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남편-63화 (63/74)

63장. 그냥…… 지나가는 중이야

“꼭…… 이래야겠어?”

“그냥 입 다물고 드시죠?”

효은은 승재가 입원한 병실로 찾아가 두 사람을 이끌고 근처 햄버거 전문점으로 들어섰다. 간호사의 눈을 피해 무단 외출을 감행한 승재는 깁스를 한 한쪽 팔을 카디건으로 가리느라 자신이 원하는 햄버거를 주문하지 못했다.

제인은 오랜만에 맛보는 고향 음식에 신이 나 기분이 고조되었지만 자신의 룸메이트가 햄버거를 사 먹는다는 건 아주 큰일이 있다는 걸 의미했기에 우선은 자리에 앉아 효은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실연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보이 프렌은 가시 돋친 말을 필터링 없이 쏟아 냈다.

“네 눈엔 내가 환자로 안 보여?”

승재는 거절당한 감정보다 배려 없는 그녀의 행동이 더 서운했다. 그리고 왜 자꾸 이 지긋지긋한 햄버거를 먹는 일이 생기냐는 것이냔 말이다. 장효은은 왜 행복할 수 없느냐고. 그 행복을 자신이 만들어 주겠다는데 기어이 싫다고 돌아서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고.

“팔이 아니라 입을 다쳤어야 했는데…….”

효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승재에게 악담을 했다.

“야, 장효은.”

“자, 자. 둘 다, 진정하고. 우리 맛있는 햄버거 먹어요. 햄버거는 죄가 없어요.”

얼른 둘의 사이를 휴전시킨 제인은 각자의 앞에 친절히 햄버거를 가져다주었다. 효은은 망설임 없이 포장을 풀고 한 입 두 입 계속 베어 물었다. 결국 캑캑캑 목이 막혀 가슴을 치는 그녀를 보고 승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눈물을 흘리는 게 덜 답답할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다시 울면 모두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경고가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햄버거를 먹는 효은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승재는 포기하듯 자신의 몫으로 받은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어 댔다. 그들 중 햄버거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은 오직 제인뿐이었다.

“말해. 무슨 일이야?”

각자 깔끔하게 햄버거를 하나씩 해치우고 나자 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 이제 백수야.”

효은이 간단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승재와 제인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이 생각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정도의 일로 이렇게 햄버거를 아작 낼 장효은이 아니라는 것에 둘 다 동의했다. 분명 다른 일이 더 있을 것만 같았다.

“취업이야 또 하면 되지. 무슨 문제야.”

승재는 그게 다친 친구를 끌고 나올 일이냐고 받아쳤다.

“그리고…… 그리고…….”

효은이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됐다. 그만해. 알아들었어.”

승재는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솔직히 또 우는 모습을 지켜만 볼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란 게 뭐가 이리도 어려운 건지. 왜 그런 남자를 사랑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왜 마음속에서 비워 내지도 못하는 바보인 것인지. 물어봤자 소용없는 말들이 가슴을 가득 채우며 쌓이기만 하는 것 같았다.

“설마, 차인 건 아니지? 네가 찬 거지?”

제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승재가 화나는 마음을 제인에게 풀어냈다.

“중요하죠. 차인 거면 내가 가만히 안 있죠. 매일 밤마다 여자를 울게 만든 놈인 것도 찢어 죽여야 할 판인데, 그 여자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잡아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요? 잘생긴 재벌이면 다야?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우리 효니 사랑하는 것같이 굴더니 다 구라였어? 야, 그 인간 지금 어디 있어? 내가 진짜 만나서…….”

“앉아.”

효은은 흥분한 친구를 한마디로 제압했다. 제인이 이런 이유로 그 남자를 만나러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겠다는 소리를 한 것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무조건 그녀의 편에서 위로를 건네주는 친구들이 옆에 있었으니까.

‘그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짜였어.’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 진짜라고 고백하던 남자.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는 게 효은은 두려웠다. 영원히 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아파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녀에게 이도는 사랑이자 설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픔이자 죄책감이었다. 그 모든 걸 다 감당하면서 또다시 그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아팠으니까. 그녀에겐 단 한 번의 사랑이 준 상처가 너무 컸다.

“찬 것도, 차인 것도 아니야. 어느 책에서 말했어. 그냥…… 구름도 지나가고, 비도 오고, 눈도 내리고……, 바람도 스쳐 가는 거야. 그냥…… 지나가는 중이야.”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절대 칸 안을 채워 줄 리 없는 이혼 서류를 입에 올리는 일 또한 없었다. 서로 잠시 가면을 벗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진짜도 가짜도 아닌 상태였으니까. 진짜로 가는 길이니까. 그 길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만 알았을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했다. 효은은 그렇게 보류된 상담처럼 그들 사이를 정지시켜 놓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뭔 소리야? 보이 프렌 씨는 이해했어요?”

