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장.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동시에
“임신한 줄…… 알았어요.”
몇 번째인지, 숫자를 셀 수 없이 정사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효은을 바라봤다. 가라앉은 눈빛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효은은 그런 이도를 더욱 깊게 품으며 뒤늦은 고백을 했다.
“유학 가기…… 전이었어요. 그래서, 임신이면 떠나지 말아야지. 책임지라고 아저씨한테 더 화내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를 생각하듯 효은이 슬픈 웃음을 보였다.
“근데…… 아니더라고요. 혹시 몸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걸까 싶어 검사까지 다 받고 괜찮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그제야 눈물이 났어요.”
이도는 그때의 효은이 가진 마음의 슬픔을 다 알지 못해 미안했다. 그래서 그저 그녀를 말없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는지 알았어요……. 내 마음이 문제였어요.”
이도는 효은의 두 뺨을 붙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난 너 하나면 돼.”
혹시나 효은이 임신에 대한 부담을 느낄까 봐 이도는 자신의 뜻을 다시 한번 단단히 일렀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 효은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이리도 달콤한 고백을 듣고 싶어서였을까. 효은은 그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그에게 가족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그저 욕심으로 남는다고 해도, 더 이상은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있으니까. 이제 서로를 믿게 되었으니까.
“나도 고백 하나 할까?”
자신의 차례라는 것처럼 이도가 물었다. 효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는 듯 민망한 웃음을 덧붙였다.
“사실은, 아웃렛에서 너 만났을 때…… 그 아이가 내 아이일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어. 그럼 널 어떻게든 옆에 데려다 놓기 쉬울 테니까.”
박 비서조차도 모르게 진실을 알아보았다. 그 아이가 효은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결과를 확인했을 땐…… 허탈함이 아닌 또 다른 질투심이 일었다.
그때 그녀의 옆에는 늘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들던 ‘한승재’라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부부라고 생각할 만큼 두 사람은 잘 어울렸고, 그들 사이에 있는 아이 또한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갈 곳 없는 그 아이 때문이라도 효은이 그 남자에게 가 버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소유욕이었지만, 그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이었다.
“설마, 내가 아저씨 아이를 혼자 키우겠어요?”
효은은 그의 추측을 단번에 날리는 물음을 내놓았다
“내 성격 알잖아요. 당장 양육비 내놓으라고 찾아갔겠죠.”
그녀의 대답에 이도는 웃어 버렸다. 맞았다. 그가 아는 효은은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데 더 익숙했다.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에게 다가와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녀라서 이도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난 빈털터리가 되어도 너한테 다 주겠지.”
그가 미련 따윈 없다는 듯 웃으며 진하게 입을 맞췄다.
“진짜죠? 나한테 다 줄 거죠?”
효은이 사랑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물었다.
“대신, 나도 데려가야 한다는 거 알지.”
이도는 그게 몸이든, 정신이든 전부 다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그녀의 몸을 더욱 파고들었다.
“지치지도 않아요?”
효은이 고개를 저으며 묻자 이도는 아직도 단단히 서 있는 아래를 그녀의 손으로 붙잡게 만들었다. 효은은 놀라 귀까지 빨개졌다.
“이거, 왜, 이래요?”
“왜 그럴까?”
이도가 진지하게 물었다. 답은 그의 눈 안에 있었다. 너 때문이라고. 그러니 책임지라고. 효은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2년 동안 기다리게 한 벌이에요?”
그녀다운 추측이었다. 이도는 당연하지 않느냐며 입을 맞춰 왔다. 그러곤 가슴을 훑고, 배를 매만지고, 아래를 뜨겁게 머금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효은이 몸서리치며 떨어지려 하면 이도는 그녀를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그럼 효은의 가슴은 또다시 울컥하며 먹먹해졌다. 이리도 그녀를 놓지 못하는 그의 집착이 그동안의 그리움처럼 느껴져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끝에 도달하기 전, 이도가 효은의 얼굴을 붙잡고 부탁했다. 그것은 애원 같기도 했다. 효은은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사랑해요.”
