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난 당신이 훨씬 더 좋아
‘그런다고, 네가, 네 인생이 달라질 것 같니?’
끝내 박태수 팀장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민아에게 선영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본심을 드러냈다. 넌 이용당하는 충견으로 살면 되는 거라고. 내가 그 지옥에서 데려와 키운 이유가 그것이라고. 감성에 빠져 허튼 반항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타이르듯 건네는 이성적인 협박이었다.
민아는 어머니 선영의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흘러 내려가지 못하고 심장에 박힌 듯 그녀를 더한 악으로 밀어 넣었다. 이젠 끝내야 했다. 그게 자신을 내던지는 일일지라도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 이대로 사라진다고 해도 생의 미련 같은 건 남지 않은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인데 날 따로 불러내고. 아직 장례식도 안 끝났는데, 이렇게 급하게 내 시간을 뺏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 보자.”
영란은 민아가 언젠간 폭탄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입양해 키우겠다는 언니 선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서울 게 없는 들짐승들은 아무리 개조를 해도 본바탕을 지우기 힘든 법이었다.
그러나 언니의 입양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다. 자식이 아니라 심복을 키우고 싶다는 것. 권선영이 어떤 인물인데. 영란은 언제부턴가 민아에게 싸구려 연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민아는 자신의 편에 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적이라면 적이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눈빛을 하며 일부러 커피 잔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민아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낚아채듯 서류를 빼앗아 온 영란은 그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라지듯 커졌다. 배신감. 그것이 첫 번째 감정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민아가 건넨 서류는 권 회장이 생전에 남긴 유언장이었다. 거기엔 내용을 확인했다는 선영의 사인도 남아 있었다.
이것이었나. 그리도 여유로웠던 이유가. 영란은 기가 차다 못해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억울함에 답답했다.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기대 같은 건 있었다. 어쨌든 핏줄이었고,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의 정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막내라는 이유로 늘 양보만 하던 인생이 머릿속을 스치며 그녀의 상처 난 가슴속에 불을 지폈다. 다스리지 못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으로 영란은 앞의 민아를 바라봤다. 무엇보다 이 아이의 의도를 알아야 했다. 이것을 보여 준다는 건 그녀가 선영의 편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모님의 주식을 원한 건, 이 모든 걸 숨기기 위한 쇼일 뿐이에요. 만약 이모님이 그 계략에 속아서 주식 전부를 건넸다고 생각해 보세요. 약속한 내용이 지켜졌을까요? 어머니는 할아버지 유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회장 자리에 오르실 텐데, 뭐가 아쉬우시겠어요.”
영란은 혼란스러웠다. 이 유언장대로라면 민아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언니 선영이 주식을 받는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의심하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회장이 되기 전에 방해물들은 없애는 것이 그녀의 작전이었을까. 모든 걸 뺏어 가야 안심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 어쩌면 그 추측이 더 신뢰가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민아의 태도도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권선영 이사님과 관련된 비리 자료들에요.”
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또 다른 서류를 영란 앞에 내밀었다. 잘 키운 충견이 사육사를 물어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영란은 새삼 민아가 무섭고,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주인을 물어뜯는 이유가 뭘까. 그래도 호적상 어머니였다. 세상에 끝까지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었고, 언젠가 그녀의 지금 이 배신도 밝혀질 것이다.
“네, 네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야? 네 어머니가 회장 되면 너한테 더 좋은 거 아닌가?”
단순하다는 것처럼 민아가 영란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 봤자 지금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충견이 되기밖에 더 하겠어요?”
“하. 왜? 이제 와서 착한 사람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야. 달라져 봤자 알아주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 너는 어차피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으로 기억될 테니까.”
영란은 어울리지 않는 충고를 건네면서 의도치 않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변하려 해 봤지만 그녀는 이미 그런 여자였다. 세상이 그녀를 그런 사람으로 정의 내렸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절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요.”
체념이 담긴 민아의 눈빛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저는 알아주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선영의 옆에서 민아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짐작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 깊은 상처로 인해 자폭하며 모두를 멸망시키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영란은 처음으로 민아를 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래. 네 시나리오대로 이걸 미끼로 언니가 물러난다고 하자. 그다음은 당연히 권이도 아닌가?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어차피 끝난 게임이라고.”
민아가 이 정도로 마음을 먹었다면 더한 화살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영란은 접었다고 생각했던 욕심이 다시 되살아나듯 솟구쳐 올랐다. 자신은 달콤한 열매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이미 깨달았다. 그것 또한 자아 성찰이었다.
