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장. 내가 다 줄 수밖에
권 회장의 눈짓을 받은 강 여사는 조용히 효은의 손을 한 번 잡아 준 뒤 병실을 나섰다. 이제 공간 안에는 효은과 무상 둘뿐이었다. 효은은 간단한 인사만 건넨 뒤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2년 사이, 너무나도 달라진 무상의 모습을 보며 세상을 떠나기 전, 할아버지 태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효은과 함께 있던 이도가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이 여기라고 했다. 박 비서는 혹시나 하는 오해라도 둘 사이에 더 이상 남아서는 안 된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그래서 효은은 그저 가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부풀려진 상황인 줄로만 알았다.
재벌들의 그런 모습들은 티브이 드라마의 단골 장면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상은 절대 무너질 일이 없을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효은이 아는 모습은 그랬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자식들을 손에 쥐고 호령하며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들어 효은이 그의 옆에 잠시 머물러 벗이 되어 준 적도 있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생각이야?”
효은이 온다고 해서 무상은 호흡기까지 빼놓고 기다렸다. 어차피 오늘 눈을 감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하루라도 더 살아 보겠다고 악착같이 의술에 의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하지만 떠나기 전, 단 하나만은 그의 입으로 직접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용서. 그것이 맞을 것이다. 무상은 다가온 효은의 손을 붙잡았다.
“태호가…… 이랬지. 자주 손을 잡아 주었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따뜻하게 품었지. 너, 네가……, 그런 네 할아버지를 아주 많이 닮았어.”
효은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무상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저한테, 할아버님도 그러세요. 처음엔 좀, 무섭기도 했는데…… 저한테는 잘 웃어 주시고, 제 편이 되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할아버님도 따뜻한 분이세요.”
노인의 마음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그 속에 감춰 둔 어두운 욕망을 읽어 낼 만큼 그녀는 세상을 알지 못했고, 아직 어렸다. 순수했기에, 그저 이 집안사람들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도 녀석이 들으면…… 널 욕할 게야.”
무상이 효은의 표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라고 하죠.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저도 지금 그렇거든요. 제가 따끔하게 혼낼게요.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잘해 드리…….”
“내 뜻이었어. 안 가겠다는 그 녀석을 독일에 보낸 건…….”
왜 모든 진실은 뒤늦게 밝혀져 사람들을 후회하게 만드는 걸까.
효은은 무상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한 순간,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무상이 이제부터 털어놓을 이야기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몰고 올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두고 떠나 버렸던 순간, 효은은 이미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되돌릴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도 알아 달라 했던 이도의 속마음을 효은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얼마나 더 그에게 미안해야 할까. 그것마저 모두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라 이해하고 넘어가 버릴 그가 눈에 그려져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날 찾아오기만 기다렸어.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네가 그 녀석을 이해하고, 나 또한 그 녀석을 이해할 수 있을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아직도 내가 녀석을 이용한 건지, 욕심낸 건지, 아니면…… 내 혈육보다 더 마음을 준 것인지.”
무상은 결국 효은에게까지 이해받으려 하는 자신의 변명 앞에서 신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제 와 그 녀석이 그를 받아들여 주고, 할아버지로 인정하길 바라는 것일까. 그 자신 스스로도 정리할 수 없는 마음들이 여전히 정신을 괴롭혔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손자가 내 핏줄이 아니란 증명이 눈앞에 있었어. 녀석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골방에 갇혀 울던 녀석이 내게 매달렸지. 뭐든지 하겠다고.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그래서 가짜로 살라 했다. 절대 들키지도 말고, 나 권무상의 손자로만. 내가 그리 시켰어.”
효은은 더 들을 수 없어 무상의 손을 놓아 버렸다.
“그만, 그만하셔도 돼요. ……알겠어요. 다 이해했어요.”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렀다. 다른 말은 기억나지 않았다.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울며 빌었을 그때의 어린 권이도가 너무 안쓰러워 가슴이 저렸다. 그의 외로움이 심장에 박히듯 그녀에게 사무쳤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어요. 그렇게 결혼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나한테 마지막 한 끝은 주지 않고 숨기는 게 뭔지 궁금하면서도 서운했어요. 나를 사랑했다면 말했을 텐데.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날, 그는 떠나겠다는 그녀를 말리지 않고 다시 별장으로 데려갔다. 효은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짐을 싼 뒤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혹시나. 그래도. 제발, 나를 붙잡아 주었으면 했지만 그는 돌아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바보처럼 서 있었다.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사랑을 그녀에게 진심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진짜라 말할수록 그것은 더 완벽한 가짜로 꾸며졌다.
