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더 열심히 사랑하는데
몇 주 사이, 계절은 어느덧 겨울로 바뀌어져 있었다. 효은은 추운 겨울이 오면 그 어느 때보다 더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번 겨울은 그리움도 아픔도 없이 따뜻하게 보낼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모두 ‘권이도’라는 남자 덕분이었다.
“핸드폰 좀 그만 보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제인이 투덜거리듯 효은에게 면박을 주었다. 오늘은 드디어 승재가 퇴원 수속을 밟는 날이었다. 간단한 골절상으로 입원해 있던 승재는 갑작스럽게 맹장이 터지면서 생각보다 입원 기간이 길어졌다.
꼭 네가 가 봐야 하냐며 질투심을 숨기지 않던 이도는 말과 다르게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출근했다. 제인의 말처럼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을 친구 제인에게 들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넌, 그래서 비행기표는 끊은 거야?”
효은은 승재가 퇴원하면 제인이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여겼다.
“내가? 왜? 나 한국에 계속 있을 건데? 소설도 완성해야 하고.”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제인이 효은에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어디서 지낼 건데?”
“네 집.”
“그 빌라 팔았어.”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제인의 눈동자가 얼었다.
“그, 그 집 아직 계약 남은 거 아니었어?”
“사정이 생겨서 그렇게 됐어.”
일의 마무리는 이러했다. 부동산 쪽으로 빠삭한 이도에게 도움을 받아 효은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집주인을 만났다. 약한 이들에겐 강하고 강한 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아주머니는 집 안 곳곳에서 발견된 문제를 법적으로 분석한 서류를 내밀자 오히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사정했다.
집 문제는 잘 마무리되었지만 효은은 어쩐지 씁쓸했다. 당당한 홀로서기를 꿈꿨는데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 혼자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때론 도움을 받아야만 더 쉽게 해결되는 일도 있다는 걸 뼈아프게 느꼈다.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돌아가는 바보가 되지는 않기로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 속에서 노하우를 터득하며 그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해답이라는 걸 배워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야.”
“어, 저기 승재 온다.”
효은은 얼른 말을 돌렸다. 때마침 퇴원 수속을 마무리한 승재가 기수와 함께 나타났다. 아기 띠를 한 그의 가슴엔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민서가 잠들어 있었다. 효은은 자꾸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연신 아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까지 안 와도 된다니까. 무슨 큰 수술 한 것도 아니고.”
승재는 여전히 효은에게 감정이 남았는지 툴툴거렸다. 그래도 그녀를 발견한 순간 반가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제인은 그런 승재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외투를 당연하게 걸쳐 주었다.
“왼손 들어 봐요.”
간병인 모드로 돌아간 그녀가 승재에게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이제 다 나았으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핀잔을 줄 줄 알았던 그는 습관처럼 익숙하게 제인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가방에서 모자 하나를 골라 머리에 씌워 주는 순간에도 어색함 같은 건 없었다.
“회색 모자 쓰고 싶은데요.”
“그거 빨아서 안 돼요.”
효은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오묘한 웃음을 내비쳤다. 그녀가 이도와 재회의 행복을 만끽하는 사이, 이 둘 사이에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 버린 것은 아닐까. 그녀 나름의 촉을 세웠다. 그것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승재의 옆에 서 있는 기수의 눈빛도 효은과 다르지 않았다.
“누가 보면 두 사람 부부인 줄 알겠다.”
“네?”
“뭔 헛소리?”
기수의 직언에 승재와 제인이 동시에 발끈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떨어지더니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효은은 100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게 그랬다. 외롭거나, 아프거나, 기대고 싶을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법이지. 그녀도 다르지 않았다. 그 마음이 동정일 것이라 생각하며 부정했지만 그 동정이라는 감정이 사랑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부터 큰일이다.”
두 사람을 곁눈질로 살피던 기수가 갑자기 운을 뗐다.
“왜요?”
효은이 의도를 알아채고 물었다.
“나 3호점 오픈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처럼 민서 못 챙길 텐데. 승재는 출근도 해야 하고, 아직 팔도 무리하면 안 될 거고. 베이비시터 모집 사이트 봐도 조건 맞는 사람이 없네. 우리는 입, 주 베이비시터가 필요하거든.”
유독 입주라는 단어를 더 강하게 발음한 기수는 이제 배턴을 효은에게 넘겼다.
“여자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누구 좋은 사람 있어?”
“왜 멀리서 찾아요? 여기 제인이 있잖아요. 쟤, 유아교육 전공에 알다시피 한국어는 우리보다 더 잘하는 만능.”
“야!”
제인이 그녀답지 않게 소리를 치며 효은을 말렸다. 그 순간, 슬쩍 제인의 눈치를 보던 승재가 조용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려 주었다.
