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장. 결혼기념일
“같이 자겠다는 소리……?”
“그럼 따로 자요?”
노랑머리의 여자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깊어진 밤, 조용한 1인실 안에서는 두 남녀가 대치 중이었다. 승재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제인은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오겠다며 사라졌다. 병실로 돌아온 승재는 제인이 없자 그제야 안심했다. 편안하게 잠들기 위해 안대를 착용하고 눕는 순간이었다. 당당히 다시 나타난 제인이라는 여자가 보호자 침대 위에 언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침낭을 펼쳐 놓고 잘 준비를 했다.
“이봐요, 친구분.”
“제인이에요.”
“그, 그래요. 제인 씨.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승재는 이 상황을 머릿속으론 이해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곧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모르던 여자와 한 공간에서 잠든다는 건 그의 인생에서 쉽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간호를 하겠다는 사람을 이성으로 느끼는 그가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여자였다.
“왜요? 혹시라도 내가 덮칠까 봐 겁나요?”
“네?”
외국 여자가 한국말로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걱정 마요. 프로는 공과 사를 구분하니까.”
제인이 쓰고 있는 안경을 도도하게 한 번 추켜올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승재는 외국말을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밥값 하는 중이라고요.”
“밥값이요?”
“네. 효니 집에서 지낸 사용료를 보이 프렌 씨 간호하는 걸로 대신 지불하기로 했어요. 이제 이해가 좀 됐어요? 그러니까 사심 같은 건 없으니 오해 말아요. 그리고 친구한테 마음 있는 남자를 유혹할 만큼 정신이 타락한 사람은 아니에요.”
“치, 친구한테 마……음…….”
제인의 말을 곱씹던 승재의 얼굴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여자는 뭘까. 도대체가 모르는 것도 없고, 감추는 것도 없었다. 제인은 이제 깔끔하게 해결됐으니 자도 되겠냐는 얼굴이었다. 승재는 저절로 어이없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효은이한테는 제가 잘 둘러댈 테니까 간호 같은 건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팔 하나 다친 걸 가지고 간호는 무슨. 그리고 제인 씨도 여기서 불편하게 자는 게 싫을 거 아닙니까?”
“저를 생각해 주는 보이 프렌 씨 뜻은 알겠는데 지금은 돌아가면 안 돼요.”
“아, 왜요!”
“효니 허즈번드랑 같이 있는데 눈치 없이 거기 또 낄 순 없어요.”
허즈번드. 승재는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그 남자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둘은 지금 왜 같이 있는 걸까. 자신은 이 외국 여자에게 맡기고 그 남자에게로 달려간 걸까. 승재는 효은의 행동에 울화가 치밀었다. 나쁜 계집애. 정말 기어이 그를 다시 선택하겠다는 건가.
“워워. 표정 무서워요. 보이 프렌 씨.”
“제가 별롭니까?”
승재가 제인에게 불쑥 물었다.
“네?”
제인은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돌려야 했다. 한국어 해석 고난이도 문장이었다. 별로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만, 자신에 대해 물을 때 사용한다는 건 별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빠른 해석이 내려졌다.
“보이 프렌 씨 정도면 최고죠.”
제인은 엄지까지 추켜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이쪽도 준수한 외모였다. 허즈번드 쪽이 완벽한 비주얼을 갖춘 차가운 이미지의 ‘냉미남과’라면 보이 프렌 쪽은 반듯하고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모자라 귀여운 구석이 있는 편안한 ‘훈남과’에 속했다.
제인은 만약 자신이 효은의 입장이었다면 어느 쪽도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해야 친구 효은이 행복할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쉽게 그려 낼 수 없었다.
“왜 제인 씨 눈에는 보이는 게 장효은한테는 안 보이는 겁니까?”
승재는 답답한 마음에 제인에게 따져 물었다.
“내 눈이랑 효니 눈이랑 다르잖아요.”
제인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하고 웃었다.
* * *
“들어와.”
싫다고 거절하면, 그는 또 그녀를 그 어떤 말로든 뒤흔들겠지. 차라리 그리 생각하며 그를 따라가는 게 효은은 마음이 더 편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억지 고집을 부려 괴롭히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효은은 쉽게 생각했다. 만약 승재가 아프지 않았다면 녀석에게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연하면서 그에게만은 절대 안 된다는 것도 우스웠다. 솔직히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승재와 제인이 걱정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근처 모텔이나 찜질방에서 지내는 것보다 이쪽이 그녀에겐 훨씬 더 실속 있었다. 사용료를 내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 오늘만 신세 좀 질게요.”
