 사람보다 진중하고 조용한 사람에게 훨씬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티브이 화면 속 인물이었다. 고로,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은 제로. 그녀는 아직 이성보단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 하여튼 너, 분위기 깨는 덴 뭐 있어.

친구 지연이 기이어 한마디를 내놓았다.

“미안.”

효은이 짧게 사과했다.

― 그러니까 너도 누굴 좀 좋아해 보란 말이야. 그래야 대화가 통하지. 고등학교 가기 전에 짝사랑도 못 하는 건 범죄야.

하하하. 효은은 지연의 논리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라고. 그렇다고 일부러 좋아할 수도 없잖아.”

효은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남자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 거기, 시골에 괜찮은 애들 없어?

“있겠니?”

사람 자체가 드문 곳이었다.

― 에휴. 말을 말자. 아, 걔 있잖아. 네 짝꿍. 한……승잰가.

띠띠띠. 승재 얘기가 나온 순간, 휴대폰에서 배터리가 없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효은은 잘됐다 싶어 친구에게 바이를 외치고 핸드폰을 닫았다.

‘한승재가 웬 말이야.’

효은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며 웃어넘기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다시 핥아 먹었다. 그때, 그녀가 앉은 긴 의자의 끄트머리에 한 남자가 다가와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스쳐보던 효은의 시선이 그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남자는 어린 그녀가 봐도 잘생겼다. 고가의 셔츠와 면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보아 이곳 시골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남자를 훑어보다 깊게 감겨 있는 눈매 쪽으로 시선을 주는 순간 가슴이 두근, 제멋대로 뛰었다.

그런데 푹 눌러쓴 야구 모자가 그의 비주얼을 가리는 것 같아 효은은 어쩐지 자신이 더 화가 났다. 벗겨서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남자가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깔끔하게 깎은 머리카락. 군인이 아니면 하기 힘든 머리 모양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잘난 얼굴은 죽지 않았다. 두상까지 반듯하고 조각 같아서 조물주의 솜씨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남자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깊고 어두운 시선이 그녀에게로 닿았다.

“엄마야!”

효은은 놀라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거기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은 부끄러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아, 쪽팔려.”

바닥만 보고 앉아 있던 그녀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남자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효은은 놀라 얼른 정류장 밖으로 나섰다.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큰 세단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때 운전석에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내리더니 그 남자에게로 다가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짐을 당연한 듯 넘겨받았다.

남자에겐 익숙한 일인 듯 보였다. 비서라도 되는 건가. 이 마을에 놀러 온 돈 많은 집 아들쯤 되려나. 효은이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남자는 비서가 열어 준 뒷좌석 문 안으로 조용히 올라탔다. 그리고 차는 쌩하니 정류장을 벗어나 버렸다. 효은은 그 모든 걸 훔쳐보고 있던 스스로가 뒤늦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핸드폰까지 꺼졌으니 할아버지가 찾을 게 뻔했지만 효은은 이상하게도 곧장 집으로 향하기 싫었다.

자주 찾는 개울가에 앉아 이유 없이 돌을 던져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까까머리 남자를 떠올렸다. 이게 뭘까. 분명 가슴이 두근거렸어. 친구들이 말했던 감정이 이것일까. 그녀는 혼자만의 충격에 빠져 허우적댔다.

분명 나이도 그녀보다 한참이나 많아 보였다.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 군인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손가락으로 나이 차이를 세어 보다 효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어른을 좋아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군인 아저씨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심지어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란 소리였다.

효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탈탈 털었다. 벌써 강가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며칠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잔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효은은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별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1층 거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녀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갈 방법은 두 가지였다. 거실로 들어가 복층 계단을 오르는 것과 건물 뒤쪽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는 것이다. 매번 그곳에서 걸어 내려와 할아버지 몰래 동네를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 타이밍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2층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으면 할아버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중학생이 된 이후론 숙녀의 사생활을 지켜 주어야 한다며 할아버지는 그녀의 방 출입을 자제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쪽 공간으로 들어서던 효은은 낯선 담배 연기를 맡았다. 놀라 멈춰 선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조용히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챙겨 자신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리에 스치기도 전에 효은은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똑바로 마주해야 했다. 심장이 또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게 아무래도 고장이 난 걸까.

