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장. 작전을 바꿨어
“씻어요.”
효은은 곧장 주방으로 향해 편의점에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뒤따라 들어선 이도에게는 지금 막 퇴근하고 돌아온 사람 대하듯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것은 오히려 이도였다.
그를 불쌍하게 여겨 맥주나 한잔 먹여 보내려는 건 줄 알았다. 그녀가 다가오면 그는 이제 겁이 났다. 언제나 그의 심장을 뒤흔드는 여자니까. 이렇게 곁을 주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있으라고 인사하고 떠나 버리면 어쩌나. 그녀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어 버리는 남자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냉장고에 맥주를 넣은 효은이 현관에 서 있는 이도에게 다가왔다.
“이러는 게 더 무서운 건 왜지?”
이도가 스스로에게 묻듯 되물었다. 효은이 짧게 웃었다.
“넘겨짚지 마요. 아무 뜻 없어요. 여기, 아저씨 집이잖아요. 내가 신세 지는 사람이고. 같이 지내도 이상할 거 없어요. 방이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다며 그를 거부할 때가 마음은 더 편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아직은 그녀를 흔들 만큼 영향력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이도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뭘 어쩌라는 건지. 다가와도, 멀어져도 불안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사랑을 너무 오래 앓아 온 부작용이었다. 그는 잡념을 접고 얼른 욕실로 향했다. 예전보다 샤워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다 말리지도 않은 채 이도가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는 편안한 팬츠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단단한 갑옷처럼 슈트를 차려입을 때와는 또 다른 이도의 비밀스런 모습이었다. 그녀만이 알고 싶었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돌아보면 그를 남자로 느낀 순간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반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마음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 같아 허탈한 자괴감이 들었다. 효은은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몸을 섞었던 남자들과 친구로 지낸다는 제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맥주 줄까요?”
효은이 그의 몫의 맥주를 가지러 가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섰다.
“아니야. 내가 할게.”
이도는 그녀의 행동을 막고 직접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긴장된 침묵이 두 사람 주위를 감돌았다. 예전에는 너무도 당연했던 상황들이 지금은 꿈 같은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도는 효은이 사 온 네 개의 맥주 캔을 보고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습관이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의 분위기, 웃음, 그에 대한 마음까지도.
“술은 좀 늘었어?”
이도는 식탁에 다가가 앉으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물었다.
“이젠 없어서 못 먹죠.”
효은은 으스대며 말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마셔도 맥주 캔을 뺏어 가던 남자가 옆에 없었지만 그녀는 술로 아픔을 달래고 싶지 않았다. 모범생처럼 공부만 하는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한 제인이 유학생들 모임에 데려간 적도 있었지만 좀처럼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권인 것처럼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외국 생활은 사치스런 탈출구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효은은 그럴 수가 없었다.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효은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두려움이 많고,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다는 걸 절대 몰랐으면 하는 남자 앞에선 변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유학 생활이 잘 맞았어요. 나 겁 없는 거 알잖아요.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나 봐요.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알차게 놀다 보니 2년은 금방 가더라고요.”
당신 없이도 잘 지냈다는 말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효은은 그녀의 결정으로 떠난 그 시간들을 후회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밌게 보냈다니 다행이네.”
이도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도 본인 인생 살아요. 왜 바보같이 그러고 있어요?”
“진짜 바보인가 보지.”
“나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만해요. 먼저 잘게요.”
효은은 상황을 피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신 맥주 캔을 치우기 위해 식탁을 정리하고 싱크대로 향하는데 이도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의 발걸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알아서 뛰기 시작했다. 이토록 신경 쓰면서. 바보. 누가 누구더러 본인 인생을 살라는 건지.
“내가 할게.”
등 뒤로 다가선 이도가 끌어안듯 손을 뻗으며 효은의 손에 들린 물컵을 뺏어 쥐었다. 그의 향기가 엄습하며 그녀를 뒤흔들었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흔들리는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이지.
효은은 오기가 나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빛이 2차전을 맞이하듯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이전과 다르게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다. 뛰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그대로 멈춰 버렸다.
“……뭐 하자는 거예요?”
