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장. 이만한 호구가 어디 있어?
노란 물결이 치는 해바라기밭이었다. 그 속에서 효은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가 곁에 있었고, 할아버지도 옆을 지켰다. 해바라기를 마음대로 만져도 그녀를 아프게 하는 알레르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을 지켜보고 서 있는 한 남자.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일까. 아니면……. 효은은 해바라기 꽃 한 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이거. 용기 내 해바라기를 건네려 하자 남자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사라져 버렸다. 울컥 울음이 솟구쳤다. 그녀의 편은 모두 여기 있는데. 행복할 이유밖에 없는데. 왜 이리도 서러운 것인지. 효은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누가 보고 싶어서 우는 거야?”
효은은 눈을 떴다. 꿈속에서도 꿈인 줄 알아서 깨고 싶지 않았는데,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수건이 거둬지고 또 다른 수건이 올려졌다. 고개를 반쯤 돌려 그녀를 간호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내 잘못이야. 그걸, 그냥 갖다 놓게 하는 게 아닌데…….”
남자의 말에 그제야 효은은 기억이 돌아왔다. 해바라기. 노란 꽃이 가득 들어찬 그 방 앞에서 쓰러져 버린 것일까. 그런 그녀를 왜 이 남자가 간호하고 있는 걸까.
“김 집사님이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도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던 그 감정을 뒤늦게 풀어놓았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땐 거짓말인 줄 알았다.
‘사모님이 찾아오셨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응급실로 가는 길이에요.’
그다음 말을 듣고 나선 가슴을 쥐어뜯으며 강원도로 급히 내려와야 했다.
일의 내막을 전해 들으면서 이도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더 이상은 후회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의 후회는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왜 해바라기를 사 모아서는. 그걸 또 왜 거기에 가져다 놓아서는 이 사달을 만들었단 말인가. 쓰러진 효은을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위험했을 거라는 응급실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취를 취한 뒤 그녀를 1인실에 입원시키고 나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하지만 효은은 좀처럼 깨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열이 오른 그녀의 머리에 차가운 수건을 가져다 대어 주는 것밖에.
“……해바라기는요?”
그게 효은의 첫말이었다. 이도는 한숨 쉬듯 그녀를 바라봤다.
“다 치워 버리라고 했어.”
“……아저씨.”
“이렇게 될 줄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런 짓 절대 안 했어. 그것도 다 내가 너한테 하는 시위 같은 거였어. 나는 이렇게 널 그리워하고 있는데……, 왜 돌아오지 않는 거냐고. 얼마나 더 힘들게 만들 작정이냐고. 사실은 너를 미워하면서 사 모은 거야.”
이도가 밑바닥에 있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정도로…… 미웠어요? 엄청 많던데.”
효은은 방 안 가득 들어차 있던 해바라기를 떠올리며 농담처럼 말했다.
“거긴 왜 갔어?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당연히 팔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거기서 할아버지랑, 아저씨랑, 같이 있었던 추억도 좀 생각하고. ……마음 정리도 하고.”
“그런다고 우리 사이가 정리될 것 같아?”
이도가 혼내듯 그녀를 다그쳤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린 진짜였어.”
“…….”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그래. 네가 안 믿는다고 해도 사실이야 그러니까, 그냥 불쌍한 남자 하나 살려 준다 생각하고 받아들여. 옆에 둬서 해될 건 없잖아. 맛있는 것도 사 주고, 간호도 해 주고, 재미없는 농담도 받아 주고, 이만한 호구가 어디 있어?”
“천하의 권이도 상무가 호구라는 거 알려지면, 선흥 주식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효은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선흥, 내일이라도 버릴 수 있어.”
이도는 진지했다. 그의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효은은 그래서 겁이 나는 것 같았다. 그와 했던 것이 정말 모두 진짜였다면, 그녀가 오해한 것이라면, 이도가 견뎌 온 시간이 너무 아팠을 것 같아서 도저히 그 진실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겁이 없던 여자는 사랑을 알게 된 이후로 아주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어쩜 이렇게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을까. 그는 2년 전 그때처럼 효은을 간호하며 가져온 업무 서류를 넘겨 보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고 있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효은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이도에게로 다가갔다. 한쪽 손에는 서류를, 다른 팔은 이마에 올려놓고 잠든 모습은 그때처럼 변하지 않고 여전했다. 효은은 새끼 고양이처럼 그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올려다본 그의 날카로운 턱선엔 벌써 까슬까슬한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효은은 팔을 뻗어 그 수염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렇게 결국은 그의 지친 얼굴을 쓰다듬게 되고 말았다.
