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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70화 (70/74)

70장. 저도 달라져 보려고요

주주 총회장을 빠져나온 선영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자신의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그녀를 비호하듯 뒤따르던 비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감정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영란의 입가에 통쾌한 미소가 스쳤다. 제아무리 표정 관리를 해도 지금 권선영이란 인간이 어떤 기분일지 영란은 잘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몰랐다. 동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와 멸시를 당했던 그간의 설움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아 그녀를 괴롭혔는지 당사자가 되어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었으니까. 선영에게도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걸 깨달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며 충분히 즐기고 싶은 영란은 아들 정민과 함께 유유히 공간을 빠져나갔다.

집무실로 들어선 선영은 따라 들어오려는 비서를 막았다. 문을 닫고 책상 쪽으로 걸어간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터져 버린 감정은 이미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선영은 한순간에 돌변해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참아 내지 못한 화를 쏟아 냈다. 굉음이 나고 다급하게 비서가 들어섰다.

“이사님!”

“민아,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를 이성조차 남아 있지 않은 선영은 입술을 짓이겨 문 채 비서에게 지시했다. 곧장 대답하고 집무실을 나선 비서는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화가 가라앉지 않아 머리가 팽팽 도는 것만 같았다. 선영은 그제야 테이블 소파에 몸을 내려놓았다.

‘저는…… 돌아가신 권무상 회장님의 친손자가 아닙니다.’

갑작스런 이도의 충격 고백은 주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기 회장 선출은 무기한으로 연기됐고, 선영은 총회장을 빠져나오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한 걸까. 권이도가 출생의 비밀을 직접 밝힐 것이라는 추측부터 했어야 했나. 아버지는 그것까지 계산하고 유언장 공개를 미룬 걸까.

그리고 어젯밤 영란이 불쑥 찾아와 내민 자료들을 보고 그녀는 다른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것이 동생의 손에 들려 있는지. 누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저 밑으로 끌어내리려 하는지.

복잡해진 머릿속에 인물 하나가 선명하게 걸려 왔다. 서민아. 그 아이밖에 없었다. 그녀의 비밀을 너무 많이 쥐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가짜 딸. 배은망덕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칼날을 그 누구도 아닌, 그녀를 구원한 어머니에게로 겨눴다. 선영은 팽팽 돌던 눈이 불길에 휩싸이듯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뭐라고. 상대방은 알아주지도 않는 멍청한 짝사랑의 말로가 키워 준 부모를 배신하는 것이란 말인가. 선영은 웃음이 났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영란은 그녀가 회장 자리에 앉게 되면 그동안 저지른 비리에 관한 자료들이 모두 공개될 것이라며 여유롭게 협박했다. 그러곤 단순한 이유를 덧붙였다.

‘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언니가 싫어. 차라리, 권이도가 이겼으면 해.’

권이도. 권이도. 끝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이름이 귓가에 맴돌았다. 선영은 머리를 흔들며 벨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붙잡았다. 비서의 전화였다. 그녀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독립한 뒤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민아의 오피스텔이었다. 선영이 들어서자 민아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했다. 이렇게 그녀가 사색이 되어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커피 내린 게 있어요. 그거 드릴게요.”

“너니?”

선영은 여유롭게 앉아 커피 따위를 마실 생각이 없었다. 곧장 따져 묻자 민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네.”

대답은 싱겁도록 쉽게 흘러나왔다.

“왜?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그깟 정략결혼 좀 하라고 했다고 이러니? 아니면, 권이도한테 마지막 순정이라도 바치려고 이러는 거야? 그래. 내 잘못이지. 멀쩡한 게 이상한 그 소굴에서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네가 아니어야 했어!”

선영은 화를 참지 못하고 민아에게 다가갔다.

“……너, 너 같은 게 다 망칠 일이 아니라고!”

한순간 민아의 뺨이 돌아갔다. 붉어진 볼을 붙잡은 민아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다 독하고 서늘한 눈빛으로 선영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왜 절 데려다 키우셨어요? 그냥, 그런 지옥에서 살다가 죽게 놔두시지. 처음엔 멍청하게 천국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살아 보니 더 지옥 같았어요. 더 힘들었어요. 더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집 잃은 개처럼 갈 곳이 없어, 낮이고 밤이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껍데기처럼 살았어요.”

