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장. 진짜 남편
갑작스런 현기증에 주저앉았던 일은 그저 잠깐의 증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넌 효은은 119를 불러 주겠다는 아주머니의 친절을 사양하고 직접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그녀는 의사에게 진단명을 듣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나는 건 오직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누르려던 효은은 제주 출장이 잡혀 늦을 것이라는 그의 문자를 먼저 마주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글자를 천천히 써 넣었다.
내일 아침 찬거리를 사서 오피스텔로 걸어가는 내내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효은은 얼떨떨한 정신으로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자 따뜻한 훈기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도일까. 출장이 취소라도 된 걸까. 헐레벌떡 집 안으로 들어선 효은은 그녀를 보고 놀라 서 있는 한 여인과 마주쳤다.
“……여사님!”
효은은 얼른 강 여사에게로 다가갔다.
“그냥, 부산 내려가기 전에…… 오늘까지만 조용히 챙겨 주고 가려고 했는데……. 들키고 말았네요. 효은 양이 이해해요. 늙은이가 오지랖이 넓어서 이런 거니까. 권 상무한테는 비밀로 해 줘요. 알면…… 또 전화를 해서 한숨부터 쉴 테니까.”
강 여사는 고향인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반찬만 챙겨 주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오피스텔에 도착했지만 막상 집 안에 발을 들여놓고 나니 그게 쉽지 않았다. 거실부터 안방까지 말끔하게 청소를 한 뒤 빨래까지 마치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챙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녀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효은 양 왔으니 난 이제 가 봐야겠네.”
강 여사는 얼른 가방을 챙기려 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효은은 갑자기 가슴속에서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급하게 곁으로 다가가 붙잡듯 그녀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가긴 어딜 가세요. 저…… 저, 꼭 먹고 싶은 게 있어요. 해 주세요. 제발요.”
강 여사는 효은이 이전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몸을 돌려 효은을 바라보자 그사이 눈물을 흘렸는지 눈가가 짓물러져 있었다. 뭐가 또 이 아이를 아프게 한 건지. 강 여사는 걱정이 되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조용히 효은의 눈물을 훔쳐 주며 그녀가 되물었다.
“뭘 해 줄까? 먹고 싶은 게 뭐예요?”
효은이 눈물 섞인 웃음을 지으며 곧장 대답했다.
“……백숙이요. 너무 삶아서 흐물흐물하고, 간도 제대로 안 맞아서 약으로만 먹어야 하는 그런 백숙이…… 먹고 싶어요.”
그 음식을 누가 해 주었는지 강 여사는 효은의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효은이 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사람을 떠올리자 모두 설명되었다. 그녀는 얼른 재료를 사 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맛이 어때요? 그때 그 맛이랑…… 비슷해요?”
뚝딱 해치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 여사는 금방 백숙 한 그릇을 만들어 효은의 앞에 내놓았다. 그사이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반찬들까지 식탁 위에 차려지자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효은은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뒤 강 여사가 발라 준 살코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음미하듯 씹었다.
“하나도 안 비슷해요. 이렇게…… 맛있지가 않았어요.”
효은이 아플 때면 태호가 몸보신을 위해 해 주던 음식이 백숙이었다. 그것만큼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어린 효은은 늘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렸다. 맛이 없는 게 몸에 좋은 법이야. 할아버지는 괴짜 같은 논리를 내놓으며 그 음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도록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어떤 병이든 나았다. 효은은 그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른이 되고 아픈 일을 숨길 수 있게 되면서 할아버지의 백숙을 맛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게 미치도록 생각났다. 더 이상 그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게 이리도 서러워질 줄이야. 효은은 수저를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음을 쏟아 냈다. 강 여사가 다가와 그런 효은을 꼬옥 안아 주었다.
“내 음식이 맛있다고 운 사람은 효은 양이 처음이에요. 알아요?”
강 여사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녀를 다독였다. 왜 이리도 서러움이 생기는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축복은 이렇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강 여사가 효은의 손에 다시 수저를 쥐여 주었다. 효은은 울다가 금방 또 웃으며 허겁지겁 백숙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 보는 식사다운 식사였다.
“아저씨가 제 밥은 못 먹겠대요. 너무 맛이 없어서.”
효은이 친정 엄마에게 고자질하듯 덧붙임 하나 없이 사실을 고했다.
“저런……. 가만히 뒀어요?”
강 여사가 쿵짝이 맞도록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우리 이렇게 살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내가 도우미 채용하라고 말해 줄게요.”
“저희랑 같이 살아 주시면 안 돼요?”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나. 효은이 강 여사에게 시선을 맞췄다.
“효은 양…….”
“염치없다는 거 알아요. 여사님도 이제야 자유가 생기셨는데, 하고 싶으신 것도 얼마나 많으시겠어요. 맞아요. 저라도 입맛 까다로운 권씨 집안사람들, 징글징글할 것 같아요. 근데, 그래도요. 저를 생각해서 가까이 계셔 주시면 안 돼요?”
강 여사는 고운 눈망울로 부탁하는 효은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지도 알았다.
“권 상무가…… 원하지 않을 거예요. 효은 양 마음은 충분히 받았어요. 그것만으로 나는…….”
완곡한 거절이 전해지기도 전에 효은이 갑자기 창백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직행했다. 곧 먹은 것들을 쏟아 내는 안쓰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강 여사는 얼른 효은을 따라 욕실로 들어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내며 두드려 주었다.