“그래. 그 녀석에게 가짜로 살라 시킨 건 내 욕심이었어.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선흥이었다. 그걸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면 내 핏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어. 이도는 완벽하게 제 몫을 해냈어. 그래서…… 더 욕심을 부리고 말았어. ……그 녀석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게, 선흥이었으면 했다.”
권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죄를 변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게 한 부탁이 놓아 달라는 거였어. 진짜가 되겠다고. 괘씸했어. 내가, 그 녀석을 놓을 수가 없었어. 이제껏 쌓아 온 그 노력들을 어찌 그렇게 간단히 버리겠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알았다. 내가 선흥보다…… 그 녀석을 더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걸…….”
효은은 이 모든 게 서로를 향한 어긋난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무상은 제 곁에 두는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려 했고, 이도는 떠나는 것으로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사랑을 몰랐다. 그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 주지 못했다. 과거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그를 벌하였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난 뒤론 사랑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다…… 내 욕심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
무상이 다시 효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니…… 효은아. 그 녀석을…… 진짜로 살게 해 다오.”
“…….”
어쩌면 이곳에 왔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이도였을지도 모른다. 무상이 내놓은 진심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했다. 효은은 그러겠다는 승낙도, 그러지 않겠다는 거절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빠져나왔다.
이도에게는 그의 오피스텔에 가 있겠다고 문자를 보낸 후, 마트에 들렀다. 그가 좋아했던 음식을 떠올리며 재료들을 집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효은은 더 이상 머릿속의 회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들었던 이야기가 현실 같지 않았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끝없는 후회가 두려워 효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이도를 기다렸다.
평소에도 요리 솜씨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신이 반쯤 나가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밥은 물을 너무 많이 넣어 질게 되었고, 찌개에는 구우려던 동그랑땡이 불청객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시계를 확인하자 그의 퇴근 시간이었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효은이 다시 정신을 붙잡고 다른 재료들을 꺼내려는데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들어서고 구두를 벗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성큼성큼 부엌에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효은은 꺼낸 오이를 씻기 위해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좀처럼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장효은.”
가라앉아, 꼭 혼내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가 그녀를 불렀다.
“아, 왔어요? 배고프죠?”
평소처럼, 그 옛날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효은이 말을 뱉었지만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떨렸다. 나이가 들면 거짓말도 잘한다던데, 효은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달라지지 못했다.
“할아버지 만난 거 알아.”
그는 오히려 담담했다. 효은은 그러냐며 돌아서 홀가분한 미소로 그를 마주하는 게 맞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먹고 몸을 돌려 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화가 난 눈빛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제대로 화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가 효은인 걸까. 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그걸 알고 싶어 그리도 안달이 나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의심했음에도 이제는 그 마음을 알게 되면 행복하기보단 가슴이 아플 것 같아 효은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밥은 무슨 밥이야.”
이도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동안 말 못 했는데…… 솔직히 네 밥, 먹기 힘들어.”
다시 한번 이혼 서류가 날아갈 소리를 그는 당당히 했다. 효은은 이도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이놈의 눈물샘을 없애 버려야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불리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그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는 여자는 질린다며 그가 떠나 버릴까 봐 겁날 정도였다.
“앞으로 내가 해 주는 밥, 먹기만 해 봐요.”
효은이 돌아서 칼을 잡고 오이를 난도질했다. 이도는 잠깐 주춤하며 머뭇거리다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냈다. 천천히 그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뒤 가만히 끌어안았다.
“안는다고 다 해결될 것 같아요?”
안아 줄 사람이 누군데. 이 아저씨가 정말. 효은은 또다시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우리 이제, 누구 탓도 하지 말자. 후회도 하지 말고, 오해도 하지 말고, 동정하지도 말자. 그냥…….”
“아니, 말하지 마요.”
효은이 그를 떼어 내고 말을 막았다.
“내가 할 거예요. 내가 해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이도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 ……해 봐.”
그가 얄밉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아저씨, 아니, 당신…… 아이 갖고 싶어요.”
늘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여자였다. 이도는 어이가 없어 웃어 버렸다.
“당신한테…… 진짜 가족, 만들어 줘야겠어요.”
웃던 이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눈물은 그녀만의 무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이도가 효은 뺨을 붙잡았다.
“내가 다 줄 수밖에.”
전부를 내걸 듯 그의 다급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