“그래. 그게 네 인생이야. 넌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선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근데 저도 사람이더라고요. 참을 수 없을 땐, 참아지지가 않더라고요. 이렇게 살다가…… 죽기 싫었어요. 내가 잘못한 건 빌고,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어요. 그래서 포기해야 하는 게 어머니라면…… 그렇게 하려고요.”

하. 선영에게선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지금의 자리가 싫다면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허수아비를 데려와 옆에 두면 그만이었다. 민아를 대체할 인물들은 많았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옆에 둘 생각 없어. 너 혼자만 사라지면 끝날 일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너한테 복수심을 느끼게 만들었니? 다른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 네가 어떻게 커 왔는지. 너는 남들보다 더 누리고 더 많이 가지면서 살아왔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야, 알아?”

“……왜, 그때…… 제 가방에서 그 서류를 가져가셨어요? 되돌릴 수 있었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 불행하길 바란 적은 없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왜, 어머니는…… 왜…… 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드셨어요?”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었나. 선영은 뒤늦게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민아가 역겨워 웃음도 나지 않았다.

“네가 착각하나 본데, 그 서류를 쥐고 이도를 협박한 건 너야. 애초에 그 비밀을 끝까지 숨기지 못한 네 잘못이라고.”

“알아요. 그래서, 다시 되돌리려는 거예요. 애당초 그렇게 치졸한 방법까지 써 가면서 회장 자리에 오르는 건, 어머니가 원하신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달라지신 어머니 때문에, 저도 달라져 보려고요. 그게 잘못됐나요?”

민아는 오히려 당당히 선영에게 되물었다. 그녀가 알던 민아가 아니었다. 납작 엎드려 종처럼 굴던 아이가 알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머리까지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선영은 더 이상은 그 어떤 대화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홀연히 돌아섰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널……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돌아서 나간 선영이 쾅, 하고 현관문을 닫자 그제야 민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이제껏 그녀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내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차피 인정받지 못하는 이 집안에서 계속 허수아비로 살 순 없었다. 민아는 안방으로 들어가 상자에 담고 있던 나머지 옷들을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다시 들렸다. 분풀이가 덜 끝난 건가. 민아는 당연히 선영인 줄 알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민아 씨.”

박태수. 어쩌면 이 남자를 정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일지 몰랐다.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 권선영 이사님 만나셨으면…… 이미 상황 파악은 되셨을 것 같은데, 더 설명을 해 드려야 하나요?”

그의 눈빛에서 민아는 이 남자가 모든 걸 알고 찾아왔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우리가 뭘 했다고.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권선영의 사위가 되는 것 아니냐고 진실을 까발리며 알려 줘야 돌아설 것인가. 지쳐 버린 민아는 모든 것이 지겨웠다.

“그래요. 내가 뭘 원하는지…… 누구보다 민아 씨가 가장 잘 알겠죠. 거짓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맞아요. 처음부터 권선영 이사님 사위가 되고 싶어서 이 결혼 할 생각이었습니다. 팀장 자리까지 오르는 것도 좆이 빠질 지경인데,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한 방에 선흥 장녀의 사위가 될 기회가 나한테 생겼어요. 거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태수는 그때를 떠올리듯 황송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여자를 잡아야 하는데, 나한테 관심이 1도 없어요. 생전 처음 여자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해 봤어요. 그래도 모자라는 것 같아서 뭘 좋아하는지, 이상형은 어떤지, 왜 이 집에 입양이 되었는지, 그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난 그런 걸 찾고 있었어요.”

민아는 태수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전 더 이상 권선영 이사님 딸이 아니에요. 그래서 억울하신 거면…….”

“그래요.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태수가 민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거고.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겁니까?”

“…….”

민아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권선영 이사님 딸이 아니래도, 서민아는 맞을 거 아닙니까?”

“박 팀장님.”

“내가, 서민아란 여자가 궁금해졌습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민아는 웃어 버렸고, 태수의 표정은 굳어 버렸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요? 그래요. 제가 궁금해지셨다니 감사하네요. 그런데 전 박 팀장님한테 관심이 없어요. 죄송해요.”

민아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현관으로 들어온 태수의 발이 문이 닫히는 걸 막았다.