“급, 급하게 먹어서…… 그래요.”
효은이 벌게진 눈으로 뒤늦은 변명을 했다. 강 여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추측에 대한 물음을 삼키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인생은 권씨 남자에게 묶이는 것으로 정해진 걸까. 이 간절한 부탁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쳐 갔다.
* * *
“꼭 여기부터 와야겠어?”
그녀를 뒤따르면서도 이도는 기어이 한마디를 건넸다. 효은은 앞장서 걷다가 다시 되돌아와 그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산 위로 올라설수록 숨이 차오르고 속이 더부룩해졌지만 이것만큼은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진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다고요.”
“아침 먹은 걸 다섯 번이나 게워 낸 사람이 할 소리인가. 너, 여기까지 차 타고 오는 내내 창밖에 머리 내놓고 숨 쉬었어. 그걸 보고도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걱정 가득했던 그의 눈빛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효은은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을 걱정하게 만든 벌은 나중에 달게 받겠다는 것처럼 축 처진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걸 어떡해요. 진짜 잠깐만 보고 가는 길에 병원 들러요. 아저씨가 가지 말자고 해도 갈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요. 네? 응?”
결국 효은이 애교 작전까지 부리자 이도는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번에 효은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곤 산 중턱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괜찮은…….”
“한 마디만 더 해.”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솔직히 그의 품에 안긴 채 이동하니 울렁거림은 덜했다. 효은은 이렇게 든든한 남자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게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훔쳐보듯 그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태호의 산소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평소 태호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차려 놓고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 그 옆을 다정히 지키고 있는 산소 앞에 나란히 섰다.
“저 왔어요, 할아버님. 아저씨도…… 같이 왔어요. 보이시죠?”
효은이 고집을 부려 끌고 온 이유를 이도가 모를 리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무상의 산소는 태호의 옆에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그것이 태호가 했던 것처럼 무상의 첫 번째 유언이었다. 친구 옆에 있으면 그곳에서 덜 외로울 것 같다는 말은, 강 여사에게만 전한 것 같았다. 효은은 그 말을 듣고, 이도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무상이 어떤 존재인지, 아직까지도 이도의 속마음을 전부 다 알지 못한다. 만약 그녀에게 모두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도 서운한 마음 같은 건 갖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그가 아니라 그녀가 더 아플 것만 같아서, 이기적이게도 그가 말하기 전엔 묻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이도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효은이 무상의 산소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기만 하는 이도에게 핀잔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해?”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없어.”
이도의 시선이 결국 태호의 산소 쪽으로 옮겨 갔다.
“나는 두 분 앞에서 아저씨한테 묻고 싶은 말 있어요.”
불쑥 효은이 나섰다.
“무슨 말?”
“회장 되니까 어때요?”
이도는 싱겁다며 웃어 버렸다. 정말 어떤 걸까. 그는 왜 스스로 회장 자리에 앉게 된 걸까. 뒤늦은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 보기도 했다.
영란의 제안은 이미 거절하기로 결론을 내린 후였다. 그리고 무상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모든 상황을 미리 꿰뚫어 본 것처럼 권 회장은 이도의 비밀이 밝혀질 시, 전 재산을 선흥 재단에 기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마무리였다. 모두가 알아 온 무상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이 진짜일까. 그것이 궁금해진 이도는 결국 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영은 이 모든 결과가 짜인 각본인 것이냐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이의 손에 그녀를 파멸시킬 힘이 쥐여진 상태였다. 영란은 핏줄이 아닌 이도를 회장 자리에 앉히며 오히려 기뻐했고, 너무나도 닮은 자신의 핏줄이 몰락하는 걸 지켜보며 안도했다. 세상은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노코멘트.”
이도는 긴 생각 끝에 간단하게 답했다.
“그럼, 나랑 다시 사니까 어때요?”
효은은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그것도…… 노코멘트.”
실망한 눈동자엔 거짓이 없어 이도를 더욱 기쁘게 했다. 이 마음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너는 모를 거야.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네가 내 전부라는 걸.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죠? 그럼, 내 비밀 말 안 할래요.”
“무슨…… 비밀?”
이도가 곧장 심각해진 얼굴로 효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눈치챌 만도 한데, 오히려 효은 자신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나, 임신했어요.”
“…….”
“아저씨, 이제 아빠 된…… 앗.”
말이 끝나기 전에 효은의 몸이 휘청하며 이도에게로 안겨 들어갔다. 너무 꽉 끌어안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좋은 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도 어쩐지 심술이 나기도 했다.
“나만 있으면 된다면서요? 이렇게 좋아하면 나 섭섭해요.”
효은이 입술을 삐쭉거리자 이도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가족 만들어 줘서.”
또 이리 진지하면 그녀가 미안해졌다.
“나도 고마워요. 내 진짜 남편 되어 줘서.”
이도는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뜨거운 키스로 화답하자 효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른 병원 가요. 그녀가 그를 밀쳤고, 이도는 업히라는 듯 그녀에게 등을 보였다. 진짜 남편들은 다 이런 거야.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효은이 못 이긴 척 업히자, 이도는 천천히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산소 뒤편엔 언제부턴가 옅은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에게 주는 선물처럼 오후의 풍경이 그림 같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