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장. 마지막 진짜였어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그게 어쩌면 그와의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은은 자신이 처음부터 솔직하게 고백했다면 지금 이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후회했다. 인생에선 반성도 무의미하게 어쩔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일이 분명 있었다. 이도도 그랬을까. 효은은 자신의 첫 직장을 잃을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한 남자를 이해하려는 중이었다.
“결혼했던…… 사이예요.”
효은의 덤덤한 고백에 최 박사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효은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그녀를 선택해 비서로 채용한 자신의 안목에 대한 후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랬군요.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되네요. 그럼, 선흥이 노인 심리 센터 사업에 나를 1순위로 지목한 이유가 효은 씨를 내 밑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최 박사는 돌려 묻지 않았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효은에 대한 실망감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늘 사람을 믿으며 이 일을 해 왔다. 홀로 센터를 이만큼 키워 오면서 양심적이기만 했다고는 자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만이 가진 신념을 내려놓으면서까지 기회를 좇진 않았다. 그래야 후회가 없었다. 어떤 내담자를 만나도 상담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충고를 건넬 수 있었다.
“그게……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효은은 자신하듯 이도에 대한 오해를 풀어 보려 했다. 분명 최 박사가 잘못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토록 그녀가 소중하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내막이 어쨌든 난 지금 선흥과의 사업 진행을 다시 고려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내 능력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사업이 진행되는 것도 내키지 않고요. 솔직하게 말하면 두 사람의 감정싸움에 내 미래를 투자하고 싶지 않아요.”
최 박사는 이 상황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자체만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효은은 다른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
“그리고 미안하지만…… 효은 씨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는 걸 감출 수가 없어요. 만약 효은 씨가 이 모든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권 상무를 만난 이후에는 나한테 말해 줬어야 했어요. 이게 두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효은 씨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아닌가요? 효은 씨가 날 믿을 수 없어서 말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이후로 어떤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난…… 비밀은 신뢰와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최 박사는 효은의 눈을 한동안 깊이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최 박사와 공적으로 얽힌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가 추진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최 박사가 노인 심리 센터 설립에 가지는 의지와 꿈을 모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든 가져와 잘라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자리에 효은이 있었다. 이렇게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효은은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하던 일은 잘 마무리할게요.”
눈치 빠르게 최 박사의 뜻을 이해한 효은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최 박사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효은은 집무실을 빠져나오면서 최대한 감정을 삼켰다. 이보다 더한 일들도 참고 견뎠는데, 이 정도로 눈물을 보인다는 것도 우스웠다. 그녀는 이제 다시는 약해지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인수인계를 할 일도 몇 가지 없었다. 애초부터 상담사가 아닌 비서직을 맡은 것부터 그녀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기분을 털어 내는 데 빠른 효과가 있었다.
최 박사에 넘길 서류들을 정리하다 효은은 이도의 상담 일지를 발견했다. 남편을 상담하는 와이프. 최 박사가 어느 지점에서 그녀에게 신뢰를 잃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끝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효은은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상담의 기본은 솔직하게 모든 걸 드러내는 것이었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치료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기본적인 걸 지키지 못한 그녀가 이도를 상담하겠다고 한 것도 우스웠다.
효은은 묵묵히 나머지 일지를 써 내려갔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의 심리 상태를 적어 내려간 상담 일지는 중간에서 멈춰졌다. 효은은 자신의 몫까지 마무리하고 인수인계 자료 안에 그것을 끼워 넣었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에 얼떨떨해하는 동료들을 두고 효은은 퇴근 시간에 맞춰 센터를 빠져나왔다. 평소 퇴근 시간보다 일찍 나왔는데도, 그의 차는 이미 골목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효은을 발견한 이도가 반가운 얼굴로 걸어왔다. 편안해진 그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일찍 나오길 잘했네.”