“안녕.”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엔 담배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게 싫지 않았다. 효은은 멍청한 얼굴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쪽은 할아버지 고향 친구. 얼른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효은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없는 나머지 1층 거실로 들어서던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실컷 잔소리를 듣고 난 후, 식탁에 앉아 있는 낯선 두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네가 효은이구나. 아주 예쁘게 잘 컸어.”

한눈에 봐도 큰 회사의 사장님처럼 보이는 할아버지의 친구는 반가운 눈빛으로 효은을 바라봤다. 시골 별장에 내려와 있을 때면 할아버지의 지인들이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작은 소란에 불과할 줄 알았던 일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로 인해 허리케인급의 큰 사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 군인 아저씨는 할아버지 손자. 인사들 해.”

가만히 앉아 식탁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그제야 효은에게 눈을 맞춰 왔다. 우리는 이미 인사했지? 하는 물음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몸속 어딘가를 자꾸만 간질이는 것만 같아 효은은 얼른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강아지가 전화기 꺼 놓고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벌써 식사했을 텐데.”

“할아버지!”

효은이 발끈하며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늦어서 미안하네. 먼 길 오느라고 시장할 텐데 얼른 들어.”

태호는 손녀의 부끄러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손님들을 챙겼다. 효은은 또다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예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저를 들었다.

앞의 남자도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는 게 보였다. 말이 없는 타입인지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도 단답으로만 대답할 뿐,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는 않았다. 그도 할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이 시골에 끌려온 것 같았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나 좋아할 동네지, 젊은 사람들에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장소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효은은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반찬을 집어 올리는 척하며 잠깐잠깐 남자를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박자 소리를 내며 뜀박질을 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효은은 그날 저녁 밥은 모두 남기고, 반찬만 줄기차게 먹고 말았다.

* *

다음 날이었다. 효은은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꼴딱 날밤을 새웠다. 2층 그녀의 방 맞은편엔 작은 빈방이 있었다. 그곳에 남자가 묵었다. 할아버지의 친구분은 1층 큰방을 쓰시고, 그는 2층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태호를 찾아온 지인들은 대부분 1층 큰방에서 다 같이 지내다 돌아갔다. 태호가 효은을 생각해 2층까지 올라올 일은 만들지 않았는데, 왜 이번엔 그러지 않은 걸까. 효은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자신의 방문을 노려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남자가 지내는 방이 있었다. 그 말은 그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혹시 몰라 문을 잠가 두긴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꼭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편하고, 속까지 울렁거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효은은 소화제를 먹고 아침 식사 자리로 내려갔다. 별장을 돌봐 주는 박 씨 아저씨의 부인이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효은은 간단한 것은 돕는 편이었기에 평소처럼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아침 식사가 2인분만 차려져 있었다. 거실로 나가 보니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 낚시 복장을 갖춘 채 외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낚시요? 두 분만요?”

“왜, 너도 가고 싶으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듣지 못한 할아버지 친구의 손자. 까까머리 군인 아저씨는 아침잠이 많은 것인지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이도는 아침 운동 나갔어. 곧 돌아올 테니까 같이 아침 먹고. 혹시 심심하면 네가 오빠 데리고 나가서 동네 구경 좀 시켜 주고. 알았지?”

오빠는 무슨. 할아버지 말에 효은은 입을 삐쭉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이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친구분이 권 사장님이라고 했으니, 그럼 그의 이름은 권이도. 권이도. 이도. 여러 번 입 속에서 되새겼다. 조용하고 단단한 그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린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효은은 마당까지 할아버지들을 배웅했다. 그때 별장 안으로 들어서는 이도가 보였다. 키가 훤칠하게 커 운동복을 입은 모습이 마치 스포츠 의류 모델 같기도 했다.

그는 두 어른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낚시를 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효은은 목소리 듣기가 참 어려운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어제저녁 말했던, ‘안녕’이란 두 글자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소중하다니. 그와 다정하게 말을 섞고 싶은 걸까. 왜. 효은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기 바빴다. 처음 찾아온 낯선 흔들림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그녀를 낳다 돌아가신 엄마가 만약 살아 계셨다면 왜 이런 것인지 물었을까. 기분이 가라앉은 효은은 이도보다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이도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어디 덧나나. 먼저 밥을 먹으라든지,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먹자든지. 효은은 텅 빈 식탁에 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수저를 드는데 이도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1층 욕실 향하는 것이 부엌에 앉은 효은의 눈에 보였다.