“내가 느낀 억울함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이사 준비 중인 것 같은데, 그것만 도와주겠습니다. 아, 다른 건 할 생각 없어요.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까, 관심 없다는 여자한테 더 들이대진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젠 배경 같은 거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냥 여자 대 남자 아닙니까? 내 이 억울한 감정이 풀릴 때까지만…… 보기 싫어도 면상 좀 마주합시다. 나한테 그 정도 권리는 있잖아요?”

할 말을 마친 태수는 문을 열어젖힌 후,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신발을 벗고 거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민아는 현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슈트를 벗고 셔츠 소매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뒤 그녀의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

듬직해 보이는 등이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박태수란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물 한 잔도 주지 않느냐는 그의 말에 민아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저 바닥에 짓이겨져 버린 그녀의 자존심이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민아는 그 자리에서 태수의 등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문이 열리고 이도가 들어서자 영란은 반가운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그에게 내비친 적 없던 친절한 웃음에 이도는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늘 하던 것처럼 같은 온도로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후 회의가 있어서요. 시간 많이 못 냅니다.”

딱 잘라 선을 긋는 모습도 이도는 이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영란은 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집무실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폭언을 퍼붓고 사라질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이성적으로 부드럽게 만들었을까. 이도도 궁금해지긴 했다.

그의 폭탄 발언으로 주주 총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는 회장직이 당연히 선영에게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시간을 두고 결정하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중립적 태도를 보이며 곧장 나서지 않았다. 그러한 의견을 드러낸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어쩌면 지금 그의 앞에 앉은 영란일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 없다니 돌려 말하지 않을게. 회장 자리에 네가 앉아.”

이도는 고개를 들어 잠시 영란을 바라보다 흐린 웃음을 내놓았다. 무상이 죽고 나자 이젠 그녀가 그의 목줄을 잡고 흔들 셈인가. 핏줄이 아닌 가짜가 진짜 노릇을 했으니 그 책임이라도 지길 바라는 마음인 건지. 이도는 모든 게 지겹고 우스웠다.

“제가 아니라도 그 자리 오를 사람은 많을 텐데요. 고모님부터가 탐내신 자리 아닙니까?”

이도는 직언했다. 영란은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런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이젠 욕심의 방향을 바꿔 보려고. 쭉 멍청하게만 돌던 머리가 제정신을 찾았는지 어떻게 하는 게 나한테 더 이득인지 따지게 됐어. 솔직히 나나 우리 정민이가 그 자리에 앉으면 선흥이 어떻게 변할지 불 보듯 뻔한 거 아니야? 난 선흥이 가진 부와 명예를 계속 누리고 싶은 사람이야. 그렇게 되려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네가 회장직을 맡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큰고모님도 잘 해내실 겁니다.”

이도는 단칼에 다른 답을 내놓았다. 이미 마음을 접은 지 오래였다. 더 이상 더러운 잇속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그러지 않을 권리가 생겼다. 이제 와 처음 가진 자유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안 만들 거야. 그럴 수 있는 무기도 당연히 가지고 있고.”

영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도는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이 피로 엮이지 않은 사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에게 밝혔다. 더 억울해하며 그를 괘씸하게 여기고 내쫓으려 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잘됐어. 차라리 네가 우리 집안 핏줄이 아니라는 게 더 안심이 돼. 너는 그저 전문 경영인으로서 선흥을 이끌면 되는 거야. 네가 말한 거짓 없는 새로운 선흥을 만들기엔 너만 한 인물이 없잖아?”

영란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이도는 돌아서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정말, 저한테 바라시는 게 그것뿐입니까?”

어깨를 잠깐 으쓱거린 그녀가 예전처럼 솔직한 속내를 꺼냈다.

“우리 정민이, 제대로 밑바닥부터 가르쳐 준다는 약속 하나 해 주면 더 좋고. 네 뒤를 이어서 선흥을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어떤 방법을 쓰든 그건 네 자유야. 그리고…… 도저히 안 될 놈이면 어쩔 수 없지 뭐.”

간단히 웃고 돌아선 영란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장소를 빠져나갔다. 생각이 많아진 이도는 그 자리에 앉아서 아직 식지 않은 커피 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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