그녀를 만나러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헤치고 나왔는지 그의 지친 어깨가 모두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 힘든 일들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효은은 얼른 밝게 표정을 바꾸고 이도의 앞에 섰다.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당연한 데이트처럼 효은이 이도를 이끌었다. 하룻밤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일까. 이도는 효은의 친근한 행동이 고맙고 감사했다. 이제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느 것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 *
그들이 향한 장소는 다시는 오지 말자며 미리 식사권을 써 버린 결혼식장 레스토랑이었다. 정말 드라마라도 찍고 싶었는지 효은은 이곳으로 향하길 원했다. 이도는 별말 없이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다. 어젯밤 이후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고, 그에게 되돌릴 수 있는 여지를 준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조금씩.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예전으로 되돌아가면 된다고 여겼다.
그때처럼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각자의 앞에 놓고 다정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보였다.
이도가 효은의 몫으로 자른 스테이크 접시를 밀어 주는데, 효은이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식 날…… 기억나요? 나, 도망치려고 했던 거.”
효은이 예전을 회상하며 느리게 웃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신부한테 고소당할 뻔했었지.”
농담처럼 이도가 뒷말을 덧붙이는데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깊어졌다.
“그때부터 난 아저씨를 기다리기만 했던 것 같아요.”
더 이상은 그녀도 가면을 쓰고 그를 대할 수 없었다. 솔직해지는 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녀도 그 뜻에 따라 주는 게 맞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고, 왜 당신에 대한 마음이 어긋나 버렸는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일지도 몰라요.”
효은의 눈가가 추억을 떠올리듯 붉어졌다.
“못 믿겠지만…… 내 첫사랑, 아저씨였어요.”
소녀의 사랑은 결혼식장에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으며 혼자만의 짝사랑은 험난한 고난을 예고했다. 그를 사랑하면 할수록, 믿고 싶을수록, 그녀는 더 불안하고, 더 아프고, 지독히 외로운 밤을 지새워야 했다.
“처음인데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요. 모든 게 다 낯설고 힘들었어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 줬으니까. 아저씨가 나한테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소중했어요. 어쩔 땐 그냥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기도 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아는 권이도의 눈빛은 거짓일 리가 없을 거라고.”
이도는 그녀의 고해성사가 이토록 잔인하게 가슴을 헤집을 줄은 몰랐다. 그가 가진 비밀들. 모든 속사정을 뒤늦게 변명으로라도 꺼내 놓고 나면 효은이 그를 이해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시간만을 기다리며 2년을 견뎠다.
효은과 다시 재회하자마자 그는 과거를 되돌리기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아이처럼 내 얘기를 들어 달라며 상담사가 된 그녀의 직업을 이용했다. 지금까지도 말해야 하는 사람은 그이고, 그녀는 그것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만 했다.
그의 잘못으로 상처받았을 그녀의 마음 같은 건 나중 문제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사랑을 몰라서,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효은이 차분히 고백하는 순간에서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이도는 가라앉은 심장을 부여잡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학 내내 단 한 번도 아저씨를 잊어 본 적이 없어요. 늘 가슴에 남아서 날 괴롭혔어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고, 내가 떠나온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벌은 아저씨가 아니라 내가 받은 것 같아요.”
“……효은아.”
이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저씨한테 흔들리고, 아직도 아저씨를 사랑해요.”
이렇게, 이런 사랑 고백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 이도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떨리는 손끝을 꽉 잡아 움켜쥐었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그만하고 싶은 거예요. 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장효은.”
“2년 동안 내가 성장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더 겁쟁이가 되었어요. 바보처럼 감추기에 바빠요. 그게 어른이라는 것처럼. 난 그렇게 변했나 봐요.”
“…….”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좀 더 나한테 자신 있을 때, 상담사로서도 부끄럽지 않을 때, 아저씨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때, 우리…… 그때, 다시 만나요.”
효은이 웃었다. 웃음 뒤에 눈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변했다는 소리일 것이다. 이도는 그녀를 그의 옆에 두고자 더 이상 억지스런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나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요? 그건, 꼭 들어줄게요.”
그녀에게 쏟아 내겠다고 다짐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든 변명들이 이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도는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진짜인 적이 없었어. 내 인생은.”
효은과 눈을 맞춘 이도는 그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연히 행복이란 걸 몰랐어. ……사랑도 마찬가지였지.”
“…….”
“그때는 몰랐어. 너를 만나고, 흔들리고, 아프기도 하다가 마지막엔 가슴이 뜨거워졌던 마음을.”
“…….”
“그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