쏴아아아. 물줄기 소리가 들리자 효은의 목에서 꿀꺽, 하고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왜 이래. 저 남자가 샤워를 하는 게 뭐, 어때서.

별장에 찾아왔던 할아버지의 지인 중에는 그녀의 또래도 많았다. 다정하게 그녀를 챙겨 주던 고등학생 오빠와 개울가를 산책한 적도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며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에도 피식, 웃음만 났었다. 집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핸드폰을 되돌려 줬던 게 여러 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들이 뭘 안다고. 효은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가지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근거림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며 호들갑을 떠는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성적표를 디밀어 주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애어른으로 통하는 효은은 그래서 지금 자신이 욕실 안에 들어가 있는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든 이 마음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딸깍.

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가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내며 걸어 나오자 효은은 모든 생각들이 삭제되는 것만 같았다. 그만 보였다. 그에게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가슴을 마구 뒤흔들었다. 부엌으로 들어온 이도가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도 효은은 넋 나간 시선을 어쩌지 못했다.

“이거, 먹으면 되지?”

그가 효은에게 물었다. 효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도는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그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 수저를 동시에 들지도 않았고, 많은 양을 입에 넣지도 않았다. 고요하고 차분한 그의 행동이 어쩐지 섹시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미쳤구나, 장효은.’

효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제껏 놀러 온 지인들을 대했던 것처럼 이 사람에게도 당당하고 산뜻한 모습을 보이면 되었다.

“언제 가세요?”

효은이 불쑥 질문을 던지자 이도가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눈을 맞췄다.

“……몰라.”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마치 너와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행동 같았다. 효은은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세상에 불만 많으시죠?”

“…….”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의 수위가 너무도 차이 났다. 이도가 잠깐 입꼬리를 올리더니 서늘한 눈으로 효은을 바라봤다. 누가 그러면 무서워할 줄 알고. 효은은 겁내지 않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군대 갔다 오신 게 불만이신가? 뭐, 나라 지킨다고 2년 동안 자기 시간 뺏긴 거 이해는 돼요. 그래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시는 아저씨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안전하게 살고 있고. 나는 그런 아저씨들한테 여섯 살 때부터 매년 감사 편지도 보냈어요. 한 번도 답장은 못 받았지만.”

효은은 그게 서운한 건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암튼, 불만이라도 어쩌겠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저라고 이해도 안 되는 수학 문제 계속 풀고 싶겠어요? 해야 하는 거니까. 남들도 다 하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세상 불만 혼자 다 가진 듯한 표정 좀 풀지 그래요? 아저씨가 자꾸 공포 분위기 조성해서 밥이 목구멍에서 스탑하고 있잖아요.”

효은의 수다 섞인 도발에 이도는 잠깐 어이없는 웃음을 보였다. 그가 웃자 효은은 또다시 심장이 콩닥거렸다. 웃어도 이러고, 인상을 써도 문제고. 어쩌자는 거야. 그녀는 자신의 심장에다 벌을 주듯 가슴을 쾅쾅 때렸다.

“내가 비켜 줄게.”

이도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뜻은 아닌데. 효은은 같이 앉아 식사를 해도 괜찮다고 말하려다 허벅지를 붙잡았다. 여자의 자존심이 있지.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저기요.”

벌써 저만치 걸어 나가 2층으로 올라서려는 이도를 효은이 다급하게 불렀다.

“내가, 도, 동네 구경 시켜 줄……?”

정말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다.

“괜찮아.”

대답은 질문보다도 빨랐다. 이도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아니, 나는 할아버지가 시켜서 그런 거…….”

그녀의 변명은 듣지도 않은 채 그는 2층으로 사라졌다. 효은은 갑자기 억울해져 눈물이 차올랐다. 발까지 동동 구르다 남은 밥을 푹푹 퍼서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다시는 저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으리라. 그녀 나름의 큰 다짐을 하며, 긴 아침 식사를 홀로 끝냈다.

효은은 이도를 혼자 두고 집을 나섰다. 누군 동네 구경 시켜 주고 싶었는지 아나. 혼자 다니는 게 그녀도 더 편했다.