효은이 고백하자 이도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깊은 곳에 ‘사랑’이라 대답한 흔적을 토해 냈다. 그러곤 물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또다시 그가 효은을 끌어안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짙은 눈빛으로 허리를 포개 오자 효은은 그대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진짜는 영원히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들끓었다. 그가 그녀를 끝없이 끌어안도록 만들었다.
* * *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동시에 찾아오는 걸까. 충만한 행복함으로 단잠을 자고 있던 두 사람을 깨운 건 이도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조용한 새벽녘에 전화가 울린다는 것만으로도 나쁜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효은은 나체로 앉아 전화를 받는 이도의 슬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꾸만 그를 안고 싶었다. 슬픈 일이 생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녀의 예감은 맞았다. 하늘은 할아버지가 떠난 그때처럼 끝없는 행복만을 주지 않았으니까.
무상이 태호의 곁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강 여사는 덤덤히 이도에게 알렸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도는 전화를 끊고 효은을 돌아봤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에게 그가 괜찮다는 듯 입을 맞췄다. 그는 조용히 웃었지만 그 웃음 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효은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침대에서 내려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예의를 갖춘 옷을 찾아 입고 거실로 걸어 나오는 그의 얼굴엔 감정 같은 건 없었다. 효은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로 다가가 그날의 이도처럼 말없이 끌어안기만 했다. 이도는 괜찮다며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다녀올게.”
그가 현관 쪽으로 돌아서려 하자 효은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가게 해 줘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도는 그의 가족들 사이에 효은을 세워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도는 늘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효은의 손을 붙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나타난 친인척들은 무상이 이리도 허무하게 세상을 뜰지 몰랐다며 한탄했다. 단단한 양반이었으니 당연히 죽음 앞에서도 얼마간은 맞서 싸울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장례는 무상의 유언을 따라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라고 그의 전담 변호사가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래도 한 그룹의 회장이 가는 길인데 이리 조용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두 사위는 같이 뜻을 모았다. 그들 사이에서 두 딸이나 손주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살았다. 뜻을 거슬러 봤자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리고…… 유산 관련 유언 내용은 신임 회장 선출 이후에 공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어쩐 일로 조용하던 둘째 딸 영란이 무슨 소리냐며 전담 변호사를 바라봤다. 당연히 공평하게 나눠져야 할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 변호사는 회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유산의 행방이 달라질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이렇게 내보이는 것일까. 허무하면서도 억울한 기분이 솟았다.
“알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영란은 변호사를 돌려보내는 선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유를 가진 언니의 담담한 눈빛에서 모든 걸 읽었다. 아버지와 언니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조용할 수가 없었다. 권이도를 이길 수 있는 패를 이미 쥐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영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욕심 같은 건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본성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선영이 회장 자리에 앉는 걸 이젠 절대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권이도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그녀의 앞날에도 더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이도는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효은에게 전해졌을 테니, 무상도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설사 한이 남았다고 한들, 그것은 그의 몫이었다. 이도는 이제 그에게 남은 미련이 없었다.
권씨의 핏줄이 되어 가짜로 살아온 삶 역시 그 자신임을 받아들였기에 더 이상은 미련한 인생을 살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중심에는 사랑, 효은이 있었다.
이도는 쪽잠을 자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효은을 바라봤다. 남들이 꺼려 하는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상을 치르는 내내 부엌만 맴도는 강 여사의 옆에서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도 그녀뿐이었다. 무상이 살아온 삶의 진짜는 저 두 사람이라는 것처럼, 두 여인은 조용히 공간을 지켰다.
“다시…… 잘 지내기로 한 거죠?”
그처럼 두 여인에게 시선을 두던 민아가 용기 내듯 이도에게 물었다. 그녀를 돌아본 이도는 더 이상 서늘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효은이 곁에 있다면, 이젠 그 누구도 미워하고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다시는 안 놓칠 거야.”
이도의 대답에 민아는 다행이라는 웃음을 보였다. 그러곤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챙겨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그곳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 쓸 사람은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음이 연결되기도 전에 당사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조문객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인 듯 보였다.
“왜? 무슨 일이니?”
그녀를 대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셔야 할 것도 있고요.”
민아는 영란을 향해 흔들림 없이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