마지막 자존심은 부려 보고 싶어서 효은은 현관으로 들어서며 말을 덧붙였다.
이도는 그 말에 대답 없이 웃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그는 감사했다. 분명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거라 생각했는데, 물음 뒤에 곧장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도 돼요? 그럼, 나야 고맙죠.’
장효은의 매력은 그것이라는 걸 오랜만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니까 지내는 데 불편하진 않을 거야.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이도는 익숙하게 오피스텔 안으로 걸어 들어가 식탁 위에 핸드폰과 차 키를 내려놓았다. 바로 어제도 반복한 것 같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간 안은 비워 둔 느낌이 아니었다. 혹시 그가 이곳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었던 걸까. 바쁠 때 한 번씩 들르는 여분의 장소인 줄만 알았다.
효은은 문득 다른 생각이 찾아들었다. 당연히 본가로 다시 들어가 지낼 거라 생각했다. 강원도 별장은 이미 처분했을 테고, 그는 예전으로 되돌아갔을 테니 그런 예상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대로 그가 겉돌도록 둘 사람이 아닐 텐데. 머릿속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라는 듯 이제는 그녀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현실감이 뒤통수를 쳤다.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내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안 해도 돼요.”
효은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더 할 말이 없어진 이도는 다시 돌아설 준비를 했다. 식탁 위에 놓아둔 물건들을 챙긴 그가 현관으로 향할 때까지 효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결국엔 그의 뒤를 따라가 묻고 말았다.
“어디로 가요?”
“어?”
이도가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본가로 가는 거 맞죠?”
효은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래.”
“알았어요. 잘 가요.”
정말 그곳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지낸 건 그저 일이 바빠서 그런 것이겠지. 다른 추측은 무의미한 망상일 뿐이었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이렇게 마지막엔 답답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비밀스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결국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왜 솔직해지지 못했을까. 그건 그녀에 대한 마음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을까.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사랑한다면 끝없이 매달리고 의지하고 싶은 게 당연했으니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과 그의 사랑이 다른 방식이라면 두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란 걸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단속하고.”
이도가 돌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아, 비밀번호는 뭐예요?”
효은은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우리 결혼기념일.”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알았어요. 내가 다른 걸로 바꿔도 되죠?”
효은은 그런 남자의 가슴을 얄밉게 할퀴었다.
“마음대로 해.”
이도는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현관문이 닫히고 효은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뒤돌아 거실로 들어서는데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그녀에게는 고통이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효은은 침대에서 일어나 지갑과 겉옷을 챙겼다. 급하게 오느라 갈아입을 속옷조차 챙기지 못했다. 하루 정도야 참고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잠도 오지 않으니 효은은 간단히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보이는 것만 담고 돌아서는데 냉장고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잠을 자기 위해선 맥주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효은은 늘 해 왔던 것처럼 할인을 받기 위해 네 개의 맥주를 골라 담았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서자 찬 바람이 부는 날씨는 더욱 쌀쌀해져 있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가던 효은은 1층 지상 주차장을 지나치다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설마.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한 남자가 아직도 이곳에 있을 것이란 뒷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효은은 발을 돌려 천천히 그의 차 쪽으로 향했다. 검게 선팅된 차 안을 들여다보자 운전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가슴을 날카로운 무언가로 푹,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리도 잔인하게 그녀를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겠지. 2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어 놓고 멋대로 이혼 서류나 보내는 여자를 가만히 놔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찬 것처럼. 한 남자는 쉴 새 없이 그녀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똑똑똑.
효은은 운전석 창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잠든 적 없는 것처럼 금방 눈을 뜬 이도가 밖에 서 있는 효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이이잉. 창문이 내려지고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혼낼 거야?”
선수 치듯 이도가 입을 열었다. 효은은 하, 하고 웃어 버렸다.
“나와요.”
그리고 그녀는 돌아서 걸었다. 뒤쪽에서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효은.”
그가 불렀다.
“맥주 많이 샀어요. 혼자 다 못 먹어요.”
그녀는 그 말만 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이도는 효은을 뒤따르며 뒤늦게 웃었다.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는. 뭘 정리하겠다는 건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이용하고 있는 자신이 나쁜 놈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며 그는 자신의 오피스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