제인은 방금 효은이 한 이야기가 여태껏 들은 한국어 중 제일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만 해석해 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이해했으면 내가 장효은이랑 사귀었겠죠.”

고개를 흔든 승재가 한 손으로 햄버거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일어섰다. 더 이상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제인은 얼른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승재의 옆에 따라붙어 트레이를 잡아챘다. 하지만 답답한 제인의 모습에 승재가 다시 트레이를 빼앗아 왔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못하냐고 승재가 타박하자 제인이 고용주가 있다고 눈치를 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며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사이, 효은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은행잎이 비처럼 내리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한국은 좋아요. 사계절이 있잖아요. 이렇게 쓸쓸한 가을이 지나면, 아주 추운 겨울이 올 거고, 그렇게 참고 기다리다 보면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고, 다시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고.”

“우리 몰래 술 마셨습니까? 왜 이래요?”

“효니 따라 한 건데요? 좀 있어 보이나요?”

하. 승재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제인을 내려다봤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효은이 앞장서듯 걸어가고 그 뒤를 승재와 제인이 여전히 투닥거리며 따라갔다. 세 사람은 마치 한 세트 같았다.

효은은 오늘 밤엔 이곳 1인실에서 신세를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그녀의 작은 빌라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시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의 오피스텔로 찾아갈 당당함도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효은 양?”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이 열리자 익숙한 인물이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웠던 사람이었다. 효은이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강 여사는 2년 전보다 살이 조금 빠져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만이 가진 포근하고 따뜻한 모습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덥석 붙잡은 효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병원 벤치로 향했다.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뇨. 나한테는 뭘. 우리는 신경 쓰지 말아요.”

강 여사는 그저 그 말만 하고 효은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집안에서 효은이 이도 다음으로 가장 크게 마음을 주고 따랐던 어른이었지만 그녀는 늘 자신이 그 집안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근데, 병원엔 무슨 일로……?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효은은 뒤늦게 생각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내가 아니라……. 암튼, 회장님이 꼭 한번 효은 양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

“저를요?”

이도와의 사이가 어떻게 끝났는지 다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2년이라는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는 동안 그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효은은 권 회장이 자신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해요. 근데 난…… 강요하지 않아요. 권 상무랑 지금 어떤 사이인지도 몰라요. 내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효은 양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언젠가 효은 양이 준비가 되면…… 그때 만나러 와요.”

강 여사는 무상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지 못하고 떠난다면 그것 또한 그 양반이 안고 가야 할 이생의 업이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인생을 욕심으로 얽매듯 쥐고 있던 그의 삶을 마지막으로 참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니. 강 여사는 그렇게 한참 동안 효은의 손을 붙잡고 있다 놓아 주었다.

* * *

1인실 침대는 좁았고, 승재와 제인의 투닥거림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결국 효은은 이른 새벽 항복하듯 가방을 챙겨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원 로비로 걸어 나오자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퇴사하고 처음으로 맞는 아침이 이토록 일찍 시작될 줄은 그녀도 몰랐다.

효은은 번호도 확인하지 않은 채 아침 첫차에 올랐다. 머릿속 잡념을 잊는 덴 그동안 바뀐 서울 시내 구경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을 지날 때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직 살아 있는 그의 할아버지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그녀의 할아버지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듣든, 강하고, 밝은 장효은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와야 했다.

강릉행 버스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여 내렸을 땐 익숙한 장소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걸까. 효은은 자기 자신에게 묻고 말았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아프기만 할 텐데.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게 나을 텐데. 그래도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오셨, 어…… 사모님 아니십니까?”

2년 전에도 별장을 관리하던 김 씨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효은은 당연히 이곳이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건물의 외관만 바라보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녀의 행적을 들키고 말았다.

“아, 안녕하셨어요?”

어쩔 수 없이 효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요즘엔 비서님만 한 번씩 오시더니. 잠깐 계셔요. 현관 키 가지고 올 테니까.”

“아니, 안 그러셔…….”

효은이 당연히 집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 추측한 것 같았다. 김 씨는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효은은 하는 수 없이 현관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곧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온 김 씨는 현관문만 열어 주고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효은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고 있는 따뜻한 온기도 없었다. 여기서 세 사람이 살았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게 그가 말하는 진짜였을까. 효은은 그날 이후로 이도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태호가 머물던 공간만 확인하고 효은은 돌아섰다. 그와 지냈던 방 안은 둘러볼 자신이 없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효은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처럼 호흡이 빨라졌다. 알레르기가 반응을 일으킬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한 걸음 더 떼자 작은 다용도실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효은은 홀린 듯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문을 밀어 연 후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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