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65화 (65/74)

5장. 어쩐지 사랑 고백 같아서

“꼭 이렇게 하셔야 했어요? 왜요, 나중에 돌아가시면 알려 주지 그러셨어요!”

역시나 무상의 병환을 듣고 달려온 가족 중에 거리낌 없이 제 말을 내지르는 건 둘째 딸 영란뿐이었다. 그는 늦은 밤 발작을 일으켰고, 의사는 이젠 모든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 여사에게 안타까운 조언을 했다.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저 멀리 물러서서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강 여사의 모습이 이도의 눈에 잡혔다. 그녀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는 듯 경계선을 그어 놓고 무리와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저 여우 같은 여자, 아버지 옆에 붙여 놓는 게 싫었다고요!”

영란이 기어이 강 여사에게 화살을 쏘아 댔다.

“……그만해.”

그런 동생을 제지한 건 역시나 선영이었다. 그녀는 영란을 한쪽에 밀어 놓고 잠자코 무상을 내려다봤다. 폐의 반이 죽어 제 역할을 못한다고 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산소 줄을 끼고 있는 양반이 이런 제 모습을 가족에게 들키지 않으려 감쪽같이 속여 왔다는 게 더 우습고 환멸스러웠다.

뭘 얼마나 지키려고 이렇게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것인지. 그것이 자신을 위한 건 아니란 걸 알지만 선영은 여기까지 잘 참아 내 견뎌 왔다. 이제 무상의 선흥은 과거로 남을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장 박사 쪽으로 옮겨서 수술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어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는 장녀의 역할을 그녀는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말을 뱉는 것조차 쉽지 않으면서도 무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영은 작은 한숨을 쉬며 아버지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이 지금 누구에게로 향해 있는지 읽혔다. 뒤늦게 나타난 이도는 그저 손주들의 자리 끝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이도는 무상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반찬을 가져다주던 강 여사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지 못해 애달픈 눈빛을 보인 게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이도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듣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미 그들 사이는 긴 강을 건너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홀가분하게 지금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감정의 찌꺼기만 남은 상황이었다.

“장인어른, 그래도 좀 더 힘을 내셔야죠. 이 사람을 봐서라도요.”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선영의 남편 한길이 먼저 나서서 맏사위 노릇을 했다. 그 뒤에 서서 영란의 눈치를 받고 뒤늦게 한마디를 붙이는 막내 사위도 오랜만인 건 마찬가지였다.

“요즘 의술로 못 고치는 병이 어디 있습니까?”

제 몫을 챙기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온 사위들을 오랫동안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무상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늘 이렇듯 곁을 주지 않는 차가운 장인어른이라 사위들도 큰 자리가 아니면 핑계를 가져다 대고 피했다. 그저 선흥의 사위라는 타이틀만으로 만족하자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유산 문제에 있어서는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가장 밑바닥의 욕망 앞에서 물러설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 달고 단 열매를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병실 안에 있었다. 민아와 정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도는 자신 역시 그들에게 그런 인간으로 비쳐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만 쉬고 싶어. 다들…… 가거라…….”

무상은 더 이상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고개를 창가로 돌려 버렸다. 하나둘 자리를 뜨자 이도도 그들을 따라 병실을 나왔다.

“넌 알고 있었지?”

영란이 이도를 돌아보며 비꼬듯 물었다.

“……몰랐습니다.”

이도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가 그곳을 벗어났다. 영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는 조카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선영 쪽으로 달라붙었다.

“언니, 이제 머리 좀 아프겠네. 난 지금 누가 회장이 될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편안한 것을. 내가 이제야 무소유의 마음을 터득했다니까.”

비밀의 열쇠라도 쥔 것처럼 그녀에게 주식을 넘기라고 제안하던 언니가 효은의 조부가 죽고, 권 상무가 선흥의 주식을 넘겨받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태도를 유지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구경하는 입장에선 이토록 흥미롭고 짜릿할 수 없었다. 어차피 영란은 자신의 아들 정민이 회장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언니와 조카를 흔들면서 그들에게 밀려난 패배자의 앙갚음을 해 왔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무소유가 뭔지나 알고 입을 놀려.”

