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장. 어떤 사이예요?
“여긴……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 말이었다. 효은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뒤늦게 현실을 파악했다. 어쩌면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권이도 상무 밑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이었으니까. 오히려 이상한 쪽은 자신이 모시는 상무님의 집에서 샤워 가운을 입고 서 있는 협력 업체 직원일 것이다.
“아,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거, 상무님한테 혼나겠는걸요. 그냥 민아 씨 부탁 받고, 아니, 상무님 친척분 부탁으로 들른 거거든요. 비밀번호까지 누르고 들어온 걸 아시면 얼마나 황당하시겠어요? 비서님이, 아니, 효은 씨가 모른 척해 주십시오.”
박 팀장은 자신이 가져온 반찬 꾸러미를 얼른 식탁 위에 올려놓고 돌아섰다. 효은이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효은은 정신이 멍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런 와중에도 가슴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던 한 이름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서민아. 그 여자는 아직도 위험한 짝사랑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젠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엔 당연한 것처럼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2년 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태수는 내려야 할 층수의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장효은. 저 여자가 왜 권이도 상무의 오피스텔에 있는 것일까. 궁금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레스토랑에서 그가 추측했던 상황이 사실일까. 정리하자면 별거한 아내와 서류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오피스텔로 여자를 끌어들였단 소리가 되었다. 그 어떤 핑계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었다.
직원들과의 가벼운 술자리조차 참석하지 않는 그가 협력 업체 직원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도의 오피스텔에 있는 효은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는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며 자신의 행보에 흠집이 날 만한 일은 시작부터 싹을 잘라 내는 보스였다. 수많은 로비와 검은손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걸 보고 존경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인생을 살면 저럴 수 있을까. 부럽기도 했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결심한 태수 자신과는 비교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닮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도 똑같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그의 인생을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삐뚤어진 감정이었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지독한 자격지심이었다. 태수는 끝내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들과 자신은 출발선상부터 달랐다. 그걸 이겨 내는 동화 같은 일은 지금 세상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체념하고 포기하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할지도 몰랐다. 그는 흐린 웃음을 내놓으며 뒤늦게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눌렀다. 그 순간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지금 이 상황을 알게 만든 민아일 거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현재는 그가 발이라도 닦아 줘야 할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핸드폰에 찍힌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네. 이사님.”
― 어디예요?
“아, 잠깐 볼일이 있어서 어디 좀 들렀다가 출근하는 길입니다.”
― 아침 식사는?
“네? ……아직.”
― 그럼, 나랑 아침 먹읍시다.
마치 사위를 챙기듯 따뜻한 목소리로 선영이 제안했다.
* * *
안내받은 고급 한정식집은 VIP들에게만 제공되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평탄하게 그의 인생을 살았다면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태수는 다시 한번 가슴 안에서 감춰 둔 욕망의 불씨가 더욱 깊게 지펴지는 기분이었다.
“어서 와요.”
공간 안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선영이 그를 반겼다.
태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고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주의 장녀. 그가 절대 독대할 수 없는 여인이라 여겼건만 지금은 미래 장모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왜 하필 자신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태수는 그 궁금증을 아직 풀지 못했지만 만약 그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민아와의 결혼은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세계로 전환할 수 있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아주 황금 같은 기회였기에.
“내가 늘 먹던 걸로 시켰는데, 괜찮겠어요?”
선영이 배려하듯 물었다.
“아, 네.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편입니다.”
태수는 곧장 싹싹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우리 집안엔 입맛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아서. 아버지부터 그래요. 나도 당연히 그 피를 물려받았을 테고. 아, 민아 아버지는 그렇게 가리진 않아요. 그래서 내가 덜 고생했죠. 남편 식성 맞추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아요. 다행히 우리 민아는 행운아가 되겠네요.”
선영은 태수를 만나면 일부러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꺼내는 편이었다. 좀 더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를 사위로 맞고 싶다는 그녀 나름의 사인이었다. 눈치 빠른 태수가 그걸 알아차리고 좀 더 태도에 신경 쓸 때쯤, 민아를 소개받았다. 어쩌면 그는 민아의 남편이 아니라 선영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 지금 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더 행운이죠. 민아 씨 같은 미인에 모든 게 완벽하신 장모님까지.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종교 행사에 다닌 보람이 있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난 박 팀장 이런 점이 좋아요. 사람이…… 유연하니까.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우리 모두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그 상황에서 가장 잘 대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박 팀장은 아주 믿음직스러워요.”