“민서가…… 음, 뭐, 제인 씨, 잘 따르니까,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같이 살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라며, 승재는 일부러 할 필요 없는 말까지 덧붙이고는 후다닥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제인은 잠시 그런 승재를 바라보다가 효은과 시선을 맞추었다. 효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정해진 인연이 있는 법이지. 어디선가 할아버지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인연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저절로 한 남자를 생각하는 사이, 효은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얼른 화면을 확인했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기다린 인물은 아니었다. 미처 지우지 못한 심리 센터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어 효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장효은입니다.”
― 나, 최윤선이에요.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자 최 박사가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효은은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녕하셨어요?”
“그래요. 효은 씨도 잘 지냈죠?”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효은은 설마 최 박사에게서 직접 연락이 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효은이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물건들 때문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그냥 버린다고 해도 문제없는 것들이었다. 만났으면 한다는 말에 효은은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움츠러들거나 피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료 주문하고 올게요.”
효은이 그녀의 비서였던 때처럼 얼른 지갑을 들고 일어서려 했다.
“난 괜찮아요. 다른 곳에서 마시고 온 길이에요.”
최 박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효은 씨 시간, 많이 뺏을 생각은 없어요.”
효은에게 분명 불편한 자리라는 걸 최 박사가 더 잘 알았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퇴사 처리를 하고 윤선도 빈자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사람의 정이라는 게 그랬다. 그만큼 효은을 신뢰하고 믿었기에 실망감도 더 컸었던 것 같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효은은 오히려 그런 윤선을 다 이해한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한테…… 서운한 마음은 없어요?”
“없다고 말하면…… 전 또, 저를 속이는 거겠죠. 사실 서운한 마음보다 박사님이 말씀하신 신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 그 사람과 제 사이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건 분명 제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전…… 박사님께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어요. 그게 억울하더라고요. 잠깐이었지만 제가 박사님께 그런 사람으로 보였구나. 내가 솔직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주실 순 없었을까……. 결국 마지막엔 저도 제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요.”
효은은 감추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뒤통수를 탁 맞은 거 같더라고요. 그 입장이 되고 나서야, 상대방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 사람 두고 유학을 떠났을 때도…… 무슨 이유 때문에 솔직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생각보다, 나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서운함만 가득했어요. 근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꼭 그것을 알아야만 했을까. 모른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만약 감추고 있는 게…… 그 사람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상처라면, 기다려 주는 게 맞지 않았을까……. 난 왜 그 사람을 더 믿어 주지 못했을까. 그런 후회가 들었어요. 뭐, 그렇다고 마음을 숨기는 게 맞는다는 건 아니에요. 솔직함만큼 강한 믿음은 없으니까요.”
긴 고해 성사 끝에 효은이 또다시 웃었다. 맑은 미소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윤선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효은에게 인간적으로 끌렸다. 그녀라면 상담가로서도 큰 몫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각이 잘못된 착각이 아니라는 걸 지금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권 상무님…… 비서라는 분이 찾아왔어요.”
윤선의 말에 효은이 놀라 시선을 맞췄다.
“아, 그건…….”
“알아요. 효은 씨 뜻 때문에 온 게 아니라는 건. 솔직히 나도 마음이 삐딱해져 있던 상태라, 이미 퇴사 처리를 했기 때문에 달라질 건 없다고 말했는데도…… 하루 종일 센터 앞에서 기다리더라고요. 오해만이라도 풀어 달라고 상황 설명을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효은 씨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효은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그분 얘길 듣고 나니까…… 내가 왜, 효은 씨를 보내고 나서 며칠 동안 멍하게 지냈는지 알 수 있게 됐어요. 내 사람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 이치에 더럽혀지다 보니…… 그 사람보다도, 들리는 말에 먼저 집중하게 돼 버렸어요. 나를 보호하는 게 먼저고,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효은 씨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았고, 박사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있지만…… 그게 성숙하다는 뜻은 아니더라고요.”
윤선은 자신의 오해와 잘못을 감추고 모른 척 묻어 두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효은에게는 꼭 지금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효은은 그녀를 그렇게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혹시……, 전처럼 나를 도와줄 생각은 없어요?”
윤선이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다. 효은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또 그녀다운 깔끔한 웃음을 보였다.
“말씀만으로 감사드려요. 근데 지금은 일보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열심히 사랑하는 데 시간을 쏟고 싶어요.”
이보다 더 멋진 거절이 있을까. 윤선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효은의 손에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 상담 일지는 아무래도 효은 씨가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어요.”
윤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 또다시 볼 날이 있었으면 한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은 채 최 박사가 돌아가고 효은은 한발 늦게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이도가 보고 싶었다. 이 일지의 마지막까지 꼭 그녀가 채워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효은은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빵빵. 클랙슨 소리가 이명처럼 그녀에게 크게 닥쳐왔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그녀에게 묻는 말이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