효은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작전을 바꿨어.”
이도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러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요?”
지고 싶지 않아 효은은 오히려 한 발 더 그에게 다가섰다. 마치 키스하기 직전처럼 두 사람의 거리가 좀 더 좁혀졌다. 이도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져다 대기라도 한다면 다음 단계는 불 보듯 뻔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한다. 그런데 효은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허락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이 진하게 변해 가며 점점 고개가 아래로 내려왔다. 효은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물러난 것은 오히려 이도였다.
“설거지는 그냥 둬. 내일 내가 할 테니까.”
작은 한숨을 내쉰 그가 주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어디선가 여분의 이불을 가지고 온 그가 소파 위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대로 몸을 눕히고 이불까지 덮는 그를 지켜보고 있던 효은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자면 불편하지 않겠어요? 아저씨만 괜찮으면 난 한 침대 써도 상관없어요.”
오기인 걸까. 아니면, 그를 더 괴롭히고 싶은 걸까.
효은은 함부로 입을 놀린 걸 곧바로 후회했다.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오히려 긴장한 쪽은 효은이었다. 이제 와 가슴이 두근거려 같이 잠을 자지 못하겠으니 다시 소파로 돌아가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상황을 극복하는 게 그녀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얼른 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가 눈을 감은 채 충고하듯 말을 꺼냈다. 침대 사이즈가 커서 어느 정도는 거리 유지가 가능했다. 효은은 등을 보인 채 누워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에게 참을 인 좀 새기라고 상황을 만들었더니 그녀가 더 힘들어져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잠들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는데 어쩐 일로 졸음이 쏟아졌다. 그녀의 집에서 그를 거실에 두고 자려고 했을 땐 온갖 애를 써도 안 되더니 사람이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안 먹던 맥주를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셔서인 것 같았다. 효은은 결국 패배하듯 잠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기억할 수 없었다.
“제인…….”
품으로 파고들며 가슴을 끌어안는 몸짓에 이도는 한 번 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잠버릇이 이것이라는 걸 경고하던 여자였으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주방에서 대치했을 땐 가까스로 상황을 모면했지만 침대 위에선 그도 이성의 끈을 쥐고 있기가 힘들었다.
“하……. 넌, 정말…….”
이도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못다 한 말을 삼켜 냈다.
“나, 아파……. 아프다고…….”
누구에게 하는 말처럼 효은이 잠꼬대를 했다. 이도의 가슴이 욱신거리며 가라앉았다. 재미있었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유학 생활에서 그녀는 얼마나 많은 밤을 이렇게 아파했을까. 그는 눈에 보이듯 그 모습이 훤히 그려져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 * *
효은은 오랜만에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늘 그녀를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던 그였는데 이번엔 활짝 웃는 모습이라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다. 그래서 잠도 푹 잤던 걸까. 몸이 어쩐지 개운했다.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효은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그제야 자신이 이도의 오피스텔에 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어젯밤 그를 이 침대로 불러들여 같이 잠들었다는 것까지.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한순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놀란 표정으로 얼른 옆자리를 내려다보자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항상 빠르게 아침을 시작하는 그는 이미 회사로 향했을 시각이었다. 그가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던 걸까. 효은은 자신의 무신경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혹시 몰라 거실 쪽으로 나가자 식탁 위에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자그마한 쪽지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아침 꼭 먹고 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연인처럼 다정한 말이었다. 효은은 이 상황이 어이없으면서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그가 차려 놓은 밥상에는 그녀가 평소에 좋아하던 반찬들이 가득했다. 분명 냉장고엔 먹을 만한 게 없었는데, 이걸 아침부터 사다 놓고 간 것일까. 그의 정성과 노력에 효은은 지금 자신이 이 남자를 밀어내고 있는 상황이 우스워지기도 했다.
“정말……. 어쩌라는 거야…….”
마음을 흔드는 생각들을 잠시 접어 두고 효은은 얼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샤워 가운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머리카락을 말릴 드라이어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는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녀가 걱정된 이도가 다시 돌아온 걸까. 효은은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얼른 현관 쪽으로 뛰어나가려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그녀를 발견하고 얼음이 된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