태수는 과찬이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이 맞게 곧 그들의 아침 식사가 눈앞에 차려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태수는 대화하는 도중에도 선영이 손을 많이 가져다 대는 반찬을 그녀 앞으로 옮겨 주었다. 다정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행동에 선영은 흡족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다면 사랑했을까. 이 모든 행동이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짓된 쇼라고 해도 여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태수의 가슴속에 욕망이 들끓는다 해도 그의 노력을 받아 내 행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민아였다.
불쑥 질투심 같은 것이 올라오자 선영은 우습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고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앞에 앉은 남자를 이용해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업무를 본 거예요?”
“아, 민아 씨 부탁 좀 들어줬습니다.”
태수는 속이는 것 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것이 민아의 어머니인 선영에게 점수를 따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민아가요? 걔가 누구한테 부탁 같은 거 잘하는 편이 아닌데, 이제 박 팀장이 편해졌나 보네요. 낯설어하기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냥, 제가 불쑥 하겠다고 가져왔습니다. 같이 출근하려고 집 앞에서 기다리던 중이었거든요.”
1년 전부터 민아는 혼자 살아 보겠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선영은 그것을 당연한 듯 허락했다. 너도 시집가기 전에 혼자 살면서 인생을 즐기라고. 그녀에게 건네는 유예기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자신의 충견이 되어 달리도록 만들기 위해 당근을 주어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사람을 다룰 줄 알아야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선영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도의 짝이 유학을 떠나고 녀석이 흔들리면서 민아가 어울리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게 그렇게 멍청한 것이었으니까.
“편해지긴요. 아직 저한텐 많이 차갑습니다.”
태수가 선영에게 이실직고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는 아니죠?”
“아, 아닙니다. 마음에 없는 여자 집 앞에서 새벽부터 기다리는 남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오늘 보니 상무님 반찬도 챙겨 주고 따듯한 면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 더 좋아져 버렸습니다.”
상무라는 말이 나오자 선영의 입가가 잠시 굳어졌다. 태수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멍청한 딸아이의 행동을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친했어요. 권 상무랑 민아가. 지금 권 상무 상황이……. 아, 뭐 박 팀장도 이제 우리 가족이 될 사람이니까 편하게 말할게요. 이미 회사에 소문이 돌기도 했고. 와이프 될 사람이랑 별거 중이니 민아가 마음이 많이 쓰일 거예요. 얼른 털어 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할 텐데, 고모인 나도 걱정이에요. 곧 서류 정리가 될 것 같은데,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줘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박 팀장 보기엔 어때요? 권 상무, 지내는 건 괜찮아 보이던가요?”
선영은 오늘 이 만남의 목적을 돌고 돌아 의심받지 않게 내놓았다. 태수는 경계와 의심 따윈 가지지 않고 이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꺼내 놓았다.
“제 생각이지만…… 이사님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곧 좋은 소식 들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도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돌아와 다시 만나는 걸까. 선영의 눈가가 더욱 짙게 꿈틀거렸다.
* * *
[퇴근 시간에 데리러 갈게.]
이도의 문자는 오후 업무가 마무리될 즈음 날아왔다. 효은은 잠시 문자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 무슨 대답이 되돌아올지 뻔했다.
피하고, 부딪치고, 그러다 포기하듯 다시 마주하고. 그것의 반복이었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해결 방식이었다. 뭐가 두려운 걸까.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아니면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어쩔 수 없이 들키게 될까 봐? 모든 게 멍청하고 바보 같았다. 그런다고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씻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노력할수록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감정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아 갔다. 효은은 자신이 상담사라는 걸 되새겼다. 되돌아봤을 때 부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자 생각하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네. 마칠 때쯤 문자 보낼게요.]
이도에게선 곧장 어울리지 않는 웃음 표시 섞인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그것도 유행이 한참이나 지난 아주 촌스러운 것으로. 효은은 어쩔 수 없이 입가에 자그마한 웃음을 품게 되었다.
“장 비서, 요즘 좋은 일 있어?”
옆자리의 동료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효은은 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최 박사의 호출이었다.
[효은 씨, 내 방으로 좀 와요.]
얼른 수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효은은 최 박사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어쩐지 심각한 표정의 그녀가 효은을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도 천천히 상담 의자에 다가와 앉았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윤선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권이도 상무랑…… 어떤 사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