선영은 명품으로 휘감은 동생의 겉모습을 한심하게 훑어 내리며 비웃음을 내놓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월에 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맞서는 주제에 무소유라니. 겉과 속, 모든 것이 작위적인 동생을 딱한 눈빛으로 건너다보던 선영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권 회장이 남길 유산을 모두 그녀가 물려받기로 확답을 받았지만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양반이었다. 이도를 감쪽같이 권씨 핏줄로 둔갑시킨 사람이었다. 그녀가 회장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대기하던 비서를 만난 그녀는 가방을 넘기며 핸드폰을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가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죠. 만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요?”

선영의 제안에 여자는 곧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 * *

“이러시면, 저 상무님한테 혼납니다.”

효은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가져온 짐까지 모두 챙긴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에 있도록 만들라는 이도의 신신당부를 듣고 보초를 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효은에게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재영은 자신의 실수로 그녀가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소식에 이도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권 회장의 현재 상태를 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이도의 눈 밖에 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재영은 얼른 효은의 가방을 뺏어 들 듯 잡아 쥐었다.

“비서님이…… 최 박사님 소개한 거 맞죠?”

효은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 것처럼 재영의 허를 찔렀다. 그걸 지금 효은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신변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루트로 전달받은 사항은 없었다. 재영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효은이 뒷말을 덧붙였다.

“아직 제가 퇴사한 건 모르시는구나. 유능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그렇게 자신을 뒷조사하며 이도와 운명처럼 다시 재회하게 만든 걸 어떤 핑계로 풀어낼지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재영은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저 혼자 꾸민 일입니다. 상무님 지시 같은 건 없었습니다. 너무…… 그저, 기다리는 게 답인 것처럼 바보같이 굴기에, 아니, 구셔서 제가 주제넘는 짓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퇴사하시게 된 거라면 제가 최 박사님을 만나 뵙고 사죄를 하도록…….”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 일이 발단이 되긴 했지만, 저도 박사님을…… 속였어요. 제가 솔직했어야 했는데……. 그 잘못을 따지려고 박 비서님께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러니까,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요. 저 이제 멀쩡해요. 서울 가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꼭 부탁드려요.”

효은을 지금 서울로 데려가면 분명 이도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재영은 그녀를 막아 낼 자격도, 힘도 없었다.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건 사모님도 받아 주셔야 합니다.”

효은은 사모님이란 말에 놀라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물건들을 챙겨 먼저 병실을 빠져나갔다. 효은은 뒤돌아 공간을 둘러봤다. 이도와 함께 있었던 어제가 꿈처럼 낯설어지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이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효은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숨을 골랐다.

“네. 아저씨.”

― 또 어디로 숨을 생각이면, 조직 하나 사서 사람을 풀 거고, 뭘 배우러 떠나겠다고 하면, 평생 한국에만 살도록 출국 금지 명단에 올릴 거야.

병실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안심하는 한편 괘씸한 마음에 진지하게 뱉어 내는 그의 협박이 효은은 어쩐지 사랑 고백 같아서 웃음과 함께 눈물이 났다.

생과 사,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붙어 다니는 것일까.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효은은 이도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러한 삶의 진리를 이제야 인정하고 가슴 깊이 받아들이며 그녀는 또 한 뼘 성장했다.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가요. 지금 아저씨 편이랑 같이 있으니까.”

효은이 운전석의 박 비서를 바라보며 그를 안심시켰다.

― ……어디야?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서울 가는 길이에요.”

― 설마, 나 만나러 온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가 지금 강원도로 내려왔다는 것을 효은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이렇게 빨리 내려올 줄 몰랐어요. 미안하지만, 어제 나 두고 가 버린 벌이라고 생각해 줘요.”

이도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는지 잠자코 아쉬운 숨소리만 내놓고 있었다.

― …….

“얼른 와요. ……보고 싶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또 이렇게 그는 효은에게 지고 말았다.

―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그의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효은은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그녀가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박 비서는 다른 물음 없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효은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약속한 장소의 문 앞에 서서 그녀는 숨을 골랐다. 똑똑. 단정하게 노크를 하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사람이 반가운 표정으로 효은을 반겼다.

“어서 오너라…….”

무상은 자식들에게 보인 적 없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효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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