“만약…… 이도 오빠가 권씨 핏줄이 아니라면요?”
* * *
무상을 떠나보낸 이후로도 일상은 평온했다. 적어도 이도와 효은에게는 그랬다.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몸을 섞고,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있는 동안 떨어져 있는 시간을 아쉬워했으며 저녁을 기다리고 또다시 만나 그 일상을 반복했다.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이제야 깨달아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달콤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요.”
아침 식사를 한 식탁을 정리하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온 효은은 이도의 넥타이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그의 눈빛에선 더할 수 없는 사랑이 쏟아졌다.
“오늘은 여기서 해 볼까?”
효은은 시선만 들어 그를 노려봤다. 왜 그 소리를 안 하나 싶었다. 가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 이렇게 큰 파장을 몰고 올 줄은 몰랐다. 체력 보충을 위해 매일 저녁 반찬으로 올리는 장어도 모두 효은이 다 먹어야 할 판이었다. 이도는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처럼 효은을 안고 또 안았다. 그게 그동안의 그리움에 대한 복수이자 보상이라는 걸 알았지만 우선은 그녀가 살아야 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흔적들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아무것도 못 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참아요. 중요한 날이잖아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는데도 효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직도 스파이랑 내통 중이야?”
이도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생각보다 더 무서운 여자라는 걸 알겠죠?”
효은은 일부러 이도의 넥타이를 바짝 조여 맸다.
“그래서 나한테 백수 된 거 숨기고 휴가라고 한 거야?”
당황한 그녀가 잠시 눈을 끔벅였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 스파이가 내 스파이기도 해.”
이도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든 일의 내막을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먼저 묻지 않았다. 기다림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효은은 또 안타깝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반성하라고 한 말은 아니야.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는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우리,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만큼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
이리도 생각이 깊은 남자인데. 효은은 그를 떠난 시간들이 후회로 밀려왔다. 이도는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려 뺨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 이유를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이해했다.
“그래도, 배려만 하는 사이는 싫어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더 알고 싶어서 집착도 하고, 그러다가 미안해하기도 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어요.”
효은은 거짓 없이 솔직해졌다.
“그래. 그럼,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신임 회장을 뽑는 주주 총회가 있는 날이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그 스스로 결정해야 할 몫이었다. 효은은 잠시 이도를 바라보다 똑같은 손길로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냥…… 아저씨 선택 존중해요. 내가 꼭 회장 마누라 되고 싶다고 떼쓰면 당신 힘들 때마다 나한테 그 얘기 할 거잖아요. 책임지라고. 뭐, 그렇다고 백수가 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우리 두 사람, 아니, 어쩌면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도 밥은 굶기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있어요, 나.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하지 하지 말고, 아저씨 생각만 해요.”
“아저씨든, 당신이든, 이제 호칭은 하나로 통일해. 참고로, 난 당신이 훨씬 더 좋아.”
이도는 또 그렇게 싱겁게 효은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든 믿을 수 있는 신뢰는 이미 생겼다. 그저, 당신이 아플 때, 힘들 때, 그리고 가장 기쁠 때, 내가 당신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효은은 그 마음만 알아 달라는 뜻을 담아 그를 꼭 끌어안았다.
“진짜 시간 없는데, 어쩌지?”
이도는 능글맞게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효은이 그를 밀치고 드레스 룸을 빠져나갔다. 이도는 효은을 따라 방을 나서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모든 걸 결정한 상태였다.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이제 그의 곁엔 권이도의 하나뿐인 진짜, 장효은이 있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는 결론이었다.
* * *
주주 총회가 열릴 공간 안에는 평소와 다르게 들뜨고, 초초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임 회장에 누가 될지에 대한 모두의 관심이 지대한 것은 당연했다. 그 인물이 새로운 선흥을 만들어 갈 것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가 내놓은 법에 따라야 했다. 후보로 거론된 선영과 이도는 앞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회장 선출에 앞서 이도는 예정에 없던 시간을 만들어 단상에 올랐다. 술렁이던 장내가 이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영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권이도 상무입니다. 먼저 선흥 그룹 신임 회장을 선출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제 거짓 없고, 신뢰할 수 있는 기업으로 저희 선흥이 새로운 도약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앞서, 저부터가 거짓 없이 솔직해져야 한다는 건 당연할 것입니다.”
이도는 준비한 서류를 총회장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띄웠다. 장내는 소란해지기 시작했고, 모두들 이 사실을 직접 폭로한 이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