평소처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대합실 에어컨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다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다. 보나마나 학원에서 만난 남학생 얘기나 한참 늘어놓을 게 뻔했다.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인상이나 쓰고, 고독한 척은 혼자 다 하는 허세 덩어리를 좋아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효은은 꼭 집어 한 남자를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짜 정신 안 차릴 거야, 장효은? 그 남자는 너한테 관심이 없고, 너보다 10년은 더 살았을 게 뻔하고, 노땅이고, 말도 없고, 재수도 없고, 있는 게 없는 사람이야. 좋아하는 여자가 이상한 거라고. 알겠어?”

옆자리에 누구라도 앉은 것처럼 효은이 혼잣말을 하자 대합실을 지키던 매표소 아주머니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효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 여중생이 정류장에 매일 나타나요. 소문이 돌기 전에 얼른 사라져야 했다.

갈 곳을 잃은 그녀는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죽어도 집에는 가기 싫었다. 그 남자와 마주쳐 또다시 어색한 공기를 견디는 것보다 뜨거운 뙤약볕을 이겨 내는 게 더 쉬웠다. 효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땀을 닦으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역시나 개울가였다. 그나마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이었으니까. 늘 앉던 자리에 주저앉아 돌멩이를 찾았다. 강 안으로 힘차게 돌을 던질 때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오늘은 물수제비를 다섯 번 이상 튕겨 내리라 다짐하며 그녀는 날렵한 돌멩이를 모았다. 아쉽게 서너 번에서 그치자 오기가 났다. 오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전투적으로 머리카락을 다시 조아 묶고 효은은 힘차게 돌멩이를 던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우아아아아. 저절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효은은 환호성을 치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끌어안고 하이파이브 백 번은 했을 성취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아 자랑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익숙한 남자가 그녀를 보며 서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게 정지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왜. 집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효은은 자신이 계속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배려한다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쪽팔렸다. 효은은 얼른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왜 평생의 쪽팔림을 모두 이 남자에게만 선보이고 있는 걸까.

남자가 저만치 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그녀도 개울가를 벗어나려 했다. 개울가에 놓인 돌다리를 하나씩 밟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사람을 봤으면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수제비를 잘했으면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자기도 한 번 던져 주고. 그럼 나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같이 좀 웃기도 하고. 효은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어제오늘 혼자서 감정의 널을 뛰고 있었다. 다시 이도가 걸어간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효은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으푸억!”

놀란 것보다 부끄러웠다. 근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참을 허우적대던 그녀의 몸이 단숨에 물에서 떠올랐다. 눈을 뜨자 코앞에 그 남자가 보였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데 또 심장이 뛰었다. 이번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쿵쿵쿵쿵. 박자감도 아주 난리였다. 쿵짝쿵짝. 이 남자가 다 알아차리고도 남을 정도로.

‘엄마, 나 어떡해. 아무래도 내 심장 터질 건가 봐.’

다급하게 개울가를 걸어 나간 그가 적당한 곳에 효은을 눕혔다. 넋이 나간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화가 나 보였다. 그 모습에 효은은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괜찮아? 말해 봐.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뺨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그가 소리치는데 효은은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효은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끅끅. 몸속에 남아 있는 물을 모조리 쏟아 내듯 눈물을 흘리고 그녀는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 이후의 일은 모르겠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 * *

효은은 그날부터 이도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철저히 노력했다. 식사 시간엔 오만 가지 핑계를 가져다 대며 피했고, 굶는 한이 있어도 그의 동선과 겹치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아침 일찍 1층이 아닌 옥상 계단으로 내려가 하루 종일 밖으로 나돌았다. 어차피 집 안은 밖과 다름없이 더웠고, 배가 고프면 정류장 근처 슈퍼에서 빵을 사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 결국 그가 떠나는 날, 앓아눕고 말았다. 차라리 잘됐다. 침대 안에 콕 처박혀서 얼른 이 열병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쓰디쓴 약을 한 움큼 집어 먹고 잠에 빠지려고 하는데, 문밖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다.

“……괜찮습니다. 쉬게 두세요.”

“그래도, 이제 보면 또 언제 볼 줄 알고. 인사는 해야지.”

“또 만날 일 있겠습니까?”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개울가에서 모조리 흘려보낸 줄 알았는데, 멍청하게 남아 있던 눈물이 주인 눈치도 보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의 미련도 가지지 않게 만드는 사람. 그런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안녕. 바이. 잊으려면 못 잊을까. 효은은 그렇게 그녀만 아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었다. 아팠지만 설레었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었다. 사랑, 이라고 말하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안도했다.

효은은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그는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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