팔이 내려가고 눈을 뜬 이도가 아래의 효은을 내려다봤다. 작은 보조 등만 켜 놓은 1인실엔 돌이킬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효은을 잠자코 바라보던 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괴롭힐 거야?”
효은에게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 이도는 단숨에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링거 줄이 흔들리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넌 꼭…… 날…… 아픈 여자한테 욕정을 품는 짐승으로 만들어.”
그녀가 했던 것처럼 이도의 손이 자연스럽게 효은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 안고 싶어요?”
효은이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효은의 환자복 안으로 불쑥 들어온 이도의 손이 이번엔 그녀의 살갗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효은은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기억하는 순간들. 그걸 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첫 남자.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차라리 잊는 것을 포기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이도의 입술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삼켜 물었다. 효은은 저절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서로를 탐하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숨이 끊길 듯 거칠게 입술을 삼키다가도 이도는 그런 자신을 반성하듯 그녀가 편히 숨을 쉬도록 잠깐의 틈을 주었다.
“…….”
“…….”
낮은 신음 소리만 병실 안을 채웠다. 이도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눈빛으로 효은을 안아 들었다. 그러곤 링거 줄이 빠지지 않게 조심히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그가 이대로 그만둬 버릴까 봐 효은은 그의 셔츠 끝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이도가 항복이라는 듯 웃어 버렸다.
“천천히 못 해. 거칠 거야.”
경고하듯 말한 이도가 자신 때문에 금세 부어오른 효은의 입가를 매만졌다.
“난 아저씨가 화낼 때 젤 섹시해 보이더라.”
“또 겁이 없지?”
“그래서 나 좋아하잖아요.”
효은이 이도의 뺨을 다시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당신 떠나서.”
효은은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보같이 빙빙 돌아 여기까지 오게 만들고야 말았다.
“나 더 나쁜 놈 만들어도 너 포기 안 해.”
이도는 효은의 손을 붙잡아 내린 뒤 그 손바닥에 다정히 키스했다. 곧이어 몸을 내린 그가 허기진 입맞춤으로 그녀의 마음을 빼곡하게 충족시켜 주었다. 더 깊게, 더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그의 곧고 뜨거운 몸짓은 효은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흐읏.”
“괜찮아?”
아무리 미친 상태라 해도 아픈 그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효은의 신음에 고개를 든 이도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그녀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효은은 그 신음이 다른 의미였기에 얼굴이 더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좋아서 그랬어요.”
복숭앗빛을 띤 붉은 뺨으로 효은이 솔직히 말했다. 이도는 이미 단단하게 일어난 아래가 더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이렇게 그를 무장 해제 시키는 건 반칙이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지새운 수많은 밤들이 건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듯 이도는 급하게 효은의 환자복 단추를 풀었다. 곧 뽀얀 속살이 드러나면서 그는 이성을 잃었다.
“으흣. 아저씨…….”
헤집듯 그녀의 가슴을 찾아 입 안 가득 물었다. 효은의 허리가 꺾이며 링거 줄이 흔들렸지만 이도는 멈추지 못했다. 집요하게 입을 놀리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물었을 땐 효은은 고개를 한 번 꺾었다. 아래에서 흥분의 흔적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그곳을 감추듯 다리를 단단히 붙여 놓는데, 그걸 눈치챈 것처럼 이도는 단숨에 그녀의 환자복 바지를 벗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속옷까지 내려가자 효은은 이도를 더 가까이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요?”
질문을 하고, 또 그 물음을 들으면서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 이리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때도 지금도 모두 진짜라는 걸 두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못 들어와. 아무도.”
이도는 그때처럼 안심시키며 효은의 아래로 손을 내렸다. 어느새 벗겨진 그의 중심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진동음이 길게 울렸다. 효은은 놀라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도가 고개를 돌리자 옆쪽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괜찮다며 다시 효은에게 키스했다. 효은은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그녀도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끊겼던 핸드폰 진동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받아요.”
효은이 이도를 달래며 속삭였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그는 핸드폰을 가져와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박 비서였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마음을 대변하듯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알겠습니다.”
상대편의 이야기를 듣던 이도는 효은과 몇 번 눈빛을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가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어쩐지 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효은은 괜찮다며 따라 웃어 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을 땐 미소를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